* 늘 자신을 경계해야

아들 부시가 일으킨 이라크 전쟁(2차)의 영웅으로 치켜세운 장군이 있다. 바로 토미 프랭크스(Tommy Franks) 장군이다

modest-i 2014. 12. 3. 11:31

아들 부시가 일으킨 이라크 전쟁(2)의 영웅으로 치켜세운 장군이 있다. 바로 토미 프랭크스(Tommy Franks) 장군이다. 이라크 전쟁을 전후로 해서 워싱턴 정가는 이 영웅을 치켜세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나는 진정으로 토미장군을 신뢰한다 (부시)

<!--[if !supportEmptyParas]--> <!--[endif]-->

현명하고 사려 깊은 군인이다.” (럼즈펠드)

<!--[if !supportEmptyParas]--> <!--[endif]-->

(공식적으로 럼즈펠드는 토미 프랭크스 장군을 추켜세웠지만, 실제로 이 둘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사석에서 럼즈펠드는 타협을 모르며, 상상력이 부족하고, 너무 구식이다.”라고 말했고, 그런 럼즈펠드를 토미는 현장을 모르는 책상머리 장군이라고 표현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한 가지 더 첨언하자면, 럼즈펠드는 단언컨대 '미친놈'이었다. 이라크 전쟁을 계획 할 때 그는 특수 부대를 주축으로 한 전쟁을 주장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미군의 최신무기들 있잖아!! 양보다 질이라니까!!"

<!--[if !supportEmptyParas]--> <!--[endif]-->

라고 소리쳤고, 이를 정면으로 반박한 게 토미 프랭크스다. 그 멍청한 부시도 토미 프랭크스의 말을 듣고는 정규군을 중심으로 한 전쟁을 승인하게 된다. 그렇게 믿고 의지한 럼즈펠드지만, 부시가 보기에도 토미 프랭크스의 말이 옳았던 것이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그는 아이젠하워와 많이 닮았다" (뉴트 깅그리치 국방부자문위원)


(깅그리치의 말에 토미는 정색을 하고, “나는 아이젠하워와 지휘방식이 다르다.”라고 말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그는 4성장군들 중에서 좀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는데, 그는 이등병으로 시작해 최고계급인 대장의 자리에 오른말 그대로 입지전적의 인물이다. 텍사스 대학을 졸업하고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부인이 된 로라 부시가 그의 고교시절 2년 후배다. 이런 우연이...) 사병으로 입대했으나, 군인이 체질에 맞았는지 포병 사관후보생 학교에 들어가 1967년 소위로 임관. 이후 베트남전에서 전쟁영웅으로 등극 (중위시절 터진 테드 대공세에서 영웅적인 활약으로 '동성무공훈장'을 받았다), 냉전 시절을 서독에서 보냈고, 1994년에는 한미연합 사령부의 작전참모로 한국에 첫발을 디뎠다. 1995년부터 2년간 경기도 동두천에 있는 제2사단장으로 군생활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대망의 2003년 중부군 사령관으로 제2차 이라크 전쟁을 진두지휘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그는 사병출신답게 서민적이었고, 사병들과 부사관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는데, 2003년 카타르로 중부군사령부를 옮기고 나서의 연회에서 보여준 모습은 지금도 미군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는데, 당시 프랭크스 장군은 부사관들이 모여 있는 테이블에 내려가 연회 내내 그곳에서 부사관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다른 장교들이 찾아와 프랭크스 장군을 헤드 테이블에 앉으라고 권했음에도 프랭크스 장군은 끝까지 그 자리에 앉아 부사관들의 이야기를 들어줬다.



<!--[if !supportEmptyParas]--> Tommy_Franks_Wayne_Newton.jpg <!--[endif]-->



(물론, 이런 토미장군에게도 이 있는데 아내 사랑이 너무 끔찍했다는 것이다. 그는 아내 캐시를 위해 여군장교 한 명을 비서로 붙였고, 나중에 가선 경호 병력도 붙였다. 물론, 둘 다 규정위반이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토미 프랭크스 장군의 진가는 이라크 전쟁이 끝나고 난 뒤였다. 부시 행정부의 억지 때문에 전쟁을 하긴 했지만 125천이란 병력으로 바그다드 레이스를 펼친 (별 피해없이) 그의 지휘력은 인정받아 마땅했다. 워싱턴에서는 그를 영웅으로 환대했고 (당연하겠지만), 그를 위한 자리를 제안했다. 육군참모총장직이었다. 프랭크스 장군은 이 자리를 정중히 거절했다. 육군참모총장 자리 앉은 뒤 전역하면, 각종 방산 업체 이사 자리는 물론, 선출직 공무원으로서 진출 할 때 엄청난 힘이 될 게 분명했음에도 불구하고 프랭크스 장군은 이를 물리친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그는 36년간 묵묵히 자신을 기다려 준 아내 캐시와 함께 한동안 손자들을 무릎에 올려놓고 같이 놀아보고 싶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천천히 책을 쓰고(그의 자서전 출간은 이루어졌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상담을 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그리고 이를 몸소 실천에 옮겼다(그는 가난한 집의 여덟째로 태어나, 태어나자마자 병원에서 입양된 아픈 과거가 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결국 그는 그가 원했던 은퇴 후의 삶을 누리게 된다. 그리고 그의 은퇴는 수많은 미국인들에게 하나의 감동으로 다가가게 된다. (, 토미 프랭크스 장군의 은퇴는 미국 내에서도 극히 예외적인 일이었던 것이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굳이 토미 프랭크스 장군에 대한 이야기를 쓰는 건 우리나라 예비역 장군들을 까기 위함이 아니다. 분명 말하지만, 이건 정말 '예외적인' 사례다. 이등병 출신이 4성장군이 된 것 부터가 함정이다. (한국에서 이게 가능할까?) 다만 이런 삶도 있다는 것을 말해주기 위해서다. (이미 많은 장군님들은 알고 있을 이야기다. 이 이야기가  유명해서 많은 예비역들이 이에 대해 이야기 하곤 했으니게다가 한미연합사와 2사단장 시절 나름 한국장성들과의 유대가 있었기에) 우리나라 장군님들에게 너무 많은 기대 하지 않는다. (물론, 그 중에는 퇴역 후 제2의 인생을 개척한 훌륭한 장군님들도 있지만) 그저 중간만 가자. 자신의 존재가 민폐가 되지 않도록제발 그 정도만 하자. 부탁이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if !supportEmptyParas]--> <!--[endi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