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과 아르헨티나의 포클랜드 전쟁이 영국의 승리로 끝난 지 3개월 뒤인 1982년 9월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와 덩샤오핑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이 베이징에서 만났다. 아편전쟁 이후 영국이 점령해 온 홍콩을 중국에 반환하는 협상을 하기 위해서였다.
먼저 덩이 기선 잡기에 나섰다. 양측 배석자들에게 "홍콩은 포클랜드가 아니고, 중국은 아르헨티나가 아니다"고 운을 뗐다. 이어 여러 미묘한 발언을 했지만 대처는 대범하게 넘겼다. 대처가 덩의 일국양제(一國兩制·한 국가에 두 체제를 두는 것) 구상에 대해 "홍콩의 특수한 역사적 환경을 고려할 때 상상력이 풍부한 해결책"이라며 치켜주자 회담이 순조롭게 진행됐다. 덩은 홍콩의 제도를 1997년 반환 후 50년 동안 바꾸지 않고 홍콩인들의 자치(自治)도 유지하겠다고 보증했다. 대처가 "왜 50년입니까?"라고 묻자 덩은 "그때쯤 중국의 경제 수준이 선진국을 따라잡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덩의 생각은 1978년 시작된 개혁·개방 전략의 교두보로 홍콩을 50년간 활용하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17년밖에 지나지 않은 지난달 찬킹청(陳景祥) 홍콩신보 총편집인이 프리미엄조선에 칼럼을 보내왔다. 제목은 '중국에 여전히 홍콩이 필요한가'였다. 그는 "중국은 세계 2위 경제 대국으로 올라선 지금 '양제(兩制)'보다는 '일국(一國)'을 강조하며 자치권을 제약하고 있다. 이제 홍콩은 중국에 더는 특별하지 않으며 더 이상 특별 대우는 없을 것을 예고하는 것은 아닐까?"라고 물었다.
홍콩은 1980~90년대에 한국·싱가포르·대만과 함께 '아시아의 4룡(龍)'으로 일컬어졌다.
홍콩 부자들은 산 좋고 물 좋은 캐나다 밴쿠버로 대거 이주해 허드렛일을 백인에게 시켰다. 밴쿠버는 '홍쿠버'가 됐다.
뉴욕 맨해튼에서 서양 명품을 입고 다니는 잘생긴 아시아인 미남 미녀는 상당수가 홍콩 출신이었다.
하지만 홍콩인들의 자부심은 오래가지 못했다.
강력한 경쟁자가 급부상했기 때문이다. 상하이였다.
세계적 금융회사들이 홍콩보다 상하이에 터를 잡고,
홍콩항을 찾던 배들은 상하이의 배후에 있는 양산항의 거대한 부두로 뱃머리를 돌렸다.
지난해 홍콩의 경제성장률은 2.9%에 그쳤지만 상하이는 7.7% 성장했다.
홍콩의 경제 발전이 더뎌지면서 덩샤오핑의 자치 약속도 점점 희석되는 분위기이다.
영국이 떠난 뒤 자치를 원하는 홍콩인들의 운명은 들판의 잡초처럼 바람 부는 대로 흔들리고 있다.
이번 홍콩 사태는 함께 아시아의 용으로 불렸던 한국에도 시사점이 적지 않다.
홍콩처럼 한국도 경제적으로 점점 중국에 밀접해지고 있는 반면
서울의 경제성장률은 상하이는커녕 홍콩보다도 낮은 2.0%(2012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만약 미국마저 떠난다면 어떻게 될까?
홍콩은 중국어로 '샹강[香港]', 즉 '향기가 나는 항구'로 불린다.
그러나 지금 홍콩의 향기는 상하이의 짙은 향수 내음에 밀려 시들해지고 있다.
서울의 향기도 시들까 걱정이다.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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