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투자=전쟁:알아야

남자는 전쟁을 알아야 한다, 여자는 전쟁을 몰라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modest-i 2014. 10. 20. 10:40

전쟁은 생존 경쟁에서 가장 큰 규모라 보면 될 것 같다

Scale이 크기 때문이다

특히 참상이 매우 크다

 

그래서 섣불리 전쟁을 하면 안되고

하게 되면 져서는 또한 안된다

 

살다 보니

이기는 것보다 지지않는 것이 우선이며 더 소중하다는 것을 느낀다

 

여기 전쟁을 모르다 쓸쓸히 죽어가는 한안국의 사례를 적어본다

 

<그는 유능한 대신이지만

 전쟁에서 다양한 계략이 있음을 몰랐고,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야하는 유비무환임 잊었다

 전쟁에서 져서 실의에 빠져 변방에서 피를 토하고 죽었다>

 

인생은 마지막까지 성공하고 승리해야(지지않아야) 된다

 

사마의는 조조가 세운 천하를 늙어서 차지하였다. 비교가 된다

 

 

전한 양 나라 대신 한안국(韓安國) 인명사전

 

 한안국(韓安國.?∼BC 127)

   전한(前漢) 양국(梁國) 성안(成安) 사람. 자는 장유(長孺). 일찍이 전생(田生)에게 <한자(韓子)>와 <잡설(雜說)>을 배웠고, 양효왕(梁孝王)을 섬겨 중대부(中大夫)가 되었다. 오초(吳楚)가 반란을 일으키자 군사를 이끌고 오병(吳兵)을 격파해 명성을 얻었다.

   무제(武帝) 때 북지도위(北地都尉)와 대농령(大農令)을 지냈다. 건원(建元) 6년(기원전 135) 어사대부(御史大夫)에 올랐는데, 사람됨이 충후(忠厚)하고 지략이 있으면서도 재물에 대한 욕심이 상당했지만 그가 추천한 사람들은 모두 염사(廉士)였다.

   나중에 중위(中衛)가 되고, 위위(衛尉)로 옮겼다. 원삭(元朔) 원년(기원전 128) 흉노(匈奴)가 대거 침입하자 재관장군(材官將軍)으로 어양(漁陽)에 주둔했지만 패하자 우북평(右北平)으로 옮겨 주둔했는데, 울화병으로 피를 토한 뒤 죽었다.

【생애】

   어사대부 한안국(韓安國)은 양(梁)나라의 성안(成安) 출신으로 후에 수양(睢陽)으로 옮겨 살았다. 그는 일찍이 추현(鄒縣)의 전생(田生)으로부터 한비자와 잡가(雜家)의 설을 배워 양효왕(梁孝王) 밑에서 중대부가 되어 모셨다. 오초(吳楚)가 반란을 일으키자 양효왕은 한안국과 장우(張羽)를 장수로 삼아 오나라 군사를 동쪽 변경에서 막도록 했다. 그때 장우는 힘껏 싸웠고 한안국은 굳게 지켰음으로 오나라 군사는 양나라 땅을 통과할 수 없었다. 오초의 반군이 격파되자 한안국과 장우의 이름은 그 일로 인해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양효왕은 한경제(漢景帝)의 동모제로 두태후(竇太后)가 매우 사랑했다. 이에 효왕은 스스로 청하여 이천석의 상국을 양나라에 둘 수 있는 령을 얻었다. 그리고 효왕이 출입하거나 놀러 다닐 때의 참란한 행렬은 마치 천자의 것과 같았다. 천자가 듣고 불쾌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 태후가 알고 양나라에서 온 사자에게 화를 내며 접견하지 않았다. 조정의 관리들도 상소를 올려 양왕을 견책해야 한다고 했다. 한안국이 양나라의 사자가 되어 대장공주(大長公主)를 접견하고 눈물을 흘리며 호소했다.

   “양왕은 효성이 지극한 태후의 아들이고 황제에게는 충성스러운 신하이신데 태후께서는 그 점을 깨닫지 못하시고 계십니다. 옛날 오(吳), 초(楚), 제(齊), 조(趙) 등의 7국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함곡관 이동의 제후국들이 모두 합종하여 서쪽을 향해 진군했으나 오로지 양나라만이 황실과 가장 친하여 곤궁한 처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태후와 황제가 관중에 거하고 있음을 생각한 양왕은 제후들이 란을 일으켜 천하를 어지럽게 하자 그 일에 관해 한 마디라도 말을 하게 되면 눈물을 수없이 흘리며 소신을 포함한 6명의 장수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오초(吳楚)의 반군을 물리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오초의 반군은 감히 서진하여 황도를 범하지 못하고 결국 패망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모두 양왕의 공로입니다.

   오늘 태후께서 조그맣고 까다로운 예절에 얽매여 양왕을 책망하고 계시는데 양왕의 부친과 형은 황제이시라 원래 보이는 것이 규모가 컸기 때문에 출궁할 때는 도로를 청소하여 길을 열고 회궁할 때는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린 것입니다. 또한 거마와 깃발 역시 모두 황제의 하사품이라 변방의 작은 고을이지만 봉국 안에서 몰고 달려 제후들에게 과시함으로써 천하가 모두 태후와 황제의 사랑을 알게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양나라의 사자가 올 때마다 묻고 힐책하시니 양왕께서는 매우 두려워하시고 밤낮으로 눈물을 흘리며 사모하기만 할뿐 어찌할 바를 모르고 계십니다. 어찌하여 효성스러운 아들에 충성스러운 신하인 양왕을 태후께서는 가엽게 여기지 않으십니까?”

   대장공주가 궁궐로 들어가 태후에게 한안국의 말을 자세하게 고했다. 태후가 기뻐하여 말했다.

   “그를 위하여 황제에게 말하라.”

   이에 황제가 듣고 마음이 이내 풀렸음으로 면류관을 벗고 태후에게 사죄하며 말했다.

   “형제가 서로 교도하고 우애하지 못해 태후의 마음을 어지럽게 했습니다.”

   이어서 양나라에서 온 사자들을 모두 불러들여 접견하고 많은 상품을 내렸다. 그 후로 양왕은 더욱 한안국에 대해 친밀하게 대하며 기뻐했다. 또한 태후와 장공주도 한안국에게 천금도 더 되는 상금을 직접 하사했다. 그래서 한안국의 이름은 세상에 드러나게 되고 한나라 조정과 연관을 맺게 되었다. 후에 한안국은 법에 저촉되어 옥에 갇히게 되었다. 옥리 전갑(田甲)이란 자가 한안국을 심히 괴롭혔다. 안국이 말했다.

   “꺼진 불이 다시 일어날 수 있는 법이오.”

   전갑이 대답했다.

   “그렇다면 내가 오줌을 누어 꺼버리겠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양나라에 내사(內史)5) 자리가 비게 되자 한나라 조정은 한안국을 그 자리에 임명했다. 한안국은 죄수의 몸에서 일어나서 녹봉 2천 석의 고관이 되었다. 이에 전갑이 도망쳤음으로 한안국은 자기의 말을 전갑에게 전하게 했다.

   “관직에 돌아오지 않으면 장차 그의 종족들을 멸족시키겠다.”

   전갑이 전해 듣고 육단(肉袒)으로 안국을 찾아와 사죄했다. 안국이 웃으며 말했다.

   “네가 아직도 능히 오줌을 싸서 불을 꺼버릴 수 있겠느냐? 너와 같은 하찮은 자는 치죄할만한 할 가치도 없음이라!”

   한안국은 결국 전갑을 잘 대우해 주었다. 원래 양나라의 내사가 비었을 때 양효왕은 제나라 사람 공손궤(公孫詭)를 얻어 기뻐하며 그를 내사로 삼고자 조정에 청했으나 그 소식을 들은 두태후가 조칙을 내려 한안국이 그 자리에 임명된 것이었다. 공손궤와 양승(羊勝)이 효왕에게 유세하여 효왕 자신을 황제의 후계자로 삼고 그 봉지를 더 넓혀 줄 것을 청하게 했다. 그러나 조정의 대신들이 반대할 것이라고 생각한 그들은 비밀리에 자객을 보내켜 권신과 모신들을 찔러죽이게 했다.

   그래서 옛날 오나라의 승상을 지냈던 원앙(袁盎)이 살해되고 말았다. 그것이 양왕의 모신 공손궤와 양승의 책동 대문이었다고 알게 된 경제는 즉시 사람을 보내 두 사람을 반드시 잡아들이도록 했다. 조정은 일단의 조사단을 10여 차례나 양나로로 계속해서 보냈다. 양나라에 차례로 당도한 사자들은 승상이하 관리들과 함께 양나라 전국을 대거 수색하도록 했으나 한 달이 넘도록 찾아내지 못했다. 내사 한안국은 공손궤와 악승이 양왕의 처소에 숨어있다는 사실을 알고 양왕을 찾아가 눈물을 흘리며 호소했다.

   “군주가 욕됨을 입으면 그 신하는 죽음으로써 그 죄를 갚아야 합니다. 대왕 밑에는 좋은 신하들이 없어 일이 이렇게 분분하게 이르게 되었습니다. 지금 공손궤와 악승을 잡지 못하고 있으니 청컨대 저에게 죽음을 내려 주십시오.”

   양왕이 말했다.

   “어찌 그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한안국이 눈물을 줄줄 흘리며 무릎을 꿇고 말했다.

   “대왕께서는 자신을 한 번 헤아려보십시오. 황제와 대왕의 관계는 옛날 태상황(太上皇)과 고황제(高皇帝) 그리고 황제와 임강왕(臨江王)과 비해 어느 사이가 더 친밀하다고 생각하시고 계십니까?”

   양왕이 대답했다.

   “내가 비할 바가 못 되오.”

   한안국이 말했다.

   “무릇 태상황이나 임강왕 등은 부자지간의 친함을 갖고 있음에도 고조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세 자 길이의 칼을 차고 천하를 얻은 사람이 짐이니라!’라고 말씀하시자 비록 황제의 부친 신분이지만 정사에 관여하지 못하고 역양(櫟陽)의 땅에 머물렀습니다. 또한 임강왕은 금상폐하의 적장자로 태자의 자리에 올랐지만 한마디의 말이 잘못되어 폐위되어 임강왕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태묘의 땅을 침범하여 궁궐을 지었다가 결국은 중위부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어째서 이겠습니까?

   사적인 일로 인해 공적인 일을 문란하게 하고는 천하를 다스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옛말에 ‘비록 친부이지만 어찌 그가 호랑이로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알 수 있으며, 비록 형제이지만 어찌 그가 승냥이로 변하지 않을 것을 알 수 있겠는가?’라고 했습니다. 지금 대왕께서는 제후의 반열에 있으시면서 한낱 사악한 신하의 뜬구름 잡는 말에 현혹되어 황제폐하의 금령을 범하고 법을 밝히는 것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황제께서는 태후로 인하여 차마 법령으로 대왕을 다스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태후께서는 매일 눈물로 지새우며 대왕께서 스스로 깨우치기를 학수고대하고 계시나 대왕께서는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계십니다. 만일 태후께서 돌연히 붕어하시기라도 한다면 그때는 대왕께서는 누구에게 의지하려고 하십니까?”

   한안국이 말을 미처 끝내기도 전에 양왕이 눈물을 줄줄 흘리고 통곡하며 한안국에게 감사의 말을 했다.

   “제가 지금 당장 공손궤와 악승을 내 놓도록 하겠소.”

   공손궤와 악승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조정의 사자들이 돌아와 고하기를 양나라에서의 문제가 모두 무사히 해결될 수 있었던 것은 한안국이 애쓴 덕분이라고 했다. 그래서 황제와 태후는 한안국을 더욱 중하게 여기게 되었다.

   양나라에서는 효왕이 죽고 아들 공왕(共王)이 뒤를 잇자 한안국은 죄에 연좌되어 관직을 잃고 집에 칩거했다. 건원(建元) 연간에 무안후(武安侯) 전분(田蚡)이 태위가 되어 황제의 귀척으로써 정사를 오로지했다. 안국이 5백금의 뇌물을 전분에게 바치자 전분은 안국을 태후에게 천거했다. 천자 역시 한안국이 현능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이미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에 즉시 그를 불러 북지군(北地郡)의 도위(都尉)로 임명했다가 얼마 후에 대사농(大司農)으로 올렸다.

   민월(閩越)과 동월(東越)이 전쟁을 일으키자 한안국과 대행령(大行令) 왕회(王恢)가 장군이 되어 출전했으나 그들의 군대가 미처 현지에 당도하기 전에 월인들이 그들의 왕을 죽이고 항복을 해왔음으로 한나라 군사들은 되돌아왔다. 건원 6년 기원전 135년, 무안후 전분이 승상이 되고 한안국은 어사대부(御史大夫)가 되었다.

 흉노가 사자를 보내 화친을 청해오자 황제가 신하들에게 의론토록 했다. 대행 왕희는 연나라 출신으로 여러 번에 걸쳐 변경을 지키는 관리를 지내 호인(胡人)들의 일에 익숙했다. 왕회가 의견을 말했다.

   “우리 한나라와 흉노는 화친을 여러 번 맺었으나 그때마다 흉노는 몇 년이 가지 않아 맹약을 배반했습니다. 허락하지 마시고 군사를 일으켜 그들을 공격해야 합니다.”

   한안국이 듣고 말했다.

   “천리를 행군하여 전쟁을 해야 함으로 군사들은 싸움에서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 현재 흉노는 충족한 군마를 믿고 속에는 금수와 같은 생각을 품으며 마치 새떼가 비상하듯 무리를 지어 옮겨 다님으로 그들을 제압하기 어렵습니다. 그들의 땅을 얻는다 해도 우리의 강역을 넓히기는 부족하고 그들의 백성들을 차지한다 해도 우리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데는 부족합니다. 그들은 상고 이래 다른 나라에 복속된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한나라가 수천 리에 걸쳐 그들과 이를 다투게 되면 우리의 군사와 말은 지치게 되겠지만 그들은 온전한 힘을 가지고 우리의 피로함을 노려 대항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강노지극(彊弩之極) 즉 강력한 쇠뇌에서 발사된 화살일지라도 그 끝에 가서는 노(魯)나라에서 생산된 얇은 비단조차 뚫을 수 없는 이치와 같습니다. 또한 세찬 돌풍도 그 끝에 가서는 기러기에 붙은 털 한 오라기조차 날릴 수 없게 됩니다. 처음에는 굳세지 않다고 하나 그 끝에 가서는 약해집니다. 흉노를 공격하는 것은 옳지 않으니 화친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군신들도 모두 한안국의 의견을 동조했음으로 황제는 흉노와의 화친을 허락했다.

  그 다음 해인 원광(元光) 원년 기원전 134년 안문군(雁門郡) 마읍(馬邑)의 호족 섭옹일(聶翁壹)이 대행 왕회를 통해 황제에게 상소를 올렸다.

   “흉노와 화천을 시작한 이래 그들의 신임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들을 유인하면 싸움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황제가 비밀리에 섭옹일을 간자로 만들어 한나라에서 죄를 짓고 흉노로 도망치는 것처럼 만들었다. 섭옹일이 흉노의 선우에게 말했다.

   “제가 능히 마읍을 지키는 현령(縣令), 현승(縣丞)과 그 관리들을 참하고 성을 차지할 수 있습니다. 성내의 재물은 모두 대왕의 차지가 될 것입니다.”

   선우가 섭옹일을 믿고 그 계획을 따르기로 했다. 섭옹일이 마읍에 돌아와 죄수를 참하여 그 머리를 성루에 걸었다. 선우의 사자가 믿고 선우에게 돌아가 고했다.

   “ 마읍의 수령과 관리들이 모두 죽었으니 서둘러 달려오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선우는 10만여 명의 기병들을 이끌고 관새(關塞)을 통과하여 무주(武州)13)의 요새로 들어왔다. 그때 한나라의 전차, 기병, 보졸로 구성된 20여 만의 군대는 마읍 주변의 계곡에 숨어 매복하고 있었다. 그때 효기장군(驍騎將軍)은 위위(衛尉) 이광(李廣), 경거장군(輕車將軍)은 태복(太僕) 공손하(公孫賀), 장둔장군(將屯將軍)은 대행(大行) 왕회(王恢), 재관장군(材官將軍)은 태중대부(太中大夫) 이식(李息) 등이 맡았고, 어사대부 한안국은 호군장군(護軍將軍)이 되어 모든 장군들을 밑에 두었다.

  선우가 마읍의 경내에 진입하면 모두 일제히 발병하여 요격하기로 약속했다. 왕회, 이식, 이광은 별동부대를 이끌고 대군(代郡)에서 흉노군의 치중을 공격하기로 했다. 이윽고 선우가 한나라의 장성을 넘어 무주의 요새로 들어섰다. 흉노가 마읍에서 백여 리 떨어진 곳까지 진군하면서 주변의 마을들을 노략질하다가 단지 들판에서 풀을 뜯어먹고 있는 가축만 보일 뿐 사람은 한 명도 보이지 않은 것을 깨달은 선우는 괴이하게 여겼다. 그래서 한나라의 봉화대를 습격하여 무주의 위사(尉史) 한 명을 포로로 잡았다. 흉노가 그를 칼로 찔러 죽이겠다고 위협하며 심문했다. 위사가 대답했다.

   “ 한나라 병사 수십만이 마읍의 성 밖에서 매복하고 있습니다.”

   선우가 좌우를 둘러보며 말했다.

   “내가 하마터면 한나라의 간계에 속을 뻔 했구나!”

   선우는 그 즉시 군사를 물리쳐 되돌아가고 말았다. 관새을 벗어난 선우가 말했다.

   “하늘이 도와 내가 무주의 위사를 얻을 수 있었다.”

   선우는 좌우에게 명하여 위사를 천왕(天王)이라고 부르게 했다. 관새의 관리가 사람을 보내 선우는 이미 군사를 이끌고 자기 본거지로 돌아갔다고 고했다. 한나라 군사들이 그 뒤를 추격하여 관색에 이르렀으나 결코 잡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추격을 중지했다. 한편 3만 군사를 이끌고 있던 왕회 등의 장군들도 역시 선우의 흉노군과 한군의 본대가 전투를 벌이지 않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작전계획대로 흉노의 치중을 공격한다면 필시 선우의 정예군과 부딪쳐 싸움에 패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결국 자기가 임의로 싸움을 그만 두었기 때문에 아무런 공을 세우지 못했다.

   천자는 왕회가 출격하여 선우의 치중을 공격하지 않고 자기 멋대로 군대를 물리친 행위에 대해 분노했다. 왕회가 말했다.

   “처음에 작전계획은 흉노가 마읍의 성내로 진입해서 우리 군사들이 선우와 교전에 들어가면 신이 그들의 치중을 공격해서 싸움을 승리로 이끌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선우가 그 계획을 알고 마읍으로 들어오지 않고 돌아갔음으로 신이 거느린 3만의 군사들만으로는 대적할 수 없어 패전의 치욕을 당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신이 돌아가게 된다면 참수형에 처해질 것이라고 신은 분명히 알고 있었으나 폐하의 3만에 달하는 군사는 온전히 보전했습니다.”

   천자는 왕회를 정위(廷尉)에게 넘겨 하옥시켜 그 죄를 다스리라고 했다. 정위는 왕회가 두요(逗橈) 죄를 적용하여 참수형에 처해야 한다고 고했다. 왕회는 비밀리에 천금을 승상 전분에게 바쳤다. 전분은 감히 황제에게 직접 고하지 못하고 태후에게 부탁하며 말했다.

   “왕회는 앞장서서 마읍의 일을 계획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일이 성사되지 않아 황제께서 왕회를 주살하려고 합니다. 왕회를 죽이는 일은 흉노를 위해 대신 원수를 갚아주는 것과 같습니다.”

   황제가 아침인사를 드리러 왔을 때 태후는 승상 전분이 전한 말을 황제에게 말했다. 황제가 말했다.

   “마읍의 일을 앞장서서 계획한 자는 왕회입니다. 그래서 천하에서 수십만의 군사를 일으켜 그의 말에 따랐으나 일이 이렇게 허사가 되었습니다. 비록 선우를 도망가서 잡지 못했으나 왕회가 그의 군사를 이끌고 흉노의 치중을 공격했다면 얼마간의 공을 이루어 이 나라의 사대부들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그런 왕회를 죽이지 않고 어떤 다른 방법으로 천하에 사죄할 수 있겠습니까?"

   황제의 말은 전해들은 왕회는 즉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한안국은 책략이 원대하고 지혜는 세상 사람들이 마음에 부합할 정도로 출중했으며 모두가 충후한 마음에서 나왔다. 비록 재물을 탐하고 좋아했으나 그가 천거한 사람들은 모두가 청렴하고 자기보다 현능했다. 양나라에 있을 때는 호수(壺遂), 장고(臧固)、질타(郅他)를 천거했는데 모두가 천하의 명사들이었다. 천하의 선비들 역시 한안국의 이러한 행위를 모두 칭찬하고 사모하게 되었으며 천자까지도 그를 국가의 큰 그릇이라고 존대했다.

   한안국은 어사대부로 재직하기를 4년이 넘었을 때 승상 전분이 죽었음으로 한안국이 승상의 업무를 대행하던 중 천자를 영접하다가 수레에 떨어져 다리를 절게 되었다. 천자가 새로운 승상에 대해 의론하다가 한안국을 세우기 위해 사자를 보내 그의 병세를 살펴보도록 했다. 사자가 돌아와 한안국의 다리 저는 모습이 너무 심하다고 고했음으로 마음을 바꿔 평극후(平棘侯) 설택(薛澤)을 승상으로 삼았다. 한안국의 관직을 그만두고 집에서 치료한지 몇 개월 만에 그의 병은 나아 다리를 절지 않게 되었다. 황제는 한안국을 정위로 임명했다. 일 년이 지나자 위위(衛尉)로 자리를 옮겼다.

   거기장군(車騎將軍) 위청(衛靑)이 흉노를 치기 위해 상곡(上谷)에서 나아가 흉노의 용성(蘢城)을 함락시켰다. 그때 장군 이광은 흉노에 의해 포로가 되었으나 도중에 탈출했다. 또한 공손오(公孫敖)는 군졸을 크게 잃었음으로 두 사람 모두 마땅히 참수형에 해당했으나 속죄금을 내고 서인이 되었다.

   다음 해 흉노가 대거 변경을 침략하여 요서태수(遼西太守)를 살해한 후에 계속 남하하여 안문까지 이르러 주민 수천 명을 살해했다. 거기장군이 요격하기 위해 안문으로 진격했다. 당시 위위의 직에 있었던 한안국은 보병을 이끄는 재관장군(材官長君)으로 어양(漁陽)에 주둔했다. 생포한 흉노의 병사가 흉노군이 멀리 퇴각했다고 말했음으로 황제에게 서장을 올려 계절이 바야흐로 농사철이이니 잠시 군역을 면해 농사를 지을 수 있게 해달라고 청했다.

   군사들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한 달여 만에 흉노가 대거 상곡과 어양을 침입했다. 한안국은 7백여 명의 군사들을 이끌고 출전하여 흉노와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고 진지로 퇴각했다. 흉노는 천여 명의 백성들과 가축들을 노략질한 후에 돌아갔다. 천자가 듣고 노하여 사자를 시켜 한안국을 책망했다. 천자는 한안국을 동쪽의 우북평(右北平)으로 옮겨 주둔시켰다. 다시 흉노의 포로가 흉노는 동쪽으로 침입할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한안국은 원래 어사대부와 호군장군(護軍將軍)으로 한나라의 전군을 통솔하는 대장이었으나

후에 점점 천자와 소원해져 결국은 변방으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젊은 장군 위청(衛靑) 등은 흉노를 정벌하여 공을 세움으로써 황제의 총애를 받아 귀한 신분이 되었다. 이미 황제와 소원하게 된 한안국은 실의에 빠져 침묵으로 울분을 달래며 지냈다.

변방의 주둔군 장수가 된 한안국은 흉노의 속임수에 빠져 많은 인명손실을 입고 스스로 이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그래서 황제에게 관직을 면하여 집으로 돌아가기를 희망했으나 황제는 오히려 한안국을 더욱 동쪽의 변방으로 임지를 옮기도록 했다.

그래서 한안국은 실의에 빠져 답답한 마음으로 지내다가 몇 달 후에 결국 피를 토하더니 죽고 말았다.

한안국은 원삭 2년 기원전 127년에 죽었다.

 

   태사공이 말한다. 나는 호수(壺遂)와 함께 율력을 정할 때 한안국의 의기와 호수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충후함을 볼 수 있었다. 세상 사람들은 양나라에 장자(長子)가 많이 살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틀린 말이 아니다. 관직이 첨사(詹事)였던 호수를 황제가 바야흐로 한나라 상국으로 삼으려고 하는 순간 죽고 말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호수는 승상이 되어 청렴하고 행실이 바른 국궁군자(鞠躬君子)로 추앙받게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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