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투자=전쟁:알아야

김일성의 무지…기동과 집중, 포위, 보급 등 전쟁을 이해 못해

modest-i 2014. 7. 11. 12:02

그냥 밀어붙이면 될 줄 알았던 김일성의 단순함

(7) 김일성에 대하여

한강서 머뭇거리다 미군 상륙

잘 알려져 있다시피 남침을 시도한 김일성의 군대가 서울을 수중에 넣은 때는 1950년 6월 28일이다. 인민군의 주력이 서울 시내에 들어왔고, 대한민국 국군 지도부는 이미 한강을 거쳐 수원으로 밀려 내려가 있었다. 북한 인민군은 이로부터 짧게는 나흘을 서울에서 지체했다. 그들이 한강을 넘어 수원을 공격한 때는 7월4일 아침이었다.

이런 정황으로 볼 때 김일성의 군대는 서울에서 머뭇거리다가 한강을 넘지 못해 결국 약 1주일가량을 지체하면서 시간상의 불리함을 자초해야 했다. 이는 중요한 시기에 해당했다. 여러 증언과 역사 연구가 밝히고 있듯이, 당시의 국군은 전력이나 전술 운용 등 모든 면에서 김일성의 군대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서울을 내주는 과정에서 급히 한강 인도교를 끊는 바람에 한강 이북의 국군 1사단 등 보유 전력을 철수하지 못해 손실이 아주 컸다.

김일성이 서울 점령에 이어 당초의 기세대로 한강을 넘어 남진을 계속했다면 상황은 대한민국에게 아주 불리했을 것이다. 그러나 천행이랄까, 김일성은 결국 거기서 주춤거리고 말았다. 그가 왜 한강을 신속하게 넘지 못했는지에 관한 진정한 이유는 학자들의 연구 등을 통해 더 밝혀져야 할 부분이다.
서울 시내를 행진하는 인민군. 나이 어린 소년도 많이 섞여 있었다.
서울 시내를 행진하는 인민군. 나이 어린 소년도 많이 섞여 있었다.
어쨌든 김일성의 머뭇거림은 국군에게는 아주 다행이었다. 국군은 시흥사령부 사령관 김홍일 장군의 지휘 아래 튼튼한 한강방어선을 구축한 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방어에 나서고 있었다. 더 큰 변화가 있었다. 국군이 신속하게 재편에 착수했다는 점, 도쿄의 맥아더 장군이 미군 전력의 희생 가능성을 알면서도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을 한국 전선에 급파(急派)했다는 점이다.

국군은 개전 초 8개 사단이었으나 이미 3개 사단 병력을 잃은 상황이었다. 이에 따라 국군은 제1군단을 평택에서 창설한 뒤 막 도착한 미군에게 한반도 전선의 축선인 서부지역을 인계하고 중부전선으로 방어지역을 변경할 수 있었다. 북한군의 주공(主攻)이 닥치고 있던 서부 축선은 일본에 주둔하다가 부산에 상륙한 미 24사단이 맡았다.

한반도 전쟁의 가장 핵심적인 축선은 신의주~평양~서울~대전~대구~부산이다. 이는 예로부터 벌어진 한반도 전쟁에서 늘 가장 중요한 축선에 해당했다. 이곳을 차지하는 쪽이 한반도 전쟁에서는 승리를 거두기 때문이다. 교통이 가장 발달했고, 따라서 인구가 가장 밀집해 있으며, 곡물을 비롯한 물자 생산량이 가장 많은 곳이어서 그렇다.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급히 배편으로 부산을 향해 떠날 준비를 하는 일본 주둔 미군의 모습.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급히 배편으로 부산을 향해 떠날 준비를 하는 일본 주둔 미군의 모습.
국군이 맥아더의 결정에 따라 급히 상륙한 미 24사단에게 서부의 축선을 내준 것은 당연하다. 적의 가장 강한 공격력이 모이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국군은 대신 숨을 돌려 적의 주공에 못 미치는 차하(次下)의 적 병력을 상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미 24사단은 그를 이끄는 윌리엄 딘 소장이 개전 이후 첫 북한군 포로로 잡히는 불운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2주 정도의 시간 동안 적 주공의 진격을 저지할 수 있었다.

국군도 재편에 성공

내가 이끄는 국군 1사단은 말이 사단이지, 사실은 ‘유랑 극단’과도 같았다. 임진강에서 적의 예봉을 4일 동안 막는 데는 성공했으나, 후방의 한강 인도교가 끊기면서 우리 사단 전원은 개별적으로 강을 넘을 수밖에 없었다. 뿔뿔이 흩어졌다가 시흥에서 모인 병력이 2000명을 넘지 못했다.

수원 육군본부에서 나는 1사단과 5사단을 함께 지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국군 재편에 따른 조치의 하나였다. 우리는 그렇게 큰물에 떠밀리듯 내려가고 있었다. 나는 1사단 및 5사단의 잔여 병력을 이끌고 충북 증평과 음성을 거쳐 경상북도로 내려갔다가 8월에는 낙동강 전선에 도착한다.
6.25전쟁 첫 선발로 한국에 도착한 미 24사단 소속 스미스 부대가 바주카포로 북한군에 맞서는 모습.
6.25전쟁 첫 선발로 한국에 도착한 미 24사단 소속 스미스 부대가 바주카포로 북한군에 맞서는 모습.
7월 중순이 넘어가면서 김일성 군대는 다급함을 보이고 있었다. 미군의 본격적인 상륙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이후의 상황은 이미 잘 알려진 내용이다. 그로써 볼 때 김일성 군대가 서울에서 미적거리며 한강을 넘지 못했던 점은 전략상의 매우 중대한 실수였다. 김일성은 작전의 가장 큰 요체인 승기(勝機)의 신속한 장악에서 중대한 결함을 드러냈음분명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마오쩌둥(毛澤東)을 비롯한 중국의 지도부는 김일성에게 작전에 신중을 기하라고 주문했다고 한다. 특히 중국 지도부는 개전 후 김일성 군대가 서울 남쪽으로 깊숙이 내려가는 일에 강한 경계심을 표시했다고 한다. 중국 지도부의 우려는 ‘미군의 상륙작전 가능성’이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북한 군대가 서울을 넘어 깊숙이 진격할 경우 전쟁의 종심(縱深)이 길어져 반드시 미군이 이를 차단하려는 상륙작전을 펼칠 것이라고 봤다.

그러나 김일성은 그런 중국의 경고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는 하루속히 부산까지 밀고 내려가 한반도 전역을 적화(赤化)하는 데 혈안이 돼 있었다. 김일성은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받아 전쟁의 불을 붙이면 한반도 전역이 일거에 타 들어가는 것쯤으로 전쟁의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또 미군의 개입 가능성을 아예 무시했다.

1950년 8월18일 벌거벗겨진 인민군 포로가 유엔군 작전에 협조하고 있는 모습./눈빛출판사
1950년 8월18일 벌거벗겨진 인민군 포로가 유엔군 작전에 협조하고 있는 모습./눈빛출판사
“미 상륙 가능성” 중국 충고도 무시

그에 비해 중국 지도부는 미군의 개입 가능성을 높게 봤고, 그를 움직이는 도쿄의 맥아더 장군이 상륙작전의 명수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의 눈에 비친 김일성 군대의 동향은 매우 불안했을지 모른다. 그 때문에 김일성에게 서울 이남 지역의 공격에 신중을 기하라고 충고를 건넸을 것이다.

그럼에도 김일성은 서울에서 머뭇거렸다. “전쟁을 벌이자마자 남한 전역에서 우리를 환영하는 남로당의 봉기가 있을 것”이라는 박헌영의 과대망상적 자신감을 섣불리 믿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소련에 기대할 수밖에 없었던 한강 도섭(渡涉) 장비를 기다리느라고 지체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김일성 본인이 전쟁을 잘 이해하지 못한 점도 주요한 원인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한강 도하 이후 남쪽으로 계속 진군을 명령하면서도 여러 가지 면에서 전쟁 자체에 무지(無知)한 면모를 드러내고 만다. 그는 단순히 국군과 급히 부산에 상륙한 미군을 밀어 붙이면 전쟁을 끝낼 수 있다고 믿었다.

서울 점령 이후, 그리고 1950년 한강을 마침내 도하한 뒤 수원을 공격해 오던 1950년 7월4일 이후, 북한군 전체가 노정한 전투의 고정적인 패턴 하나가 있었다. ‘독전(督戰)에 의한 신속한 공격’이었다. 김일성이 열심히 독전을 하는 장면은 여러 기록으로 나타난다. 서울에도 왔고, 수안보까지 내려와 남진하는 북한군을 열심히 독려했다. 그러나 전체 상황의 전개, 있을지 모를 위험에 대비하는 전쟁 지휘자로서의 면모는 좀체 찾아볼 수 없었다.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내각 수상 때의 김일성./한국학중앙연구원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내각 수상 때의 김일성./한국학중앙연구원
그는 남한의 점령지에서 젊은이들을 대거 강제 징용해 남쪽에 형성되는 전선으로 내몰았다. 그들의 뒤통수에 총을 들이대고, 기관총 사수의 발을 쇠사슬로 묶으면서 말이다. 김일성은 그런 원시적인 방식의 독전을 거듭했다. 그로 인한 한반도 주민들의 인명 손실이 얼마나 막심했는지는 많은 기록이 증명하고 있다.

김일성의 전쟁 계획은 단순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의 <6.25 전쟁사>에 따르면 그는 개전 초기 한강까지의 종심 90㎞를 5일 만에 뚫고, 다음 2주 동안은 140㎞, 다시 이후의 10일 동안 80㎞를 돌파해 남해안의 모든 항구를 접수한다는 구상을 세웠다.

전쟁이 수많은 변수에 대응하는 과정이라는 ‘기본’을 안다면 그런 계획을 세우기가 매우 어렵다. 소련으로부터 지원받은 T-34전차와 각종 무기를 앞세우고 그저 진군하면 승리를 볼 수 있다는 단순한 생각의 극치다. 종심이 깊어져 보급에 문제가 생기는 점을 전혀 고려치 않은 구상이다.

전투방식도 변화가 없었다. 그냥 밀면 된다는 생각이 강했다. 상대의 의표를 찌르는 대담한 기동(機動)이 없었으며,

 부대를 집중해 운용하는 안목도 없었다. 그러니 재편을 했다고 하더라도 아직 혼란스럽기만 했던 국군 병력을

포위해 섬멸하는 작전 방식은 아예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그러나 작전 단계마다 김일성은 반드시 나서서 모든 것을 좌지우지했다. 당시 벌어진 북한군의 작전 모두가 김일성의 결정을 따른 것이었다.

그런 김일성은 북한군이 점령한 서울에 며칠 뒤 나타났다. 7월 초로 추정할 수 있다. 한강 도하를 망설이고 있던 북한군에게 그가 무슨 지시를 내렸는지는 분명치 않다. 빨리 강을 넘으라는 독촉이 있었을 법하다. 그런 김일성이 보인 특이한 면모가 있다. 그는 전쟁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으나 권력에는 매우 민감했던 듯하다.

<정리=유광종, 도서출판 ‘책밭’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