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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 최강의 훈족 / 속전속결 위주 기마군단의 발빠른 이동이 위력

modest-i 2015. 8. 22. 10:11

훈족과 독일인

제2차 세계대전중 연합국의 주측인 영국과 미국이 히틀러의 제삼제국인 나치독일을 훈이라고 부르며 비하한 이유는 독일의 옛선조들이 훈족과 맺었던 역사적인 깊은 유대관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서기 376년 훈족의 침입으로 서고트족(Visigoths=western Goths)은 그들의 근거지인 오늘날 오스트리아 다뉴브강가에서 밀려나게 되였다. 서고트족이 로마황제 발렌스(Valens)에게 로마경내로 이주를 요청하자 황제는 서고트족의 로마 경내로의 이주를 허가했다. 로마제국은 경내로 이주한 서고트족을 차별하자 서고트족은 이에 항의했고 항의하는 서고트족에게 로마 황제는 로마경내를 떠나라는 명을 내렸다. 이에 격분한 서고트족은 봉기해 로마 황제의 군대를 격파하고 황제를 죽였다.


중국 한족이 자신들의 영토 외에 사는 이민족을 각각의 명칭의 야만족으로 부르듯, 로마제국도 그들의 영외에서 살고 있는 제(諸)민족을 야만족으로 불렀다. 로마제국이 야만족으로 부른 종족은 현대 독일어계의 언어를 사용하는 독일계(Germanic tribes) 제(諸)부족으로 서고트족, 동북유럽에 거주하던(현우크라이나) 동고트(ostroghth)족, 반달(Vandals)족, 롬바드(Lombard)족, 알마니(Almani)족, 후랭크(Franks)족, 벌간디안(Burgundians)족으로 이들은 훈족과 같은 유목민족이 아닌 문맹의 농경민족이었다.

독일계 야만족은 기독교인이 되면서 이들이 건축한 건물을 통해 고트양식이라는 독특한 건축문화를 남겼다. 그들 중 유명한 고트족 출신의 알라릭(Alaric) 고트족 왕은 서고트족 출신으로 로마군대에 입대해 높은 계급까지 오른 사람으로 부친이 죽자 로마군대에서 이탈해 서고트족의 왕이 되었다. 서기 410년 그는 로마를 포위하고 금품을 요구하자 로마는 그의 요구를 거절했다. 이에 알라릭의 군대는 로마를 포위했다. 성내에 양식이 고갈되자 굶주림에 지친 로마 시민들이 성문을 열어 입성한 알라릭의 군대는 삼 일간 방화, 약탈을 지속하였다. 알라릭은 부녀자 폭행금지, 교회 파괴금지령을 내려 800년간 지속되어온 영원한 도시 로마의 영화는 야만족에게 무릎을 꿇었으나 로마시가지가 완파되는 것은 막을 수 있었다.
로마는 독일계 민족의 단순한 성격에 강인한 체력의 소유자인 이들을 로마군대에 편입시켰고, 이들은 자신들을 지켜주는 보호세력으로 로마를 이용했다. 유럽을 침입한 훈족에 밀려 독일계 민족이 서쪽으로 이동해 오늘날의 독일영토인 현 위치로 쫓겨 가는 독일민족의 대이동이 있었지만 융성기의 훈족은 점령한 지역을 지배하는 제후에 자신들을 지지하는 수많은 독일계 종족을 임명했다.


훈족과 로마는 이들 독일계 야만족을 함께 흡수해 가면서 군의 병력을 보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훈족에 편입된 독일계 종족들은 훈족의 풍습인 편두를 할 정도로 훈족에 복종하였다. 훈족에 편입된 독일계 종족중에 아틸라의 참모 장군의 지위에 까지 오른 사람도 있었다. 훈족의 왕인 아틸라가 독일계 공주와 결혼식을 올리고 잠자리에 들어 다음날 아침에 죽은 시체로 발견된 사실은 현대의 독일인 선조와 흉노의 깊은 관계를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위 내용은 인터넷 문서중 Barbaian을 검색해서 얻은 내용 중 필요한 부분만 번역해서 이용했음을 알려드립니다)


훈족이 유럽에서 활동하던 기간 동안 이들을 추종하는 모든 종족들을 일컬어 훈족이라고 불렀다. 2차대전중 연합국이 나치 독일을 훈족으로 비하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2차대전중 나치독일 비밀경찰의 두목 히물러가 아리안족의 원류를 찾아서 티베트 인류학자를 보내서 티베트인들을 연구하고 간 사실은 역사방송을 본 독자들은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독일 방송에서 역사의 비밀이라는 다큐에서 훈족을 다룬 이유도 독일인들이 자신들의 선조와 훈족과의 관계를 규명하기 위한 연구의 한 일부라고 할 수 있고, 이와 함께 미국에서 제작한 훈족 다큐는 필자가 훈족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계기가 되었다.



 

 

사상 최강의 훈족

속전속결 위주 기마군단의 발빠른 이동이 위력

문명세계 강대국 로마 초토화 시켜 & #39;공포의 대상& #39;

 

 

 

375년, 훈족은 전 유럽을 공포에 떨게 하면서 게르만족의 대이동을 촉발시켰고,

 

찬란한 로마 문명이 476년 게르만족인 오토아케르에게 멸망케 하는 도화선이 되었다는 것을 「

 

고대 유럽 휩쓴 & #39;훈족& #39;은 한민족」(2004.3.2)으로 설명했다.

 

 

흉노(匈奴) 중 서천(西遷)한 훈족과 동천(東遷)한 한민족(가야신라)이 같은 민족의 일파임도 밝혔는데

이는 근래 많은 언론에서 신라는 기마민족 흉노의 일파라고 발표되는 논지와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훈족이 갑자기 유럽 땅에 나타났고 100년도 안되어 사라졌기 때문에 그들에 대해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더구나 지난 1500년 동안 서구 사람들은 편견으로 가득 찬 매우 적대적인 관점에서 훈족을 다루었다. 유럽인들은 야만인 훈족을 경멸 어린 시각으로 바라보았고 기독교인들은 훈족을 이교도 무리로, 그들의 지도자인 아틸라(395∼453)를 하느님이 죄를 지은 사람들을 징벌하기 위해 지상에 내려 보낸 도구로 보았다.

흉노, 훈, 한민족이 친연성(親緣性)을 갖고 있다는 것은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은 퍼즐을 하나하나 맞추는 것과 다름없다. 375년, 서유럽을 공격하여 새로운 유럽 질서를 만들게 한 훈족의 지배집단이 한민족이라는 것은 한민족으로서 매우 의미심장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까지 조그마한 한반도 내에서 외침만 받고, 세계사에서 미미한 역할만 했다고 알려져 있는 한민족이 세계사의 가장 중요한 장면을 장식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추위가 만든 서유럽과의 조우

아시아 대륙에서 활약하던 흉노가 4차에 걸쳐 서천한 후 훈족이라는 이름으로 서쪽에 있는 고트족의 영지로 침공하게 된 것은 그야말로 만화 같은 사건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훈족과 고트족은 크리미아 반도를 두고 오랜 세월을 가까운 데서 거주하면서도 서로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그런데 어느 날 훈족이 기르던 어린 암소 한 마리가 쇠파리에 쏘이자 놀라서 늪지대를 가로질러 먼 해변으로 달려갔다. 한 목동이 암소를 쫓아갔다 돌아와서 자기가 목격한 일을 부족민들에게 이야기했다. 6세기 고트족의 역사가로 게르만족에 대한 『게피다이 족의 기원과 관습』을 쓴 요르다네스(Jordanes)는 그 일화를 다음과 같이 적었다.

‘목동의 이야기를 듣고 훈족이 바다로 생각하여 건널 수 없다고 여겼던 메오티아 늪지대를 걸어갔다. 그러자 이제까지 미지의 땅으로 남아 있었던 스키타이 땅이 눈앞에 펼쳐졌다. 메오티아 늪지대 너머에 다른 땅이 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던 훈족은 스키타이 땅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내가 보건데 훈족의 조상신인 악령들이 스키타이인들을 시샘하는 마음에서 그런 짓을 저지른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훈족이 생각지도 못한 광대한 땅을 발견하였지만 곧바로 서방으로 이동한 것은 아니었다. 훈족들의 서방 이주를 부채질한 것은 기후 탓으로 보인다. 훈족이 서방에 넓은 초원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지 얼마 안되어 공교롭게도 혹독한 겨울이 닥쳐왔고 모든 강들이 얼자 새로운 땅으로 이동을 단행했던 것이다.

 

물론 훈족의 서방 진출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우선 강을 건너자마자 광대한 초원지대에 이미 정착하고 있던 여러 민족과 부딪쳤다. 훈족과 부딪힌 민족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알란족(Alans)이다.

 

알란인들은 훈족과 370년대에 큰 전투를 벌여 패배하자 훈족의 군대에 편입된다.

학자들은 이 알란족들을 이란인으로 추정하고 있다.

 

 

훈족이 서진하는 과정에서 맞부닥친 또 다른 민족은 유명한 사르마타이족(Sarmatians)으로

이들은 역사상 가장 용맹한 민족 중에 하나였다는 스키타이를 격파한 민족이었다.

이들은 인도유럽어 계통의 민족으로 알란족과 비슷한 언어를 사용했다.

 

훈족이 서방으로 진격하는 동안에 많은 민족들이 훈족의 영향 하에 들어갔는데

그 중 스키리족은 한때 남부 러시아에 살던 민족으로 훈족의 주력 세력 중 하나였다.

 

 

훈족이 단일 민족이 아니라 여러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은 유물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최근에 발견된 훈족의 유골들을 보면 훈족의 4분의 1 가량만이 순수한 아시아 계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훈족’이란 용어는 원래의 훈족으로 불린 지배집단에 의해 지휘된 모든 부족을 지칭한다고 할 수 있다.

훈족과 한민족의 친연성을 거론할 때도 훈족 전체가 한민족과 같은 민족임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아틸라 등 핵심 지배집단이 한민족과 친연성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상 최강의 유목민족, 훈족

유럽인들은 게르만족의 대이동을 촉발시킨 훈족과

세계에서 가장 광대한 제국을 정복했던 칭기즈칸의 몽골족을 역사상 가장 야만스러운 민족이라 표현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대다수의 유럽인들이 유목민이라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드는데,

그 중에서도 훈족에 대한 경멸감은 극심하다.

 

왜냐하면 야만인의 대명사인 훈족이 당시 세계 최고의 문명이자 초강대국인 로마, 이란 등을 침입해

들어간 지 얼마 안 되는 짧은 기간에 초토화시켰기 때문이다.

 

기원 후 375년 훈족은 전 유럽을 공포에 떨게 하면서 게르만족의 대이동을 촉발시켰고,

 

이후 100년이 지난 476년 쫓겨난 게르만족의 용병대장 오토 아케르는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던 로마제국을 멸망시켰다.

 

 

 

무엇보다 몇만이 되지 않는 훈족이 세계 최강을 자랑하던 60만의 서로마제국군을 무너뜨린 게르만족을 몰아낸 장본인이라는 것,

그리고 이들이 바로 아시아인이라는 것에 대해 유럽인들은 극도로 자존심 상해한다.

 


훈족은 울긋불긋하게 물들인 변발이거나 한쪽을 빡빡 밀어낸 머리를 뒤흔들고

유목민 특유의 날카로운 목소리를 내면서 적진으로 달려들었다.

생전 처음 보는 모습의 이 날렵한 기마군단에 의해 자신들의 재산과 생명이 위협당하자

유럽인들은 훈족을 일컬어 인간이 아닌 동물이라고 말했고,

또 그렇게 믿고 싶어했다.

 

 

 

 

▶ 백전백승 훈족 리더십 첫 번째- 죽을 때까지 기본기를 익혀라

훈족은 유목민족이다.

당연히 기동이 중요하기 때문에 달리는 말은 그야말로 말이 필요없는 그들의 기본이다.

 

물론 훈족 말고도 당시 유럽의 군사들에게 기마병은 필수였다.

 

그러나 훈족은 눈을 감고도 말을 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아예 말과 하나가 되었던 민족이었다.

 

 

 

훈족은 자기들이 사용한 말에서부터 무언가 특별함을 갖추고 있었다.

훈족의 말들은 오늘날의 사냥용 말보다 어깨 폭이 20센티미터 가량 더 좁았기에 스피드와 지구력에서 뛰어났고,

또 다른 여러 가지 면에서 당대 서구의 말들보다 우수했다.

훈족의 말들은 험준한 산악지형을 제외하고는 매일 100킬로미터를 달릴 수 있었다.

그러나 단지 말들의 질적 우수함에 백전백승의 훈족이 탄생한 것은 아니었다.

 

훈족의 아이들은 걷는 법을 배우자마자 말 타는 법부터 배웠다.

뿐만 아니라 훈족은 말을 탄 채로 잠을 자고, 밥을 먹고, 국사를 처리하고, 심지어는 용변을 보기까지 했다.

 

로마인들은 기마병과 말이 그렇게 혼연일체가 된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으므로

훈족을 일컬어 반인반마의 괴물이라며 두려움에 떨었다.

 

거기다 훈족의 전사들은 한 명 당 6∼7 마리를 가지고 다니면서

언제든지 상황에 따라 말을 바꾸어 타고서 자유자재로 전투에 임했다.

 

 

훈족은 자신들이 기마민족인 것에 대해 자부심을 느꼈을지언정 결코 자만심에 빠지지 않았다.

 

그들이 걸음을 떼기가 무섭게 말 타는 법을 배우기 시작해 말 위에서 잠을 자고 밥을 먹고 똥오줌을 싸기까지 한 것은,

말에 관한 전문가를 넘어선 지극히 겸손한 달인의 경지였다.

 

당대 어느 민족보다도 말을 잘 탔지만

그들은 기마민족의 기본인 말타기를 죽을 때까지 연습했고,

결국엔 진짜 켄타우로스처럼 말과 혼연일체가 되었다.

 

훈족이 자신들의 기본기를 이토록 갈고 닦지 않았던들 어찌 최강군단 로마의 패망을 가져올 수 있었겠는가?


 

 

 

▶ 백전백승 훈족 리더십 두 번째- 최고란 결과가 아닌 영원한 과정이다

사상 최강의 기마군단 훈족은 결코 자신들을 그 어느 나라의 기마병들과도 동일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들은 항상 최고라는 확신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최고일 수 밖에 없도록 자기가 자기고 있는 것을 끊임없이 갈고 닦았다.


 

 

훈족은 & #39;나무안장& #39;과 & #39;등자& #39;라는,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자신들만의 말장식을 발명했다.

 

무엇보다 유럽인들의 눈에 괴물같은 반인반마로 훈족이 보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나무안장 덕분이었다.

훈족의 안장은 로마인의 안장처럼 말의 몸통에 가죽끈으로 잡아매는 평범한 것이 아니라 나무 버팀목이 있는 안장이었다.

 

앞뒤로 높이 올려진 우뚝한 기둥과 안장머리는 말이 달릴 때에 기수에게 안정감을 준다.

이에 반해 당시 로마의 기병들은 싸우기도 전에 스스로 균형을 잃고 낙마해 목숨을 잃기도 했다.

 

 

이 뿐만 아니라 훈족은 안장 외에도 유럽에 아직 알려지지 않았던 등자를 도입했다.

 

훈족은 장시간 말을 탔을 때 생기는 다리의 피로감을 예방하기 위해 발을 받쳐 주는 가죽 밴드나 발주머니를 안장에 부착했다.

 

기수는 안장에 단단하게 앉아 이 등자에 다리를 고정시킴으로서 달리는 중에도 사방으로 화살을 쏠 수 있었다.

이 등자의 발명이야말로 오랫동안 유목민들이 정주민의 기마대를 능가하는데 공헌한 일등공신이었다.

 

 

 

말이라면 눈을 감고 발로도 부릴 수 있었던 그들에게 굳이 그러한 도구들이 필요했을까.

그런데도 그들은 최고가 되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훈족에게 있어서 최고란 결과가 아닌 영원한 과정이던 것이다.

 

 

 

 

▶ 백전백승 훈족 리더십 세 번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기술을 가져라

훈족은 당시 누구도 따라올 수 없었던 자신들만의 활과 화살 제조법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복합궁(Composite Bow)과

      도끼날 화살촉.

 

훈족은 그들 특유의 & #39;예맥각궁(濊貊角弓)& #39;을 사용했다.

 

예맥각궁은 만드는 데만 5년, 거기다 제대로 쏘기 위해 그것을 익히는데만 10년이 걸리는 활이었다.

 

 

그러나 일단 활시위를 당기기 위한 모든 준비가 완성되었다면,

무려 1분 안에 15발 이상 쏠 수 있다고 전해진다.

 

 

훈족이 이 예맥각궁을 사용했다는 것은 이탈리아 북부 아퀼레이아에 자리한 크리프타 아프레시아 교회의 프레스코화가 말해준다.

이 그림을 보면 말을 탄 훈족이 추격해오는 로마 기병을 향해 활을 쏘는 장면이 있다.

 

그리고 훈족은 이 신기한 활에다 특수 제작한 도끼날 화살촉을 사용했다.

도끼날 화살촉은 날아가면서 회전하기 때문에 목표물에 꽂히는 순간의 충격이 매우 크다.


그러니까 기마술을 비롯한 훈족의 무기술은 당대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경지였다.

 

 

 

 

 

 

그러나 정작 훈족을 우러러 볼 수 밖에 없는 것은 전투를 위한 그들의 초인적인 인내와 노력이었다.

 

이미 훈족은 아기 때부터 말을 타고,

최소한 15년이 걸리는 궁술을 익히는 내내

백전백승을 기한 철저한 준비과정을 마련해 놓고 있었던 것이다.

 

훈족의 숨겨진 진정한 최강은 바로 언제 전장에 튀어나와 적들을 일시에 무력화시킬 지 모르는 이 만반의 히든카드에 있었다.

 

 

 

 

▶ 백전백승 훈족 리더십 네 번째- 총.력.전.

훈족은 속전속결에 관한 한 타에 추종을 불허하는 최강의 기마부대이다.

 

훈족이 주로 사용한 전술 중에 & #39;파르티아식 활쏘기(Parthian shaft)& #39;가 있는데,

 

이것은 기동력이 둔한 적을 만날 경우 여러 방면에서 적을 향해 돌진하다가

가까운 거리에 이르면 갑작스레 일제히 말머리를 오른쪽으로 돌려 분산하면서

뒤돌아보듯이 좌후방으로 화살을 일제히 발사한 뒤

멀리 이탈,

 

다시 집중하기를 반복하여 적을 교란시킨 후 격멸시키는 전투법이다.


 

 

훈족의 공격군은 단지 500∼1000명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이 소수정예의 기마대는 우선 300미터 거리에서 불화살을 날리면서 공격을 개시한다.

 

그런 다음 물러나는 척을 하다가 다시 지그재그식으로 달려들었다.

 

훈족은 등자에 두 발을 딛고 서서 활을 앞뒤옆으로 자유롭게 쏘았으므로 유럽인들에게는 무시무시한 공포의 대상이었다.

 

처음에는 멀리서 일고 있는 먼지구름을 통해, 다음에는 요란한 말발굽 소리에 의해 잔뜩 공포심을 느끼다가

화살이 비 오듯 쏟아지면 육박전에 익숙한 유럽인들은 금새 혼란에 빠지면서 적의 공격에 대항할 엄두도 내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화살을 피했다 하더라도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훈족 기병의 기다란 양날검이었다.

활과 화살 뿐만 아니라 당시 훈족이 사용한 칼 역시 유럽의 칼을 능가했다.

 

 

 

 

기동력을 가장 중요시한 훈족은 전투병과 보급병의 구별을 두지 않고 군사들을 모두 전투병으로 운용했다.

보통 농경민족의 군대는 전투병력과 보급병력으로 나뉘어진다.

당연히 군대 전체의 이동속도는 가장 느린 보급병에 맞춰져야 한다.

 

보급선이 차단된다면 장기전에서 버티지 못하고 섬멸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훈족은 전원이 전투병이자 전원이 보급병이었고,

거기다 한 병사가 한번에 6∼7 마리의 말을 몰고서 돌아가며 달렸으므로

진격속도는 상상을 초월할 뿐만 아니라 전투와 보급에 있어서 아무런 문제도 발생하지 않았다.

 

군대의 파괴력은 그 규모에 정비례하지만 이동속도에는 제곱에 비례하는 것이다.

 

 

 

 

훈족의 백전백승의 3대 요인은 집중, 기동, 그리고 기습이다.

 

바로 총.력.전.

 

뛰어난 말,

자기들만의 발명품인 말안장과 등자,

누구도 따라올 수 없었던 궁술과 기동력,

아무도 예상할 수 없는 전술,

 

그리고 무엇보다 젖을 채 때기 전부터 전사로 길러져 최강일 수 밖에 없는 개개의 전투병들,

 

 

훈족에게는 백전백승할 수 밖에 없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고,

 

백전백승을 향한 더욱더 빛나는 집념이 있었기에

역사상 최강의 유목민족,

최강의 군단으로 길이 남고 있는 것이다

 

 

 

미즈넷 카페에서 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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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부대의 이동속도이다.

 

예상할 수 없는 지점에 예상할 수 없는 시기에 군대가 나타나면 기습이 된다.

 

 

 

예상할 수 없는 수의 병력이 순간적으로 모이면 대항할 엄두도 못내고 지리멸렬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승전의 3대 요인을 집중·기동·기습으로 표현한다.

 

 

 

 

 

조갑제는 이런 상황을 물리학 공식으로 F(힘)= M(질량) V2(속도)

즉 군대의 파괴력은 규모(M)에 정비례하지만 이동속도에는 제곱에 비례한다고 설명했다.

 

 

이런 전투의 원리를 극대화한 것이 훈족의 기마군단이므로 이들에 의해 세계의 역사가 바뀌었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는 일이다

 

 

 

 

루리웹 게시판에서 펌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