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디스티 들어가기
몇 년 전 마샬을 정독하고 정독하여 많은 감명을 받았다
2015.11.21 중앙일보에 '인간의 품격'이라는 서평에서 '자신을 낮춰서 더 빛난 사람들'에 마샬이 들어가 내용을 보고
다시 한 번 더 마샬을 접하게 되면서 유용할 자료가 될 것 같아 펌하고 각색을 하였다
2015.11.22 모디스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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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은식 육군준장 | 2010-02-17 11:17:42
알려지지 않은 위대한 영웅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 미 육군은 규모가 17만 5천 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것은 1차대전 직후 중립법안에 의해 다른 나라의 정책에 간여하지 않는다는 먼로독트린의 영향 때문에 군을 급격하게 감군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런 군대를 불과 5년만에 830만이라는 대육군으로 증강시킨 사람이 미 육군 참모총장을 지낸 조지 마셜 장군이었다.
그는 대규모의 군대를 무려 6만 마일에 걸쳐 완벽하게 뒷받침하는 보급 시스템을 구축하였고
최첨단의 무기를 생산하고 뒷받침하는 병참능력을 설비한 장군이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하여 세계적인 전략가로 명성을 떨쳤고
개성과 자존심이 강했던 대통령과 대영제국의 수상 사이를 원만하게 조율하였을 뿐만 아니라
패튼과 맥아더를 조율했고,
다섯 개의 서로 다른 전장을 동시에 지휘하여야 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전통적으로 사이가 좋지 않았던 미 육군과 해군간에 유례없는 긴밀한 협조관계를 이끌어 내었고 연합군을 통합하여 단일지휘체계를 완성하였다. 그리고 미 육군과 공군 사이의 합동작전을 성공적으로 끌어내 마침내 전승을 거둔 승리의 설계자(Orgnizer of victory)였다.
영국의 처칠 수상은 마셜을 “마지막 위대한 미국인”이라 평가하였고, 아이젠하워 대통령도 “역사상 미국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군인”이라고 칭송하였으며,트루만 대통령도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인물”이라고 극찬하였다.
그는 2차대전 후 몰락한 유럽 동맹국들과 독일 등 적국들이 폐허에서 재기할 수 있도록 전후복구 부흥계획인 마셜계획을 입안하여 집행함으로써 유럽의 경제 재건과 부흥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여 공산화의 확산을 막고 자유진영의 보루를 강화하였다. 이 경제 부흥안의 성공으로 평화를 유지하였고 정치, 경제, 군사 최강대국으로서 미국의 위상을 확립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그 결과 그는 군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이외에도 마셜은 미 대통령의 중국특사, 미국 적십자사 총재, 국방장관 등 대단히 다양한 직책을 수행하였다.
특히 미국은 국방장관으로 임명 시 현역에서 옷을 벗고 10년이 경과해야 국방장관을 할 수 있는데, 마샬은 이 조항을 누르고 임명되었다.
그만큼 그는 직무를 공정하게 수행했고 이에 대해서는 그의 직속상관이었던 헨리 스팀슨 전쟁성 장관도 인정하였다.
그는 마셜에 대해 “내가 만난 사람중에 가장 자기희생적인 공직자였다”고 공공연하게 말하였다.
그 결과 타임지는 제2차 세계대전이 치열했던 1943년과
전후 냉전이 절정에 다달았던 1947년 두 번에 걸쳐 마셜을 올해의 인물로 선정하였다.
마셜은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는 것보다 반드시 알아야 할 것에 대해 이야기 했다.
또한 재능을 가진 인재를 발굴하기 위해서는 기회와 보상이 공정하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연령, 인종, 성별을 불문하고 훌륭한 재능을 가진 인재를 발탁하여 활용하였다.
조지 마셜의 성장기와 전쟁준비
마셜은 1880년 12월 31일 펜실베니아주 유니온 타운에서 석탄장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901년 버지니아 주립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보병소위로 임관하였다. 마셜은 첫 부임지인 필리핀에서 2년을 근무한 후 미 본토 중서부 지역에서 군부대와 훈련소에서 몇 가지 임무를 수행하였다.
오지와 험난한 지역에서 근무를 하면서 그는 인내심과 극기심을 연마하였고, 평생 연구하는 습관을 체득하였다.
1906년에 육군 보병 및 기병학교에 입교하였고 수석졸업한 성적우수자로 2년동안 교관으로 재직할 수 있었다.
그는 이때에 공부하는 방법을 배웠다고 그의 전기에서 밝히고 있다.
당시 교관 중 한사람이었던 모리슨 소령으로부터
규칙 위주의 구식교리 대신 새로운 생각이 접목된 시각을 가져야 함을 배웠고
모든 문제를 간략하게 정리하고
스스로 공부하는 법을 배웠다.
지휘참모대에 재직하는 동안 마셜은 주 방위군과 민병대에서도 근무하였고 1913년에 다시 필리핀에서 근무하였다. 1916년 대위로 승진하여 참모장교로서 프랑스 전선에서 보병 제1사단에 배속되어 참전하였다.
대전후 퍼싱 장군의 부관으로서 “제1차 세계대전이 낳은 가장 유능한 장교”라는 극찬을 받고
1924년까지 5년동안 육군 참모총장 보좌관직을 수행했다.
1924년 마셜은 3번째 아시아 근무를 했는데 이전과 달리 중국 텐진에 주둔한 15연대에 배속되었다.
이때 그는 중국어를 배웠고 중국에 대해 연구를 하였다.
그의 중국어 실력은 법정에서 증인들이 진술하는 것을 중국어로 받아 적을 수 있을 정도로 능숙했다.
3년 후 마셜은 미 육군대학원의 교관으로 선발되었으나 아내의 사망으로 이 보직을 포기하고 육군 보병학교 교수부장직을 택하였다. 이때 그는 교육과정을 개선하고 현대적 교육제도를 도입하였다. 그는 학교에서 배우는 도상 전술훈련과 전투실상 간에 차이점을 이해 시키고 이론에 치우치는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마셜 보병전술(infantry in battle)’을 저술하여 전투를 경험한 베테랑들의 관점을 전수하고자 하였다.
이 책에서 그는 전쟁에는 교통법규와 같은 규칙은 없으며,
지속적으로 변화되는 상황과 조건에서 발생하는 전투에서는
똑같은 상황이 두 번 발생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또한 현대전은 신속하게 전개되기 때문에
상상력이 없는 사람은 이길 수 없는 게임임을 강조하였다.
여기서 2차대전에서 활약하게 되는 다수의 뛰어난 장교들을 만날 수 있었다. 마셜은 200여 명의 제2차 세계대전 중의 장군들을 교육하였다. 특히 오마 브래들리는 “나는 효과적인 지휘에 관한 모든 것을 마셜에게서 배웠다”고 말할 정도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교관들에게 “학생들을 지도할때는 학생들이 어떤 길을 갈 것인지를 상상하게 만들라”고 강조하면서
해답찾기식의 교수법을 버리고
창의력과 독창성을 강조하는 교수법을 채택하였다.
또 그는 다음 전쟁의 초기 6개월을 연구하라는 훈시를 학생장교들에게 하곤 하였다.
이후 사우스캐롤라이나주 포트몰트리에의 제8보병연대장을 역임하고 군문에 들어선 지 35년이 지난 1936년에 준장으로 진급하였다. 이후 워싱턴주 포트밴쿠버에서 3사단 예하의 여단장을 수행하였다.
마셜의 화려한 경력은 1938년에 그가 워싱턴주를 떠나 미국방부 전쟁기획국장에 보직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곧바로 미 육군 참모총장에 발탁되면서 시작되었다.
국방부 핵심직위에 발탁된 마셜은 미 육군의 현대화를 위해 최선을 다했고, 특히 공군력의 증강 및 향상에 초점을 맞추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당시 공석이었던 육군참모총장 자리에 원로 장군 32명 대신 마셜을 선발하였다. 1
939년 9월 1일은 마셜이 미 육군 참모총장에 취임하던 날이었다. 바로 그날 독일은 폴란드를 침공하였으며 영국과 프랑스가 이어서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당시 미 육군 장군들은 세계를 상대로 한 전략계획 수립에 익숙하지 않았다.
마셜은 미 본토 방위를 넘어선 새로운 전략이 필요함을 직감하고 전쟁준비를 대통령에게 건의하였다.
그는 모든 것을 앞서가면서 미리 준비하였으며,
동료들이나 경쟁자들보다 한걸음 앞섰던 사람이었다.
1920년대에 이미 미래의 미군 장군들을 선발하였으며 1930년에는 미국의 전쟁준비를 위해 노력했고, 1940년에는 독일과의 전세계에 걸친 전쟁가능성에 대비하여 참모들을 준비시켰다.
그의 한발 앞선 것 중 가장 놀라운 점은 미국이 유럽에서 독일과, 태평양에서 일본과 전쟁을 치르는 도중에 발생하였다.
그는 전쟁의 승리를 예측하고 전후상황에 미리 대비하는 지혜를 보여주었다.
마셜은 육군 휘하에 향후 민사문제를 전문으로 담당할 부서를 창설하였고 이 부서에 일본과 독일에 대한 점령정책을 준비하라고 지시하였다.
또한 참모들에게도 전후 1차대전 직후에 벌어졌던 문제들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패전국 처리문제에 대비하고 효과적인 점령정책을 준비하라고 강조했다.
먼로독트린에 의한 고립주의를 주장하는 미 상하원의원들은 미국이 유럽의 전쟁에 관여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런 의원들을
일일이 설득하였다. 1940년 초 전쟁이 전세계로 확산되자 마셜은 노력을 배가하였다. 역사상 처음으로 육군의 평시동원을 단행하였고, 현대전에
대한 이해와 체력의 한계를 드러낸 원로장군들을 전역시키고 열정적인 젊은 장교들을 중용하였다. 육군과 해군의 관계를 호전시켜 전시 원활한
합동작전수행에 필요한 기반을 구축하였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1941년 3월 11일, 당시 전쟁을 지속할 물자와 재정이 부족한 연합군들에게 대륙양여법(Land lease)을 채택하여 전쟁을 지속할 수 있도록 제도적 정비를 하였다. 미국의 대륙양여법에 의해 영국이 310억 달러, 소련이 110억 달러, 프랑스 30억 달러, 중국 15억 달러 등 486억 달러를 지원하였다. 마셜은 의회와 국민여론의 반대를 무릅쓰고 추가 징병을 실시하였고, 이 조치는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하였을 때 빛을 발했다.
참모총장 기용 배경과 연합군 최고사령관 직위 선택
1938년 11월 4일 미 육군 참모차장이었던 마셜은 루스벨트 대통령이 주재하는 회의에 참석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는 참모총장을 선발하는 데에 대통령의 의사가 결정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마셜은 루스벨트 대통령이 육군 항공단의 증강을 위해 항공기 1만 대를 제작하는 사업을 추진하는 것에 대해 기쁘게 생각하였다. 하지만 회의가 시작되자 마셜은 실망을 감출 수 없었다.
루스벨트는 항공기 1만 대 제작에 필요한 비용 승인에만 관심을 기울일 뿐
항공기 정비와 조종사 양성 등의 문제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대통령이 회의에 참석한 참모들에게 의견을 물었으나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마셜에게도 의견을 묻자 그는 “ 대통령 각하 죄송하지만 저는 각하의 계획에 찬성할 수 없습니다”라고 냉정하게 답변하였다.
순간 당황한 루스벨트는 회의를 서둘러 종료하였다.
이후 6개월이 지나자 루스벨트는 마셜을 백악관으로 불러 그를 참모총장에 기용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대통령은 마셜의 정직한
직언에 감동했던 것이다.
마셜은 총장직 수락 직전에 “저는 제가 생각하는 바를 말씀 드릴 것이며 때때로 저의 태도는 유쾌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라고 하였고
루스벨트는 흔쾌히 수락을 하였다.
이것은 소장 22명, 중장 8명을 뛰어넘는 파격인사였다. 그는 준장에서 대장으로, 그것도
미 육군 참모총장으로 바로 진출한 장군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가장 치열했던 1943년 말, 마셜은 유럽본토에 대한 대규모 상륙작전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루스벨트 대통령과 처칠 영국 수상을 설득하는 데 성공하였다.
상륙작전의 필요성 문제가 일단락되자 세인들의 관심은 과연 누가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알려진 사상 최대의 군사작전을 지휘할 것인가에 집중되었다.
거의 모든 면에서 마셜은 연합군을 지휘할 사령관이 되는 데 문제점이 없었다.
루스벨트도 마셜이 가장 적합한 인물이라 생각했으며 그가 이 직책을 간절히 원한다는 점도 알고 있었다.
루스벨트는 마셜을 고려하면서 아이크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역사는 참모총장보다 최고사령관을 기억할 것이므로 나는 마셜을 임명하고자 한다.”
그러나 루스벨트는 마지막 순간에 결심을 내리는데 주저하였다.
왜냐하면 전쟁 전체에서 마셜이 차지하는 역할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많은 장군들이 있었지만 마셜만큼 전략적 안목을 겸비한 인물이 좀처럼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대통령은 진퇴양난의 고민에 빠지고 말았다.
대통령은 마셜이 사령관직을 요구할 경우에만 그를 임명하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이때 마셜은 자신의 이익과 입장보다는 국가 이익을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대통령의 지시에 따를 것을 분명히 하였다.
그렇게 하여 연합군 최고사령관 직위는 아이크에게 돌아갔다.
아이크는 이 직책을 발판으로 하여 대통령직에 재선되었다.
마셜은 항상 국가에 봉사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노력했다.
1945년 5월 8일 스팀슨 전쟁성 장관은 마셜에게 “이기적인 사람은 위인이 될 수 없는 법입니다. 마셜 당신이 진정한 위인입니다.”라고 하였다.
마셜은 아이크의 일을 대신할 수 있지만,
아이크는 마셜의 일을 대신할 수 없었다.
이것이 마셜이 최고사령관이 되지 못한 이유이자 루스벨트가 결심을 굳힌 요인이었다.
마셜의 전략적 리더십
전략적 리더란 다가올 미래에 대해 주로 초점을 맞추는 사람으로서
그는 조직이 달성하기를 바라는 장기 최종상태의 그림을 그리는 전략적 비전을 발전 시켰다.
1952년 자신의 제자이자 부하였던 아이크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마셜은 당선을 축하하는 서한을 보냈다. 이 편지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사항을 특히 강조하였다. ‘나는 당신이 좋은 인재를 선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인데 바로 이들이 당신에 대한 역사의 기록을 결정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요구하는 높은 수준에 맞는 훌륭한 인재를 찾기 바랍니다.’ 이러한 마셜의 조언은 그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한국전쟁을 수행하던 중 중공군이 개입하자 맥아더는 마셜에게 전혀 새로운 전쟁으로 접어들었다고 하면서 중국에 대한 대량보복을
건의하였다. 맥아더는 트루먼 행정부의 전략에 반대하였으며 자기의 반대의사를 공개적으로 표명하였다. 트루먼은 이 상황에 대해 마셜에게 조언을
구했다. 마셜은 숙고한 끝에 맥아더를 해임해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마셜은 맥아더가 전체적인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으며
특히 유럽에 대한 소련의 위협증가가 미국의 전략적 이해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해서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고 판단하였다.
타임지는 이에 대해 당시 별로 유명하지 않은 사람들이 유명한 사람을 해고한 사건이라고 했다. 최종적으로 맥아더 장군을 해임하기로 결정한 트루먼은 특정개인의 인기보다 문민통제의 원칙을 확립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으며 마셜도 이에 동조하였다.
마셜은 전후에 미국 적십자 총재직을 수락했다. 그가 이 직책을 수락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전쟁 중에 부상을 당하거나 전쟁 후유증으로 인해 물리적,심리적 의료지원이 필요한 수많은 참전자들의 복지를 향상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은퇴한 이후에도 마셜은 자신의 부하였던 사람들과 그 가족들의 사기와 복지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였다.
마셜 리더십의 요체
마셜이 지상최대의 전쟁이었던 제2차 세계대전에서 보여준 완벽한 임무수행과 책임감은 다른 사람들이 감히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자신만의 독특한 리더십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의무감,
자기절제,
청렴,
정직성
등 거의 모든 면에서 마셜은 후세 사람들에게 더 많이 알려진 인물들과 비교해도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의 강직하고 근면하며 겸손한 리더십은 세계대전의 승리의 설계자이자 좌절에 빠진 유럽 경제의 구원자가 될
수 있는 밑받침이 되었다.
다재다능한 인재를 발굴하는 마셜의 뛰어난 능력을 언급할 때마다 빠지지 않는 이야기가 아이크에 대한 이야기이다.
2차대전 초기 마셜은 당시 중령에 불과한 아이크를 선발하여 그보다 계급이 높은 350명의 선배장교를 제치고 준장으로 진급시켰다.
한국전쟁 중 미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로톤 콜린스도 소령을 17년 달았는데 마셜은 콜린스의 인물됨을 알아보고 3년 후 소장으로 진급시켰다.
마셜이 참모총장으로 부임하여 취한 최초의 조치는 육군의 진급제도 개선이었다.
역사가들은 마셜이 취한 조치가 미 육군의 발전에 가장 중요한 공헌을 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2차대전 후 그는 참모총장직을 물러나면서 아이젠하워 장군을 후임으로 추천하였다. 하지만 마셜의 은퇴는 며칠 가지 않았다. 그가 참모총장에서 물러난 지 10일 후 대통령 특사로서 중국에 가서 모택동과 장개석 간의 내전을 말리는 중재역을 맡기도 하였다. 그는 이 역할을 성공하지 못했지만 트루먼은 1947년 1월 그를 국무장관에 발탁하였다. 그는 과로로 건강이 좋지 않아 스스로 국무장관직을 물러났다. 그러나 트루먼 대통령은 그를 1950년 다시 국방장관직에 기용하였다. 마셜은 이 자리에서 한국전에 참전한 미군 등 유엔군과 나토군에 대한 강력한 지지를 보내고 옹호하였다. 그는 1951년 공직에서 완전 은퇴하였으며, 1953년에 유럽부흥 마셜계획의 성공으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장교후보생들에게 그는 리더에 대해 다음과 같이 훈시하였다.
“위대한 리더는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는 사람이다.
전투와 전쟁은 장비부족, 식량 고갈, 물자부족등 이겨내야 할 어려움의 연속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변명에 불과하다.
진정으로 위대한 리더는 다가온 어려움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을 이겨내고 승리할 수 있는 자질을 보여주는 사람이다.
대가(大家)란 말하는 대신 행동하는 사람이다.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를 티내지 않고 조용히 다른 사람에게 공을 넘기는
사람이다.”
군인이자 정치가였으며 평화주의자로서, 세기의 리더였던 마셜 장군은 1959년 10월 16일 워싱턴에서 서거하여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첫째, 그는 자기가 속한 조직에 정직의 문화가 필요함을 역설하였다.
그는 리더가 자기에게 주어지는
비평이나 의견을 수용해야 할 뿐만 아니라 조직 전체가 정직함을 추구하는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부하들에게 “나는 귀관들에게
실망했다. 왜냐하면 일주일 내내 내가 처리한 수많은 일에 대해 단 하나의 반대도 제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나는 뛰어난 능력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현재 우리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하여 어느 정도 불만을 가진 사람을 볼 때마다 그 사람에게 매력을 느끼며 좋은 인상을 갖는다”고
하였다. 이처럼 그는 조직의 결정에 대한 비판과 반대 의견을 발굴하고 이를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둘째, 그는 항상 인내하며 미래를 준비하는 삶을 살았다.
1910년 버지니아 주립 사관학교에 재학중이던 마셜은
짧은 휴가의 대부분을 영국 육군의 활동에 대해 연구하며 보냈고,
1913년 휴가중에는 1905년 러일전쟁 전적지를 연구하였으며
이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군의 전술을 공부하기 위해 일본도 여행하였다.
어느 누구도 마셜에게 여행과 연구를 강조하지 않았지만 그는 항상 준비하는 삶을 살았고
후배들에게 “기회는 언젠가 온다.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미군 내 그를 대체할 참모장교가 없었기 때문에 그의 뛰어난 참모 재능은 오히려 그의 진로의 발목을 잡을 정도였다.
미국 시민들이 군사력 증강을 반대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마셜은
미래전쟁에 대비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시민군을 들고,
만약 시민군 육성에 실패하면
앞으로 다가올 전쟁에서 첫 일년간은 매우 힘든 상황이 될 것임을 예측하였다.
미군이 2차대전에 무리없이 돌입할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은 마셜의 판단에 기인하였다.
셋째, 그는 선배들이 피 흘려 치르고 배운 경험을 높이 평가하고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마셜은 병사들이 앞으로 싸우게 될 전쟁에 대해 자세히 알면 알수록 훨씬 더 잘 싸울 수 있을 것이라는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각종 미디어를 통해 전쟁의 이유와 배경 그리고 전쟁에서 배워야 할 교훈과 승리하는 군대의 비결에 대해 끊임없이 연구하고 전파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에서 배운 것을 바탕으로 그는 전쟁에 대해 철저히 준비하였다.
이러한 철저한 준비가 있었기 때문에 결국 전쟁의 결과를 바꾸어 놓을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미국이 마셜이 주도했던 것과 같은 준비와 대비를 하지 못했다면 제2차 세계대전은 1947년이나 1948년까지 계속 되었을 것이고
수 천만 명이 더 희생 되었을 것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처칠은 평시에 미 육군이 보유했던 소규모 참모진이 어떻게 대규모 군대를 건설하고 뛰어난 지도자들을 찾아낼 수 있었는지 불가사의하며,
그것은 예술의 경지였다고 칭찬할 정도였다.
마셜은 국가의 산업생산력을 전시 생산력으로 전환시킨 주무자였다.
넷째, 그는 항상 발생 가능한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대비책을 강구하였다.
마셜은 전쟁의 위험에 대하여 계속 경고음을 발산하고 대비책을 강구해야 함을 호소하였으나 미 의회는 마셜의 경고를 여러 차례 무시하였다.
그는 위기를 측정하고 대비하며
조직의 경보시스템을 갖추고
모의훈련을 하고,
그 결과를 피드백 하는
위기관리 절차에 따라
대책을 강구하였다.
마셜은 한국전쟁 중 또 다시 미 육군을 재건하면서 모든 것이 이완되어 있으며 나태와 싸워야 함을 강조했다.
3번의 큰 전쟁에서 모두 제대로 대비하지 못해 대가를 톡톡히
치렀기 때문에 마셜은 강한 군대를 건설하고 유지하는 데 필요한 국방예산을 제안하여 통과시켰다.
다섯째, 그는 모든 문제의 핵심을 간파하고 이를 간결하고 요약된 형태로 설명하거나 브리핑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지 마셜은 모든 면에서 간결한 형태를 좋아했다.
심지어 그는 어떤 문제든 한 페이지 이내로 간략히 요약되어 있지 않으면 충분히 연구 검토되지 않은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문서보고나 구두보고를 간략하게 줄여야 하며
핵심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했다.
그는 사전에 충분히 연구하고 준비했다면 어떤 일이든 신속하게 처리가 가능하다고 생각하였다.
퍼싱 장군의 부관을 하면서도 그랬고,
참모총장시절 대통령에게도 “각하 제게 3분만 시간을 주시겠습니까?”하고 대통령에게 준비된 자료를 브리핑했다.
육군의 상황에 대한 참모총장의 간결하고 솔직한 보고에 대해 루스벨트는 마음을 움직여 마셜의 건의를 대부분 수용하여 결정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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