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투자=전쟁:알아야

수양제의 판박이 건륭제

modest-i 2015. 8. 7. 20:41

 

* 수양제(隋煬帝) : ()나라의 황제인 양제(煬帝). 북중국을 점령하고 한족의 문화를 받아들인 탁발선비(拓拔鮮卑)족의 후손이고, 본명은 양광(楊廣)’이다. 성이 씨고 이름은 이다.

 

 ‘양제는 당나라 사관들이 붙인 시호인데, ‘()’이라는 한자는 태우다/불사르다/”라는 뜻이 있어 양제‘(나라를) 태워버린 황제라는 뜻을 지닌 시호가 된다.

 

그가 수나라를 잘못 다스려, 마치 집을 불로 태우듯이 나라를 망쳤기 때문에 그런 시호가 붙었다.

 

사치와 위선과 패륜과 침략전쟁과 토목공사(대운하 건설)로 악명이 높은 임금이었다.

 

 

 

 

 

* 건륭제(乾隆帝) : 청나라의 황제. 본명은 아이신기오로 훙리’. ‘아이신기오로가 성이고 훙리는 이름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건륭제는 시호다. ‘아이신기오로는 만주어로 황금 집안이라는 뜻이다(한자로 풀이하면 ’, 그러니까 이 된다). 서기 18세기에 청나라를 다스렸다.

 

 

(인용 시작)

 

건륭 후기는 태평성세로, 나라에 적지 않은 재부가 쌓여 있었다. 청대 역시 명대와 마찬가지로 권력이 군주 한 사람에게 고도로 집중되어 있어, 황제나 황제의 총애를 받는 신하가 멋대로 부정과 비리를 저지를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나 든든한 배경을 찾지 못했다면, 화신(청나라의 대신. 만주족 출신이다. 부정부패와 탐욕으로 악명이 높았다 - 인용자 잉걸. 이하 인용자’)이 제아무리 솜씨가 좋고 능력이 뛰어났다 해도 그렇듯 천문학적인 규모의 재물을 횡령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화신은 아부에 능했고, 또 동시에 그것을 좋아하는 대상을 찾아냈다. 자신의 공과 업적을 과시하기 좋아하고 이익과 명예를 동시에 탐냈던 건륭제는 그런 점에서 나무랄 데 없는 표적이었다.

 

건륭제의 입장에서 볼 때도 화신의 절묘한 비위 맞추기와 아첨은 자신의 구미에 딱 맞았다. 게다가 재물을 긁어모으는 화신의 놀라운 솜씨는 건륭제의 필요와 맞아떨어지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손바닥이 마주치니 요란한 소리가 났고, 화신에 대한 건륭제의 총애는 갈수록 더했던 것이다. 이렇듯 둘의 사이는 공생관계였다. 따라서 화신이란 인물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먼저 건륭제에 대해 살펴보는 것이다.

 

필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표면적으로 건륭제(아이신기오로 훙리 - 인용자 잉걸. 이하 인용자’)와 수양제(양광 - 인용자)는 완전히 달라 보이지만, 실은 여러 가지 면에서 두 사람은 서로 빼닮았다고.

 

독자들은 이런 견해에 찬성하지 않을지 모른다.

관 뚜껑을 덮고 난 다음 내려진 평가들에 따르면,

 

수양제는 폭군에다 망국(亡國 : 망한 나라 - 인용자)의 군주였다.

 

반면 건륭제는 초기에는 분발하여 일을 잘 해냈지만, 후기에는 교만해져 사치와 방탕을 일삼은,

전후가 완전히 다른 인물이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아 어용(御用 : 임금이 쓰는 것/권력에 영합하여 줏대 없이 구는 짓을 낮잡아 일컫는 말 - 인용자) 사가(史家. ‘역사가를 줄인 말 - 인용자)들이 오랫동안 노래를 불러온 건륭성세’(아이신기오로 훙리가 다스린, ‘한창 융성한 세대를 일컫는 말 - 인용자)의 창건자 중 한 사람으로서 어느 정도 제몫은 한 황제라고 평가한다. 따라서 두 사람을 한데 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고들 말한다.

 

여기서 시비장단(옳고 그름과, 장점과 단점 - 인용자)에 대해 논쟁하고 이러쿵저러쿵 길게 얘기할 것 없이, 그들의 평생 경력을 진지하게 비교하여 그들 사이에 닮은 점이 얼마나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첫째, 그들은 마침 성세(盛世. [나라나 집안이] 한창 융성한 세대 - 인용자)를 만난 행운아들이었다.

 

역사상 일부 제왕은 억세게 재수 없는 시대를 만난 탓에, 아무리 노력하고 애써도 대세를 만회하지 못했다. 예를 들어 한나라(동한東漢 - 인용자) 헌제(獻帝. 본명은 유협劉協’. 성이 유씨고 이름은 협이다. ‘헌제[나라를 남에게] ‘바친[] 임금[]’이라는 뜻을 지닌 시호고, 동한의 뒤를 이은 위나라의 사관들이 붙인 시호다. 실제로 유협은 조조의 아들인 조비에게 황제 자리를 넘기고 물러나야 했으며, 그가 물러난 뒤 동한이 멸망했다 - 인용자)는 즉위 당시 대권이 이미 다른 곳으로 넘어갔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 명나라 숭정제(崇禎帝)는 즉위 무렵 내우외환이 봇물처럼 밀려들어(명나라의 국경선이었던 만리장성 밖에서는 만주족이 세운 후금後金의 군대가 명나라를 노렸고, 명나라 안에서는 이자성李自成의 농민군이 명군과 싸우며 북경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 인용자), 무던히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멸망이란 운명의 시곗바늘을 되돌리지 못했다.

 

(중략)

 

반면 수양제는 북주(北周. 북중국을 점령하고 중앙아시아 나라들과 한족[漢族]의 문화를 받아들인 유목민족이 세운 왕조 - 인용자)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호사를 누리며 자랐고(북주의 귀족들도 대부분 한화漢化한 탁발선비족이었다 - 인용자),

 

성년(成年 : 어른 - 인용자)이 된 다음에는 때마침 아버지 문제(文帝. ‘수 문제 隋 文帝를 줄인 말이다. ‘문제는 시호고, 본명은 양견楊堅이다. 탁발선비족의 후손이며, 그의 집안은 원래는 보육여라는 성을 쓰다가 나중에 한족의 성씨인 을 썼다. 남중국에 있던 한족의 왕조 진을 무너뜨리고 중국을 통일했으며, 나라 안에서는 백성을 잘 다스려 인심을 얻었고, 과거제도를 만들어내 인재를 뽑아 썼으나, 나라 밖으로는 다른 나라들의 복종을 강요하였고 고구려와 싸웠다. 나중에 아들인 양광에게 죽임을 당한다 - 인용자)가 일궈놓은 대업(大業. 나라를 세우는 일 - 인용자)을 물려받아 천하에 남부러울 것 없이 살았다.

 

 

 

 

건륭제는 25세에 즉위했는데, 강희/옹정 두 황제가 키워놓은 나라를 이어받아, 잔뜩 쌓여 있는 재부(財富. 넉넉한 재물 - 인용자)를 이용해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었다.

 

 

 

 

그들은 모두 황제들 중 행운아이자, 부잣집 도련님이었다.

 

 

 

 

 

 

둘째, 두 사람 모두 공 세우기를 좋아하고, 또 그것을 여기저기 자랑하길 즐겼다.

 

수양제는 애당초 진(. 중국의 남북조 시대 말기인 서기 6세기에, 남중국 - 장강[長江] 이남 - 을 다스리던 마지막 남조南朝 왕조. 한족의 나라였다 : 인용자)을 평정하는 전쟁에서 병권을 쥐고 큰 공을 세웠다.

 

그 뒤 고구려를 원정(‘침략이라는 말을 쓰거나, ‘공격이라는 말을 쓰거나, 아니면 고구려와 싸우면서라는 말을 써야 한다. 이 글을 쓴 사람이 한족이라서 원정이라는 말을 쓴 게 아닌가 한다 - 인용자)하면서

좌절을 겪었음에도, 분에 못 이겨 대가를 따져보지도 않은 채 기어코 고구려를 멸망시키려 했다.

 

 

 

 

 

 

건륭제는 군사(軍事. 군대와 전쟁과 관련된 일 - 인용자)에 대해서는 알지도 못하면서, (청나라의 - 인용자) 경제력만 믿고 기분에 따라 군대를 동원하기 일쑤였다.

    싸움에 나섰다 하면 승리를 거둘 때까지 포기할 줄 몰랐다.

 

 

그는 황제 노릇을 하는 60년 동안 무려 열 차례나 전쟁을 일으켰는데, 어용 사관들은 이를 두고 열 번 싸워 열 번 다 대승(大勝. 크게 이김 - 인용자)을 거두고 공을 세웠다며 십전무공十全武功(“군인으로서 세운 완벽한 공적이라는 뜻이다 - 인용자)이라고 찬양했다. 이 때문에 건륭제는 만년에 십전노인’(“열 번 싸워 열 번 다 이긴 노인”/“군인으로서 완벽한 공적을 세운 노인이라는 뜻 - 인용자)으로 자처하면서 호기를 부렸다.

 

그러나 말이 열 차례 전쟁에서 전승을 거둔 것이지, 사실은 결코 그렇지 않았다. 일부 전쟁은 완전히 침소봉대(針小棒大. 바늘[]만큼 작은[] 것을 방망이[]처럼 크다[]고 말하는 것. 쉽게 말해 부풀리기뻥튀기’ - 인용자)한 것으로, 애당초 군대를 일으킬 필요조차 없었던 경우였다.

 

그는 명성을 얻기 위해 여러 차례 거리낌 없이 전쟁을 일으켜 많은 군사와 백성, 변방 소수민족의 생명을 희생시켰다.

그에게 전쟁은 놀이나 마찬가지였다.

 

 

 

 

 

셋째, 두 사람 모두 우아한 척 풍류 넘치는 재주꾼으로 자처했다.

과대망상에 사로잡혀 스스로를(‘자신을이라는 말을 써야 한다. 이 글을 한국어로 옮길 때, 용어를 좀 더 바른 것으로 골랐어야 하는데, 아쉽다 - 인용자)

지략이 뛰어나고, 동시에 문학적 재능도 대단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수양제는 애정 시 몇 편을 남겼는데,

시를 써서 황제를 뽑아도, 나는 황제가 될 수 있다!”며 큰소리를 뻥뻥 쳤다.

 

그 당시에는 설도형의 시가 지식인뿐만 아니라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널리 애송될 정도로 인기가 높았는데, 특히 어둑한 창문엔 거미줄이 드리우고, 빈 대들보 위엔 제비가 집을 짓네.”라는 구절은 많은 사람들이 즐겨 인용하는 명구(名句. 뛰어나게 잘 지은 글귀/이름난 글귀 - 인용자)였다.

 

수양제는 이런 설도형을 시기하고 질투하여 죽인 다음,

아직도 그 구절을 지을 수 있겠느냐?”며 의기양양해했다.

 

 

 

건륭제도 시와 문장을 애호했다.

천하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가는 곳마다 시와 문장을 남겨 자신의 글재주를 자랑했다.

 

동시에 그는 늘 자신이 뛰어나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한인(漢人)의 문장에서 잘못을 찾아내서는 대대적인 문자옥(文字獄. “글자[문자]와 관련된 옥사[범죄를 다스리는 사건]”라는 뜻.

청나라 조정이 한족들의 책과 글에서 만주족이나 청나라를 욕하는 글귀 - 또는 내용 - 이 있는지를 검열하고,

 

만약 혐의가 사실이라고 인정될 경우 그 책과 글을 쓴 사람을 사형에 처하고 책과 글은 불태워 버리거나 금서로 정한 일.

 

한 예로 한족 지식인이 이 세상에 해()와 달()이 없다.”는 시를 쓴 사실이 밝혀지자, 아이신기오로 훙리는 ()과 월()을 합치면 명()이 되지 않느냐? 이건 명나라를 그리워하고 [명나라의 땅을 점령한] 청나라를 욕하는 내용이야!”라고 주장하며 그 지식인을 고문하고 사형에 처했다 - 인용자)’을 일으켰다.

 

 

 

 

 

넷째, 두 사람은 모두 여기저기 놀러 다니기를 좋아했으며,

특히 풍요로운 강남(江南. ‘장강의 남쪽을 줄인 말. 중국 남부를 일컫는 말이다 - 인용자)을 좋아했다.

 

수양제는 세 번 강도(양주)를 찾았고(그는 결국 여기서 최후를 마쳤다),

건륭제는 여섯 차례나 강남을 순시하면서 인력과 재력을 낭비했다.

 

그들이 지나는 길목의 백성들이 엄청난 고통을 당했다는 점에서도 두 사람은 닮은꼴이다(내가 <히스토리 HD>의 다큐멘터리인 <제국의 건설 - 중국>에서 본 바에 따르면,

 

양광이 대운하에 배를 띄워 남중국으로 갔을 때, 행차가 규모가 크고 화려했으며,

그와 일행이 산해진미를 즐기다가 다 먹지 못하면 배를 멈추고 운하 곁에 있는 땅에 구덩이를 판 뒤, 거기에 남은 음식들을 모조리 버리고 다시 흙을 덮었다고 한다.

 

또한 역사책에 따르면, 양광은 북중국과 남중국을 잇는 대운하를 파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대운하를 파느라 동원된 백성들은 노역을 피하려고 일부러 멀쩡한 팔이나 다리를 잘랐다고 한다. 이 때문에 수나라 백성들은 양광을 원망하고 미워했다 - 인용자).

 

 

 

 

 

 

다섯째, 더욱 닮은 점은 두 사람 다 남의 말을 듣지 않고 제멋대로 굴었으며,

                                 죽어도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수양제는 반란이 일어나 자신이 이미 반군의 손아귀에 들어갔는데도(도피처인 강도에 함께 데려간 수나라의 군인들이 양광에게 반기를 들었다. 그들은 온 천하가 폐하를 원망하고 있습니다.”라며 양광에게 목숨을 내놓으라고 했다. 반란군의 우두머리는 우문화급宇文化及이라는 장수였는데, 그는 양광의 아버지인 양견이 씨를 말린 북주의 황실과 같은 우문宇文 씨였다 - 인용자),

억지를 부리며 목 졸려 죽는 순간까지 결코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다(반란군이 양광이 잘못한 일을 하나하나 들어가며 그에게 죽음을 강요하자,

 

양광은 백성들에게는 진심으로 미안하다.

하지만 너희들은 짐과 함께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지 않았느냐?”라고 대답했고,

 

반란군 앞에서 한낱 보통 사내가 피를 흘려도 땅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데,

하물며 천자의 피는 어떻겠느냐?”짐은 독이 든 술을 마시고 죽겠다!”고 고집했다 - 인용자).

 

 

 

 

건륭제는 그래도 수양제에 비해 운이 좋은 편이었다. 여러 차례 강남을 순시하며 백성을 괴롭히고 재정을 축내 원성이 들끓었지만, 집안(청 황실 - 인용자)의 밑천이 두둑한 덕에 황제 자리에서 물러날 때까지 큰 난리를 겪지는 않았다. 백련교(청나라 중기에 한족 농민들이 만든 종교단체. 청 황실에 반기를 들고 청나라 군사들과 맞서 싸웠다 - 인용자)가 각지에서 크게 일어난 것은 그 아들 가경제 때의 일이었다.

 

 

 

건륭제는 강남 유람을 말리는 의견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누구든 말리면 곤욕을 치르게 만들었다. 4차 강남 유람 때는 항주로 행차했는데,

황제의 체면도 돌아보지 않고 심야(깊은 밤 - 인용자)에 변복(變服. []을 바꾸다[].

다시 말해 남이 알아채지 못하게, 옷을 바꿔 입다.’ - 인용자)을 하고는 화류계(花柳界. []들이 모인[] []. 다시 말해 윤락여성들이 모인 곳. 몸 파는 여성을 에 빗댄 말이다 - 인용자)를 찾아 나서려 했다.

 

황후가 울면서 말리자,

화가 난 건륭제는 황후를 북경으로 돌려보냈고,

녀는 끝내 우울증에 시달리다 죽었다.

 

 

6차 유람 이후에는 황당한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윤회일이 글을 올려, 강남 일대 백성들이 고통에 신음하며, 원망의 목소리가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다고 바른 소리를 했다. 그러자 건륭제는 버럭 화를 내면서, “민간이 고통을 받았다고 했는데, 대체 누가 고통을 받았는지 지적해보라! , 원성의 목소리가 거리를 가득 메웠다고 했는데, 대체 누가 원망을 했는지 지목해보라!”며 억지를 부렸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논리로 대신들의 입을 틀어막았으니,

정말이지 무뢰의 극치라 할 만하다.

이런 억지 질문에 답을 하지 못한 윤회일은 군대로 쫓겨났다.

 

 

 

 

임기응변에 능했던 기효람은 건륭제가 아끼는 대신으로 평소 대단한 존중을 받고 있었는데,

그 역시 건륭제의 유람을 말리면서 했던 동남(중국대륙의 동남쪽. 중국 남경[南京]이나, 강소성이나, 상해나, 절강성이나, 복건성을 일컫는 말이다 - 인용자)의 재력이 바닥났다.”는 말 한마디 때문에 호되게 홍역을 치렀다.

 

6차 강남 유람에서 돌아왔을 당시 건륭제의 나이는 벌써 74세였는데,

정력이 예전만 못했던지 그 후로는 더 이상 강남으로 행차하지 않았다.

만약 그가 스스로 그만두지 않았더라면 누구도 말릴 수 없었을 것이다.

 

 

 

 

 

 

건륭제와 수양제의 일생을 비교해보면,

그들의 성격, 생활, 일 처리 방식 등이 대체로 비슷했다고 말할 수 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최후의 결말뿐이었다.

 

 

두 사람은 모두 자기 멋대로 굴며 선조가 쌓아 놓은 재부(실제로는 백성들의 피와 땀)를 아낌없이 바닥냈고,

 

결국 패가망신(敗家亡身. 집안의 재산을 다 써 버리고 몸을 망침 - 인용자)했다.

 

다만 수양제는 국가 재정을 완전히 바닥내는 바람에 모순이 격화되고 큰 난리가 터져 목숨을 잃었다.

 

반면 건륭제는 집안의 밑천이 든든했던 덕에 모순이 발화점에까지 이르지 않았고,

또 가경제가 사태를 임시로 수습해 국면이 잠시 누그러진 덕에 편안한 최후를 맞을 수 있었다.

 

 

(인용 끝)

(덧붙이자면, 아이신기오로 훙리는 자신의 아랫사람인 화신의 부정부패를 고발하고 처벌함으로써 모든 것을 화신 탓으로 돌릴 수 있었다.

 

그렇게 했기 때문에 백성들의 불만과 증오가 아이신기오로 집안이 아니라 화신에게로 향했고,

대폭발을 막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양광은 자기 대신 죽어줄 간신이 없었고,

모든 것을 자신이 책임져야 했다.

이 때문에 양광이 죽어야 했고,

백성들과 군벌들과 귀족들의 불만은 황실인 양씨 집안으로 고스란히 향했으며,

수나라는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인용자)

 

- 출처 :청렴과 탐욕의 중국사(사식 지음, 김영수 옮김, 돌베개 펴냄, 서기 2007)

 

* 사식(史式) :

 

성이 사()씨고 이름은 식()이다. 중화민족사 연구회 회장, 중국 태평천국사 연구회 고문, 민족중앙 손중산 연구회 고문, 중격사범대학 교수 등을 맡고 있다.중화민족사 연구,태평천국 대사전등과 같은 방대한 편찬 사업을 주도했다. 주요 저작으로는태평천국사 어휘석,대만 선주민사,한어성어 연구등이 있다.

 

* 김영수 :

 

고대 한중 관계사를 전공했으며,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석사 및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중국 소진학회 초빙 이사이자 중국 사마천학회 회원으로, 현재 중국 알기중국 알리기에 힘을 쏟으며 매년 일반인들과 함께 중국 답사를 실천하고 있다. 저서로지혜로 읽는 사기,고대 동북아시아의 민족과 문화,간신은 비를 세워 영원히 기억하게 하라등이 있으며, 역서(옮긴 책 - 인용자)모략,임어당 산문집,맨얼굴의 중국사,추악한 중국인,황제들의 중국사등이 있다.

 

 

 

역사 마을 에서 펌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