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서(漢書)를 보면 가의(賈誼)가 한 문제(文帝, BCE 180 -157)에게 “지금 흉노는 교만을 떨며 쳐들어와 노략질을 합니다. 흉노의 모욕적 행위는 극치에 달합니다. 그러나 조정은 매년 금, 비단, 자수직물, 공단 등을 그들 에게 바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오랑캐가 명령을하며 윗자리에 앉아 주군 역할을 하고있으며, 반대로 천자는 신하의 예를 갖추어 공물을 바치고있는 꼴 입니다” 라 고 말을 하였다. 흉노들은 한나라를 아우의 나라라고 불렀고, 후에 요와 금 조정은 송 황제를 조카라 불렀다. Jagchid and Symons (1989: 15, 55) 참조.
漢書 卷四十八 賈誼傳 今匈奴…侵掠…而漢歲致金絮采繒以奉之 夷狄徵令 是主上之操也 天子共貢 是臣下之禮也
金史 卷六 本紀第六 世宗上 五年 宋…稱姪宋皇帝…再拜奉書于叔大金皇帝
이것이 바로 사마천(司馬遷, c.145-86 BCE)이 보는 유목
민족 대 정주농경 한족이라는 양극체제의 본질인 것이다. “신중히 선택된 용어와 조공이라는 수사학적 표현으로 포장을하여 유목국가에 대한 보상을 숨겼지만, 실제로는 수많은 한족 왕조가 무력충돌을 회피하기 위하여 자신들보다 훨씬 강한 유목세력에게 조공을 바친것이었다. 정착-농경 국가는 평화 공존을 위해 비싼 대가를 치르고 있었지만, 그래도 군가적 해결책 보다는 공물을 바치고 국경무역을 제공하는 편이 훨씬 비용이 적게 드는 셈이었다.” Jagchid and Symons(1998: 116)
흉노 군대의 숫자가 약탈을 자행 해 한나라 조정을 겁주기에는 충분했지만, 중국 전역을 정복하여 통치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 을 흉노 자신들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 대륙을 정복하려들지 않았다. Barfield (1989: 91) 참조.
당시의 흉노는 정주농경 지대를 점령하고 통치를 할 관료조직도 없었다. 흉노는 수적인 열세와 관료 통치조직 부재의 약점을 노출시키지 않고, 또 기동성을 잃지 않으면서, 중국을 착취하고자 하였다. 그들은 막대한 공물을 빼앗아 내고, 한족의 저항 의지를 제거하는 최상의 도구가 바로 한족을 공포에 떨게 만드는 것이라 믿었다. 평화협정의 잦은 파기는, 갈취 물자의 량을 늘리려는 책략이었다.
동아시아 역사: 왜곡의 시정-제2회 / 홍원탁 서울대 명예교수 에서 일부 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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