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 군대의 우수성과 주요 전략·전술(상)
박완
목차
Ⅰ.들어가는 말
Ⅱ.본마당
1.몽골 군대의 양상
2.유목민 군대로서의 몽골 군대의 우수성
3.정복 왕조 군대로서의 몽골 군대의 우수성
4.군사학적 관점에서의 몽골 군대의 우수성
5.몽골 군대의 주요 전략·전술
6.몽골 군대의 주요 전역 분석
Ⅲ.맺음말
Ⅰ.들어가는 말
12세기 말, 몽골인들은 유라시아 대륙의 절반 이상을 아우르는 사상 최대의 제국을 수립하였다. 채 한 세기가 안 되는 기간 동안 아시아, 중동, 유럽의 수많은 제국과 왕국들을 무너뜨린 몽골 제국의 신속한 정복 과정과 광대한 영토는,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연구 대상이 될 만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몽골인들의 세계 정복 과정을 단순히 칭기스칸이라는 한 개인의 영웅적인 활약으로 묘사하거나, 혹은 미개한 야만인들의 무자비한 학살과 약탈 과정 정도로 폄하하면서 애써 무시하는 경향이 강하였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몽골인들의 세계 정복의 원동력을 그들의 군대의 우수성에서 찾고자 하며, 이를 위해 군사학적 관점에서 몽골 군대의 우수성을 분석하고 그들의 주요 전략·전술을 제시하며, 이러한 요소들이 실제 전쟁 과정에서 어떻게 발휘되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또한 지금까지 수많은 유목 민족들이 유목 국가와 정복 왕조를 수립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몽골인들만이 동양과 서양, 초원 지대와 정주 지역 모두를 아우르는 대제국을 수립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원인이 과연 무엇이었는가에 대해서도 살펴보도록 하겠다.
Ⅱ.본마당
1.몽골 군대의 양상
(1)규모
몽골의 침입과 지배를 받아 온 민족들의 경우, 흔히 몽골 군대의 규모를 크게 부풀려서 그것에서 자신들의 패배 원인을 찾는 경향이 강하다. 하지만 1206년 칭기스칸이 몽골 고원을 통일하였을 때 몽골 군대는 95개 천인대와 1만 명의 친위대로 구성되어 있었고1), 서하 원정 직후 칭기스칸이 사망한 1227년의 몽골 군대의 총 병력은 12만 9천명에 불과하였다2). 주요 원정에서도 몽골 군대의 총 병력은 15만 명을 넘는 경우가 거의 없었고, 게다가 그 중 상당수는 피정복민들로부터 차출한 병력이었다. 애초에 칭기스칸 시대의 몽골의 전체 인구가 200만 명 정도에 불과하였기에3), 인구와 병력 동원 능력에서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로 우월한 정주 국가를 수적 우위로 제압하였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다.
(2)조직
몽골 군대는 사회 조직과 마찬가지로 십진법에 따른 조직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몽골인들은 호(戶)의 수에 따라 십·백·천호에 속해 있었고, 15세 이상의 남성들은 70세가 될 때까지 병역의 의무를 지고 있었다4). 이러한 사회 조직에 기반한 몽골 군대 역시 십·백·천·만인대로 이루어져 있었고, 또한 전략적 필요성에 따라 2~3개의 만인대를 합쳐 일개 집단군으로 편성하여 한 명의 지휘관 아래에 두기도 하였다5). 몽골은 유목 국가의 전통에 따라 남쪽을 향하여 중앙과 좌·우익을 설정하고 그에 따라 천호들을 배치하였으며, 실제 행군과 전투에서는 경기병으로 이루어진 전위와 좌·우익이 중군을 둘러싸는 대형을 취하였다6).
<그림 1> 몽골 울란바토르의 국립 역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몽골 갑옷과 활집.
<그림 2> 같은 곳에 소장되어 있는 몽골 활과 화살, 그리고 군화.
(3)장비
몽골 군대는 전원이 기병이었고, 이들은 역할과 장비에 따라 중기병과 경기병으로 나뉘어졌다. 중기병은 적군의 돌격을 저지하고 동요하는 적진에 최후 돌격을 감행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들은 얇은 철판을 댄 가죽 투구를 썼고, 마찬가지로 철판을 대거나 옻칠을 한 가죽 갑옷을 입었으며, 창, 칼, 도끼, 철퇴 등으로 무장하였다. 반면 경기병은 적진을 교란하거나 적군을 포위망으로 유인하고 달아나는 적군을 추격하는 역할을 맡았는데, 이들은 투구는 썼지만 갑옷은 거의 입지 않았고, 때로는 몸에 딱 들어맞는 질긴 비단옷을 입어서 화살이 몸 안으로 깊이 파고들지 못하도록 하였다7). 중기병과 경기병 모두 두 대의 활을 주 무기로 사용하였고, 그 외에도 약간의 곡물과 말린 고기, 소금, 냄비, 가죽 주머니, 활시위, 화살촉 연마용 줄칼, 실과 바늘 등을 말 등에 싣고 다녔다8).
2.유목민 군대로서의 몽골 군대의 우수성
(1)말(馬)
초원의 유목민들이 농경민들에 대하여 줄곧 군사적인 우위를 누릴 수 있었던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바로 말의 힘이었다. 오늘날의 말의 조상은 그 크기가 너무 작아서 사람을 태울 만한 힘이 없었기에, 석기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단순한 사냥의 대상으로 간주되었고, 기원 전 4,000년경 처음 사육되었을 때에도 그 목적은 식용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9). 하지만 선택 교배를 통해 말의 크기가 점점 커지고 바퀴, 고삐, 안장 등의 다양한 마구(馬具)가 발명되면서, 기원 전 2,000년대 초반부터 말의 역할은 식용에서 운송 수단, 그 중에서도 전쟁 수단으로 바뀌게 되었다10). 그리하여 기원 전 1,700년경부터 시작된 인도-유럽어족 인들의 대이동에서부터 17세기 만주족의 중국 정복에 이르기까지, 농경민들에 대한 유목민들의 침략의 역사는 수천 년간 끊임없이 이어져 온 것이다.
말이 인간에게 가져다 준 군사적 능력은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것이었다. 말은 시속 30Km 이상의 속도로 달릴 수 있는데, 이것은 인간의 행군 속도보다 10배나 빠른 것이다. 또한 말은 19세기에 내연 기관이 발명되면서 기차와 자동차가 등장할 때까지, 인간의 운송 수단 중 가장 빠른 것이었다. 정주 국가들 역시 말의 이러한 군사적 가치를 잘 알고 있었기에, 국가가 직접 목장을 운영하여 말을 기르기도 하였고, 백성들에게 말 사육과 공납을 의무화하기도 하였으며, 유럽에서처럼 토지 분봉을 대가로 말 사육과 기병 양성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농경민들은 결코 유목민들처럼 우수한 기병이 될 수 없었고, 또한 그들처럼 효율적으로 말을 사육하지도 못했던 것이다.
특히 몽골말은 몽골의 세계 정복에 있어서 일등공신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몽골말은 지면에서 어깨까지의 높이가 122~129cm에 불과하여11) 서양의 말에 비해 30cm 정도 작으며, 머리가 크고 목이 굵으며 다리가 짧고 털이 많은 등 매우 볼품없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몽골말은 인내심이 대단하고 추위와 배고픔을 잘 견디며, 40~50cm 깊이로 쌓여 있는 눈을 걷어차고 그 아래에 파묻혀 있는 풀을 뜯어먹을 줄도 알았다12). 또한 몽골인들 역시 말의 복종심과 인내심을 키우고 체력을 늘릴 수 있도록 효율적으로 말을 사육하고 조련하였다. 그로 인해 몽골말은 하루 평균 150Km, 준마의 경우 무려 550Km를 달릴 수 있었으며13), 이로써 몽골 군대에 무적의 기동성을 제공해 주었던 것이다.
(2)활
말과 더불어 유목민 군대의 가장 중요한 무기 체계로 들 수 있는 것이 바로 활이다. 실제로 말과 활은 화약 무기가 전장에 나타나기 전까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력적인 무기 체계였고, 또한 활은 인간의 근력을 탄성력으로 변환하여 물체를 멀리까지 날려 보낼 수 있는 인류 최초의 기계였다14). 기원 전 25,000년경의 라스코(Lascaux) 동굴 벽화에 그려진 화살 그림이 활과 화살에 대한 최초의 기록으로 추정되며15), 기원 전 13,000년대 이후로 세계 각지에서 타제 화살촉이 공통적으로 발견되고 있다16). 이처럼 예전에는 생각할 수도 없을 만큼 먼 거리의 목표를 정확하게 맞출 수 있게 한 활은, 처음에는 사냥 도구로서, 나중에는 전쟁 무기로서 전 세계로 급속하게 퍼져 나갔고, 그 지역과 재료에 따라 다양한 형태를 띠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 중 가장 강력했던 것은 바로 복합 활(composite bow)이었다. 대략 기원 전 2,000년대에 처음 등장한 것으로 보이는 이 무기는17), 소의 힘줄과 물고기 부레를 녹여 만든 특수한 아교를 사용하여 나무, 물소 뿔, 소의 힘줄 등의 재료를 결합하여 만든 것이다. 즉 나무로 된 활의 본체의 앞뒤에 물소 뿔과 소의 힘줄을 붙여서, 압축(뿔)과 신장(힘줄)에 대한 활의 복원력을 배가시켜서 활의 위력을 높였던 것이다. 숙련된 사수의 경우 복합 활을 사용하여 300m 거리의 목표를 정확하게 맞출 수 있었고, 1분당 화살을 15~16발까지 쏠 수 있었다. 복합 활의 최대 사거리는 이보다 훨씬 길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1224년에 벌어진 활쏘기 시합에서 칭기스칸의 조카 이숭게는 536m를 쏘아 우승하였고18), 오스만 튀르크의 술탄 셀림은 무려 889m를 쏘았다고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19).
<그림 3> 몽골의 나담 축제의 활쏘기 시합의 모습. 복합 활의 모양이 잘 나타나 있다.
그런데 이처럼 강력한 무기인 복합 활은 유목민들에 의해 처음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매우 높고, 또한 실제로 유목민들에 의해 오랫동안 애용되던 주 무기였다. 우선 활의 재료인 동물의 힘줄, 뼈, 뿔 등은 유목 사회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것들이었고, 또한 아교로 재료를 결합하고 건조시키는 데에 필수적인 한랭 건조한 날씨 역시 초원 지대의 전형적인 특징이었다. 또한 복합 활은 대단히 강력하면서도 그 크기는 작았기에, 말 위에서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었다. 물론 활이 작다는 것은 그만큼 작고 가벼운 화살을 사용한다는 것을 의미하기에, 그만큼 많은 화살을 화살통에 담아 나갈 수 있었다. 이처럼 유목민들은 말 위에 올라탄 채 작고 편리하면서도 강력한 복합 활을 사용하여 동물을 사냥하였고, 이러한 전술은 전쟁터에서 적 병사에게도 그대로 도입되었던 것이다.
(3)유목민의 생활·사고방식
하지만 이처럼 우수한 말과 활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결국 전쟁의 승패는 그것을 사용하는 이가 누구냐는 것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유목민은 농경민에 비해 훨씬 뛰어난 전사였다고 단언할 수 있다. 초원의 혹독한 기후와 잦은 굶주림에 단련되고, 한정된 목초지와 샘을 두고 끊임없이 분쟁이 발생하는 상황 속에서, 유목민들은 농경민들에 비해 훨씬 강인하고 소박하며 인내심이 있으면서도 또한 거칠고 야만적인 사람이 되어갔던 것이다. 유목민은 사방으로부터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시력과 청력이 크게 발달하였는데, 지금도 흔히 몽골인의 시력은 5.0이라고 말해질 정도이다20). 또한 지금도 몽골의 아이들은 3~4살이 되면 말을 타기 시작하고 4~5살이 되면 작은 활을 쏘기 시작하는데21), 말과 활을 능숙하게 다루는 데 최소한 몇 개월에서 보통 몇 년은 걸린다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이러한 ‘조기 교육’은 군사적으로 큰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유목민들은 자신들의 삶의 방식을 통하여 자연스레 매우 효율적인 전쟁 방식을 체득할 수 있었다. 유목민들의 기본적인 경제 활동은 바로 목축과 사냥이다. 이를 통하여 유목민들은 말이라는 우월한 기동력을 이용하여 가축이나 사냥감을 한 곳으로 몰아넣거나 멀리 흩어버리고, 방목지나 포위망 안으로 동물들을 유인하며, 무리 중의 우두머리를 고립시켜서 나머지 동물들을 고분고분하게 하고, 도살할 대상은 가급적 최소한의 고통을 가하여 빨리 죽여서 다른 동물들이 동요하지 않도록 하는 방법 등을 익힐 수 있었던 것이다22). 특히 칸에 의해 소집되어 모든 신하들이 빠짐없이 참석한 대규모 포위 사냥의 경우, 그 자체만으로도 전시 동원 체제를 점검하고 모의 전투를 행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23).
이처럼 유목민들은 목축과 사냥을 통해 전쟁과 살인을 미리 경험해 볼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농경민들에 대한 자신들의 편견을 통해 아예 전쟁과 사냥을 동일시해 버리기까지 하였다. 농경민들이 유목민들을 난폭하고 예의도 모르는 야만인으로 치부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유목민들 역시 농경민들을 토지에 얽매여 사는 자유가 없는 존재요 풀을 뜯어먹고 사는 가축과 같은 존재로 매도하였던 것이다24). 유목민들에게 있어서 농경민이란 자신들이 기르고 있는 가축이나 사냥감, 즉 도살하고 사냥해도 되는 존재였기에, 마치 사냥을 하듯 정주 국가의 군대를 이리저리 몰아가다가 마침내 포위하여 학살해 버리곤 했다. 이처럼 사람을 죽이는 것에 대하여 아무런 주저함도 없이 최대한의 폭력을 동원하는 유목민의 전쟁 방식은, 농경민을 충격과 공포에 빠뜨려 애초에 전쟁 수행 의지를 꺾어버렸던 것이다.
<그림 4> 그림으로 남아 있는 유목민 기마 궁수의 모습.
<그림 5> 몽골 기병의 복식을 오늘날 재현한 모습.
3.정복 왕조의 군대로서의 몽골 군대의 우수성
(1)부족주의의 해체와 중앙 집권 체제의 확립
끊임없는 이주를 전제로 하는 유목 사회는 지연에 기반을 둔 행정 조직이 아닌, 혈연에 기반을 둔 씨족·부족제로 구성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러한 유목 사회에서 정치·군사적으로 실권을 쥐고 있었던 것은 바로 씨족장과 부족장이었으며, 선우나 칸 등 고대 유목 국가의 군주들 역시 이들의 지지 하에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들 씨족장과 부족장 역시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유목 군주의 권위뿐만 아니라 집단 내부의 구성원들의 동의와 지지를 얻어야만 했다. 따라서 이들은 국가의 이익과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이 상호 충돌할 경우에는 이에 반대하여 반란을 일으키거나 혹은 집단을 이끌고 다른 곳으로 이주하는 경우가 많았고, 이것은 고대 유목 국가의 통일성과 안정성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주요 원인이 되어 왔다25).
하지만 1206년 테무진이 몽골 고원을 통일하고 두 번째로 칭기스칸에 즉위하면서, 몽골 사회의 부족주의는 급속히 약화되었다. 이미 오랜 전쟁으로 인하여 씨족 구성원들이 뿔뿔이 흩어진다거나, 씨족의 일부 혹은 전부가 다른 씨족에 흡수되는 등, 씨족의 혈연적 동질감이 많이 약화된 상태였다. 또한 칭기스칸은 이제까지 씨족장과 부족장의 지위를 인정하고 그들을 천호장과 만호장으로 임명해 주던 관행을 깨뜨리면서 자신의 일족들과 심복들을 그 자리에 다수 배치하였고, 전쟁 기간 중에 포로가 되었거나 유민으로 전락했던 여러 부족민들을 합쳐 새로운 천호로 재구성함으로써 혈연적 동질감을 고의적으로 약화시켰다26). 이와 함께 칭기스칸은 성문법인 ‘야삭(jasaq)’을 반포하고 자신의 성훈(聖訓)인 ‘빌릭(bilig)’으로 이를 보완하는 등, 혈연적 질서를 중앙의 법적 질서로 대체하는 일에도 적극적이었다27).
그 중에서도 칭기스칸의 중앙 권력 강화의 의지를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 바로 친위대(keshig)의 창설이었다. 친위대는 천·백·십호장의 자제들로 구성된 1만 명의 군대로서, 그 구성원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유력자들의 자식들을 인질로 잡아두어 견제하기 위한 성격이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칸을 모시는 정예 부대라는 이유로 이들에게 각종 지위와 특혜가 보장되었다는 점이다. 즉 친위대의 일반 병사는 다른 부대의 천호장보다 지위가 높았고, 지휘관이 이들을 처벌할 때에는 반드시 칭기스칸의 사전 승인을 얻어야 했으며, 많은 장군들이 친위대에서 선발되었다28). 이러한 특별대우를 통하여 칭기스칸은 자신에게 개인적으로 충성하는 강력한 무력 집단을 보유하고자 했던 것이다. 특히 이제까지의 정치·군사의 실권자인 천호장, 즉 씨족장보다 칸의 친위대의 일개 병사가 더욱 지위가 높았다는 점은, 칭기스칸 이후 몽골 사회의 부족주의가 약화되고 모든 권력이 군주 개인에게 집중되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실례라고 하겠다.
(2)국가 사업으로서의 정복 활동과 분봉 제도
이처럼 칭기스칸은 몽골 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있던 부족주의를 타파하고, 모든 권력을 칸과 그 일족들에게 집중시키는 데에 성공하였다. 그에 따라 모든 몽골 유목민들은 칸의 가문의 소유물로서 분배되었고, 예전의 실질적인 지배층이었던 씨족장과 부족장은 단지 그들을 관할할 권한만을 가질 뿐이었다. 특히 정주 지역의 정복지가 급속하게 늘어나면서 점차 칸의 일족들은 그 곳의 토지와 인민 역시 자신들의 소유와 분배의 대상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즉 이들에게 있어서 정복 활동이란, 칸의 가문의 재산을 증식시키기 위한 국가적인 공동 사업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유목 사회는 정복을 통해 얻은 이익은 모든 이들이 공유해야 한다는 의식이 매우 강한 사회였다. 따라서 이를 무시하고 칸의 가문이 모든 이익을 독점할 경우 자칫 더 큰 화를 불러올 수도 있었다. 따라서 몽골의 칸들은 즉위 후 반드시 쿠릴타이를 열어서 새로운 정복 사업을 결정하고 이를 실천에 옮김으로써 여러 신하들의 관심을 외부로 돌리는 한편, 이렇게 하여 정복한 정주 지역의 토지와 인민을 칸의 일족뿐만 아니라 인척, 부마, 귀족, 공신들에게까지 고루 나누어 주었던 것이다. 이처럼 정복 활동을 자신들의 재산 증식을 위한 공동의 사업으로 인식하였고, 이를 통해 얻은 정복지에 대해 분봉(分封)을 실시하였다는 것은, 몽골 제국이 초기에 정복지를 둘러싼 별다른 내분 없이 지속적으로 정복 사업을 추진할 수 있었던 중요한 요인으로 생각된다29).
(3)지정학적 위치와 주변국의 정세
물론 이처럼 유목 민족이 중앙 권력을 강화하고 대외 정복을 통하여 대제국을 수립한 것은, 몽골족의 경우가 처음도 아니었고 또한 마지막도 아니었다. 하지만 동서양을 아우르고 초원 지대와 정주 지역을 포함하는 세계 제국을 건설한 것은 몽골인들이 유일하였는데, 여기에는 몽골 고원의 지정학적 위치 역시 상당히 중요하게 작용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즉 거란족, 여진족, 만주족이 흥기하였던 만주와 요서 지역은 실크로드의 동쪽 끝자락이었고, 이들은 건국 초기부터 중국과의 상호 대립과 견제 속에서 성장해 나가야 했다. 이로 인해 이들의 지상 과제는 중국 대륙을 정복하는 것에 집중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반면 몽골 고원은 동·서·남쪽으로 개방되어 있었고, 실크로드의 초원길의 일부를 형성하였으며, 또한 그 아래의 사막길을 통하여 서역과 중국의 진귀한 물건들이 오고가는 것을 볼 수 있는 위치였다. 따라서 몽골인들은 일찌감치 동쪽의 중국뿐만 아니라 서쪽의 서역까지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게 되었고, 동쪽과 서쪽 모두에 대한 교역과 정복 활동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칭기스칸이 애초에 세계를 정복하고자 하였다거나, 혹은 초원을 벗어나 정주 지역을 정복하고자 하였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전형적인 유목 국가의 군주로서 도시를 다스리기보다는 불태우는 것을 선호하였고, 정주 지역을 지배하기보다는 약탈하거나 교역을 강요하는 것을 선호하였다. 하지만 주변국들의 상황은 그와 그의 후손들로 하여금 정복 왕조의 군주로서 거듭날 수밖에 없도록 하였다. 즉 칭기스칸의 침공을 받은 금, 카라키타이, 호레즘 제국 등은 내부 기반이 취약하여 순식간에 국가 자체가 무너져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로 인해 공납을 요구하거나 교역을 강요할 대상 자체가 없어지게 되자, 몽골인들은 어쩔 수 없이 그들 나름대로 정복지를 다스리고 물자를 수탈할 기구를 마련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이것이 그들로 하여금 정복 왕조로 거듭나는 계기가 되었다30).
이처럼 몽골인들의 지배 영역이 초원 지대에서 정주 지역으로까지 늘어나면서, 몽골 군주들의 정치 이념도 서서히 변화하게 되었으니, 바로 자신들을 사해(四海)를 지배하는 보편 군주이자 유일 군주로 인식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칭기스칸은 죽는 순간까지 유목 국가의 군주로서 생각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였으며, 군주의 정식 칭호로서도 결코 ‘칸’ 이상을 취하지 않았다. 칸은 유목 세계의 군주를 의미하며 복수형이 존재하는 단어이다. 하지만 그의 후손들은 ‘카간’, 즉 ‘칸 중의 칸’이라고 불리었는데, 이 말은 곧 유일무이한 지고의 지배자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복수형이 존재하지 않았다. 또한 이들이 로마 교황 및 유럽의 군주들에게 보낸 외교 문서의 표현을 참고해 보면, 이들은 자신들과 동등한 지위의 군주를 더 이상 인정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31). 이처럼 세계 제국의 보편 군주라는 인식이 자리잡고 있었기에, 몽골인들은 스스로 내분을 일으키기 전까지는 외부 세계에 대한 정복 활동을 꾸준히 이어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4.군사학적 관점에서의 몽골 군대의 우수성
(1)중앙으로부터의 지휘·통제와 정보 수집
몽골 군대는 대외 원정에 앞서 중앙의 사령부에서 일종의 작전 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는 원정에 참여하는 모든 고위급 지휘관들이 참석하여 상황을 토의하였고,
대강의 작전 계획을 세웠으며, 집결 시일과 장소, 공격로를 선택하였고, 부대 배치를 결정하였다.
물론 실전에서 예하 부대의 지휘관들은 폭넓은 재량권을 부여받아서
자신의 판단에 따라 작전 행동을 하거나 교전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지만,
미리 분명하게 정해진 주요 목표지점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또한 총사령관은 예하 지휘관들의 보고를 받아 상황을 분석한 뒤 지령을 내려
언제라도 지휘관들로 하여금 특별 행동을 취하게 할 수 있었고,
예하 지휘관들 역시 상호 연락을 통하여 신속하게 서로를 엄호하고 지원할 수 있었다32).
또한 몽골 군대는 정보의 중요성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행
군 중인 부대는 사방으로 100~200리 되는 지점까지 정찰대를 파견하여 적의 동태를 파악하고 기습에 대비하는 한편33),
대상(隊商), 포로, 지역 주민 등 가능한 모든 이들을 통해 진격로상의 지형, 도로, 교량, 성곽, 방목지의 유무, 적군의 동태 등 최대한의 정보를 캐내고자 하였다.
이렇게 하여 수집된 정보는 즉시 상급 부대의 지휘관에게 전달되어 작전 수립에 도움이 되도록 하였고,
이것은 다시 역참(驛站) 제도를 통해 최종적으로는 칭기스칸의 사령부에까지 도달하였던 것이다34).
(2)조직과 훈련을 통한 우수한 작전 수행 능력
몽골 군대는 십진법에 따라 적게는 십인대에서 많게는 만인대로 편성되어 있었다.
각 부대의 지휘관은 위계 서열이 엄격하게 정해져 있었고,
그에 따라 군의 지휘 계통 역시 확립되어 있었다.
또한 칭기스칸은 만·천·백부장에게 각각 금과 은으로 된 패찰(牌札)을 나누어 주는 일종의 계급장 제도를 도입하여,
지휘관 상호간의 위계질서를 더욱 명확하게 하였다.35)
그리고 그는 몽골인들로 하여금 평화시에도 신체를 단련하고 무기를 손질하게 하였으며,
대규모 포위 사냥에도 참석하게 하는 등 전쟁에 앞서 반복적인 훈련을 통해 전술을 숙달하도록 하였다36).
그에 따라 몽골 군대는 근대 이전의 군대로서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수준의 작전 수행 능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이 당시의 전쟁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결국 두 집단 간의 무질서한 난투극으로 귀결되는 경우가 많았고,
양측의 지휘관들 역시 앞장서서 적진에 뛰어들어 용감하게 싸우는 ‘전사’의 성격이 강하였다.
하지만 몽골 군대의 지휘관은 대개 전선을 내려다볼 수 있는 후방의 고지에 자리 잡고서 전황을 파악하였고,
낮에는 깃발, 밤에는 불빛, 전투시에는 북과 징으로 신호를 보내어 예하 부대를 지휘하였다37). 그리고 이러한 지휘에 따라 전진과 후퇴, 공격과 수비, 기습과 포위로 자유로이 전환할 수 있을 만큼 우수한 작전 수행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바로 몽골 군대였던 것이다.
(3)기동력의 극대화와 병참의 최소화
군대에 있어서 어떤 부대 전체의 행군 속도는 그 부대에서 가장 느린 이들의 속도에 맞추어지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보병을 주력으로 하는 정주 국가의 군대의 행군 속도를 좌우하는 것은 바로 보병 부대와 보급 부대였고,
따라서 이들이 적국의 영토를 행군할 경우 하루에 겨우 수 Km밖에 행군하지 못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하지만 몽골 군대는 전원이 기병으로 편성되어 있었고,
기병 한 명당 말을 적게는 4마리에서 많게는 7~8마리까지 끌고 다니면서 수시로 갈아탐으로써 말의 부담을 적게 하였기에38),
부대의 행군 속도는 정주 국가의 군대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통계 자료에 따르면 몽골 군대의 일일 평균 속도는 11~12Km, 일일 최대 속도는 무려 128~200Km에 달했는데,
이것은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전격전(電擊戰)으로 유명하였던 독일 전차 군단의 일일 평균 속도 6~8Km, 일일 최대 속도 32Km를 훨씬 웃도는 것이었다39).
이처럼 기동력에서 압도적인 우위에 있었기에 몽골 군대는 적군의 반격이나 추격을 쉽게 따돌릴 수 있었고,
오히려 그들을 기습하고 유인하여 포위한 뒤 달아나는 패잔병들을 추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몽골 군대의 강점 중 하나로서 손꼽히는 것이, 바로 병참의 필요성을 최소화하였다는 점이다.
흔히 병참, 즉 보급 문제는 군대의 꼬리에 비유되곤 한다. 아무리 군대가 적국의 영토 안으로 맹렬히 진격한다 하더라도, 병참선이 길어지면 마치 꼬리가 무거워진 것처럼 군대의 행군 속도를 둔화시키게 되고,
자칫 병참선이 공격받아 단절될 경우 아예 군대 자체가 와해될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몽골 기병들은 말린 고기, 곡물, 유제품 등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식량을 항상 말 위에 싣고 다녔고,
유목민답게 거친 음식을 먹거나 아예 굶는 것에 그다지 개의치 않았다.
특히 몽골 군대의 군용 식량으로서 애용되었던 것은 말린 쇠고기인 ‘보르츠’였는데,
소의 방광 안에 무려 소 한 마리분의 보르츠를 넣을 수 있었다40).
또한 몽골말 역시 길가의 마른 풀이나 나무의 잎사귀를 먹으면서 배고픔을 달랠 수 있었다.
이것은 반드시 말에게 건초 혹은 곡물을 먹여야만 했으며, 따라서 원정시 병사들이 먹을 식량뿐만 아니라 말이 먹을 마초(馬草)까지 준비해야 했던 정주 국가의 사정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몽골 군대에 필요한 것은 활과 화살 등의 필수적인 보급품을 실은 낙타 무리와 갈아탈 말들뿐이었고,
그 외의 것은 정복지의 물자를 약탈하여 보충할 수 있었다41).
이처럼 몽골 군대는 몽골 고원으로부터 수천 Km나 떨어져 있는 곳에서 작전에 임하면서도,
보급품이나 병참선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던 역사상 유일한 군대였다.
(4)피정복민의 군대·기술 흡수
몽골인들은 인종과 종교뿐만 아니라 군대에 있어서도 개방적이었다. 즉 몽골인들은 피정복민들의 군대를 자신들의 군대로 그대로 흡수하는 데에 아무런 거리낌도 가지지 않았던 것이다. 칭기스칸은 1212년 금을 공격할 때 요양(遼陽)에서 옛 요의 황족이 반란을 일으키자, 부하 장수인 제베로 하여금 이를 지원하게 하고 그 대가로 거란인 군대를 제공받았다42). 또한 호레즘 원정에 나선 칭기스칸을 대신하여 1217~1223년 동안 금을 공격하였던 무칼리의 경우에도, 그의 군대의 절반 이상은 정복한 지역에서 징집한 여진인과 한인 출신이었다43). 칭기스칸의 맏아들 주치는 호레즘 제국 원정을 마친 뒤 그 지역에 살고 있던 투르크인들을 정복하고 그들을 전력으로 흡수하였으며44), 쿠빌라이는 일본을 정복하기 위해 고려와 옛 남송의 수군을 동원하였다45).
또한 몽골인들은 피정복민들의 군대뿐만 아니라, 그들의 발달된 전쟁 기술 역시 열성적으로 받아들였다. 유목민들에게 있어서 자신들의 진격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은, 바로 농경민들이 쌓은 성곽과 요새였다. 따라서 몽골인들은 포로로 잡은 한인과 무슬림 기술자들로부터 세련된 포위 공격 기술을 받아들였고, 곧바로 이것을 실전에서 활용하였다.
바투의 러시아·유럽 원정 당시 몽골 군대는 중국의 화약 무기를 사용하여 러시아의 여러 공국들의 목책(木柵)과 요새를 불태워버렸다46). 또한 쿠빌라이의 남송 원정에서는 무슬림 기술자가 제작한 신식 투석기인 회회포(回回砲)를 사용하여, 몽골 군대의 포위 공격을 무려 6년 동안 버텨내고 있었던 양양(襄陽)과 번성(樊城)을 함락시킬 수 있었다47).
이처럼 몽골인들은 피정복민들의 군대와 전쟁 기술을 흡수함으로써, 인구와 병력 동원 능력에서의 약점을 보완하고 군대의 효율성을 더욱 높였던 것이다.
<그림 6> 14세기 초 페르시아의 세밀화에 그려진 몽골 군대의 포위 공격 장면과 회회포의 모습. 회회포의 근처에 터번을 쓴 무슬림 기술자가 보인다.
(5)심리전의 활용
칭기스칸과 몽골 군대 하면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것은, 바로 피에 굶주린 살인마이자 야만인의 이미지일 것이다. 실제로 몽골 군대는 자신들에게 항복하지 않고 저항하는 도시의 경우, 그 도시의 주민 전부를 학살하였을 뿐만 아니라 아예 성벽과 건물들까지 무너뜨려서 도시 자체를 지도상에서 말 그대로 지워버렸다. 이러한 끝이 보이지 않는 살인·약탈·방화 행위는 몽골 군대의 말발굽이 닿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든 볼 수 있었고, 이로 인해 어떨 때는 한 도시에서만 적게는 수십만 명에서 많게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몰살당했다고 당시의 역사가들은 기록하고 있다48).
하지만 비록 몽골 군대의 잔인무도함을 기정사실로서 인정한다 하더라도, 당시 정확한 통계 자료가 없는 상황에서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큰 이러한 피살자들의 수를 글자 그대로 믿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또한 이러한 잔혹 행위가 아무런 이유 없이 되는 대로 자행되었다고 보아서도 안 된다. 원래 유목민 군대뿐만 아니라 모든 군대에 있어서 가장 어렵고 힘든 전투가 바로 도시와 성곽에 대한 포위 공격이다. 공격측으로서도 엄청난 손실을 감수해야 하고, 점령하는 데에 대단히 오랜 시간이 걸릴 뿐만 아니라, 만약 도시를 점령하지 않고 지나쳐 갈 경우 자칫 후방이 위협받을 가능성도 있다. 특히 칭기스칸 시대의 몽골 군대는 변변한 포위 공격 기술을 보유하고 있지도 않았고, 또한 도시를 온전히 유지하여 다스리겠다는 개념도 부족하였다. 따라서 몽골 군대는 자신들에게 항복하지 않거나 반란을 일으킨 도시 몇 곳을 본보기로서 철저히 파괴함으로써, 나머지 도시의 주민들로 하여금 저항을 포기하게 하는 일종의 심리전의 효과를 노렸던 것이다49).
5.몽골 군대의 주요 전략·전술
(1)행군시의 전략·전술
몽골 군대는 ‘분군 행군, 총군 전투(march divided, fight united)’의 원칙을 완벽하게 지켰다50).
즉 전체 병력을 3~4개의 소부대로 나누어 상호 연락과 지원 하에 각기 다른 경로를 통하여 적국의 수도 혹은 병력 집결지로 진격하게 하였던 것이다.
이 경우 적군은 몽골 군대의 주력이 어느 부대인지, 그리고 공격 의도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게 된다.
만약 적군이 몽골 군대와 맞서 싸우기 위해 자신들도 병력을 분산시킨다면,
몽골 군대는 즉시 집결하여 분산된 적군을 하나하나 각개격파하였다.
반면 적군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들은 전쟁의 기선을 빼앗긴 채 사방에서 몰려드는 몽골 군대에게 포위당하게 되었다.
이처럼 적국의 영토 안을 행군하면서도 오히려 각개격파당할 위험 없이 병력의 분산과 집중을 마음대로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만큼 몽골 군대가 기동성, 정보력, 부대간 상호 연락·지원에서 압도적으로 앞서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2)교전시의 전략·전술
개활지에서 적군과 맞서게 되었을 경우, 몽골 군대는 전위와 좌·우익으로 중군을 감싸는 대형을 취하였다. 중군은 5열 횡대로 되어 있었고, 앞의 2열에는 중기병, 뒤의 3열에는 경기병이 배치되었으며, 전위와 좌·우익에도 각각 경기병이 배치되었다. 만약 적군이 정면 공격에 나서면, 중군 후방에 있던 경기병들은 공격을 받고 있는 전위 부대를 지원하러 나섰고, 나머지 좌·우익의 경기병들은 적군의 측면으로 파고들어 포위망을 형성하였다. 한편 사방에서 경기병들의 화살 공격을 받아 적군의 예봉이 무뎌지고 전열이 흐트러졌을 때, 중기병들이 정면 돌격을 감행하거나 혹은 적군의 배후로 돌아들어가 후방에서 결정적인 공격을 가하여 적군을 완전히 무너뜨려 버렸다51).
<그림 7> 몽골 군대의 전투 장면.
또한 몽골 군대는 유목민 군대의 특기였던 유인 전술을 최대한 활용하였다. 적군이 전장에서 보다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고 있다거나 혹은 수적으로 우세하였을 경우, 몽골 군대는 우선 경기병으로 구성된 소부대를 투입하여 적군을 유인하고자 하였다. 즉 이들은 적군에게 기습적인 선제 공격을 가한 뒤, 마치 겁먹은 것처럼 무질서하게 퇴각함으로써 적군의 추격을 유발하였던 것이다. 몽골 경기병의 퇴각과 적군의 추격은 때로는 며칠에 걸쳐 계속되는 경우도 있었다. 마침내 적군이 몽골 군대의 포위망 혹은 매복 지점으로 깊숙이 들어서게 되면, 사방에서 경기병들이 화살 공격을 퍼붓고 중기병들이 최후의 일격을 가하여 적군을 전멸시키는 것이었다. 때로는 일부러 포위망의 일부를 풀어주어 적군이 달아날 수 있도록 한 뒤, 그 곳을 통해 무질서하게 패주하는 적군을 추격하면서 마치 사냥감을 몰아나가듯 그들을 쓰러뜨리기도 하였다52). 이와 같은 몽골 군대의 교전 원칙은, 기습, 기만, 유인, 포위, 추격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3)포위 공격 전술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유목민 군대의 진격을 가로막는 가장 큰 걸림돌은, 바로 농경민들이 세운 도시와 성곽이었다. 특히 칭기스칸 시대의 몽골 군대의 경우 도시에 대한 포위 공격의 경험도, 기술도 부족하였기에, 이들이 겪은 어려움은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초기의 몽골 군대는 도시와 성곽을 정면 공격하기보다는, 여러 가지 계략을 통해 간접적으로 점령하는 방법을 취하였다. 즉 1209년에는 서하(西夏)의 수도인 영하(寧夏)를 점령하기 위해 황하의 물줄기를 돌려 수공(水攻)을 시도하였고53), 1213년에는 거짓 후퇴로 요양에 주둔한 적군을 도시 밖으로 유인한 뒤 섬멸하고 도시를 점령하였다54). 또한 몽골 군대는 항복하지 않은 도시를 무자비하게 파괴하고 주민들을 학살하여 본보기로 삼음으로써, 다른 도시의 주민들에게 항복을 강요하거나 혹은 도시를 버리고 달아나게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위협에도 불구하고 항복하지 않는 도시가 있을 경우, 먼저 몽골 군대는 도시 주위에 목책을 세워 도시와 외부와의 연락을 완전히 차단하였다. 그런 다음 도시 인근 지역의 주민들을 사로잡아 그들로 하여금 해자(垓字)를 메우고 성벽을 무너뜨리며 토루(土壘)를 쌓도록 강요함으로써, 도시 안의 수비군의 사기를 떨어뜨리면서 동시에 자신들의 전력 손실을 최소화하였다55). 그리하여 수비군이 동요하는 틈을 타 정면 공격을 감행하여 도시를 점령하였던 것이다. 물론 계속되는 정복 활동을 통해 포위 공격의 경험을 쌓고 한인과 무슬림 기술자들을 다수 군대에 흡수하게 되면서, 몽골 군대는 점차 포위 공격에 있어서 노포(弩砲), 투석기, 화약 무기를 동원하는 등 보다 세련된 모습을 갖추게 된다56).
6.몽골 군대의 주요 전역 분석
(1)제 2~3차 금 원정
1212년 1월, 칭기스칸은 제 2차 금 원정을 단행하였다. 몽골 군대는 무주(撫州)를 공격하여 점령하였고, 이 곳을 구원하기 위해 달려온 금의 30만 대군을 섬멸하였다. 당시 칭기스칸은 결사대를 편성하여 이를 선봉으로 삼아 적군의 중앙을 돌파하는 전술을 구사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가 끝난 뒤 칭기스칸은 항복한 금의 장수의 조언을 받아들여 원정을 계속하였고, 마침내 그 해 8월에는 금의 서경(西京)인 대동(大同)을 포위하였다. 이에 금은 대동을 구원하기 위해 다시금 구원병을 파견하였지만, 이번에도 몽골 군대는 금의 구원군을 밀곡구(密谷口)라는 좁은 골짜기 안으로 유인한 뒤, 그 곳에 매복해 있던 군대로 금의 군대를 기습적으로 포위하여 섬멸해 버렸다. 이 전투는 몽골 군대의 특기인 유인과 포위 전술의 효과를 자연 지형을 이용하여 더욱 높인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57).
<그림 8> 제 2차 금 원정 당시 밀곡구 전투.
한편 이듬해인 1213년에 금의 군사 요충지인 선덕(宣德)을 점령한 뒤, 칭기스칸은 제 3차 금 원정에 착수하였다. 이번 원정의 목표는 금의 수도인 중경(中京), 즉 연경(燕京)이었다. 하지만 칭기스칸은 높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대도시인 연경을 정면 공격하기보다는, 오히려 금의 영토를 초토화시킴으로써 심리적인 압박을 가하여 금의 항복을 받아내고자 하였다. 즉 칭기스칸은 몽골 군대를 세 부대로 나누어, 아들인 주치, 차가다이, 우구데이가 이끄는 우군(右軍)은 산서 지역을 휩쓸게 하였고, 동생인 카사르, 옷치긴이 이끄는 좌군(左軍)은 요서 지역을 점령하게 하였으며, 그 자신과 툴루이는 중군(中軍)을 이끌고 하북과 산동 지역을 유린하였다58). 그 해 가을부터 시작된 이러한 동시다발적인 약탈과 파괴 행위는 별다른 저항 없이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마침내 이듬해 3월 이들 세 부대가 다시 연경 교외에 집결하였을 때, 완전히 겁에 질려 버린 금의 황제는 화의를 애걸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59).
<그림 9> 제 3차 금 원정 당시 몽골의 좌·우·중군의 이동 경로.
(2)호레즘 제국 원정
몽골 군대의 여러 원정들 중에서도 가장 극적이고 또한 눈부신 것으로 손꼽히는 것이, 바로 이 호레즘 원정이다. 전쟁의 빌미를 제공한 것은 호레즘 제국이었다. 1218년 호레즘과의 우호적인 무역 관계를 맺기 위해 칭기스칸이 사절단 자격으로 파견한 대상(隊商)들이, 호레즘의 국경 도시 오트라르(Otrar)에서 잔인하게 학살당하고 재화를 강탈당한 사건이 발생하였던 것이다. 칭기스칸은 호레즘에 대해 책임자 처벌과 배상을 요구하였지만, 오히려 호레즘의 술탄 무함마드는 몽골 사신들을 죽이거나 모욕을 주고 쫓아내 버렸다. 이제 칭기스칸은 중국 전선에는 소수의 병력만을 남겨 둔 채 호레즘 정복에 나서게 되었고, 1219년 여름 몽골 군대의 주력은 이르티쉬(Irtish) 강 상류에 집결하였다60).
<그림 10> 호레즘 원정 당시 몽골 군대의 이동 경로.
당시 원정에 동원된 몽골 군대의 총 병력은 10~15만 명이었던 반면61), 호레즘 제국의 총 병력은 20~30만, 많게는 무려 40만 명에 달하였다62). 하지만 무함마드는 시르다리아(Syr Daria) 강을 방어선으로 삼고 강을 따라 늘어선 거점들에 병력을 분산 배치하는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여, 그의 군대의 수적 우세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였다. 한편 칭기스칸은 제베로 하여금 2만 명의 별동대를 이끌고 시르다리아 강 상류로 진출하여 호레즘의 수도 사마르칸드(Samarkand)와 부하라(Bokhara)를 위협하게 하였고, 자신은 주력 부대를 이끌고 1220년 2월 시르다리아 강 중류 지역에 도달하였다. 이 곳에서 그는 다시 부대를 셋으로 나누어, 주치가 이끄는 제 1군단과 차가다이, 우구데이가 이끄는 제 2군단은 강을 따라 남하하여 제베의 별동대와 합류하게 함으로써, 무함마드로 하여금 그 곳에 그의 모든 예비 병력을 투입하도록 하였다63).
하지만 정작 몽골 군대의 주공(主攻)이 가해질 곳은 그 곳이 아니었다. 칭기스칸과 툴루이가 이끄는 주력 부대는 시르다리아 강의 하류 지점에서 도하한 뒤, 키질 쿰(Kyzyl Kum) 사막을 가로질러 무려 500Km 이상을 남하하여 호레즘의 후방을 강타하였던 것이다64). 칭기스칸의 주력 부대는 그 해 4월 11일 부하라를 점령하였고, 나머지 부대와 합류하여 사마르칸드를 포위하였다. 겁에 질린 무함마드는 서쪽으로 달아났고, 이것으로 호레즘 제국의 조직적인 저항은 사실상 종식되었다. 한편 제베와 수베데이는 25,000명의 기병 군단을 동원하여 달아난 무함마드를 추격하였고, 무함마드가 병사하자 그대로 카스피 해 연안을 따라 북상하여 그루지야 기사단과 킵차크-러시아 연합군을 괴멸시키는 등, 후방의 지원 없이도 2년간 무려 수천 Km를 횡단하면서 승리를 거두는 대기록을 세웠다65).
(3)제 5차 금 원정
칭기스칸은 앞서 살펴 본 제 3차 금 원정에서 금과 화의를 맺고 막대한 양의 전쟁 배상금을 받아낸 뒤, 1214년 3월 몽골 고원으로 철군하였다. 하지만 동년 5월 금의 황제가 몽골의 위협을 피해 남경(南京)인 변경(汴京)으로 천도하자, 칭기스칸은 이를 중대한 배신 행위로 보고 즉시 군대를 일으켰다. 몽골 군대는 연경을 포위하여 마침내 점령하였고, 금이 포기한 황하 이북 지역을 사실상 손에 넣게 되었다66). 하지만 1217년 칭기스칸은 무칼리에게 소수의 병력만을 남겨둔 채 호레즘 제국 원정에 나서게 되고, 무칼리는 몽골인, 한인, 여진인으로 구성된 혼성군을 지휘하여 금의 도시를 하나하나 점령해 나갔다. 그 뒤 1223년 무칼리가 병사하고 호레즘 정복이 일단락되면서 칭기스칸은 다시 한 번 금에 대한 친정(親征)에 나서고자 하였지만, 그 역시 1227년 8월 서하를 정복하기 직전에 65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말았다.
이제 금의 최종적인 정복은 칭기스칸의 뒤를 이어 카간이 된 우구데이의 몫이 되었다. 당시 금은 동쪽으로는 황하, 서쪽으로는 동관(潼關)을 주 방어선으로 삼고 그 곳에 병력을 집중해 둔 상태였다. 병력면에서도 몽골 군대는 10만 명 정도를 원정에 투입할 수 있었던 반면, 금의 군대는 무려 30만 명에 달하였다67). 따라서 우구데이는 정면 공격에 나서기보다는 금의 방어선을 우회하여 서쪽에서부터 공격하고자 하였다. 즉 우구데이의 중군과 옷치긴의 좌군이 각각 산서 지역과 하북·산동 지역을 거치면서 남하하여 금을 압박하는 동안, 툴루이의 우군은 섬서와 사천 지역으로 크게 우회하여 금의 수도인 변경의 남쪽으로 돌아 들어간다는 것이었다68). 1230년 6월 툴루이는 남송에 사신을 보내 남송의 영토를 통과하여 금을 공격할 수 있도록 해 줄 것을 요청하여 승낙을 받았고(몽골측의 기록에 의하면 이것은 칭기스칸이 임종시 남긴 전략에 따른 것이었다고 한다69)), 그 해 12월 툴루이의 부대는 마침내 한수(漢水)를 도하하여 금의 영토로 진입하였다70).
<그림 11> 제 5차 금 원정 당시의 몽골의 좌·우·중군의 이동 경로. 툴루이의 우군의 우회 기동이 눈에 띈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몽골 군대가 출현하자 금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금은 즉시 황하 남쪽에 주둔하고 있던 15만 명의 주력 부대를 남쪽으로 파견하였다. 반면 이에 맞서는 툴루이의 부대의 병력은 고작 3만 명 정도에 불과하였다71). 하지만 금의 군대는 적극적인 공세에 나서지 않은 채 거의 1년간 툴루이와 대치하기만 하였고, 이 때를 틈타 1232년 1월 우구데이의 중군은 백파(白坡)에서 황하를 도하하여 변경으로 접근하기 시작하였다. 금은 주력 부대가 남쪽에 묶여 있어서 변경의 수비 병력이 채 4만 명을 넘지 못했기에, 툴루이와 대치하고 있던 주력 부대를 변경 방어를 위해 급히 불러들였다. 툴루이의 우군은 철수하는 금의 군대를 추격하여 후방을 괴롭혔고, 마침내 그 해 2월 이들을 삼봉산(三峰山)으로 몰아넣는 데에 성공하였다. 추위와 굶주림, 피로에 지친 금의 병사들은 툴루이의 우군과 우구데이의 중군에 의해 완전히 포위되었고, 결국 이 곳에서 금의 주력 부대는 완전히 괴멸되었다72).
<그림 12> 제 5차 금 원정 당시 삼봉산 전투.
(4)러시아·유럽 원정
1234년 마침내 금이 멸망하자, 이제 우구데이의 관심은 서방으로 옮겨졌고, 결국 러시아와 유럽으로 원정할 것이 결정되었다. 약 15만 명에 달하는 몽골 원정군은, 주치의 아들 바투가 총사령관, 역전의 노장 수베데이가 부사령관 겸 참모장을 맡았고, 그 외에도 구육, 카다안, 카이두, 뭉케, 바이다르 등 몽골 제국의 왕자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었다73). 1237년 가을 몽골 군대는 볼가(Volga) 강을 건넜고, 그 해 겨울부터 부대를 둘로 나누어 본격적인 군사 행동에 돌입하였다. 즉 바투와 수베데이가 지휘하는 부대는 북상하여 리아잔(Riazan), 모스크바, 수즈달(Suzdal), 블라디미르(Vladimir), 야로슬라프(Yaroslav), 트베르(Tver) 등 러시아의 거의 모든 공국들을 정복하고 몽골의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한편 뭉케가 지휘하는 부대는 흑해 연안의 러시아 남부 초원 지대를 정복하고 그 곳에 거주하던 투르크인들을 복속시켰다74). 몽골 군대는 잠시 휴식을 취한 뒤 1240년 말부터 우크라이나 지역을 침공하였고, 마침내 그 해 12월 6일 러시아 문명의 상징인 키예프(Kiev)가 함락되어 완전히 파괴되었다75).
<그림 13> 러시아·유럽 원정 당시 몽골 군대의 유럽 진공 경로.
이제 몽골 군대의 다음 목표는 유럽이었다. 후방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러시아에 3만 명의 병력을 잔류시킨 채, 몽골 군대는 폴란드로 달아난 키예프 대공을 추격하여 동유럽으로 밀고 들어왔다. 1241년 1월 몽골 군대는 헝가리의 북쪽 국경 지대인 카르파티아(Carpathia) 산맥 북쪽에 집결하였고, 이 곳에서 다시 네 부대로 나뉘어졌다. 그 중 세 부대는 각기 다른 경로를 통해 헝가리로 진격하여 페스트(Pest)에서 집결하기로 하였고, 나머지 한 부대는 별동대로서 폴란드와 독일로 진격하여 측면으로부터의 위협을 제거하고 유럽 군대의 집결을 방해하는 역할을 맡았다76). 이 3만 명의 별동대는 카이두와 바이다르가 지휘하였는데, 이들은 폴란드의 슐레지엔(Silesia) 대공 헨리가 지휘하는 3만 명의 폴란드·독일·튜턴 기사단과 맞서게 되었고, 그 해 4월 9일 리그니츠(Liegnitz) 전투에서 그들을 유인한 뒤 포위하여 완전히 전멸시켜 버렸다77).
한편 나머지 몽골 군대의 주력 부대들은 각각 북·동·남쪽에서 헝가리를 압박에 들어갔고, 마침내 그 해 4월 2~5일 사이에 대부분의 병력이 페스트 맞은편에 집결하였다78). 하지만 당시 집결한 몽골 군대의 병력은 7만 명 정도였던 것에 반해, 헝가리 국왕 벨라 4세가 이끄는 유럽 연합군은 그 수가 10만 명에 달하였다. 또한 벨라 4세는 도나우(Donau) 강에 의지하면서 페스트의 성문을 굳게 닫고 유럽 각국의 지원군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79). 따라서 몽골 군대는 거짓 공격을 가한 뒤 퇴각하여 헝가리 군대를 유인하였고, 무려 6일간 계속된 유인과 추격 끝에 몽골 군대와 헝가리 군대는 모히(Mohi)라는 곳에서 사요(Sajo) 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대치하게 되었다.
<그림 14> 러시아·유럽 원정 당시 사요 강 전투.
마침내 4월 11일 새벽, 바투의 부대는 사요 강의 돌다리를 기습적으로 공격하여 탈취한 뒤, 강을 건너 헝가리 군대의 북쪽 측면으로 파고들면서 그들과 교전하였다. 한편 이 때를 틈타 수베데이의 부대 역시 다른 곳에서 강을 건너 헝가리 군대의 남쪽을 에워싸는 포위망을 형성하였다. 순식간에 숙영지 안에 갇혀버린 헝가리 군대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고, 몇 차례 결사적인 돌격을 시도해 보았지만 모두 격퇴되어 버렸으며, 몽골 군대의 불화살과 투석기 공격을 받자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이 때 몽골 군대가 일부러 포위망의 서쪽 일부를 풀어주자 헝가리 군대는 페스트를 향하여 무질서하게 도주하기 시작하였고, 몽골 군대는 왔던 길 그대로 6일간 추격을 계속하여 무려 7만여 명의 헝가리 병사들을 쓰러뜨렸던 것이다80).
(5)남송 원정
북방의 몽골과 남방의 남송이 중원의 지배권을 놓고 군사적으로 충돌하게 된 것은, 금이 멸망할 무렵인 1233년경의 일이었다. 당시 남송 정부는 양자강 이북의 중원을 탈환하기 위해 금의 지원 요청을 무시한 채, 오히려 몽골에 지원 병력을 제공하였던 것이다. 이에 대한 대가로 몽골은 하남 지역의 일부를 남송에 양보하였지만, 남송은 이에 불만을 품고 중원 전체를 회복하고자 하였다. 결국 1234년 금이 멸망하고 몽골 군대가 북방으로 돌아간 틈을 노려 남송은 6만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중원 회복을 시도하였고, 그 해 7~8월에는 변경과 낙양(洛陽)을 점령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하지만 몽골 군대는 즉각 반격에 나서 이들을 몰아내 버렸고, 이듬해인 1235년에 우구데이는 쿠릴타이를 소집하여 남송 정복을 결의하였다81). 그리하여 1236년부터 남송 정복이 개시되어 우구데이가 사망하는 1241년까지 양자강 유역을 중심으로 치열한 공방전이 치러졌고82), 이후 뭉케에 의해 1253년부터 남송 정복이 재개되어 북·서·남쪽의 삼면에서 남송을 압박해 들어갔다. 하지만 남송의 항복을 받아내지는 못하였고, 오히려 친정에 나섰던 뭉케가 1241년에 병사하면서 원정은 다시금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83).
이처럼 남송 원정에 나선 몽골 군대의 전황이 지지부진하였던 데에는 몇 가지 원인이 있었다. 먼저 금과 남송간의 오랜 전쟁으로 인해 황하와 양자강 사이의 중원 지역이 완전히 황폐화되었기에, 이 지역을 통한 군대의 이동과 보급이 매우 곤란한 상태였다. 또한 강남 지역의 고온다습한 기후와 수많은 하천, 습지, 성곽 등이 몽골 기병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남송은 금과 대치하던 한 세기 동안에 걸쳐 회수(淮水), 양자강, 한수의 삼대(三大) 강을 방어선으로 삼고 강을 따라 수많은 성곽과 요새를 쌓아 두었으며, 또한 이 지역에 총 병력 40만 명의 정규군의 대부분을 배치해 두었던 것이다. 하지만 남송 군대는 기동성과 유연성이 부족하였고, 예상치 못한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전략 예비군이 사실상 전무하였다. 따라서 마치 철통같아 보이는 남송의 방어선 중 일부만이라도 돌파하여 후방으로 진격할 수 있다면 나머지 남송 군대는 그대로 무너져 버릴 것이었고, 쿠빌라이는 바로 이 점을 노리고 있었다84).
마침내 1268년 9월, 쿠빌라이는 남송 정복을 재개하고 원정군을 파견하였다. 총 병력이 약 7만 명이었던 몽골 원정군은 총사령관 아주가 이끄는 몽골 기병 부대와, 원에 투항한 군벌의 우두머리인 사천택(史天澤)이 이끄는 한인 보병 부대로 편성되어 있었다. 이들이 남송 방어선의 돌파구로 삼은 것은 한수 중류의 요충지에 위치한 쌍둥이 도시인 양양(襄陽)과 번성(樊城)이었다. 그리하여 그 해 10월에 몽골 군대는 양양과 번성을 포위하였고, 흙으로 된 이중 요새를 쌓아 두 도시를 둘러싸서 외부로부터 완전히 고립시켜 버렸다. 당시 병력이 약 1~2만 명이었던 양양 수비대의 지휘관인 여문환(呂文煥)은 몇 차례나 몽골의 포위망을 뚫고자 시도하였지만 성공하지 못하였고, 외부에서는 양양으로 통하는 수상 보급로를 둘러싼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다. 그리하여 1271년 4월 남송은 범문호(范文虎)가 이끄는 10만 명의 수륙 연합군을 파견하여 양양을 구원하고자 하였지만, 장강과 한수를 거슬러 오르며 진격했던 남송 군대는 그 해 6월 몽골 군대와의 전투에서 참패하여 궤멸되고 말았다85).
<그림 15> 남송 원정 당시 양양·번성 포위 전투.
이처럼 외부로부터의 구원은 더 이상 기대할 수 없게 되었지만, 여문환이 이끄는 양양 수비대는 항복하지 않고 그로부터 2년간이나 더 몽골 군대의 공격을 꿋꿋이 견뎌내었다. 그리하여 1272년 쿠빌라이는 동생 훌레구의 일 칸국으로부터 무슬림 기술자 두 명을 전선으로 초빙하였고, 이들이 제작한 이슬람 투석기인 회회포가 1273년 1월부터 포격을 개시하였다. 결국 그 해 2월에 번성이 먼저 함락되었고, 여문환 역시 포격을 견디지 못한 채 그 해 3월에 항복하고 성문을 열어 주었다86).
<그림 16> 남송 원정 당시 양양·번성 함락 이후의 몽골 군대의 진공 경로.
마침내 남송의 방어선에 구멍을 뚫는 데에 성공한 쿠빌라이는 양양을 보급 기지로 삼은 뒤, 이듬해인 1274년부터 28만 명이라는 대군을 동원한 총 공세에 나서게 되었다87). 한수와 양자강을 따라 동쪽으로 진격해 들어오는 몽골 군대에 남송은 제대로 저항도 해 보지 못하였고, 남송의 재상 가사도(賈似道)가 이끄는 군함 2,500척의 남송 수군 역시 1275년 3월의 무호(蕪湖) 전투에서 전멸당해 버리고 말았다88). 그리하여 마침내 1276년 1월에 몽골 군대는 남송의 수도인 임안(臨安)에 무혈 입성할 수 있었고, 이것으로 사실상 남송은 멸망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치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았던 몽골 제국의 정복과 팽창의 역사 또한, 남송 정복을 통하여 마침내 그 대미를 장식하였던 것이다.
Ⅲ.맺음말
몽골인들. 인류 역사상 그 어느 누구도 이들만큼 짧은 시간 안에 광대한 세계 제국을 건설한 민족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몽골인들의 세계 정복의 역사로부터 어느새 700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버렸고, 유럽과 아시아, 중동을 아우르던 몽골 제국의 흔적은 이제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되었으며, 그들의 후손들은 지금 유라시아 대륙 한복판의 나라에 고립된 채 조용히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그로 인해 일반인들은 몽골인들이 세계를 정복할 수 있었던 원동력을 이성적으로 분석하고 평가하기보다는, 그저 감성적으로 섣불리 판단을 내려버리기 일쑤이다. 즉 어떤 이들은 칭기스칸이라는 한 개인의 영웅 서사시적인 활약상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기도 하며, 다른 이들은 아예 몽골인들이 다른 유목 민족에 비해 더욱 야만적이고 무자비하였기에 세계를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애써 폄하하기도 한다.
하지만 순수하게 군사학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몽골인들은 틀림없이 세계를 정복할만한 힘과 능력을 갖춘 민족이었다. 우선 몽골인은 유목민답게 타고난 전사이자 탁월한 기마 궁수였다. 또한 칭기스칸은 이러한 전사들을 기강이 잘 잡힌 군대로 조직하였고, 부족주의를 타파하여 쓸데없는 내분의 가능성을 없앴으며, 정복에 참여하는 이들에 대한 보상을 확실히 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탄생한 몽골 군대는, 지휘 계통이 명확하고 위계질서가 잡혀 있었으며, 기동성, 정보력, 작전 수행 능력이 우수하였고, 병참에의 의존도가 매우 낮았으며, 피정복민의 군대와 기술까지도 흡수할 수 있었던 말 그대로 세계 최강의 군대로서, 오늘날의 군대에서도 본받을 만한 점이 많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엄연한 사실을 무시한 채 몽골인들의 세계 정복을 그저 우연 혹은 야만성의 발로 정도로 매도해 버린다면, 그것이야말로 ‘문명’이라는 색안경으로 인해 역사를 객관적으로 판단하지 못하는 꼴이 될 것이다. 세계를 정복했던 몽골 군대의 위상. 그것은 신화나 야만의 영역이 아닌, 엄연한 역사의 영역 속에서 앞으로도 영원히 살아 숨 쉴 것이다.
<미주>
1) 김호동, 몽고제국의 형성과 전개, 서울대학교동양사학연구실 編, 강좌중국사 3(서울: 지식산업사, 1989), 256~257쪽.
2) 彭世乾, 몽골군의 전략·전술, 김순규 編譯(서울: 국방군사연구소, 1997), 7쪽.
3) 박원길, 몽골의 문화와 자연지리(서울: 민속원, 1999), 11쪽.
4) 같은 책, 6쪽.
5) 같은 책, 9쪽.
6) 베빈 알렉산더, 위대한 장군들은 어떻게 승리하였는가, 김형배 譯(서울: 홍익출판사, 2000), 112쪽.
7) 버나드 로 몽고메리, 전쟁의 역사 2, 승영조 譯(서울: 책세상, 1996), 581쪽.
8) 彭世乾. 같은 책, 11~13쪽.
9) 존 키건, 세계전쟁사, 유병진 譯(서울: 도서출판 까치), 1998, 227쪽.
10) 같은 책, 229~230쪽.
11) 박원길, 같은 책, 50쪽.
12) 하자노프, 유목사회의 구조: 역사인류학적 접근, 김호동 譯(서울: 지식산업사, 1990), 85쪽.
13) 박원길. 같은 책, 57쪽.
14) 존 키건, 같은 책, 179쪽.
15) Frederick Wilkinson, Arms & Armour (London: Chancellor Press, 1996), 13쪽.
16) 김후, 활이 바꾼 세계사(서울: 가람기획, 2002), 12쪽.
17) 존 키건, 같은 책, 235~236쪽.
18) 스기야마 마사아키, 몽골 세계제국, 임대희·김장구·양영우 譯(서울: 신서원, 1999), 377~378쪽.
19) Edwin Tunis, Weapons: A Pictorial History (Baltimore: Th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1999), 20쪽.
20) 박원길, 같은 책, 176쪽.
21) 같은 책, 144쪽.
22) 존 키건, 같은 책, 233~234쪽.
23) 박원길, 같은 책, 98~100쪽.
24) 김호동, 몽고제국의 형성과 전개, 262~263쪽.
25) 김호동, 고대유목국가의 구조, 서울대학교동양사학연구실 編, 강좌중국사 2(서울: 지식산업사, 1989), 268~270쪽.
26) 김호동, 몽고제국의 형성과 전개, 256~257쪽.
27) 르네 그루쎄, 유라시아 유목제국사, 김호동·유원수·정재훈 譯(서울: 사계절출판사, 1998), 326쪽.
28) 김호동, 몽고제국의 형성과 전개, 257~258쪽.
29) 같은 책, 282~283쪽.
30) 같은 책, 283~288쪽.
31) 같은 책, 268~269쪽.
32) 버나드 로 몽고메리, 같은 책, 584~585쪽.
33) 彭世乾, 같은 책, 39쪽.
34) 같은 책, 26~27쪽.
35) 같은 책, 31~32쪽.
36) 버나드 로 몽고메리, 같은 책, 583쪽.
37) 같은 책, 585쪽.
38) 彭世乾, 같은 책, 19쪽.
39) 같은 책, 20쪽.
40) 박원길, 같은 책, 115~116쪽.
41) 彭世乾, 같은 책, 29쪽.
42) 김후, 같은 책, 175쪽.
43) 르네 그루쎄, 같은 책, 340쪽.
44) 김후. 같은 책, 181쪽.
45) 르네 그루쎄, 같은 책, 383쪽.
46) 彭世乾, 같은 책, 99쪽.
47) 스기야마 마사아키. 같은 책, 253~254쪽.
48) 김호동, 몽고제국의 형성과 전개, 262쪽.
49) 같은 책, 263쪽.
50) 버나드 로 몽고메리, 같은 책, 585쪽.
51) 베빈 알렉산더, 같은 책, 112~113쪽.
52) 같은 책, 113쪽.
53) 르네 그루쎄, 같은 책, 333쪽.
54) 김종래, 유목민 이야기: 바람에 새겨진 역사(서울: 자우출판, 2002), 258~260쪽.
55) 彭世乾, 같은 책, 46쪽.
56) 같은 책, 14~16쪽.
57) 彭世乾, 같은 책, 50~51쪽.
58) 르네 그루쎄, 같은 책, 337쪽.
59) 彭世乾, 같은 책, 62~64쪽.
60) 르네 그루쎄, 같은 책, 348쪽.
61) 같은 책, 348쪽.
62) 彭世乾, 같은 책, 86쪽.
63) 버나드 로 몽고메리, 같은 책, 588~591쪽.
64) 베빈 알렉산더, 같은 책, 114~116쪽.
65) 르네 그루쎄, 같은 책, 356~360쪽.
66) 같은 책, 338쪽.
67) 스기야마 마사아키. 같은 책, 57쪽.
68) 같은 책, 56~57쪽.
69) 彭世乾, 같은 책, 71~72쪽.
70) 같은 책, 71~75쪽.
71) 같은 책, 74~75쪽.
72) 같은 책, 77~79쪽.
73) 르네 그루쎄, 같은 책, 382~383쪽.
74) 彭世乾, 같은 책, 97쪽.
75) 르네 그루쎄, 같은 책, 384쪽.
76) 베빈 알렉산더, 같은 책, 121쪽.
77) 彭世乾, 같은 책, 102쪽.
78) 르네 그루쎄, 같은 책, 386쪽.
79) 베빈 알렉산더, 같은 책, 128쪽.
80) 彭世乾, 같은 책, 104~107쪽.
81) 르네 그루쎄, 같은 책, 375쪽.
82) 같은 책, 376쪽.
83) 같은 책, 408~411쪽.
84) 太丸伸章 編, 歷史群像 グラフィッス 戰史 シリーズ 7: 中國 近世·近代編(東京: 學習硏究士, 1999), 114쪽.
85) 같은 책, 114~115쪽.
86) 스기야마 마사아키, 같은 책, 253~255쪽.
87) 太丸伸章 編, 같은 책, 115쪽.
88) 스기야마 마사아키, 같은 책, 260~261쪽.
<그림 출처>
◎ <그림 1> The Silver Horde.<. target=_blank>http://www.viahistoria.com:8005/SilverHorde/main.html>.
◎ <그림 2> 같은 곳.
◎ <그림 3> Virtual Mongol. <. target=_blank>http://www.kiku.com/electric_samurai/virtual_mongol>.
◎ <그림 4> 김종래, 유목민 이야기: 바람에 새겨진 역사(서울: 자우출판, 2002), 243쪽.
◎ <그림 5> The Dark Horde. <. target=_blank>http://members.tripod.com/~whitebard/ca6.htm>.
◎ <그림 6> 김종래, 같은 책, 258쪽.
◎ <그림 7> 같은 책, 256쪽.
◎ <그림 8> 彭世乾, 몽골군의 전략·전술, 김순규 編譯(서울: 국방군사연구소, 1997), 51쪽.
◎ <그림 9> 같은 책, 62쪽.
◎ <그림 10> 같은 책, 87쪽.
◎ <그림 11> 스기야마 마사아키, 몽골 세계제국, 임대희·김장구·양영우 譯(서울: 신서원, 1999), 59쪽.
◎ <그림 12> 같은 책, 78쪽.
◎ <그림 13> 베빈 알렉산더, 위대한 장군들은 어떻게 승리하였는가, 김형배 譯(서울: 홍익출판사, 2000), 122쪽.
◎ <그림 14> 彭世乾, 같은 책, 105쪽.
◎ <그림 15> 스기야마 마사아키, 같은 책, 250쪽.
◎ <그림 16> 같은 책, 258쪽.
<참고 문헌>
◎ 개정판 세계전쟁사. 육군사관학교 전사학과 編. 서울: 도서출판 황금알, 2004.
◎ 김종래. 유목민 이야기: 바람에 새겨진 역사. 서울: 자우출판, 2002.
◎ 김호동. 고대유목국가의 구조. 서울대학교동양사학연구실 編. 강좌중국사 2. 서울: 지식산업사, 1989.
◎ 김호동. 몽고제국의 형성과 전개. 서울대학교동양사학연구실 編. 강좌중국사 3. 서울: 지식산업사, 1989.
◎ 김후. 활이 바꾼 세계사. 서울: 가람기획, 2002.
◎ 박원길. 몽골의 문화와 자연지리. 서울: 민속원, 1999.
◎ 르네 그루쎄. 유라시아 유목제국사. 김호동·유원수·정재훈 譯. 서울: 사계절출판사, 1998.
◎ 룩 콴텐. 유목민족제국사. 송기중 譯. 서울: 민음사, 1984.
◎ 버나드 로 몽고메리. 전쟁의 역사 2. 승영조 譯. 서울: 책세상, 1996.
◎ 베빈 알렉산더. 위대한 장군들은 어떻게 승리하였는가. 김형배 譯. 서울: 홍익출판사, 2000.
◎ 스기야마 마사아키. 몽골 세계제국. 임대희·김장구·양영우 譯. 서울: 신서원, 1999.
◎ 존 키건. 세계전쟁사. 유병진 譯. 서울: 도서출판 까치, 1998.
◎ 彭世乾. 몽골군의 전략·전술. 김순규 編譯. 서울: 국방군사연구소, 1997.
◎ 하자노프. 유목사회의 구조: 역사인류학적 접근. 김호동 譯. 서울: 지식산업사, 1990.
◎ Wilkinson, Frederick. Arms & Armour. London: Chancellor Press, 1996.
◎ Tunis, Edwin. Weapons: A Pictorial History. Baltimore: Th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1999.
◎ 太丸伸章 編. 歷史群像 グラフィッス 戰史 シリーズ 7: 中國 近世·近代編. 東京: 學習硏究士, 1999.
[타인글이나 자료 인용] 르네 그루쎄, 유라시아 유목제국사, 김호동·유원수·정재훈 譯(서울: 사계절출판사, 1998), 3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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