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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칠의 일머리: 독일과의 정보전: 1차대전후 독일 암호해독 이야기함, 2차대전후 1974년까지 비밀로 함

modest-i 2015. 3. 16. 19:56

일머리가 중요하다는 것을 느끼기에 사례를 검토해보았다

 

처칠은 1차대전 때 독일 해군을 격파했는데

전쟁이 끝나고 독일의 암호를 해독했다고 이야기 했다

 

이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느낀 처칠은

2차대전 때는 철저히 암호해독을 비밀로 하며

이를 최대한으로 활용해서 승리로 이끈다.

 

 

그가 만약 장교 출신이 아니었다면

정보의 중요성을 크게 느꼈을까?

 

전쟁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처칠이 수상이 되었던 것은 영국으로서는 복이다

 

 

일머리는 일은 알아야 한다

일을 알지 못하고는 일머리가 나오지 않는다

 

처칠은 어학에는 둔했지만 역사 공부를 즐겼다

 

역사와 육군사관하교에서 공부가 시대를 만나 위인이 나왔다

 

 

아래 글들은 인터넷 검색을 통하여 뫃은 것의 일부를 실었다

 

 

                               2015.3.17    모디스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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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트라 작전

 

에니그마가 해독되면서

주인공들은 딜레마에 빠지게 됩니다.

독일의 통신에 대응하면 독일은 통신체계를 바꿔 버릴것이고

그리하여 영국정부는 처칠의 주도하에

'더블크로스작전'을 시행합니다.

이는 독일의 통신을 해독하여 얻은 정보를 토대로

영국에 침입하는 스파이를 역포섭하여 거짓정보를 흘리는 작전이었습니다.

이 두가지 작전으로 인해 나치독일은 패망하게 됩니다.

에니그마에 관련된 기술자들은 종전후까지도

에니그마가 해독된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고 할정도로

작전은 치밀하게 수행되었다합니다.

 

 

 

 


 

울트라 작전은 이후 눈부신 성과를 올렸다.

영국으로 폭격기와 전투기 부대를 출격시키라는 독일군의 명령을 읽은 영국은

 숫적으로 열세인 자국 전투기를 주요 지역에 집중 배치해 효과를 극대화하는가 하면,

 

독일이 U보트 부대를 집결하고 선단에 대한 공격을 조율하는 에니그마 메시지를 해독하기도 했으며,

 

또한 보급선과 탱크 부족을 호소하는 독일 육군 원수 에르빈 롬멜의 불평을 해독한 영국군은

엘알라메인 전투에서 롬멜의 허를 찔러 공격을 개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울트라가 만병통치약은 아니었다.

이를테면 벌지 전투로 알려진 1944년의 독일군의 공격은 연합군의 허를 찌른 공격이었는데,

당시 독일의 공격 명령은 지상통신 수단을 통해서만 전달되어 연합군이 눈치채지 못했다.

 

 

울트라 작전은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독일군 고위 장교들 간의 교신 내용은 독일의 적국에게 낱낱이 노출되었다.

독일의 다른 모든 정보 관련 통신 역시 마찬가지여서,

연합군은 히틀러의 정보조직 내부를 빤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울트라의 역할은 여기에 그치지 않아

연합군의 기만작전과

이중간첩작전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진행되는지도 점검할 수 있었다.

 

독일 정보기관은 스파이 작전에 대한 평가와 대응책 역시 에니그마를 통해 교신했다.

 

울트라의 놀라운 성공을 보면 독일이 어떻게 그렇게 오랫동안 속아넘어갈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영국이 그리고 나중에는 미국까지도 삼엄한 보안체계를 유지했다. 중요한 암호를 해독했을 때는 독일군에게 에니그마가 도청되었다는 느낌을 주지 않도록 모든 행동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특히 예상되는 독일군의 움직임에 대응해 군사행동을 감행할 때는 더욱 그러했다. 울트라 소속 특별 밀사로 구성된 SLU(Special Liaison Unit)라고 알려진 특수연락부대는 암호해독 결과를 꼭 필요한 주요 사령관에게만 직접 전달했다. 울트라와 관련된 1만 명이 넘는 사람들은 자신이 하는 일의 중요성을 잘 알았고, 행여 귓속말이라도 한번 잘못했다가는 전쟁을 승리로 이끌 무기를 무용지물로 만들 수도 있다는 생각에 비밀을 철저히 지켰다.(이들은 1974년 영국이 마침내 울트라의 존재를 공식 인정할 때까지 침묵을 지켰다.)

 

 

두 번째 이유는 에니그마와 에니그마의 보안을 책임진 독일국방군 사령부의 코드해독부서(OKW/chi) 사람들이 이처럼 우수한 기계가 도청되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기 때문이다. 에니그마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아는 애초의 개발자들도 기계가 점점 개량되면서 에니그마의 안전성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불가능도 현실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그리고 자신보다 더 똑똑한 사람이 나타나 자신이 발명한 기계를 공격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이들 머릿속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에니그마를 수호하는 사람들은 세상에 절대적으로 안전한 암호체계는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야 했다. 그러나 독일이 항복하는 날까지 OKW/chi 소속 전문가들은 에니그마만큼은 안전하다고 굳게 믿었다. U보트를 통솔하던 카를 되니츠(Karl Dönitz) 제독은 걱정스레 물었다. 1943년 불과 한 달 만에 43척의 잠수함을 잃었는데 이는 자신이 잠수함 함대에게 보낸 에니그마 전송 내용을 적이 탐지했기 때문이 아니겠느냐고. 하지만 OKW/chi는 이 같은 질문을 받을 때마다 상대를 안심시키면서 U보트 통신만을 위해 특별히 6개의 회전판을 장착한 특수 에니그마를 별도로 제작했고, 이 특수 에니그마가 만들어내는 키 조합의 가짓수는 무려 10의 21제곱 개이며, 이처럼 복잡한 기계는 기존에 알려진 그 어떤 방법으로도 해독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에니그마 (엔하위키 미러 발췌)

 

1 그리스어


'수수께끼' 또는 '어둡게 말하기'를 의미하는 그리스어이다.
원래 그리스어 발음은 '아이니그마'였으나, 라틴어 역어인 '애니그마'라는 단어를 차용해서 쓰였기 때문에 지금은 그 비슷한 단어인 '에니그마'를 쓴다.


아래의 항목들은 바로 그 단어를 빌려쓴 것이다.

 

2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쓰인 독일의 암호기기

 

 

 

 

 

 

제1차 세계대전이 종전된 후에도 독일군은 자신들의 암호체계가 뚫렸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러다가 전쟁 종결 후 한참이 지난 후에 쓴 처칠의 1차대전 회고록을 읽고서야 암호가 깨진 것을 알아챘다. 당연히 독일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엄청난 충격이었다. 적에게 놀아난 것을 한참 후에나 알아챘으니…


에니그마는 이런 사태가 일어난 것에 대한 반성으로서 등장했다. 처음에는 상업용으로 발매되었고 첫 등장도 1923년이라 상당히 이른 축에 속한다. 덕분에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에도 에니그마 암호기 자체는 특허에 의해 보호되었다. 당시로서는 강력했던 기계식 암호화기법을 사용했으며, 여기에 독일군이 추가로 복잡한 장치를 추가시킨 바람에 기존의 암호해독 기술을 완전히 무력화시켰고 상당 기간 동안 난공불락의 암호체계였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직전에 폴란드 정보부에 의해 해독의 기초가 마련 되어 폴란드 침공 후 그 자료가 영국에 전해져, 앨런 튜링과 영국 블리츨리 파크에 모여있던 암호해독팀[1]의 손에 해독되었다. 여기서 컴퓨터의 조상뻘 되는 전자계산기인 콜로서스를 사용하여 해독했다는 루머가 웹에서 돌고 있으나, 실제로는 콜로서스에 의한 암호체계 무력화는 독일군의 최고사령부 레벨 보안통신기인 로렌츠 체계가 대상이었다. 로렌츠 체계의 구조는 기본적으로 에니그마와 같지만, 에니그마의 경우 바퀴의 갯수가 3개에 반사바퀴 하나였지만, 이놈의 경우 바퀴의 갯수가 12개이고, 각각 바퀴의 캠수도 달라 암호화 강도가 훨씬 높았다. 다만 로렌츠 체계 역시 에니그마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니, 콜로서스가 에니그마 파해에 도움이 되었다고 해도 딱히 반박할 만한 사실은 아니다.

 

 

다만 전쟁 중인 1942년에 독일군이 암호체계를 강화할 목적으로, 에니그마가 중간에 개량되자 한동안 연합군의 암호 해독률이 크게 떨어졌고, 이를 기회로 독일군 잠수함대는 그 어느때보다 풍성한 실적을 올렸다. 물론 독일군의 암호체계 강화는 에니그마가 해독된다는 것을 알고 한 것이 아니라 암호 해독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연합국이 정보를 수집하는 것 같으니 예방차원에서 한 일이며, 정작 에니그마가 뚫렸다는 사실은 종전때까지 독일 정보부에서 전혀 눈치채지 못 한 것도 독일 패망의 원인 가운데 하나다.


그리고 에니그마의 사용처는 독일만이 아니라 이탈리아군이 기존에 판매된 상대적으로 간단한 상업용 암호기를 사용하였고 일본군도 소수를 도입하여 독일과의 연락용으로 사용했다.


영화 U-571에서 이 물건을 탈취하려고 온갖 개고생을 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영화 상에서는 독일군 암호 해독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처럼 묘사됐지만 실제로는 에니그마의 기계 자체는 해석이 끝났고, 회전자의 세팅이나 암호부호책이 필요했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위의 것을 구하려고 해도 유보트를 털어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므로 헛고생을 한 것은 아니다. 1944년 미국은 U보트를 털면서 배를 고쳐 미국까지 끌고오는데 성공하게 된다.

 

 

 

 

 

 

 

에니그마 자체는 1945년 독일 패전과 함께 사용이 중지됐지만, 그 변형은 1970년대까지 주로 상업적 보안통신용으로 사용되었다. 에니그마의 시조가 상업목적-기업 대외비-용으로 개발된 걸 생각한다면 복직이라고 해야 하나…에니그마를 원형으로 한 군용 보안통신기 역시 1960년대까지 사용되었다. 해독법이 뻔해진 상태임에도 사실 그 해독작업 자체가 여전히 수월찮은 것은 사실이었고, 암호기의 핵심인 회전자 개수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해독작업은 더욱 어려워지고 비용 또한 폭발적으로 증가했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에니그마에 대한 암호해독 자체가 전후에도 오랫동안 기밀로 분류되었다. 일반에 그 존재가 제대로 밝혀진 것은 미국에서 1974년 정보공개법(Freedom of Information Act)이 제정된 이후 부터이다. 영국의 관련기밀문서 중에는 심지어 21세기 들어선 지금까지도 기밀분류된 것이 남아있다고 한다.

 

사실 2차대전 중에 세계 각국이 사용한 암호기 중에서는 가장 해독이 어렵고 해독하는데 비용이 많이 드는 시스템이기도 했다. 물론 가장 값비싼 물건이기도 했는데, 그 이유는 암호해독을 못하게 하려면 회전자를 늘리는 등 에니그마 본체에 손을 대는 조치가 필요하고, 그 후에 개선된 에니그마를 전체 군대에 대량으로 보급해서 기존 에니그마와 교환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당장 돈이 없던 일본만 해도 에니그마가 좋은 줄 알면서도 전용 계산자와 난수표를 사용하는 구태의연한 방식을 패전때까지 사용했다.(물론 죄다 털렸다) 그나마 에니그마를 보고 에니그마의 개량형이라고 볼 수 있을 정도로 꽤나 괜찮은 기계인 퍼플(purple)을 최고위 외교 메시지 전송을 위해 만들었는데, 미국에서 뚫어버렸다.(…)

 

 

컴퓨터의 아버지 앨런 튜링 칼럼

2011/06/30 09:46

복사 http://blog.naver.com/twinmemory/201316635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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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인물] 컴퓨터의 아버지 앨런 튜링
서구의 시각이지만 '인류문명의 3대 사과'라는 게 있다. 인간의 원죄를 표상하는 이브의 사과, 호머의 일리아스를 낳은 파리스의 사과, 만유인력을 발견한 뉴턴의 사과다. 이 반열에 오를 사과가 또 있다. '컴퓨터 과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천재 수학자 앨런 튜링의 '독사과'가 바로 그것이다.

1912년 런던에서 태어나 명문 킹스칼리지와 미국 프린스턴대 대학원에서 수학했다. 27세 때 현대 컴퓨터의 모델이라는 '튜링 머신'을 고안했고 1943년 연산컴퓨터 '콜로서스'를 만들었다. 이는 세계 최초의 컴퓨터라고 하는 미국의 '에니악'보다 2년 앞선 것이다. 2차 대전 중에는 영국 암호부대 브레츨리 파크에 들어가 독일 암호체계 '에니그마'를 해독, 연합국 승리에 숨은 공신으로 꼽히기도 한다. 독일의 최신예 전함 비스마르크호의 격침이나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독일군의 교신을 연합국이 먼저 해독할 수 있었던 것도 그의 공로였다. 그러나 1952년 동성애 혐의로 체포돼 '화학적 거세'를 당한다. 이 치욕을 견디지 못한 그는 1954년 오늘 청산가리를 주입한 사과를 베어 무는 것으로 삶을 마감했다. 사과를 한입 베어 먹은 모양의 애플사(社) 로고는 그에 대한 경의(敬意)의 표시라는 얘기가 있다.

정경훈<논설위원>

기사 작성일 : 2010년 06월 07일


앨런 튜링… 비운의 컴퓨터 선구자
이재구 국제과학전문기자 jklee@zdnet.co.kr 2011.06.01 / AM 08:38
[지디넷코리아]암호를 풀지 못하면 영국민의 식량이 가라앉는다

“에니그마(수수께끼)를 풀어라.”

 

1939년 9월 4일 영국이 독일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면서 2차대전 참전을 선언한 다음 날. 런던북쪽 64km 지점. 이른바 블레츨리(Bletchley) 파크의 괴짜 수재들에게 긴급 임무가 전달됐다.

 


이들은 영국전역에서 모여든 사람들로서 이집트학자, 십자말풀이 전문가, 체스챔피언 등이 다양한 재능을 가진 인물들이었다. 영국정부의 암호해독팀(GC&CS)이 독일군의 암호기계 이른바 ‘에니그마(Enigma)'의 비밀을 풀기 위해 영국정부가 국가 프로젝트를 위해 특별 선발한 두뇌그룹이었다.

 

히틀러가 이끄는 독일은 사흘 전인 9월 1일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인류역사상 최악의 전쟁인 2차대전을 촉발시켰다. 폴란드의 함락은 몇 주일도 안 걸렸다.

 

이듬 해 영국군의 상황은 더 급박해졌다. 작전수행의 최대 골칫거리는 독일의 잠수함 U보트였다.

 

영국민은 독일군의 도버해협 봉쇄로 대서양건너 미국에서 오는 상선에 식량과 물자를 의존해야 했다.

 

하지만 미국 상선이 U보트에 의해 여지없이 격침되면서 영국은 극도의 혼란에 빠졌다. 미국은 1941년 12월7일 일본군의 진주만 공격이 있기 전까지는 중립적 입장을 견지하고 참전하지 않고 있었다.

 

“암호를 풀어내지 못하면 영국국민의 보급물자와 식량이 배와 함께 가라앉는다.”

 

영국군은 비장한 심정으로 블레츨리파크의 요원들에게 기대를 걸고 있었다.

 

독일군은 당시 한창 기술발전의 절정에 오르고 있던 무선기술을 이용해 에니그마로 생성한 암호를 주고 받았다. 그리고 전쟁을 일으킨 히틀러와 동맹을 맺은 뭇솔리니의 이태리군 지역사령관들역시 에니그마를 사용하고 있었다.

 

■절대적 암호체계 에니그마가 깨지는 실마리

에니그마는 언뜻 보기에 타자기처럼 생겼지만 타이핑한 메시지가 전기기계 신호로 바뀐다는 점에서 타자기와 다른 기계였다. 이 기계는 자판, 스크램블러,램프보드 등 세 개의 원판 톱니바퀴와 반사경으로 이뤄져 있는데 이 톱니바퀴를 장착하는 순서에 따라 전혀 다른 암호체계를 만들 수 있었다.

 

또 톱니바퀴 둘레에 알파벳을 나열하는 방법에 따라서도 완전히 다른 암호가 나오는 데다 반사경을 이용해 두 알파벳을 바꾸면 무려 2,418,983,437,669,710,912,000개의 경우의 수가 발생할 수 있다는 그야말로 수수께끼같은 기계였다.

 

이후 독일은 톱니바퀴 수를 더욱 늘려 경우의 수를 더욱더 크게 만들었다. 독일군은 이 무수한 경우의 수 가운데 몇가지를 골라 암호책을 만들어 배포했다.

 

그날 그날 사용할 에니그마의 상태를 기록한 이 책의 유효기간은 한달에 불과했다. 암호해독 코드는 매일 바뀌었다.심지어 나중에는 여덟시간마다 바뀌기도 했다.

 

하지만 독일군은 이 에니그마암호 생성 체계에 대한 절대적 믿음을 갖고 있었던 만큼 전세계에서 본국으로 보내는 비밀문서 전송이나 군작전용 통신에도 어김없이 이 암호체계를 사용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한스틸로 슈미트라는 독일인이 이 완벽한 에니그마 해독에 대한 최초의 실마리를 제공하면서 철벽 코드체계는는 깨지기 시작한다.

 

“도대체 정부가 내게 해 준 게 뭐야?”

 

19381년 한스는 렉스라는 암호명의 프랑스 비밀요원과 벨기에 베르비에의 그랜드 호텔에서 만난다.

 

그리고 1만마르크(오늘날의 3천만원 정도)를 받는 조건으로 ‘암호기계 에니그마 지침서’와 ‘암호기계 에니그마 암호해독법’이란 서류를 넘겨 버렸다.

 

독일장교로 임관돼 1차대전에 참전했다가 자질 부족으로 군을 쫓겨난 그였다. 그는 승승장구하면서 독일 비밀통신조직인 통신군단을 지휘하던 형 휘하의 에니그마부대 서류를 빼내 조국과 형에게 복수를 하고자 했다.

 

1918년 독일의 발명가 아르투르 쉬르비우스와 그의 친구 리하르트 리터가 개발한 암호기술 에니그마는 이렇게 프랑스측으로 넘어갔고 여기서 이웃 폴란드로 건네졌다.

 

폴란드 암호해독반의 마리안 레예프스키가 1년만에 이 암호를 풀었고 해독기계 봄베까지 만들었다.

 

하지만 1938년 들어 중단할 수 밖에 없었다. 폴란드의 독일군 암호 엿보기는 독일군이 암호보안을 강화하자 멈춰버렸다.

 

독일침공은 목전에 있었고 보안이 강화된 암호풀기는 막혀 버렸다.

 

“이럴 수가!”

 

1939년 6월 30일 바르샤바로 긴급히 초청받은 프랑스와 영국의 고위암호해독전문가들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폴란드 측은 에니그마를 해독하다가 멈춘 사실, 봄베를 만들어 그간 독일군을 도청한 사실을 알리면서 이와 함께 봄베의 청사진과 에니그마 복제품을 넘겨주기로 했다.

 

그것만 해도 전세계 암호해독 기술수준을 10년은 앞선 것이었다.

 

1939년 8월16일. 폴란드 정부는 항구에 있는 독일 첩보원의 눈을 속이기 위해 폴란드 여배우 부부의 짐속에 에니그마 복제품을 몰래 실어 런던으로 옮겼다. 2주일 후인 9월 1일 히틀러는 폴란드를 침공했고 제2차세계대전은 시작됐다.

 

■앨런튜링, 보안이 강화된 에니그마를 깨다

블레츨리파크의 멤버들은 폴란드에서 건너온 에니그마를 바탕으로 ‘울트라(Ultra)’라는 암호해독 프로젝트에 들어갔다.

 

“그렇다 독일군들은 매일 새벽 6시 조금 지나면 일기예보를 암호화해 송신한다. 따라서 오전 6시5분에 도청된 암호문에 날씨라는 독일어 ‘wetter’란 단어가 들어있을 확률은 100%에 가까울 것이다.”

 

울트라 멤버중 한명이 보안이 강화된 에니그마 암호를 풀 궁리를 하던 중 차츰 실마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이듬 해인 1940년 3월 18일. 에니그마 메커니즘을 부분적으로 모방한 새로운 기계가 소개됐다. 폴란드의 암호해독가 레예프스키가 만든 이전 기계처럼 '봄베(Bombe)'로 이름 붙여졌다. 하지만 기능에서 달라졌다. 시간당 1만7천576가지의 가능한 암호조합을 20분 안에 잡아 낼 수 있었다.

 

사람 키 높이의 커다란 냉장고를 연상시키는 무게 1톤짜리의 이 기기는 108개의 드럼과 톱니바퀴․펀치테이프․전기회로 등으로 이뤄졌다.

 

이제 조금 시간이 걸리기는 해도 독일 잠수함 U보트의 이동상황을 파악해 사전에 대비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이듬 해 2호기가 설치되면서 그 해에만 178개의 독일 암호 메시지를 해독해 냈다.

 

‘울트라’프로젝트 성공의 주역은 26세의 앳띤 청년이었다. 그의 이름은 앨런 튜링이었다.

 

그는 이미 4년 전 22세의 나이로 독일의 저명 수학자 다비드 힐베르트가 낸 20세기 수학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이른바 '결정문제(Entscheidungs problem)'를 만나면서 이 문제의 실마리를 찾아내 놓고 있는지도 몰랐다.
힐베르트의 문제는 독창력이 요구될 뿐만 아니라 고된 단순작업도 함께 수반해야 풀 수 있었다. 끝없는 반복계산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튜링은 과거 선구적 수학자들처럼 반복 계산작업은 인간에게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시킬 뿐이며 이는 기계의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기계가 따라할 수 있는 명료한 지침서가 있다면 어떤 수학적 문제도 풀 수 있는 기계를 설계할 수 있을 거야!“

 

앨런 튜링은 ‘튜링기계’라고 불리는 만능기계(Universal Machine)의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그는 이 '가상의 기계'를 이용해 힐베르트의 문제가 제시하는 참과 거짓을 증명할 해법을 내놓으며 실력을 인정받았던 청년이었다.

 

그리고 그 성과는 절체절명의 위기속에 빠진 영국을 구할 성과물을 내놓기에 이른 셈이 됐다.

 

튜링은 연이어 케임브리지대학의 맥스웰 뉴먼교수와 설계한 새 기계 히드 로빈슨(Heath Robinson)으로 독일군의 암호 해독에 속도를 더했다. 당시의 전기기계가 사용했던 전화교환기보다 1천배가 빠른 논리적인 연상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이었다.

 

초당 1천자씩 들어오는 문자를 동기화해 롤(roll)방식의 종이테이프에 찍어낼 수 있도록 한 영국우체국 교환기 엔지니어 토미 플라워(Tommy Flowers)도 기쁨을 함께 했다.

 

■프로젝트 피시와 컬로서스의 등장

“독일군이 암호를 바꾸었습니다. 튜링박사가 독일군 암호 텔레타이프를 해독해 주시오.”

 

1943년 영국 국방부는 그에게 새로운 임무를 부여했다.

 

독일 해군이 에니그마 암호체계를 바꿔버리면서 기존 암호 해독기는 무용지물이 됐다.

 

독일의 새로운 암호체계는 ‘피쉬(Fish)'로 불렸다. 특히 히틀러가 간부들간의 통신에만 사용됐던 것으로서 이 암호 해독문제가 연합군에게 시급한 문제로 부상하고 있었다.

 

피쉬의 암호는 알파벳을 5자리의 2진수로 코드화한 후 비트조작을 해 암호화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에니그마를 풀던 봄베와는 완전히 다른 구조의 암호해독기가 필요했다.
▲ 블레츨리파크에 설치된 봄베

게다가 영국공군은 대잠수함 작전을 할 만한 충분한 성능의 레이더를 갖추지 못해 조바심하고 있던 참이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공군기들로부터 진주만 공습을 받고 나서야 참전을 선언한 미국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독일 U보트들은 이제 ‘두 번째 해피타임’이라고 알려진 시기를 맞아 연합군 배들을 마음껏 침몰시키면서 활개치고 다니고 있었다. U보드를 막으려면 한시가 급했다.

 

“드디어…… 풀었다!”

 

1943년 12월 정부의 전폭적 지지 속에 1년여 만에 새 암호 해독기를 만든 블레츨리 팀은 환호했다. 진공관으로 작동되는 전자식 암호해독기 ‘컬로서스 마크 I(Colossus Mark I)이 마침내 가동을 시작한 것이었다.

 

컬로서스는 거의 매일 사람이 힘들게 구성을 바꿔줘야 하는 기기였다. 독일군이 메시지 전송 방식의 세부사항을 정기적으로 교체하는데 맞춰 줘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컬로서스는 10자리 수의 덧셈과 뺄셈은 물론 0.2밀리초 내에, 곱셈은 3밀리초 이내에, 나눗셈과 곱셈은 20밀리초 이내에 풀어낼 수 있었다.

 

이로써 영국군은 독일군 텔레타이프 암호의 90% 가량을 해독할 수 있었다. 1주일 걸리던 것을 몇시간 만에 해독해 낼 수 있었다.

 

오늘 날 암호해독을 위해 출발한 컬로서스는 최초의 프로그래밍 가능한 컴퓨팅기계라는 의미와 함께 인류 역사의 향방을 단시간에 좌우한 최초의 컴퓨터라는 의미까지 부여받고 있다.

 

기계의 성능개선에 박차를 가한 튜링은 1944년6월 개량된 컬로서스 마크II를 내놓았다. 2천400개의 진공관에다 800개의 전자기식 릴레이를 덧붙여 설계한 이 컴퓨터는 더욱더 빨라졌다.

 

이로써 연합군은 2차대전의 결정적 승기를 잡게 될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대비할 수 있었다. 노르망디해안에 배치된 독일군 해안포대 위치까지 지도까지 만들어 낼 정도였다.

 

“아이젠하워의 독일 대공격을 위한 장소로 노르망디가 결정된 것은 블레츨리팀의 정보에 근거해 결정된 것이었습니다.”
2010년 2월2일 BBC와의 인터뷰에서 블레츨리의 유일한 생존자 제리 로버츠가 증언했다.

 

독일은 연합군 상륙지점을 칼레해안으로 예상하고 병력을 그곳으로 집중시켰다. 독일군은 여전히 블레츨리팀의 존재를 모른 채 전쟁이 끝날 때까지도 에니그마와 텔레타이프로 모든 비밀 문건을 작성하고 있었다.

 

■극비였던 인류사를 바꾼 컴퓨터팀의 역할

블레츨리팀의 활동을 비밀로 부치시오.”

 

처칠수상은 2차대전 중

 

블레츨리팀의 활약과 에니그마, 그리고 컬로서스의 존재에 대해 극비사항으로 묶어 놓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

 

이와함께 영국은 2차대전 후 독일로부터 수거한 수천대의 에니그마를 영연방 국가에 배포했다. 영국에게서 받은 이 암호제조기가 해독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굳게 믿었던 이들 국가의 비밀통신 내용은 영국에 오랫동안 그대로 흘러들어갔다.

 

그 비밀 속 블레츨리 파크 팀의 이야기는 1974년 여름에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 처칠 수상의 명령으로 그 존재조차도 숨겨야 했던 플레츨리파크 팀의 존재는 1974년에야 밝혀진다. 암호반들이 작업했던 블레츨리 파크 맨션건물.

울트라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윈터보덤 대위가 영연방국가들이 더 이상 에니그마를 사용하지 않고 있다며 정부에 비밀 공개 압력을 넣기 시작했다. 그는 결국 1974년 여름 ‘울트라 시크릿(Ultra Secret)’이라는 책을 세상에 내놓았다.

 

이는 블레츨리 암호해독 요원들의 공로가 공개적으로 인정을 받게 되는 계기가 됐다.

 

블레츨리 파크 팀의 존재를 되도록 늦게 공개한 데에는 또 다른 배경도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블레츨리팀은 독일군의 암호를 해독해 독일군이 인구20만의 코벤트리시를 공습할 것이라고 보고했지만 처칠은 손을 쓰지 않았다.

 처칠수상은 세계대전 승리라는 대의를 위해 자국민 수백명의 사망대신 암호해독반의 기밀 보호를 택할 수 밖에 없었다.

 

컬로서스도 1974년에서야 존재를 드러낸 최초의 ‘프로그래밍 가능한 컴퓨터’였다.

 

 

 

 

 

 

기만과 역습의 첨예한 대립

노르망디 상륙작전 Before D-day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인류 역사상 최대의 상륙작전으로 불립니다. 단순히 투입된 인원수나, 규모만으로 놓고 따지면 허스키 작전이라 불리는 시칠리아 상륙작전이 2개 사단 규모만큼 더 크지만, 해군과 공군이 모두 투입되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동원된 병력의 숫자 면에서도 침투 범위면 에서도 결국 제일가는 상륙작전입니다. 무엇보다 이 상륙작전이 세계 2차 대전의 판세를 뒤집어 놨다는 것을 판단해보면, 이 작전이 얼마나 거대하고 중요한 ‘한방’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3번에 나누어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전말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D-Day 직전까지의 상황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참고로 D-day에서 D의 어원은 불명확합니다. Doom이나 Destiny 등이 물망에 올라있지만, Day의 D가 가장 근접하다고 합니다. 더불어 D-day란 용어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처음 사용되었습니다.)

(시칠리아 상륙작전에는 해, 공군의 참여율이 크지 않습니다.)

1944년 경 유럽전선에선 이오시프 스탈린을 주축으로 형성된 소련군이 독일과 전쟁을 지속하고 있었고(독소전쟁), 별다른 차도 없이 지난하게 진행되는 상황의 타개가 절실해진 소련 측에서 연합군에게 2차 전선을 요구하는 실정에 도달하게 됩니다. 굳이 소련의 요구가 아니더라도 2차 전선의 필요성은 급속도로 물망위에 오르고 있었던 상황이었기에 1942년 경 영국의 원수 처칠이 디에프 상륙작전을 실시하기도 하였지만, 무참히 패배하고 이루 말할 수 없이 처참한 피해만 기록하게 됩니다. 이 작전을 통해 영국을 비롯한 연합군은 상륙작전 시 필요한 부분들에 대해서 반면교사를 제공받을 수 있었습니다만, 이건 엄연한 실전이기에 수많은 병력들을 소모하면서 이런 반증의 여지를 생성하는 것은 용납되어선 안될 일입니다. 계속해서 ‘병력’이란 이름으로 적혀 있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피하로 전달되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서 짚어가자면, ‘병력’은 곧 사실상의 ‘인명’입니다. 전쟁은 시대가 발전하고 그 어떤 대체 물품이 존재한다 한들 결국 사람이 해야 할 일입니다.

(전쟁은 결국 한명의 병사가 행하는 잔혹성 기반의 행위라는 본질을 잊어선 안 됩니다.)

처칠의 뼈아픈 대실패 속에서도 1943년 7월 쿠르스크 전투에서의 소련의 승전보는 연합군에게 다시금 2차전선 형성의 희망을 전달하게 됩니다. 주요 지점이었던 키에프를 탈환한 연합군은 엘 알라메인 전투에서 ‘사막의 여우’ 에르빈 롬멜을 크게 격퇴하며 완연한 우위를 선점하게 됩니다. 이 우위를 승기의 반전으로 삼고 싶었던 드와이트 아이젠버그 대원수는 연합군측 대표들을 모아놓고선 인류 최대의 상륙 작전을 기획하게 됩니다. 최초에는 유럽의 ‘따뜻한 배’라고 불리는 이탈리아와 남부 유럽 지방으로의 상륙을 계획했던 그들은 추축국이었던 이탈리아의 애매한 태도와 무정부 상태의 괴뢰 국으로 변모한 로마의 실정을 고려(독일이 이탈리아를 점령하며 로마는 그야말로 ‘무방비 상태’에 놓이게 됩니다.), 새로운 지점을 물색하게 됩니다.

(고전 영화 ‘무방비 도시’에는 그 현실이 매우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디에프 상륙작전 자체가 원래 어디까지나 정부 수집과 정찰에 목적의식이 있었다는 점을 상기해보면 독일군과 연합군은 정보와 첩보 수집에 꽤나 열을 올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전 초기에는 독일군이 연합군에 비하여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지만, 독일군의 암호체계였던 에니그마가 해석되고(이미 전쟁이 발발하기 이전에 폴란드에서 그 기초가 확립되었고, 후에 “울트라”라는 전담 해석 팀에 의해서 완벽하게 해석되게 됩니다.) 덕분에 독일 수뇌부의 의중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던 영국군은 영국에 투입된 50명 정도의 스파이 중 의문사 했다는 1명을 제외하고는 모두를 잡아들이는데 성공합니다. 더불어 그들을 설득하여 이중간첩으로 양성, 독일에 거짓정보를 흘리게 합니다. 그 당시의 독일군은 항공 전력이 씨가 말라 공중 정찰도 못하는 정보 빈약국 그 자체였습니다.

(매우 복잡한 암호 생성기기 에니그마는 2차 대전이 채 끝나기 전에 해독이 완료되어 버린 비운이 기기입니다.)

연합군은 단순히 정보를 알아내는 것에서 일을 그치지 않고 독일군을 기만하는 작전들을 펼치기로 결심, 상기에 서술했던 허스키 작전에서 상륙작전을 속이기 위해 실시한 ‘다진 고기 작전’에서 쏠쏠한 재미를 봅니다. (쥐약을 먹고 죽은 노숙자의 시체를 연락장교의 시체로 꾸며, 해변에 떠밀려 가게한 뒤 “정어리<사르딘>을 얼마나 가지고 갈지 모릅니다.”라는 거짓 암호문을 독일군이 보게 하여 마치 샤르데나로 상륙할 것처럼 속이는 작전입니다.) 이에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성공시키기 위한 ‘포티튜드 작전’을 설립, 신속히 실행에 옮깁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단순한 격돌이 아닌 치밀한 정보전이 밑바탕 되어 있는 전면전이었습니다.)

포티튜드 작전은 크게 북 포티튜드 와 남 포티튜드 작전 두 개로 나뉩니다. 북쪽의 노르웨이 지방과 남쪽의 프랑스 파 드 칼레 지방, 양쪽에서 양동작전을 실시하는 것처럼 속이기 위함이었지요. 북 포티튜드 작전을 위해 영국군은 서류상의 군단을 창설하기도 하였으며, 25만개의 스키(스키부대가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속이기 위해)를 주문하고, 스웨덴과의 외교적 수단까지 사용하였지만, 효력에 관해선 학자들 간의 분석이 다릅니다. 기본적으로 노르웨이 해안 쪽으로 독일군을 유인하는 데에는 실패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디에프 지역은 발전된 항구도시인지라 전차와 같은 대형 무기들이 진격하기에 굉장히 불편한 장소였습니다.)

이에 비해 남 포티튜드 작전의 성과는 엄청났습니다. 노르망디에 비해서 영국 본토와 가까운 위치였던 파 드 칼레 지방은 디에프와 마찬가지로 잘 발달 된 항구도시였으며, 방어하기에도 까다롭기에 매우 그럴듯한 거짓말이었습니다. 이 작전의 확실성을 부여하기 위해 서류상의 군단을 창설 유명세를 떨치던 조지 패튼 장군의 휘하에 위치시킵니다. 뿐만 아니라, 나무로 만든 상륙정, 나무로 만든 탱크 및 지휘본부를 설치해 패튼으로 하여금 직접 사열을 감사하게도 하면서 아주 본격적으로 독일군을 교란합니다. 심지어는 작전 당일까지 독일군 레이더에 잡히는 양철, 알루미늄 덩어리들을 풍선에 매달려 날려 보냄으로서 파 드 칼레 지방이 진짜라는 인식을 심어줍니다.

(칼레 역시 잘 발달된 항구도시입니다.)

이작전은 매우 효과적이었기에 히틀러는 샤를 드 골 장군이 노르망디가 진짜라고 방송을 하는 그 순간까지 파 드 칼레로 올 병력들에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습니다. 후에 진실을 깨우친 그가 노르망디로 수비군을 보냈지만, 이미 늦은 상황. 오로지 노르망디에서 연합군의 공격을 대비하고 있었던 것은 사막에서 유럽으로 건너온 에르빈 롬멜 장군 뿐이었습니다. 연합군은 6월 4일을 D-day로 선정했지만, 날씨 탓에 6월 6일로 변경, 구성을 맞추고 수많은 연습을 통해 칼을 갈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약속되었던 6월 6일 아침, 노르망디의 드넓은 해변에 연합군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작성 : 미디어 홍보부>


 

 

 암호해독팀 `울트라'(Ultra)가 이렇게 입수한 정보는 연합군을 승리로 이끌어 윈스턴 처칠 총리는 국왕 조지 6세에게

"울트라 덕분에 우리가 승리했다"고 말할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