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전쟁
식민지의 독립선언으로 일단 전쟁은 시작되었지만 이상하게도 사태는 조용히 흘러가고 있었다. 영국은 당시 세계 최강의 군대를 보유하고 있긴 했지만 대서양을 건너 군대와 물자를 대규모로 수송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미국이 - 이제는 더 이상 식민지가 아니다 - 영국을 몰아붙여 빨리 전쟁을 끝낼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다. 여전히 독립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만만치 않았고 몇몇 주는 아예 필요한 군대와 물자를 보내주지도 않았다. 심지어 영국군에 가담하여 싸우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사정이 이러했으므로 처음에는 탐색전 정도의 소규모 전투만 산발적으로 벌어졌다.
뉴욕을 누가 차지하느냐가 싸움의 초점이었다.
뉴욕은 허드슨 강으로 통하는 전략적 요충지로서,
이곳을 빼앗기면 '성지' 필라델피아가 위험에 처하게 된다.
윌리엄 하우 장군이 이끄는 영국군은 1776년 말
이곳에 대규모 공세를 펼쳐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저항하는 워싱턴군을 뉴욕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워싱턴은 황망히 패잔병을 이끌고 델라웨어 강을 건너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은 이때가 최대의 위기였다.
그런데 때가 마침 성탄절이어서 영국군이 명절을 쇠기 위해 추격을 갑자기 멈추는 바람에
워싱턴군은 겨우 사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신사적인 영국군이, 잠시 쉬었다가 새해 들어 다시 싸우자는 신호를 보낸 것인데,
워싱턴의 입장으로서는 그럴 만한 여유가 전혀 없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패할 것이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생각 끝에 워싱턴은 후퇴하던 발길을 돌려 얼어붙은 델라웨어 강을 다시 건너갔다.
그리고는 성탄절을 맞아 느긋하게 쉬고 있던 영국군을 트렌턴에서 미명에 기습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비록 작은 전투이긴 하지만
여기에서 승리함으로써 땅에 떨어졌던 군대의 사기가 크게 올라갔고,
여세를 몰아 이듬해에는 새러토가 대전투에서도 합중국군이 승리함으로써
적어도 전쟁을 지구전으로 끌고 갈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었다.
전쟁은 지루하게 계속되었다. 별다른 전투도 없이 진지에 처박혀 대치하거나 소규모 유격전으로 시간을 보냈다. 합중국으로서는 빨리 전쟁을 끝내고 싶어도 군사력, 특히 해군력이 턱없이 열세였기 때문에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프랑스가 1778년에 합중국 편에 가담하여 참전했지만 전황을 크게 바꾸지는 못했다.
영국은 초반에 결정적인 승기를 잡았으나 형편없는 지휘관들과 또 절반쯤은 불운으로 인하여
아까운 기회를 놓쳐버리고 말았다.
새러토가에서 패배한 뒤로는 영국도 섣불리 군사 행동에 나설 수가 없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전쟁과 승리 - 독립전쟁 (미국사 다이제스트 100, 2012.10.22, 가람기획)
잘 알다시피 독립전쟁은 합중국의 승리로 끝이 난다.
그러나 손쉬운 승리는 아니었다.
엎치락뒤치락 7년을 끌다가
요크타운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합중국이 겨우 이길 수 있었다.
독립전쟁에서 합중국이 결국 승리할 수 있었던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영국은 초반에 승리를 거둘 수 있었으나 무능한 현지 지휘관들 때문에 다 잡은 승리를 놓친 일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래도 제해권을 쥐고 있는 한 싸움은 근본적으로 영국에 유리했는데, 뜻하지 않게 1778년 프랑스가 합중국 편에 가담하여 참전함으로써 전세가 일변했다.
여기에다가 합중국으로서는 행운이 따른 일도 많았다.
1776년 말의 뉴욕 전투에서는 합중국 군대가 거의 궤멸하다시피 참패를 거듭했는데,
이때 영국군 사령관이었던 윌리엄 하우 경이 크리스마스 잔치를 며칠만 연기하고 계속 밀어붙였다면
합중국 군대는 재기불능의 타격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당시 영국은 서두르지 않아도 승리는 떼어 놓은 당상이라는 달콤한 생각에 빠져
합중국군을 몰아붙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합중국의 승리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한 사람의 위대한 인물 조지 워싱턴(1732~1799)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합중국이 초반의 열세를 극복하고 궁극적으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데에는 합중국군 총사령관 조지 워싱턴의 뛰어난 용기와 지략 그리고 지도력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워싱턴은 1732년 버지니아 마운트 버넌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그 지역에서는 제법 성공한 농장주의 한 사람이었다. 워싱턴의 어린 시절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그렇게 많지 않은 데다 잘못 알려진 부분도 많다. 예를 들어 어린 시절 '사과나무 사건'이 그렇다.
여섯 살 때 일인데, 정원에서 선물로 받은 작은 도끼를 가지고 놀다가 아버지가 아끼는 사과나무 - 벚나무라고도 함 - 를 찍어 넘어뜨렸다. 아버지는 누가 한 짓인지 모르고 가족과 하인들을 모아 놓고 불같이 화를 냈다. 워싱턴은 겁에 질렸지만 정직하게 자기가 했노라고 말했다. 벌을 받을 줄 알았는데 뜻밖에 아버지는 그를 따뜻하게 끌어안고 말했다. "얘야, 네 진실을 말하는 용기가 이 따위 사과나무 천 그루보다 나한테는 더 기쁘단다!" 이런 비슷한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여섯 살난 아이가 도끼로 사과나무를 쓰러뜨렸다는 이야기는 믿기 어렵다.
그가 어린 시절부터 강 이쪽에서 저쪽까지 돌팔매를 날릴 정도로 힘이 셌다는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그의 집 앞의 강은 지금 가서 보아도 아무리 힘센 사람이라도 돌팔매로 건너편에 닿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어쨌든 위대한 인물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언제나 어느 정도 과장된 이야기들이 있기 마련이다.
아무튼 워싱턴은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떴음에도 불구하고 넉넉한 가세로 매우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런데도 부자들이면 누구나 가는 대학에 가지 않았던 것을 보면 공부에는 별로 흥미가 없었던 듯하고 대신 말타기, 사냥, 무도회 등 전형적인 남부 귀족의 생활을 즐겼다. 그는 풍채가 훌륭할 뿐 아니라 전체적으로 장중하고 위엄있는 외모를 갖추고 있었다. 거기다 달변은 아니지만 말솜씨도 뛰어나 누구나 그와 이야기를 시작하면 그를 좋아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하는 재주도 있었다.
워싱턴은 프렌치·인디언 전쟁 직전 버지니아 정부에서 파견된 오하이오 계곡 민병 정찰대장으로 근무하면서 군대와 인연을 맺었다. 그곳에서 뜻하지 않게 프랑스 대군과 교전이 벌어져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는데, 아무튼 그의 무모하다 싶을 정도의 용감성은 이때 이미 증명되었다. 곧이어 프렌치·인디언 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후일 독립전쟁 때 크게 활약한 호레이쇼 게이츠, 이스라엘 퍼트넘과 함께 식민지 의용대 대장으로 영국군에 가담하여 싸웠다. 이를 통해 영국군의 전술을 익히고 귀중한 전투 경험을 쌓았지만 영국군이 식민지인과 식민지군을 멸시하는 데 분개하여 이후 철저한 반영 독립주의자가 되었다.
크리스마스 저녁, 적을 기습공격하기 위해 부하들을 이끌고 델라웨어 강을 건너는 워싱턴. 이 전투에서의 승리가 전세를 뒤집는 전환점이 되었다.
워싱턴은 1775년 제2차 식민지 회의(대륙회의)에서 식민지 연합군 총사령관으로 선출되었다. 워싱턴은 버지니아 대표로 근사한 군복을 입고 회의에 참석했는데, 이런 암시가 없었다 하더라도 전투 경험, 인격, 통솔력, 재산 등 모든 면에서 그에 버금갈 만한 사람이 전혀 없었으므로 사령관으로 선출되는 건 별로 어렵지 않았다.
일단 사령관이 되기는 했지만 워싱턴에게 닥친 어려움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우선 식민지 군인들은 대부분 모자에 '자유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구호를 써붙이고 의욕만 앞서 있지, 전투 경험이 하나도 없는 오합지졸에 불과했다. 게다가 식민지들로부터의 재정 지원이 턱없이 부족하여 급료는 물론 병사들에게 최소한의 무기를 지급할 형편도 되지 못했다. 이런 악조건 하에서도 합중국군이 그런대로 버텨나가고 결국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워싱턴 개인의 희생과 능력에 힘입은 바가 크다.
사실 독립전쟁 중 워싱턴에 대해서는 지지자와 비판자 사이에 평가가 크게 엇갈린다. 옹호자들은 워싱턴이 군사작전의 귀재로서, 새러토가 전투나 요크타운 전투 등 전쟁의 명암을 가른 큰 전투들에서 합중국 측이 승리한 것은 전적으로 워싱턴의 뛰어난 전술 때문이었다고 말하지만, 비판자들은 워싱턴이 그리 대단한 지략가가 아니었으며, 다른 유능한 장군이 사령관을 맡았더라면 전쟁이 좀 더 일찍 끝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워싱턴은 지나치게 원칙에만 충실하여 부하들에게 필요 이상으로 가혹했고, 그 때문에 전쟁기간 내내 탈영병이 끊이지 않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객관적으로 보아 워싱턴이 나폴레옹에 버금가는 불세출의 명장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그러나 독립전쟁 당시 워싱턴이 수행한 역할은 단순히 총사령관이라는 군사적 직책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그는 합중국의 단결과 힘을 상징했으며, 그가 있었기 때문에 그나마 합중국이 그런대로 단결하여 싸울 수 있었다고 보는 것이 그에 대한 타당한 평가일 것이다.
아무튼 워싱턴은 군인으로뿐 아니라 정치가로서도 뛰어난 소질과 야망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전쟁이 합중국의 승리로 막을 내린 후 사령관직에서 물러나 귀향했지만 그를 열화같이 지지하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합중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화려하게 재등장했다. 대통령으로 8년을 재임하면서 합중국의 기초를 다지는 데 크게 이바지한 후 명예롭게 은퇴한 그는 오늘날까지도 '건국의 아버지'로 미국인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독립의 영웅, 건국의 아버지 - 조지 워싱턴(1732~1799) (미국사 다이제스트 100, 2012.10.22, 가람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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