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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병법 - 허실 : [전례] 진문공과 성복지역

modest-i 2021. 8. 24. 11:24

손자병법제6편 허실 : [전례] 진문공과 성복지역

 



[전례] 진문공과 성복지역





초성왕과 진문공의 접전

춘추시대에 패자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실력과 명분을 모두 갖추어야만 했다. 기원전 632년 여름 4월, 중원의 패자 진문공과 남방을 호령하는 초성왕이 정면으로 맞붙었다. 이를 성복지역()이라 한다. 이 싸움은 춘추시대에 전개된 여러 전투 가운데 가장 유명한 전투다. 진문공은 이를 계기로 제환공의 뒤를 이어 중원의 패자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이전에 제환공도 초성왕과 자웅을 겨룬 적이 있으나 그때는 상호 체면을 살리는 선에서 그치고 무력전으로 치닫지는 않았다. 당시 제환공을 보필한 관중은 벌모()와 벌교()에 실패해 비록 무력을 동원하는 벌병()에 나서기는 했으나 최하 수준의 용병인 공성()의 단계에는 이르지 않았다. 이에 반해 진문공과 초성왕 사이의 접전은 남북의 실력자가 정면으로 맞붙은 최초의 사례에 해당한다. 육박전의 유혈전으로 치달은 점에서 공성전을 펼쳤던 셈이다. 당시 상황에서 이는 천하의 판세를 좌우한 역사적인 대접전이었다. 진문공은 이 싸움에서 승리를 거둔 덕분에 명실상부한 중원의 패자가 되었다. 진나라가 이후 수백 년 동안 중원의 패자로 군림했던 배경이 여기에 있다.

정반대로 싸움에서 패한 남방의 강국 초나라는 초장왕()이 등장할 때까지 제법 오랫동안 중원으로 진출할 생각을 품지 못했다. 기세가 크게 꺾였던 탓이다. 퇴각의 명을 어기고 진군했다가 패한 초나라 장수 성득신()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당시 초성왕은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이내 퇴각을 명함으로써 성복지역을 마무리 지었다. 더 이상의 확전을 원치 않았던 것이다. 〈허실〉의 다음 가르침을 누가 충실히 좇았는지 여부에 따라 승패가 갈린 결과로 볼 수 있다.

“무릇 군사작전은 물과 같다. 물은 높은 곳을 피해 낮은 곳으로 흐른다. 용병도 적의 강한 곳을 피해 허점을 치는 식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물은 지형에 따라 흐르는 방향을 결정한다. 군사작전도 적의 내부사정 변화에 따른 다양한 전술을 구사해야 승리할 수 있다. 군사작전에 일정한 형태가 없는 것은 물이 일정한 형태가 없는 것과 같다.”

진문공은 망명 시절 초성왕의 은덕으로 일시 곤경을 면한 적이 있었다. 초성왕은 진문공의 은인이었다. 만일 이런 인연이 없었다면 초성왕과 진문공의 접전은 총력전으로 치달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 경우 승패를 점치기가 쉽지 않았다. 성복지역을 진문공의 일방적인 승리라고만 평할 수 없는 이유다. 그럼에도 초성왕이 성복지역의 패배로 중원에 대한 지배권을 진문공에게 내주고 남방의 패자로 만족해야 하는 처지가 된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기원전 633년 겨울, 초성왕이 4개국 군주와 함께 연합군을 이끌고 가 송나라를 포위했다. 송나라가 급히 진문공에게 사자를 보내 구원을 청했다. 진나라 대부 호언()이 일전을 권했다.

“초나라는 얼마 전에 처음으로 조()나라의 지지를 얻었고 위()나라와 혼인관계를 맺었습니다. 우리가 조나라와 위나라를 치면 초나라는 반드시 그 나라들을 구원하려 할 것입니다. 그리되면 제나라와 송나라는 초나라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기원전 632년 봄 1월, 진문공이 군제를 2군()에서 3군으로 개편한 뒤 출격명령을 내렸다. 망명 시절 자신을 박대했던 조나라부터 칠 생각이었다. 먼저 위나라에 길을 빌려줄 것을 청했으나 위나라가 허락하지 않았다. 진나라 군사가 길을 돌아 조나라를 친 데 이어 곧바로 위나라로 쳐들어갔던 이유다. 이해 2월, 진문공이 제소공()과 지금의 하남성 복양현인 염우()에서 동맹을 맺었다. 이해 3월 10일, 진나라 군사가 조나라 도성을 함몰시키고 조나라 군주를 사로잡았다. 진문공이 조나라와 위나라 땅의 일부를 송나라에 떼어주었다. 당시 초성왕은 이미 철군해 초나라 변경인 신() 땅에 머물러 있었다. 곧 초나라 군사를 이끌고 있는 영윤() 성득신에게 사자를 보내 송나라에서 철수할 것을 명했다.

“진나라 군주는 19년간 망명했다가 결국 진나라를 차지했소. 세상의 온갖 역경과 간난을 고루 겪어 사람의 속마음을 모두 꿰뚫고 있소. 속히 철군하도록 하시오.”

성득신이 이의를 제기했다.

“감히 공을 반드시 세우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차제에 출격을 훼방하는 소인배들의 입을 막고자 할 따름입니다.”

초성왕은 화가 나 소수의 병력만 내주었다. 난감해진 성득신은 ‘명예로운 철수’를 할 요량으로 사자를 진나라 진영에 보냈다.

“진나라가 먼저 위나라 군주를 복위시키고 조나라 땅을 원래대로 회복시켜주시오. 그러면 초나라도 송나라에 대한 포위를 풀고 철군하겠소.”

호언 등이 진문공에게 건의했다.

“성득신은 무례하기 그지없습니다. 초나라를 대파할 수 있는 이번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은밀히 조나라와 위나라의 영토를 회복시켜주어 그들을 초나라로부터 떼어놓은 뒤 초나라 사자를 억류해 성득신을 격노하게 만드십시오. 나머지 대책은 싸움의 전개양상을 보아가며 강구하면 됩니다.”

조나라와 위나라는 과연 초나라와의 관계를 끊겠다고 밝혔다. 대로한 성득신이 먼저 공격을 가해왔다. 진나라 군사가 90리 뒤로 물러서자 진나라 장수들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초나라 군사는 이미 출병한 지 오래되어 사기가 크게 떨어져 있는데 무슨 까닭으로 뒤로 물러서는 것입니까?”

호언이 말했다.

“우리 군사가 90리를 후퇴한 것은 초나라 군주가 전에 우리 군주에게 베푼 은혜에 보답하려는 것이오. 우리가 뒤로 물러서 초나라 군사도 돌아간다면 곧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니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소? 그러나 초나라 군사가 돌아가지 않는다면 저들은 명분을 잃게 되오. 이때 응징하는 것이 가할 것이오.”

진나라의 계책에 넘어간 성득신이 이내 승리를 거둘 것으로 생각해 초성왕의 철군 명령을 거부했다. 이해 여름 4월 3일, 진문공이 송나라 및 제나라 군사 등과 함께 지금의 하남성 진류현인 성복()에 주둔했다. 성득신도 성복 일대에 진을 친 뒤 사자를 진문공에게 보냈다.

“한 번 힘을 겨루어보고자 하니 청컨대 군주는 수레 위에서 이들이 싸우는 것을 구경도록 하시오. 저 또한 군주와 함께 관람할 것이오.”

진문공이 이를 받아들였다. 4월 4일, 진나라 군사가 하남성 진류현 동북쪽에 위치한 유신()의 옛터에 진세를 펼쳤다. 성득신은 정예병 600명을 이끌면서 이같이 호언했다.

“오늘 반드시 진나라 군사를 모두 없애버릴 것이다.”

이로써 역사적인 성복의 대회전이 시작되었다. 이때 초나라 진영에서 진()나라와 채나라 장수가 첫 공을 세우기 위해 다투어 전차를 몰고 나갔다. 도중에 진나라 군사들이 짐짓 후퇴하자 급히 그 뒤를 쫓았다. 이때 진나라 장수 서신이 이끄는 병사들이 도중에 튀어나왔다. 진나라의 전차를 이끌고 오는 말이 모두 호랑이 가죽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초나라 진영의 말이 전차를 매단 채 그대로 돌아서서 오던 길로 미친 듯이 달아났다. 때마침 달려오는 초나라 후속부대와 정면으로 충돌하자 초나라 군사가 일시에 혼란스러워졌다. 진나라 장수 서신이 지원군인 진()나라 군사와 함께 내달려 이들을 물리쳤다. 마침내 진()나라와 채나라의 군사가 사방으로 도주하자 초나라의 우군도 뒤따라 궤멸되고 말았다.

이때 진나라의 상군 주장 호모()도 2개의 대장기를 앞세우고 짐짓 후퇴하는 모습을 보였다. 초나라 군사를 유인하기 위한 것이었다. 호모는 하군 주장 난지로 하여금 병거의 우거들이 나뭇가지를 끌고 가게 했다. 그러자 마치 급히 도망칠 때와 같이 자옥한 먼지가 일었다. 초나라의 좌군을 이끌고 있는 투의신은 공명심에 눈이 어두워 적의 꾐에 빠진 것도 모르고 급히 뒤를 쫓아왔다. 초나라 군사가 공격권에 들어오자 진나라의 중군 주장 선진()과 부장 극진()이 진문공의 친위부대를 이끌고 초나라 군사의 옆을 치고 들어갔다. 초나라 좌군은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호모와 호언도 말머리를 돌려 중군과 함께 두 동강난 초나라 좌군을 협격했다. 초나라의 좌군은 마침내 궤멸되고 말았다.

이 사이 진나라 연합군이 텅 빈 초나라 영채를 점령했다. 성득신은 영채까지 빼앗기자 더 이상 싸울 수가 없었다. 당시 성득신은 휘하 군사를 수습해 움직이지 않은 까닭에 그가 이끄는 초나라 중군만은 무사할 수 있었다. 4월 8일 초나라 군사가 성득신을 호위한 채 곡 땅에서 일제히 철군했다. 진문공이 초나라 군사가 주둔했던 영채로 갔다. 영채 안에는 그들이 버리고 간 군량과 마초가 가득 쌓여 있었다. 진문공이 크게 기뻐하며 외쳤다.

“이건 모두 초나라 사람들이 우리를 위해 놓고 간 것이다!”

진나라 군사들은 사흘 동안 초나라 군사들이 주둔했던 곡 땅에 머물며 노획한 군량을 먹었다. 성복의 싸움은 개전한 지 불과 엿새 만에 진나라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당시만 해도 초나라는 남만()으로 간주되었다. 후대인 역시 중원을 대표한 진나라가 남방의 오랑캐인 초나라를 격파한 성복지역에 커다란 의미를 부여했다. 《삼국연의》에 제갈량이 지금의 운남성 일대를 개척한 것을 두고 칠종칠금()의 전설을 만들어낸 것과 같다.

궤도의 전술

《손자병법》의 관점에서 볼 때 성복지역은 허허실실의 대표적인 사례에 해당한다. 논거는 크게 2가지다. 첫째, 기선() 대신 후발()을 취한 점이다. 통상 군사작전에서는 기선제압을 매우 중시한다. 전국()의 전반적인 형세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바둑으로 예를 들면 초반에 포석이 잘못되면 상대방이 실수를 범하지 않는 한 중반에 뒤집기가 매우 어려워진다. 실전에서 기선제압이 병사에게 미치는 영향이 이처럼 막대하다. 그런데도 진문공은 기선 대신 후발을 택했다. 후발은 말 그대로 상대방이 먼저 기선을 제압하는 것을 허용하는 것을 말한다. 명분싸움에서 이기기 위한 것이었다.

진문공이 공자의 신분으로 19년간 망명생활을 할 종반에 초나라에 이르게 되었다. 초성왕이 군주를 대하는 예로써 이 일행을 후하게 대접했다. 하루는 일행을 궁중으로 불러 크게 연회를 베풀어 대접하다가 문득 진문공 중이에게 넌지시 물었다.

“만일 귀국해 보위에 오르면 무엇으로 과인에게 보답할 생각이오?”

“미녀와 보옥, 비단은 군주가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제가 무엇으로 보답할 수 있겠습니까?”

“비록 그렇기는 하나 아무튼 장차 어찌 보답할 생각이오?”

“만일 군주의 은덕으로 귀국한 후 두 나라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 양쪽 군사가 중원에서 만나게 되면 저는 군주를 피해 3사()가량 뒤로 물러날 것입니다. 만일 퇴병하겠다는 군주의 명을 얻지 못한다면 왼손에 활, 오른손에 화살통을 쥐고 군주와 한번 겨루어보겠습니다.”

1사는 30리다. 3사는 100리에 해당한다. 전투가 벌어질 때 100리를 후퇴하는 것은 대단한 양보라고 할 수 있다. 성복지역 당시 진문공은 약속을 지켰다. 덕분에 여론의 지지를 얻고, 병사의 사기를 진작시킬 수 있었다. 주목할 것은 진문공이 행한 ‘3사의 후퇴’가 단순히 명분상의 우위를 얻기 위한 행보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초나라 사자를 억류해 초나라 장수 성득신을 격노하게 만들었던 것이 그 증거다. 적장을 격동시켜 자신들이 쳐놓은 올가미 안으로 들어오도록 유인했던 것이다. 성미가 급한 성득신이 여기에 그대로 걸려들었던 셈이다. 성복지역에서 나온 이른바 퇴피삼사(退) 성어의 본질이 여기에 있다. 퇴피삼사는 간교한 책략의 전형에 해당한다.

상황에 따라서는 이처럼 통상적인 정석과 정반대되는 포석이 주효할 때가 있다. 바둑에서 모르는 척하며 상대방에게 네 귀퉁이의 실리를 차지하도록 허용하는 와중에 은밀히 중원에 커다란 세력을 형성해 결국 승리를 거두는 것에 비유할 만하다.

둘째, 아군의 병력은 한곳으로 집중시키고, 적의 병력은 10곳으로 분산시키는 〈허실〉의 아전적분()의 계책을 구사했던 점이다. 성복지역은 〈허실〉에서 말하는 궤도를 유감없이 발휘했던 전투에 해당한다. 당시 중원의 진나라는 먼저 동쪽의 강국 제나라와 서쪽의 강국 진나라를 싸움에 끌어들여 초나라로 하여금 움찔하도록 만들었다. 초성왕이 군사를 뒤로 물렸던 이유다. 성득신도 물러날 생각이었다. 다만 그는 자존심이 강한 탓에 ‘명예로운 후퇴’를 하고자 했다. 이것이 화를 불렀다. 진나라는 성득신의 속셈을 거꾸로 이용했다. 성득신이 보낸 사자를 억류해 자존심을 자극하고, 약속으로 지킨다는 구실로 짐짓 3사를 후퇴함으로써 성득신의 허영심을 부추겼다. 성득신은 병력이 분산된 상황에서 헛된 자존심과 허영심에 들뜬 나머지 진나라가 쳐놓은 올가미에 걸려들고 말았던 셈이다. 당시 초성왕은 호언장담을 하던 성득신이 패하자 크게 노했다. 곧 사자를 보내 힐난했다.

“그대가 만일 그대로 귀국하면 죽은 장병의 부형을 어떻게 대할 셈인가?”

당시에는 장수가 패하면 병사의 부형자제를 볼 면목이 없다는 이유로 자진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성득신은 철군 도중 이내 초성왕의 사면령을 받지 못하자 크게 탄식했다.

“비록 대왕이 나를 용서해준다 해도 내가 돌아가서 무슨 면목으로 자식을 잃은 신과 식 땅의 부로들을 대할 것인가!”

그러고는 칼을 뽑아 자신의 목을 쳤다. 초성왕이 크게 후회하며 급히 사람을 보냈으나 이미 늦었다. 당시 진문공은 맹회를 마친 후 곧바로 귀국해 종묘에 포로를 바치고 장병을 위로하며 포상했다. 이때 호언의 공을 가장 높이 샀다. 장수들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성복의 싸움에서 계책을 세우고 초나라를 격파한 것은 모두 선진의 공로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호언의 공을 가장 높게 평가하는 것입니까?”

“이번 싸움에서 선진은 말하기를, ‘반드시 초나라와 싸워 무찔러야 한다’고 했소. 그러나 호언은 ‘신의를 잃으면 안 되니 우선 초나라 군사 앞에서 3사를 후퇴해야 한다’고 했소. 무릇 적군과 싸워 이기는 것은 한때의 공로에 불과하지만 신의를 드날리는 것은 만고의 교훈이오. 어찌 한때의 공로가 영원한 공로보다 낫다 할 수 있겠소?”

진문공은 신의를 운운했으나 내막을 보면 진나라의 승리는 궤도의 전형에 해당한다. 짐짓 패해 도주하는 사패계()와 복병을 숨겨두었다가 사정권 안에 들어온 적을 집중 공략하는 복병계()를 적절히 활용했던 덕분이다. 아전적분 계책은 적의 실상이 드러나게 하고 아군의 실상이 드러나지 않도록 하는 형인무형()의 전술과 동전의 양면 관계를 이루고 있다.

《손자병법》에 나오는 전술은 결국 자신을 최대한 감추고 적을 최대한 드러내게 하는 형인무형, 적을 착각에 빠뜨려 사정권 안으로 끌어들이는 허허실실, 적의 병력을 분산시킨 가운데 아군의 화력을 집중시켜 차례대로 궤멸시키는 아전적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모두 궤도의 일환이다. 전투가 전개되었을 때 온갖 유형의 속임수가 난무하는데 이를 윤리도덕의 잣대를 들이대 재단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후대의 성리학자들은 진문공이 의전()을 편 것으로 풀이했다. 이는 지나치게 겉모습에 주목한 결과다. 진문공이 성복지역 이후에 보여준 일련의 행보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당시 주양왕은 진문공이 대승을 거두었다는 소식을 듣고 친히 교외로 나가 이를 치하하고자 했다. 진나라 군사가 정나라 형옹() 땅에 이르렀을 때 주양왕의 사자가 달려와 그 뜻을 전했다. 진문공이 곧 천자의 행궁을 지금의 하남성 형택현인 천토()에 지었다. 주양왕이 행궁에 이르자 진문공이 노획물을 바쳤다. 수레 100승과 포로 1,000명이었다. 이틀 뒤 주양왕이 연회를 베풀어 진문공을 대접한 뒤 중원의 패자를 상징하는 대로지복()과 융로지복() 등을 내렸다.

대로지복은 제사 지낼 때 타는 금색의 수레와 이 수레를 탈 때 쓰는 붉은색의 닭 깃털로 된 모자 등을 말한다. 융로지복은 군례()를 행할 때 사용하는 수레와 이 수레를 탈 때 쓰는 가죽 모자 등을 지칭한다. 이 밖에도 붉은색 활인 동궁()과 검은색 활인 노궁() 등이 수여되었다. 천자를 대신해 제후국을 토벌할 권한을 부여했던 것이다. 명실상부한 패자가 되었음을 공식 승인한 것이다. 사가들은 이를 천토회맹()이라 한다. 주양왕이 진문공에게 당부했다.

“천자로서 숙부()에게 이르니 천자의 명을 공경히 받들어 사방의 제후들을 안무하고 천자에게 잘못을 저지르는 자들을 바로잡거나 제거하도록 하시오.”

‘숙부’는 진나라도 주왕실과 마찬가지로 희씨 성의 나라인 까닭에 이같이 말했던 것이다. 나이 차가 많이 나지 않고 항렬을 따지기 어려울 때 숙부로 칭했다. 진문공이 3번 사양한 뒤 비로소 왕명을 받아들였다.

“신은 감히 재배고두()하며 위대하고 밝고 아름다운 천자의 명을 받들어 이를 천하에 널리 선양하도록 하겠습니다.”

재배고두는 천자 앞에서 2번 절하면서 머리를 바닥에 대는 공식의례를 말한다. 진문공은 주양왕이 참석한 천토회맹을 통해 마침내 춘추시대의 2번째 패자가 되었다. 천토회맹이 있은 지 반년 뒤인 이해 겨울, 진문공이 제후들과 온() 땅에서 만났다. 이때도 주양왕이 참석했다. 이로 인해 그는 후대인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다. 《춘추좌전》은 당시 상황을 이같이 풀이해놓았다.

“천자가 온 땅에서 사냥했다고 한 것은 원래 진문공이 천자를 부른 사실을 숨기면서 진문공의 공덕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날카로운 지적이다. 제환공은 춘추시대의 첫 패자라는 칭호를 받았음에도 한 번도 초나라를 결정적으로 굴복시킨 적이 없었다. 그러나 진문공은 초나라를 힘으로 제압하고 중원의 패권을 확고히 장악했다. 당시 초나라를 제압한 진문공의 자부심은 하늘을 찌를 듯했다. 이는 그가 천자를 자신이 주재하는 회맹장소까지 불러낸 사실을 보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비록 천자가 제후국을 순행()하는 형식을 취했으나 사실 천자를 강압적으로 끌어냈던 것이나 다름없다. 《춘추공양전》은 아예 천토라는 지명을 밝히지 않았다. 《춘추공양전》은 그 이유를 이같이 풀이해놓았다.

“어찌하여 천자가 천토에 있다고 기록하지 않은 것일까? 그것은 제후가 천자를 부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주양왕을 강압적으로 부른 진문공의 비례()를 용서할 수 없다는 취지를 담고 있다. 공자도 같은 입장에 서 있었다. 그는 《논어》 〈헌문〉에서 진문공을 이같이 질타했다.

“제환공은 바르면서 술수를 부리지 않았으나 진문공은 술수를 부리면서 바르지 않았다.”

똑같은 패업인데도 제환공의 패업은 올바른 패업인 정패(), 진문공의 패업은 속임수를 동원한 휼패()로 나누었던 셈이다. 휼패는 《손자병법》이 전술의 핵심요소로 간주한 궤도와 같은 것이다. 진문공의 패업을 제환공보다 한 수 낮게 평한 것은 타당성을 찾기 힘들다. 제환공도 비록 존왕양이()를 전면에 내세우기는 했으나 진문공 못지않게 존왕의 이념을 거슬렀던 바 있다. 천자만이 행할 수 있는 봉선()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힘을 배경으로 한 패도를 굳이 정패와 휼패로 나눌 필요는 없다. 후대인에게 진문공의 패업은 제환공의 패업과 동일한 수준의 평가를 받았다. 난세의 시기에 부득불 무력을 동원한 마당에 도덕을 찾는 것은 순서가 뒤바뀐 것이다. 자칫 송양지인()의 우를 범할지도 모를 일이다.

cafe.daum.net/m8464563/I6J7/34   충주 문화동 천주교회 에서 펌함

 

각색 모디스티 21.5.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