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제력 · 리더십

조조처럼 대담하라 / 자제할 수 없는 미끼를 던져라 / 조조가 문추의 목을 벨 때 구사한 계책이 바로 미끼를 던져 적을 유인하는 이적계(餌敵計)이다

modest-i 2017. 3. 13. 07:36

원소가 황하를 건너 조조의 군사를 뒤쫓아 연진 남쪽까지 왔다.


조조가 병사들에게 연진의 남쪽 언덕 아래에 영채를 차린 뒤 영루 위로 올라가
원소의 군사를 살피게 했다. 병사가 말했다.
“대략 500~600명의 기병이 있습니다.”
잠시 후 다시 보고했다.
“기병의 수가 더 늘었고, 보병은 수도 셀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조조가 말했다.
“더는 보고하지 마라.”


그러고는 이내 기병에게 명해 안장을 풀어 방마(放馬)토록 했다.
당시 백마로부터 치중(輜重)이 육로를 통해 운반되고 있었다.


여러 장수는 적의 기병이 많은 것을 보고는 돌아가 영루를 지키느니만 못하다고 여겼다.
순유가 말했다.
“이는 적에게 미끼를 던져 유인하는 이적(餌敵)을 위한 것이다.
어찌 철수한단 말인가!”


원소의 기병을 이끄는 부장 문추(文醜)와 유비가 5천~6천 명의 기병을 이끌고
앞뒤로 추격해 왔다. 조조의 여러 장수들이 다시 말했다.
“가히 말에 오를 만합니다.”
조조가 말했다.
“아직 때가 아니오.”


잠시 후 추격해 오는 기병의 숫자가 점점 늘어났다.
어떤 자는 치중을 차지하기 위해 급히 내달려 다가왔다.
조조가 말했다.
“됐소.”
이내 모두 말에 올랐다.
당시 기병의 수는 600명이 못됐으나 마침내 일시에 내달려 적을 치게 해 대승을 거두고
문추의 목을 베었다.
_ 『삼국지』 「위서, 무제기」





[명사]

  • 1.말이나 수레에 실은 짐.
  • 2.군대의 여러 가지 물품을 통틀어 이르는 말. 탄약, 식량, 장막, 피복 따위를 이른다



       
        
    상대의 마음을 정확히 읽고 효과적인 미끼를 던진다.
     
    이 대목은 관도대전 당시 원소의 맹장 문추의 목을 베는 과정을 묘사한 것이다.
    당시 원소의 군사는 맹장인 안량에 이어 문추마저 조조의 군사에 의해 목이 떨어지자
    크게 흔들렸다. 압도적인 우위를 자랑했던 원소의 군사가 끝내 패하게 된 근본배경이다.
     
    원소와 조조 사이에 벌어진 건곤일척의 대전인 관도대전

    그 어떤 전쟁이든 병사들이 사기측면에서 밀리게 되면 이내 패하게 된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증한다.



    조조가 문추의 목을 벨 때 구사한 계책이 바로 미끼를 던져 적을 유인하는 이적계(餌敵計)이다.

    미끼를 덥석 무는 쪽은 패배를 자초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원소는 바로 조조가 구사한 ‘이적계’에 걸려들어 패망의 길을 걷게 됐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


    조조와 원소, 두 영웅의 전투

    관도대전

    시대200년

    조조는 헌제의 후견인을 자청해 자신의 세력을 굳건히 만든 후 백마에서 원소군을 크게 물리쳤다. 이에 원소가 조조군을 다시 공격하자, 당시 가장 강한 두 군벌 세력이었던 원소와 조조가 충돌하는 관도대전이 일어났다. 조조는 원소군의 식량 보급지를 알아내고 습격해 군량미를 모두 태워 버리고 총공세를 펼쳤다. 이로써 조조는 관도에서 2만의 군사로 10만의 원소군을 격파하는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다.


    189년, 후한의 제12대 황제 영제(靈帝, 재위 156~189)가 죽은 뒤 실권을 장악한 외척 하진은 누이동생 하황후 소생인 소제를 황제로 즉위시켰다. 이어 그는 환관 척결에 나섰다. 그의 계획은 명문 사인 출신 원소(袁紹)와 병주목 동탁의 힘을 빌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환관들은 100년에 가까운 오랜 세월 동안 온갖 음모와 계략과 배신으로 황제를 쥐락펴락하고 있었다. 결국 하진의 계획은 사전에 누설되어 환관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원소는 하진의 죽음과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사촌 동생 원술과 궁문을 치고 들어가 마침내 2천여 명의 환관들을 주살했으며, 동탁은 소제와 소제의 동생 유협(劉協)의 신병을 확보했다. 그리고 곧 동탁은 소제를 폐위시키고, 유협을 헌제(獻帝, 재위 189∼220)로 옹립한 후 전권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190년에는 각지에서 원소를 맹주로 한 반동탁군인 관동군(關東軍)이 결성되었고, 위협을 느낀 동탁은 낙양을 버리고 장안으로 천도했다. 이때부터 후한은 망국이나 다름없었으며, 중원은 군웅할거 세력으로 들끓었다.

    여포

    동탁의 부하였으나 동탁이 절대 권력을 행사하며 민생을 어지럽히자 왕윤과 모의하여 동탁을 살해했다.

    192년, 동탁이 부하 여포(呂布)에게 암살당했다. 동탁의 전횡이 더욱 심해지고, 민생을 파탄 지경에 이르게 하여 추종자들의 불만을 샀기 때문이었다. 동탁의 죽음 후 그의 부하들이 난립하여 싸우면서 장안은 또다시 폐허가 되었다. 이에 헌제는 장안을 떠나 낙양으로 돌아왔지만, 낙양 역시 폐허가 된 지 오래였다. 헌제가 마땅히 의탁할 곳도 없이 곤궁한 생활을 하자, 조조(曹操)가 그를 허성(許城)으로 모셨다. 조조는 황건적의 난을 진압하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또한 동탁의 토벌군에도 가담했으며, 192년에는 청주 황건적의 투항을 받아 내 청주병을 조직함으로써 정치, 군사적 역량을 확장했다. 그리고 196년, 마침내 조조는 헌제를 자신의 근거지인 허성에 모심으로써 '천자를 옹위하여 제후를 거느린다'라는 명분을 얻었다. 더불어 그는 허성을 임시 도성으로 삼아 명칭을 허도(許都)로 바꾼 후, 식량과 군비를 확보하기 위해 유민과 변방의 병사들에게 둔전을 경작하게 했다. 이로써 조조는 자신의 세력을 더욱 굳건히 만들 수 있었다.

    한편 관동군의 맹주로 추대된 원소는 북방의 광대한 지역에서 당시 최대의 군벌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런 와중 200년, 서주를 차지하고 있던 유비(劉備)가 조조에게 쫓겨 원소에게 의탁하는 일이 발생했다. 당시 유비는 조조의 명을 받아 원술을 대패시키고 서주의 주인으로 복귀한 상태였다. 그런데 과거 유비가 후한의 외척 동승과 함께 조조를 암살하려던 계획을 세운 것이 조조에게 들통 났고, 이에 조조가 직접 대군을 이끌고 유비를 토벌하려 하자 유비가 원소에게 몸을 의탁한 것이다. 이 일로 원소는 조조의 세가 예상외로 강하다는 것을 알았으며, 조조의 세력이 급속도로 커지는 것을 견제할 필요성을 느꼈다. 200년, 드디어 당시 가장 강한 두 군벌 세력이었던 원소와 조조가 군사적으로 충돌했으며, 이를 관도대전(官渡大戰)이라 한다.

    200년 2월, 원소는 10만 대군을 이끌고 업성(鄴城)을 출발하여 여양(黎陽)으로 향했으며, 조조를 유인하기 위해 모사 곽도(郭圖)와 대장 안량(顔良)을 백마(白馬)로 파견해 조조의 동군태수 유연(劉延)을 포위하게 했다. 8월에 이미 주력 부대 2만을 관도에 주둔시킨 조조는 백마의 포위를 풀기 위해 연진(延津)으로 북상했다. 하지만 이는 조조의 유인책이었다. 조조는 군사 일부만을 보내 황허를 건너 원소의 후방을 치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원소는 유인책에 걸려 백마의 군대 일부를 연진으로 보내 버렸다. 이때 조조가 직접 기병을 이끌고 백마를 기습하자 원소군은 대패하고 안량은 전사했다.

    둔전

    위진 시대 묘실 벽화에 그려진 고대 군영의 모습. 군량과 재원을 확보하기 위해 국가 주도로 관유지를 직접 경작하던 제도이다.

    한편 백마에서 승리한 조조는 재빨리 철수를 시작했고, 조조의 유인책에 말려 군을 잃은 것에 대노한 원소는 기병대장 문추(文醜)에게 조조를 맹추격하라고 명했다. 마침 문추가 백마산에 이르렀을 때, 그는 조조군의 무기, 갑옷 등이 함부로 널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에 문추는 아무런 의심 없이 조조군이 남긴 물건들을 회수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 매복해 있던 조조군 600기가 나타났다. 조조군은 문추와 원소군을 몰살시킨 후 순조롭게 관도로 퇴각했다.

    원소

    원소는 관도대전에서 불과 2만의 병사를 가진 조조에게 패했다. 군사 수는 조조에 비해 월등하였으나 통솔과 지략에 있어서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또한 다른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는 성격도 패배의 원인이 되었다.

    비록 백마 전투에서는 패했지만 원소군은 여전히 조조군에 비해 수적으로 월등히 우세했다. 원소는 황허를 건너 조조가 있는 관도를 포위했다. 관도는 허도와 불과 100여 킬로미터 거리밖에 되지 않았고, 원소가 조조에 대항하는 다른 반란을 유도했기 때문에 조조는 방어에만 치중했다. 이로써 전세는 장기전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이때 원소의 모사 허유(許攸)라는 자가 한 가지 계책을 내놓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조조의 군량미가 바닥날 것이니, 군대를 나누어 관도를 돌아 허도를 급습하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원소는 허유의 계책을 무시해 버렸고, 이에 허유는 자신의 능력을 알아주지 않는 원소에 실망하여 조조에게 투항했다. 게다가 허유는 원소의 식량 창고가 오소(烏巣)에 있으며, 그곳의 책임자가 순우경(淳于瓊)이라는 것까지 알려 주었다. 즉시 조조는 군대를 원소군으로 위장시켜 오소를 습격해 순우경을 죽이고 원소의 군량미를 모두 태워 버렸다.

    조조와 유비

    《삼국지연의》 삽화 중 한 장면. 조조가 유비를 초대해 천하에 영웅이라 할 만한 사람이 누가 있는지 대화하고 있다.

    오소에서 원소군은 큰 타격을 입었지만, 원소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역습의 기회라고 여겼다. 그리하여 원소는 장합(張郃)과 고람(高覧)에게 조조군의 주력 부대가 없는 틈을 타 조조의 본진을 공격할 것을 명했다. 그러나 장합과 고람은 조조의 협공을 받자 저항을 포기했다. 군량미가 불타 없어지고, 지휘관들의 배신으로 원소군이 동요하자 조조군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총공세를 펼쳐 7만여 명의 원소군을 격퇴했다. 원소가 패잔병을 이끌고 황허를 건널 때, 그의 곁에는 겨우 900여 명의 기병만이 있었다. 이로써 조조는 관도대전에서 최종 승리했다.

    관도대전에서 조조는 2만의 군대를 가지고 10만의 원소군에게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다. 원소군은 조조군에 비해 우세했으나 통솔이 잘되지 않았고, 이에 반해 조조는 뛰어난 통솔과 지략을 발휘했다. 또한 원소의 패배에는 다른 의견이나 타인을 받아들이지 못한 그의 성격에서도 원인을 찾을 수 있다. 202년, 원소가 병으로 생을 마감하자 그의 셋째 아들 원상이 뒤를 이었다. 그러나 곧 형제간의 불화로 세력이 약해졌으며, 204년에 조조에 의해 완전히 멸망했다. 이로써 조조는 당시 13개의 주 중에서 5개의 주를 차지하여 중원 장악을 이루고, 천하 제패의 전기를 마련했다.



    ㆍ 196년 : 조조가 헌제를 자신의 근거지인 허성에 모심으로써 세력을 더욱 굳건히 하다.
    ㆍ 200년 : 원소와 조조가 군사적으로 충돌한 관도대전이 일어나다.
    ㆍ 204년 : 관도대전에서 승리한 조조가 중원을 장악하고, 천하 제패의 전기를 마련하다.





    --------------------------------------------------------------------------------------------- 

    히틀러와 무솔리니를 패망케 한 ‘민스미트 작전’


    세계전사 가운데 ‘이적계’에 걸려들어 역전극이 빚어진 대표적인 사례로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43년 연합군이 구사한 ‘민스미트 작전’을 들 수 있다.
    이해 11월 22일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루스벨트와 처칠 및 장개석 등 연합군 수뇌가 회동했다.
    5일간 열린 이 회담의 핵심현안은 일본의 패전을 전제로 한 일본 영토의 처리문제였다.
    당연히 한반도 문제도 논의됐다. ‘앞으로 적절한 절차에 따라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줄 것이다.’
    라는 내용의 카이로선언이 나온 배경이다.
     
    이들이 일본의 패망을 예상한 것은 이해 9월 이탈리아가 항복을 선언한 데 따른 것이었다.
    연합국 수뇌부는 독일은 물론 일본도 조만간 제압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이탈리아가 항복을 선언한 것은 이해 7월 영국의 첩보기관이 치밀하게 진행한 이른바
    ‘민스미트 작전’이 주효한 데 따른 것이었다.
     
    이 작전은 21세기 현재까지 최고의 첩보작전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한 편의 드라마를 방불하는 이 작전은 1943년 5월 1일 이른 새벽 스페인의 남쪽 우엘바강 카디스만 부근의 해변에서 시작됐다. 당시 어선을 타고 바다로 나가던 어부가 우연히 파도에 떠 있는 영국군 장교 시체를 발견했다. 구명조끼를 걸친 시신은 부패해 있었지만, 주머니에 신분증이 있어서 신원을 파악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특이하게도 시신의 오른손에는 수갑으로 연결된 서류가방 하나가
    단단히 묶여 있었다.
     
    어부가 시체를 배 위로 끌어올린 뒤 우엘바 강변으로 끌고 왔다. 수백 명의 어민이 구경을
    나왔다. 스페인 군경도 나와 사진을 찍으며 시신을 검색했다. 시신은 이내 스페인의 한 병원으로 옮겨져 해부 됐다. 폐에서 소량의 바닷물이 발견되면서 산 채로 바다에 빠져 익사한 것으로
    결론이 났다. 그리고 서류가방 안의 문서 검증을 통해 그가 영국의 연합군 작전사령부의
    작전참모 윌리엄 마틴 소령이고, 비행기를 타고 영국 해군 잠수함으로 이동하던 중 비행기
    사고로 바다에 빠진 사실을 알아냈다. 이는 최고급 정보에 속했다.
     
    당시 스페인은 히틀러에게 우호적이었다. 스페인 정부는 은밀히 시신과 서류를 독일 정보 요원에게 전달한 뒤 마틴 시신의 표류 사실을 공식 발표했다. 영국 정부는 짐짓 흥분한 모습을 보이며 시신과 서류의 즉각적인 반환을 요구했다.
    서류가방은 1주일 만에 영국 정부에 전달됐지만, 독일 정보 요원은 이미 모든 문서를 사진으로 찍어 베를린에 보낸 뒤였다. 겉으로 보기에 서류봉투는 개봉된 흔적이 없었지만,
    정밀 검사 결과 봉투는 개봉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영국 정보부는 환호성을 올렸다. ‘민스미트 작전’의 성공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원래 민스미트(Mincemeat)는 다진 고기에 잘게 썬 사과와 건포도, 기름, 향료 등을 섞어 만든 영국의 전통 음식이다. 이는 독일군을 유인하는 미끼라는 취지에서 붙여진 것이다. 이 작전은 해군 정보장교 유웬 몬태규 중령의 머리에서 나왔다. 가상의 영국군 장교로 위장한 시체에 독일군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릴 정보를 매달아 놓는 계책이었다.
    몬태규는 서류가방을 시체에 매다는 교묘한 방법을 생각해냈다.
    미끼를 놓을 장소는 스페인이었다.
    스페인이 표면상 중립을 선언했지만, 뒤로는 독일과 이탈리아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몬태규의 계책을 받아들인 영국 정보부는 이내 한 행려병자의 시신을 구해다가
    윌리엄 마틴 소령이란 새로운 이름을 붙인 뒤 가짜 기밀문서가 담긴 가방을 손에 채웠다.
    기밀문서의 내용인즉슨 영국 해군의 지중해 사령관에게 연합군이 조만간 그리스를 침공할 것이니 철저히 대비하라는 가짜 명령이었다. 영국 정보부는 폭풍우가 부는 날을 택해 시신을
    스페인 해안으로 밀려가도록 조치했다. 영국 해군의 잠수함이 여기에 동원됐다.
     
    가공인물인 마틴 소령으로 둔갑한 행려병자의 시신은 원래 폐렴으로 사망한 까닭에 폐 안에
    물이 가득 차 있었다. 영국 정보부는 마틴에 대한 의심을 불식시키기 위해 은행의 채무변제
    독촉장과 같은 개인 문서 등을 서류가방 안에 함께 집어넣었다.
    여기에는 약혼한 지 얼마 안 된 것으로 위장하기 위해 런던의 유명 보석상에서 약혼반지를
    외상으로 구매한 영수증과 ‘사랑하는 니샤’로 시작되는 연애편지도 있었다.
     
    당시 영국 정보부는 히틀러를 더욱 철저히 속이기 위해 <더 타임스>에 마틴을 포함한 전사자
    명단을 공표하고 부고를 냈다. 마틴의 시신 역시 군대의 의전을 좇아 우엘바에 안장됐다.
    장례식 날 추모의 정을 담은 카드와 함께 영면을 기원하는 화환이 마틴의 ‘약혼녀’ 이름으로
    배송됐다. 우엘바 주재 영국 부영사관은 한술 더 떠 작전 수행 중 사망한 마틴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대리석으로 깎은 묘비까지 세웠다. 모든 게 감쪽같았다.
     
    독일 정보국이 주목한 것은 시신의 몸에서 나온 문서였다.
    문서 중에는 영국 총사령부의 부참모장이 아프리카 북부 튀니지에 주둔하는
    영국 원정군 사령부 알렉산더 장군에게 보내는 친서도 있었다.
    친서는 연합군이 시칠리아 섬을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밝히면서 뭔가 숨기려고
    애쓴 느낌이 강했다. 이는 고도의 속임수에 해당한다.
     
    마틴의 장례식이 진행되는 와중에 독일 정보국은 서류의 진위를 파악기 위해 전문가를
    데려다가 정밀한 감식작업을 벌였다. 연합군이 사르데냐와 그리스로 진격할 계획을 하고
    있다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이를 보고받은 히틀러는 이내 무솔리니와 회동한 자리에서 정보를 전해주면서 득의에 찬
    목소리로 이같이 말했다.


     
    “우리가 얻어낸 정보는 모두 사실입니다.
    내가 어찌 대응할지 고민하는 차여서 이 정보는 매우 중요합니다.”
    무솔리니가 찬물을 끼얹었다.
    “저의 예감으로는 연합군이 그래도 시칠리아를 칠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히틀러가 핀잔을 주었다.
    “정보는 늘 직감보다 중요합니다. 우리는 정말 믿을 만한 정보를 확보했습니다!”
     
    히틀러는 ‘정보는 귀신에게 빌어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유사한 사례로 유추해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반드시 사람을 통해 알아내야만 한다.’는
    가르침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 또한 『손자병법』을 읽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가 취득한 정보가 영국 정보국의 사간(死間)을 이용한 가짜 정보였다는 데 있다. 결과적으로 무솔리니의 ‘예감’이 옳았던 셈이다.
     
     

    정보전쟁에서 승리해야 화력전에서도 승리한다.
     
    당시 내막을 전혀 알 길이 없었던 히틀러는 시칠리아에 주둔하고 있던 병력과 통신 연락 장비 등을 대거 그리스와 사르데냐 일대로 옮기도록 조치했다. 이로 인해 연합군이 눈독을 들이고 있는 시칠리아 섬은 최강의 방어벽을 자랑하다가 졸지에 가장 취약한 지역이 되고 말았다. 연합군이 손쉽게 상륙한 뒤 이내 로마로 진군해 무솔리니의 항복을 받아낸 배경이 여기에 있다. 히틀러는 뒤늦게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알고 연합군의 시칠리아 상륙을 저지코자 했으나 이미 때가 늦었다.
     
    당시 연합군은 시칠리아 상륙작전을 ‘허스키 작전’으로 불렀다. ‘허스키 작전’의 성공은 ‘민스미트 작전’이 주효했기에 가능했다. ‘허스키 작전’은 1943년 초 연합군이 ‘사막의 여우’로 불린
    롬멜의 아프리카 전차군단을 격파한 데서 비롯됐다.
     
    남은 과제는 유럽 본토로의 진격이었다. 이 문제를 놓고 미국과 영국이 대립했다.
    침공의 교두보에 대한 이견에서 비롯된 것이다. 미국은 단시간 내에 전쟁을 끝내고자 단숨에 프랑스에 상륙해 독일로 진격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볼 때 이는 성급했다. 영국은 이탈리아부터 제압해 독일을 압박하는 우회 전략을 주장했다. 이해 1월 14일부터 13일 동안 북아프리카 프랑스령 모로코의 카사블랑카에서 이뤄진 루스벨트와 처칠의 회동은 이 문제를 매듭짓기 위한 만남이었다. 결국, 처칠의 안이 채택됐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시칠리아에 주둔하고 있는 독일군의 화력이 간단치 않았다. 상륙을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먼저 독일군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려놓아야만 했다. 이때 영국 정보국이 제시한 게 바로 ‘민스미트 작전’이었다. 화력전으로 전개될 ‘허스키 작전’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짓기 위해 시도된 첩보전이다. 두 작전의 잇따른 성공은 첩보전에서 이기면 화력전에서도 승리할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을 역사적으로 증명한 것이나 다름없다.
     
    ‘민스미트 작전’은 제2차 세계대전의 여러 전례 가운데 영국 정보국의 기발하면서도 빈틈없는 첩보전술이 돋보이는 일화이다. ‘민스미트 작전’이 전개될 당시 런던에 숨어 있던 독일의 첩자들마저 마틴 장교의 신원을 밝혀내며 환호하는 ‘희극’이 빚어진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시종 철저한 기밀 속에 한 치의 착오도 없이 정밀하게 진행된 덕분이다.
     
     

    상대를 계략에 빠트리려면 자제할 수 없이 빠져드는 미끼를 던져야 한다.
     
    『손자병법』 「구변」은 ‘적을 계략에 빠지도록 유인하려면 그가 좋아하는 것을 미끼로 내걸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를 두고 조조는, “적이 자제할 수 없는 이익을 미끼로 내걸어 달려오게 하는 것을 말한다.”
    고 했다. 그럴듯한 미끼를 내걸어야 효과를 볼 수 있다는 지적이다. 이는 한마디로 말해
    미끼가 커야 대어(大魚)를 낚을 수 있다는 속언과 취지를 같이하는 것이다.
     
    『장자』 「외물」에 이를 뒷받침하는 일화가 나온다. 하루는 임(任)나라 공자가 커다란 낚싯바늘과 굵은 낚싯줄을 만들었다. 이어 50마리의 불깐 소를 미끼로 삼아 회계산에 앉아 동해에 낚싯대를 드리웠다. 날마다 낚시를 했으나 1년이 지나도록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어느 날 마침내 대어가 미끼를 물었다. 거대한 낚싯바늘을 끌고 엄청나게 큰 쇠고기 미끼를 입에 문 채 바다 밑바닥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바다 위로 솟구쳐 올라 등지느러미를 마구 휘둘러댔다. 흰 파도가 산과 같고, 바닷물이 온통 뒤집힐 듯 요동쳤다. 신음이 마치 귀신의 울부짖는 소리와 같아 1천 리 밖에 있는 사람들까지 매우 놀라 두려움에 떨었다.
     
    임나라 공자가 이내 이 물고기를 낚아 올린 뒤 잘게 썰어 포를 만들었다.
    절강(浙江)의 동쪽에서 창오(蒼梧)의 북쪽에 이르기까지 이곳에 사는 백성 중 배불리 먹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이후 후세의 천박한 재사와 떠벌리는 것을 좋아하는 무리가 모두 놀라
    이 얘기를 서로 전했다. 장자는 이 일화를 두고 이같이 말했다.
     
    “가느다란 낚싯줄을 묶은 보통의 낚싯대를 쳐들고 작은 도랑을 좇아 붕어와 같은 잔챙이나 지켜보며 낚으려는 자들은 이런 대어를 낚기가 어렵다. 쓸모없는 작은 언설이나 꾸며대며 작은 벼슬자리라도 요구하며 다니는 자들은 이처럼 큰 경지에 이른 대인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다. 임나라 공자의 풍도를 아직 듣지 못한 사람과는 함께 천하경영을 논할 수 없는 것 또한 분명한 일이다.”


    치중의 단어 뜻을 첨가하고 각색함   2017,03, 13  모디스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