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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 최대의 상륙작전 / 총동원된 독일군 기만작전

modest-i 2017. 3. 13. 19:27

사상 최대의 상륙작전

총동원된 독일군 기만작전

역사 사건 미스터리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1944년 6월 6일 새벽 3시에 시작됐다. 먼저 연합군은 셰르부르 반도 남동쪽 후미진 곳인 이지니를 공습했다. 이 또한 위장 작전의 일환이었다. 공습은 낙하산병 세 명, 모조 폭탄 수백 개, 매연을 뿜는 매연탄, 총성과 고함 그리고 군홧발 소리 등이 녹음된 축음기와 증폭기 한 대 등으로 구성됐다. 이 위장 화력은 독일군 352사단 916보병연대를 본래 위치에서 오마하 해변까지 물러서게 만들었다.

연합군에서 사용한 속임수는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확실하게 상륙 지점이 칼레임을 확인시켜주기 위해서 잠수함과 소해정, 수뢰정 등이 칼레에 출현하도록 했고 전폭기로 해변을 공습하기도 했다. 상륙작전이 개시된 뒤에도 거짓 작전은 계속됐다. 작전 개시와 더불어 연합군은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공개적으로 유포했다.

노르망디 공격은 독일군이 잘 막아내고 있다. 따라서 아이젠하워 장군은 칼레 공격을 위한 병력 일부를 노르망디에 투입할 계획이었는데 미국에서 신규 병력이 파병됨에 따라 계획을 취소했다. 이제 연합군은 독일군이 노르망디로 이동해 병력이 분산되는 시기를 기다려 내릴 아이젠하워 장군의 공격 개시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다.

이 같은 메시지가 영국 국영 방송인 BBC와 무선 통신사에도 배포됐다. 이것은 누군가가 이 정보를 독일군에 보내라는 뜻이었다. 연합군의 예측은 어김없이 맞아 들어갔다. 전후에 밝혀진 이야기이지만 ‘가르보’라는 암호명을 쓰는 영국 통신사가 노르망디 작전 개시 4시간 전에 작전 정보를 독일군에 발송했다. 메시지는 히틀러에게 즉시 보고됐고 6월 9일 히틀러는 독일의 최정예 부대를 노르망디로 급파하려는 계획을 철회했다.

이는 독일군 주력이 칼레에 계속 주둔한다는 뜻이었다. 아이젠하워는 독일 제15군을 48시간 동안만 칼레에 묶어두면 작전은 성공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독일군은 계획대로 움직였다.

1944년 6월 5일. 상륙작전이 펼쳐지기 직전에 101 공수 사단 소속의 낙하산 부대를 방문 중인 아이젠하워


물론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성공한 것은 연합군의 기만술 덕분만은 아니다. 사실 연합군으로서는 예기치 못한 행운이 연속으로 있었기 때문이지만 독일군의 초기 대응에도 결정적인 문제점이 있었다. 첫째는 독일군 지휘관인 롬멜이 현장에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현장 지휘관인 요들 장군은 베르흐테스가덴에서 잠을 자고 있었는데 부하들은 그를 깨우지도 못했다. 반면에 룬트슈테트 장군은 상륙작전을 보고받고도 진짜 상륙작전을 위한 위장 작전일지 모른다고 의심했다.

둘째는 상륙 날짜를 잘못 예상한 점이다. 연합군이 상륙하기 가장 적합한 순간은 해가 늦게 뜨고 새벽에 썰물이 들 때였다. 이 조건에 알맞은 시기는 6월 5일에서 7일 사이였지만 연합군은 기상 조건이 좋지 않아서 상륙 시기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장병 약 100만 명과 차량 17만 대가 선박 9,000여 척에 분산돼 대기하고 있었는데 잘못하면 작전을 한 달이나 연기해야 할 판이었다. 하지만 연합군은 예상을 뒤엎고 6월 6일 아침 함포 사격과 함께 상륙 주정을 발진시켰다. 날씨가 잠깐 좋아질 것이라고 기상대가 보고하자 지체 없이 공격 명령을 내린 것이다.

독일군은 완전히 허를 찔렸다. 기상이 나쁘고 파도가 높게 일고 있었으므로 연합군이 공격하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노르망디에 연합군이 대대적으로 상륙하고 있음에도 독일군 최고사령부는 양동 작전에 지나지 않는다고 믿었다. 그래서 주력부대인 제15군을 칼레 지역에서 노르망디로 이동시키지 않았다. 연합군의 기만전술이 빛을 발한 것이다.

1944년 6월 6일 개시되어 노르망디 교두보를 완전하게 확보하고 1944년 6월 30일 종료된 작전명 ‘넵튠(Neptune)’은 칼레가 아닌 소드(Sword), 주노(Juno), 골드(Gold)로 명명된 해변에 영국과 캐나다군이 그리고 ‘오마하(Omaha)’, ‘ 유타(Utah)’ 해변에 미군이 각각 상륙하면서 시작되었다.


6월 11일 연합군은 교두보를 확보했다. 6월 12일에는 병력 32만 6,547명과 차량 5만 4,186대와 군수품 10만 4,428톤이, 6월 17일에는 병력 60만 명과 차량 10만 대가, 7월 2일에는 병력 100만 명, 차량 17만 7,000대, 보급품 50만 톤이 상륙을 마쳤다. 연합군은 독일군 주력부대를 이틀 정도만 지체시킬 수 있다면 작전이 성공할 것으로 예상했는데, 독일군은 일주일이 지나도록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연합군 쪽 피해는 사망자 2,500명, 부상자 또는 실종자가 9,000명에서 1만 명 정도였을 뿐이다. 재미있는 건 날씨가 몇 시간 정도 좋아질 것이라고 정확하게 예측한 대령은 곧바로 장군으로 승진했다는 점이다.

셋째 실수는 어떻게 방어할지를 두고 독일군 사령부의 의견이 엇갈렸다는 점이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속임수로 여긴 히틀러는 주력부대를 이동시키는 데 반대했다. 상륙작전의 성패는 교두보를 확보하느냐에 달려 있는바, 독일군은 연합군을 격퇴할 기회를 스스로 놓친 것이다.

가장 치명적인 실수는 기갑부대가 히틀러의 명령 없이는 움직일 수 없었다는 점이다. 히틀러는 연합군이 반격하면 지휘관 사이에 혼선이 올 수 있다면서 자신이 직접 작전을 명령하도록 체계화했다. 그런데 히틀러는 연합군의 계교를 사실로 믿었을 뿐 아니라 스스로 기갑부대 동원을 막는 악수까지 두었다.

결국 독일군은 기민하게 반격하지 못했다. 연합군으로서는 엄청난 소득이었다. 사상자 규모만 따져도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성공적이었다. 영국 총리 처칠은 작전 개시일 당일에만 사상자가 2만 명에 이를 것이라고 추산했다. 7만 5,000명까지 예측한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연합군 피해는 앞에서 얘기한 대로 사망자 2,500명, 부상자 또는 실종자가 9,000명에서 1만 명 정도였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성공한 연합군은 독일군을 격파하면서 빠른 속도로 진격했다. 8월 말에는 이미 레지스탕스와 시민의 봉기로 해방된 파리에 유유히 입성할 수 있었다.



daum 백과에서 펌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