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투자=전쟁:알아야

칭기즈칸 친위대에는 정치적, 전략적 정보를 다루는 정보부서가 있었고 수부타이는 이 정보를 전투에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modest-i 2015. 8. 15. 00:56

몽골, 유라시아 호령한건 수적우세 아닌 전략의 힘

수부타이 / 리처드 A 가브리엘 지음 / 박리라 옮김 / 글항아리 펴냄

 

 

역사 속 위대한 개인의 야망은 '꿈의 조력자' 혹은 '제2인자'와의 만남을 통해 현실화되는 사례가 많다. 유라시아 대륙 전체를 자신의 말발굽 아래에 두고자 했던 칭기즈칸의 꿈 역시 그의 야망을 전술과 전략으로 구체화해내는 용장 수부타이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특히 초원에 흩어져 있던 몽골을 통일시킨 후 중국과 이슬람 세계, 러시아를 정복해 나가는 과정에서 전략의 설계자는 수부타이였다.

이 책은 몽골 대제국의 숨은 설계자였지만 역사 속에 거의 기록을 남기지 않은 칭기즈칸의 위대한 장군, 수부타이의 삶을 복원하고자 한다.

몽골이 치렀던 많은 전투의 구상과 실행을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사람은 칭기즈칸이었지만 작전 수립은 수부타이의 몫이었다는 것이 전쟁사 전문가인 저자의 생각이다. 특히 칭기즈칸이 대제국을 이루지 못하고 눈을 감은 후 모든 군사 기획과 감독 권한은 수부타이에게 맡겨졌다.

몽골이 압도적이고 괴멸적인 힘으로 정복전을 펼쳐나간 것으로 알려졌지만 사실 수적 우세 속에서 전투를 치른 적이 많지 않았다. 치밀한 준비와 정세 판단으로 쟁취한 승리에 가깝다.

칭기즈칸 친위대에는 정치적, 전략적 정보를 다루는 정보부서가 있었고 수부타이는 이 정보를 전투에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예를 들어 몽골이 헝가리를 공격한 일은 독일 황제와 교황이 극심한 대립관계에 있어 몽골이 침공해도 결코 힘을 합쳐 대항하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다.

수부타이가 지휘하는 몽골군의 강점은 효율적으로 전투작전을 수행하는 데 있다.

몽골군은 목표를 강조함과 동시에 목표 달성에 필요한 수단과 방법은 부대 지휘관이 결정하도록 맡겨두는 군사 지휘 방식을 처음으로 고안했다. 지침이 관대한 덕분에 야전 지휘관들은 아주 넓은 범위에서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 특히 독창성과 혁신성 그리고 실행상의 유연성이 강조되었다. 이 책이 단순히 전기가 아니라 한 권의 경영전략서로도 손색이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기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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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부타이는 몽골군 최고사령관으로서 거의 전권을 갖고 남송과 서하, 러시아, 폴란드, 헝가리, 아르메니아 등 광대한 유라시아 대륙 내 32개국을 잇달아 정복하는 전공(戰功)을 세웠다. 저자는 “칭기즈칸이 죽은 뒤에도 놀라운 세계 정복의 역사를 쓸 수 있었던 건 수부타이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쓰디쓴 패배를 맛봤던 당대 중국인들도 수부타이를 ‘신의와 불변의 장수’라고 칭하며 존경을 표시했다.

하지만 그의 성장 과정은 정통 몽골 전사와는 사뭇 거리가 있었다. 초원에서 태어나 세 살 때부터 말을 타는 칭기즈칸 부족과 달리 삼림지대의 대장장이 아들로 태어난 수부타이는 열네 살에 입대할 때까지 말을 타본 적조차 없었다. 당연히 몽골족의 트레이드마크인 활쏘기도 서툴렀다. 그런 그가 군 사령관까지 오를 수 있었던 건 칭기즈칸의 혜안 덕분이었다. 칭기즈칸은 부족 인종 출신과 상관없이 능력에 따라 적재적소에 사람을 쓸 줄 알았다. 중원 공략에 앞서 몽골 부족들을 통일한 계기가 됐던 차키르마우트 전투에서 칭기즈칸은 주요 지휘관에 자신의 부족 출신을 단 한 명도 임명하지 않았다. 오직 실력과 경험을 중심에 놓고 인재를 폭넓게 등용했다.

수부타이는 외부 문화나 기술에 대해 개방적이었고 이것이 군사 전략과 전술을 발전시키는 데 바탕이 됐다. 그 대표적인 예를 몽골의 금나라 정벌에서 엿볼 수 있다. 당시만 해도 변변한 성을 쌓아본 적이 없었던 몽골은 견고한 금나라 성채를 공격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공성(攻城) 작전의 기초는 물론이고 투석기와 같은 공성 병기조차 제대로 쓸 줄 몰랐다. 그러나 수년간 전투를 거치며 금나라 기술자들을 과감히 군대로 편입하자 전세는 역전됐다.

칭기즈칸의 기병대를 재현한 몽골인 부대. 이틀 만에 200km를 이동할 수 있었던 몽골 기병대는 서양인들에게 공포 그 자체였다. 동아일보DB

힘에만 의존하지 않고 광범한 정보 수집을 통해 적절한 외교력을 구사한 것도 한몫했다. 수부타이는 각 지역의 세력 판도와 그들 간의 관계를 면밀히 살폈다. 예컨대 1234년 금나라 수도 개봉(開封)을 두 갈래로 에워싸 협공할 수 있었던 건 몽골군 일부를 남송의 영토를 거쳐 우회 배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남송은 몽골에 군대를 지원할 정도로 금나라와 관계가 틀어져 있었다.

수부타이의 탁월한 군사전략은 700여 년이 흐른 러시아(당시 소련)에서 화려하게 꽃피운다. 300년간 몽골에 지배당한 러시아에선 수부타이를 기억하고 있었다. 2차 대전 당시 투하쳅스키 소비에트 붉은 군대의 사령관 등 소련 군부는 전후방을 가리지 않고 탱크를 통한 기습전으로 적을 교란하는 ‘종심전투(縱深戰鬪)’ 전술을 활용해 나치 독일에 대한 반격의 기틀을 마련했다. 소련 군부가 수부타이의 전술을 오래전부터 연구해 실전에 적용한 것이다. 오랫동안 잊혀진 수부타이가 세계 전사에 되살아나는 순간이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