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원의 지배자 [제 4 부] 변종사학의 얄량한 떡밥
6. 수렵狩獵 기술을 현명하게 적용適用시킨 전술戰術 운용運用의 탁월함
초원草原에서의 생활양식으로 말미암아 체질화體質化된 신체적 능력과 기민성機敏性을 가장 과학적으로 발전시킨 기동전술機動戰術의 활용이다. 즉 처음부터 여러 <파트>로 나뉜 군사적 조직들은 복잡한 패턴으로 흩어졌다가 타격점打擊點을 찾은 적절한 순간에는 한 치의 착오錯誤도 없이 다시 모이곤 하였다.
상대방이 그런 혼란 속에서도 이루어지는 질서 있는 모습에 당황하여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기회를 독수리처럼 포착捕捉하여 놀라울 정도의 속도를 가지고 전장戰場을 제 마음대로 요리하는 가운데 조화롭게 움직였다. 이와 같은 아비규환阿鼻叫喚 속의 철저한 도살屠殺을 맛본 사람들은 자신들이 악마惡魔에게 씌었다는 표현으로 밖에는 그 괴물怪物 같은 저력底力을 설명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전략적인 운용 방식은 [유목제국遊牧帝國]의 공통적인 군사적 행동유형이었는데 기록으로 가장 잘 나타낸 사실들이 <칭기즈칸>의 원정양태遠征樣態였다. 그렇다면 그 원천源泉은 과연 어디에서부터 이루어진 것일까?
그들과 맞선 상대의 혼魂을 빼앗은 귀신같은 군사조직의 이합집산離合集散 능력은 사실 우리 열국시대列國時代의 기록에서도 종종 나타났던 [단군조선 제국]의 유산遺産이기도 한 [사냥대회와 국가적 수렵행사狩獵行事]의 연장선延長線 상上에 있다.
1) 전통적인 생활 풍습을 통해 자연적으로 배인 개인적인 능력을 발전시키는 방식으로 진화한 훈련을 통해 나온 군사전술軍事戰術이었기 때문이다. 전쟁이 없는 해에도 능력을 저하低下시키지 않으려는 목적으로 행한 [국가적인 사냥 행사]는 보통 몇 달에 걸쳐 전개展開되었는데 광활한 초원草原이나 스텝지역에 병사兵士들을 늘여 세웠다(칭기즈칸의 경우 몽골리아 초원草原에서 거의 128KM에 걸쳐 이루어졌다는 기록이 있다).
2) 처음 시작되는 장소에서 수십km 많게는 수백km 거리에 사냥이 끝나는 지점地點을 만들어 <깃발>을 세운다. 그리고 길게 늘어선 대열隊列이 전진前進하면서 사냥감들을 앞쪽으로 모는 것이다.
3) 어느 정도 형태가 갖추어지면 다소 복잡하게 얽힌 양 끝이 정해진 기동방식機動方式에 따라 천천히 곡선曲線을 만들면서 원圓을 이루는 형태를 취한다. 넓은 지역 안의 사냥감들이 눈치 채지 못하는 가운데 포위하는 것이다(여기서 중요한 점은 사냥의 마지막 지점地點을 표시한 깃발들이 원圓의 중심으로 바뀌어 지는 과정이라는 사실이다).
4) 이때부터 동심원同心圓을 그리면서 원圓의 중심을 차츰 좁혀나가는 와중에 사냥감을 죽이거나 포회捕獲하는 것이다. 하지만 가장 위험한 맹수猛獸들은 놓아주는 가운데 나머지는 가장 나중에 힘을 결집한 촘촘한 대형隊形들 속에 몰아넣어 죽인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위대한 수렵狩獵 방식]을 통해 <유목제국군대遊牧帝國軍隊>는 멀리에서 보내는 신호信號만을 통해서도 정확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솜씨를 키우고 이를 바탕으로 오차誤差가 없는 정확성을 기르는 기동능력機動能力을 서로 조화시키며 다양한 상황에서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해야 할 일들을 분명하게 인식한다.
즉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현명한 행동을 개시開始하는 솜씨를 기르는 훈련을 반복하였으며 [제국帝國의 지배자支配者]는 사냥 놀이이자 훈련인 이런 행사를 통해 자신의 군사적인 목표와 전략을 현명한 장군將軍들에게 주입注入시키고 부하部下들 사이의 단결과 신뢰를 쌓는 발판을 만들었으며 전투에서는 용맹하고 강력한 군대의 기강紀綱을 다지는 기회로 삼았다.
한 가지 시사점示唆點은 [초원제국草原帝國과의 전쟁]에서 매우 독특한 현상들이 자주 보인다는 사실이다. 즉 [궤멸潰滅과 살육殺戮]이란 결과이다. 이긴 쪽은 피해被害가 불과 <수백 명>이지만 진편은 <수만>이 도살屠殺당하는 것이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났을까? 해답은 한 마디로 [기동력을 바탕으로 철저하게 각개격파各個擊破한다]는 전쟁 기술의 확연한 차별성 때문이다.
1) 월등한 기동력으로 적敵을 당황시키면서 대열隊列을 부분적으로 쪼개어 나가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병사兵士들은 대열隊列이 무너지는 순간 결속감結束感과 안정을 잃고 스스로 고립孤立되었다고 헤아려 전투를 포기抛棄한 채 달아나기에 바빠진다. 등을 보인 상대相對는 그 때부터 사냥감으로 전락하고 만다.
2) 주변 동료同僚들에게 의지할 수 없다는 절박감切迫感이 휘몰아치면 그 순간 견딜 수 없는 원시적인 공포감 속에 다시 말해 혼자 죽음을 맞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 내던져지는 것이다. 초원草原의 위대한 장군將軍들은 이를 철저하게 이용했다.
3) 적敵의 중심축中心軸과 연결된 고리를 단절시키면서 일부를 토막 내어 철저하게 고립시켜 가장 먼저 지휘자指揮者부터 혼자이며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고 느끼게 만들었다. 그 다음으로 병사兵士들이 벌판에 홀로 내던져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공포감을 주입注入시키기 위해 개인적으로 월등한 기동력과 전투력을 매우 효과적으로 활용했다.
사실 이러한 기마전술騎馬戰術은 특별하게 고안考案되거나 갑자기 툭 떨어진 게 아니다. [단군조선 제국]에서 발아發芽하여 [동호東胡-부여夫餘-고구려高句麗를 거쳐 흉노匈奴-유연柔然-돌궐突厥 등] 북방北方 유목제국遊牧帝國으로 꾸준히 이어져 온 평시平時 초원草原의 <대규모 몰이사냥>에서 발전된 영원불변永遠不變의 기본적인 전술戰術들을 개선한 양태樣態에 불과하였다. 이에 대한 유명한 말이 있다.
낮에는 늙은 늑대의 경계심으로 밤에는 갈 가마귀의 눈으로 지켜보아라. 전투에서는 적을 매처럼 덮쳐라. <칭기즈칸>
사슴 무리에 참을성을 가지고 몰래 접근하는 것은 사냥감인 적敵에게 들키지 않고 아무 소리 없이 보이지 않는 정찰조偵察組를 전방前方으로 보내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초원草原에서 사냥할 때 몰이 대형隊形을 사용하여 달아나는 야생동물 무리의 방향을 바꾸게 하는 것은 적군敵軍을 양兩 날개로 손쉽게 포위包圍할 수 있는 우회기동법(迂廻機動法Tulughma)을 배워주었다.
여기에 고도高度의 기동력機動力을 지닌 기병騎兵을 마음먹은 대로 활용하여 작전作戰이 개시開始되기 전부터 적敵을 당황하게 만드는 기습奇襲 전술과 편제編制의 효율성을 극도로 높여갔다. 더욱 현명한 점은 그렇게 해도 적敵이 한걸음도 물러서지 않거나 정돈된 모습을 강하게 유지하면 절대로 거점據點을 공격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흩어져 홀연히 사라졌다가 한족漢族의 창병槍兵이나 호레즘Khoresm*헝가리Hungary 등 서방西方의 기병騎兵들이 경계심을 늦추면 순식간에 모여 다시 돌아올 준비가 언제나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거짓 후퇴를 추격하는 실수를 저지른 장수將帥나 군주君主들은 다만 언제부터 끔찍한 재앙災殃을 맞느냐? 의 문제일 뿐이었다.
1) 먼저 적敵을 정상적인 공격루트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하고 근거지根據地에서 멀리 떨어진 험한 지형地形으로 유인하여 마치 포위당해 쓰러질 <소 떼>처럼 만들었다.
2) 이때부터 준비된 전위前衛와 양익兩翼의 경기병輕騎兵들 움직임이 바빠진다. 화살을 쉴 새 없이 날려(연사連射와 속사速射의 위력이 발휘되는 시점時點이다) 공격하는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한다. 바로 이런 위력적인 양상樣相이 적敵의 대오隊伍에 엄청난 혼란을 가져다주었다.
※ 그 무렵의 전쟁을 살펴보면 따라잡기 어려운 기동력機動力과 엄청난 화살의 발사거리(거의 400m 이상) 그리고 마치 표적으로 삼은 사냥감은 반드시 적중시키는 듯한 정확한 살상殺傷 능력에다가 당시로서는 보기 드믄 전술상의 우위優位에 뚜렷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4) 전위부대前衛部隊는 대형별隊形別로 자주 교체交替되어 일제사격一齊射擊을 퍼부은 다음 빠져나갔다. 적敵이 어느 정도 앞으로 유인되고 원거리遠距離 사격으로 기동력을 잃게 되면 중무장重武裝한 기병대騎兵隊를 중심으로 군도軍刀를 빼어들고 돌진突進하여 적敵을 조각 조각내었다.
※ 기병騎兵 한사람 한사람은 이러한 임무에 알맞는 무장武裝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두 개의 활과 화살 통*굽은 칼*손도끼*안장鞍裝에 걸린 쇠로 만든 미늘창*상대 기병騎兵을 떨어뜨리기 위한 갈고리 창*당기면 죄어드는 올가미가 있는 <말> 털로 짠 밧줄 등이었다.
이들은 예기치 않게 나타나 잘 정돈된 모습으로 배치되었고 지평선地平線 위로 등장하여 둥글게 달렸다. 장엄한 느낌까지 불러일으키게 하는 침묵 속에서 서행徐行하다가 지휘하는 고함소리조차 없이 기수旗手의 신호信號에 따라 움직이고 진격했다. 바로 그 순간 갑자기 악마惡魔와 같은 비명과 고함을 내지르며 돌진突進하는 모습에 상대방의 공포심은 최대한 달아올랐다.
이는 희생犧牲이 되는 대상물對象物을 제압制壓하기 위하여 흥분시키고 갈피를 못 잡게 하는 <사냥몰이>의 오래되고 전통적인 계략이었다. 잘 훈련된 궁수弓手들은 마치 독수리가 최고 높이로 날아올랐을 때 쏘아 떨어뜨리듯이 적敵이 가장 지쳐있을 때 일제히 덮쳤다.
가장 모범적인 형태로 완성된 훌륭한 표본은 몽골군이 [트란스옥시아나와 헝가리]에서 치러졌다. 사냥감을 지치게 하고 갈팡질팡하는 가운데 기진맥진하게 만든 다음 포위하여 매우 조직적으로 살육殺戮함으로서 끝장을 내는 거대한 <몰이사냥>의 전형典型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적敵을 발견하자마자 한 사람이 서너 대씩 화살을 쏘아대면서 돌진突進한다. 그래도 꺾어지지 않는다는 걸 알아차리면 우군友軍이 있는 곳으로 퇴각退却한다. 그러나 이런 행동은 미리 배치된 복병伏兵들 속으로 유인하고 추격하기 위한 미끼이다. 적敵이 너무 강하다고 판단되면 하루나 이틀이 지나도록 후퇴하면서 지나는 지역을 약탈한다...
아니면 잘 선택된 지점에 설영設營한다. 그리고 적敵이 줄을 지어 지나가기 시작하면 튀어나와 기습한다...그들의 전쟁 기술은 여러 가지이다. 병력 대부분은 포위하기 위해 양 날개에 자리 잡고 상대방이 제1차 기병돌격騎兵突擊을 감행敢行하면 포로捕虜들과 외국인外國人 보조부대로 이루어진 제1선으로 맞서게 한다.
이 일을 너무나 주도면밀하게 하기 때문에 적敵은 실제보다 훨씬 더 많은 것으로 착각하게 만든다. 만일 완강하게 방어하면 전열戰列을 열어주어 도망칠 수 있도록 했다가 갑자기 추격하여 가능한 많은 도주자逃走者들을 베어버린다(이 전술은 AD 1241년 수베에테이가 사요Sajo에서 헝가리 군軍을 상대로 사용하였다). 그들은 화살로 인마人馬를 살상殺傷하는 걸 목표로 삼기 때문에 백병전白兵戰은 가능한 피한다. <플라노 카르피니>
사냥을 하고자 할 때 그들은 야생동물이 있는 곳에 대규모로 모여 짐승들을 그물처럼 포위하고 화살로 쏘아 쓰러뜨리기 위하여 짐승들에게 조금씩 다가간다. <루브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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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전술戰術을 극도로 발전시켜 완성한 몽골의 경우를 자세히 살펴보자. <칭기즈칸>이 호레즘Khoresm의 샤Shah인 무함마드Muhammad 2세를 공략할 때의 전략이다. <샤>는 몽골군이 호레즘의 최동단最東端인 트란스 옥시아나 [1]를 공격하리라 예측하고 그들보다 두 배나 많은 잘 훈련된 투르크Tu가의 40만 기병騎兵을 반드시 건너야만 할 시르다리아Sirdarya 강변江邊을 따라 만들어진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요새要塞에 집중적으로 배치했다.
[1] 동東으로 800km에 이르는 시르다리아 강江은 북쪽은 군대가 가로지를 수 없을 만큼 혹독한 키질쿰Kyzylkum 사막沙漠이 서편엔 아무다리아Amudaria 강江이 가로막아 천혜天惠의 방어막防禦幕을 형성했는데 가장 중요한 사마르칸드Samarkand와 부하라Bukhara가 모두 이곳에 위치해 있었다.
유일한 허점虛點인 남부로 돌아 나오는 길은 너무 멀어 틀림없이 <시르디리아 강江>을 넘으리라고 보았다. 이윽고 AD 1219년 정찰대偵察隊는 몽골군이 빠르게 <페르가나 계곡>을 지나 강江의 남쪽으로 접근함을 알려왔다. 무함마드Muhammad 2세는 아들 잘랄jalal 앗-딘ad-Din을 보내 치열한 전투 끝에 패배시켰다. <앗 딘>은 이렇게 말했다.
명성名聲과는 달리 몽골군은 원정遠征 길로 초췌한 모습이며 두려운 존재가 아닙니다. <말>들 또한 메말라 있었으며 더 이상 전쟁을 원하지 않는 듯합니다.
그러나 몇 달 뒤 몽골군은 갑자기 북쪽에 나타나 <오트라Otra>를 공격해 전쟁의 원인이 된 몽골 상인商人들을 살해한 총독總督을 사로잡아 눈과 귀에 끓는 은銀을 부어 죽였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쳐들어오자 당황한 무함마드Muhammad 2세는 군대를 파견해 북쪽 전선戰線을 서둘러 보강補强했다. 비록 신속히 이동할 수는 있지만 수적數的인 면에서 압도적인 우세優勢를 당해내지 못하리라 여긴 것이다.
그러나 생각과는 달리 몽골군은 <오트라>에서 전격적으로 시르다리아 강江을 따라 남쪽으로 진격하는 길을 택했다. 갑자기 군사를 나누어 <칭기즈칸>의 장남長男 <주치Jochi>가 이끈 일군一軍은 강변江邊을 따라 주요 요새要塞를 공격하면서 언덕과 강江 근처의 둔덕을 따라 움직이게 했고 명장名將 <제베Jebe>가 거느린 일군一軍은 문득 남쪽으로 사라졌다. 무함마드Muhammad 2세는 서둘러 <사마르칸드>에 주둔군駐屯軍 일부만 남겨두고 강江가를 따라 병력兵力을 파견해 배치했다.
<주치>의 군대는 턱없이 적어 겨우 2만을 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몽골군은 매우 빠르게 움직이면서 연달아 요새要塞를 불사르고 황폐화시켰다. 전방前方에서 계속해 들려오는 침울한 소식에 결국 무함마드Muhammad 2세는 차츰 당혹스러워지고 있었다.
몽골 기병騎兵들은 훨씬 가볍고 빠른 <말> 몇 마리를 여분餘分으로 끌고 다니면서 지치면 바꾸어 타고 달렸으며 군사軍士들은 보급 마차를 활용해 편하게 움직였다. 거의 두 배 이상 빠르게 움직이면서 활솜씨도 남달라 공격하거나 후퇴하는 가운데에서도 능숙하게 쏘아 치명적인 손상損傷을 입혔다. 멀리 떨어졌어도 깃발이나 봉화烽火로 완벽하게 소통疏通하여 기습공격은 정교하고 조직적이며 예측할 길이 없었다.
<호레즘>의 군대가 이런 끊임없는 공격에 시달리며 점점 지쳐가고 있을 때 <오트라>에서 남하南下하는 것처럼 보이다가 갑자기 사라졌던 <제베>가 어느 틈에 나타나 엄청난 속도로 북서北西 방향인 <트란스옥시아나>로 진격한다는 소식이 날라 왔다.
급히 5만을 그쪽으로 보내면서 아직도 상황을 낙관樂觀했는데 정규전正規戰에서는 이전以前 <페르가나 계곡>의 전투처럼 강한 면모가 있음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번은 달랐다. 이상한 무기(武器-화살에 끓는 타르를 묻혀 쏘았다)로 인한 매캐하고 자욱한 연기 속에서 중무장重武裝한 기병騎兵들이 공격 루트를 숨긴 채 경악할만한 속력으로 진격해 온 것이다.
<마차>들은 쉴 새 없이 진영陣營에서 보급품을 실어 날랐고 병사兵士들은 하늘을 화살로 뒤덮으며 전장戰場을 압도壓倒했다. 그들은 말을 타고 달리면서 <호레즘>의 병사들을 철저하게 유린蹂躪했다. 이제 <호레즘>의 군대는 서쪽으로 퇴각해 다시 정비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어느새 <칭기즈칸>의 친위군親衛軍이 <사마르칸드>의 서쪽 도시 <부하라>에서 나타났다. 그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왔단 말인가? 도무지 납득할 수가 없는 일이 현실로 닥친 것이다. 이들은 곧장 <부하라>를 점령했고 며칠 후에는 <호레즘>의 자랑인 <사마르칸드>를 초토화焦土化시켰다.
경악한 무함마드Muhammad 2세는 장군將軍들과 군사軍士들이 도망가는 걸 보면서 목숨이나 살리려고 약간의 수하手下들과 달아났는데 몽골군은 지체 없이 그를 뒤 쫓았다. 그로부터 몇 달 후 세상에서 가장 부유하다고 뽐내었던 무함마드Muhammad 2세는 카스피Caspie 해海의 작은 섬에서 누더기 옷을 걸친 채 굶주림 속을 헤매다가 삶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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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칸>은 세계에서 가장 빠른 병사들을 군사작전에 절묘하게 활용하기 위해 규율과 평시 훈련으로 조직화한 천재적인 인물人物이었으며 과거의 전통적인 유목전술遊牧戰術을 최대한의 유산遺産으로 받아들인 현명한 [초원草原의 지배자]였다. 따라서 주기적週期的으로 한족漢族 국가와 서방세계를 공황상태恐慌狀態에 빠뜨린 [유목제국遊牧帝國의 전쟁지도전략戰爭指導戰略]은 대략적으로 이렇게 정리될 수 있다.
1) 몽골군이 중요한 전쟁을 치룰 때 그렇듯이 출정出征 전에 철저히 준비하는 단계이다. 즉 치명적인 난관難關을 가장 효과적인 이점利點으로 전환轉換시키는 것으로서 [칭기즈칸]이 <호레즘>을 공략하려면 반드시 <키질쿰 사막>을 횡단橫斷하여야 했는데 사막의 오아시스를 잘 알고 있는 <길 안내자>로서 활용할 수 있는 사람을 h로捕虜로 잡아 그의 도움으로 가로지른 전술이 대표적이다.
2) 이어 상대가 전혀 눈치 채지 못하도록 준비를 느슨히 하고 자만自慢에 취해서 이런 상황을 탐지探知하지 못하도록 게으르게 만드는 단계이다. 몽골군이 <페르가나 계곡>에서 일부러 져주어 <호레즘>의 신경을 무디게 한 전략이다.
3) 이제 본격적인 속도전速度戰으로서 예측하지 못하는 기습공격으로 당황한 상대방이 혼란에 빠진 가운데 관심을 한 방향으로 쏠리게 유도하는 단계이다. <제베>의 갑작스런 출현이 대표적인 사례事例이다.
4) 마지막인 마무리 국면局面으로서 적敵이 전혀 생각조차 하지 못한 방면方面에서 나타나 더욱 빠르게 공격을 감행하는 단계이다. <칭기즈칸>이 사막을 건너 적敵의 핵심지역인 <부하라>에 등장한 것이 바로 절묘한 전략의 정수精髓이다.
전혀 상상하지 못한 순간에 정체불명의 대군大軍이 출현하면 병사兵士들은 심리적으로 극도의 공포감과 위협을 느낀다는 점을 십분 활용한 탁월한 전술이다. 이처럼 상대의 허虛를 찌르는 [유목전술遊牧戰術]은 실제의 전력戰力보다 몇 배 이상의 상승효과를 부추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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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기마전사騎馬戰士들이 보여주었던 [개별전술個別戰術]이다. 추격당할 경우 덫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초원草原으로 유인한 다음 기병騎兵의 기동성과 뛰어난 궁술弓術로서 제압하는 것을 장기長技로 삼는다.
특히 추격하는 상대방을 가장 두렵게 하여 공포감을 맛보게 해준 것은 궁사弓士들의 능력이었다[1]. 이 때문에 미리 기다리고 있던 원군援軍을 만나 별안간 행동을 바꾸어 공세攻勢로 돌변突變할 무렵부터 몇 배나 약해진 자신들의 전력戰力에 대해 뼈저린 좌절감을 씹어야 했다.
[1] 이는 크게 역사逆射와 연사連射 그리고 속사速射로 나누어진다. 역사逆射는 퇴각退却하는 와중에도 <말> 위에서 몸을 비틀어 뒤로 돌리면서 <활>을 쏘는 걸 말하는데 흔히 서양西洋에서는 [파르티아Partia 활쏘기]라고 부르는 방식이다.
연사連射는 한 번에 <활>을 몇 개씩 시위에 매겨 쏘는 걸 이야기하는데 이때는 사격 거리와 정확도가 떨어지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손가락으로 시위 줄을 비틀어 꼼으로서 화살대 자체가 회전하면서 날아가 더욱 깊숙하고 광범위한 상처를 낸다.
속사速射는 화살을 메기는 시간을 빠르게 하여 상대방이 보면 쉬지 않고 쏘는 모습처럼 느끼게 하는 방법인데 많은 전사戰士들이 전투 대형隊形을 이루어 한꺼번에 쏘아 기선機先을 제압할 때 즐겨 쓰는 기법技法이다.
7. 같은 병력兵力으로서도 근접전투近接戰鬪에서 우세優勢를 점占한 강인한 전투력의 바탕이 된 [피 홈] 등의 착안着眼
대개 국지局地 전투의 마무리는 돌격突擊에 의해 쇄도殺到하여 타격打擊을 가하는 육박전肉薄戰이다. 이 때 아무리 거칠고 드센 충격을 받아도 절대로 <말> 위에서 떨어지지 않게 하여 공격력을 극대화시킨 등자鐙子의 위력은 이미 말했다.
이에 곁들여 눈길을 끄는 기술적 역량力量은 [피 홈]이라는 기발한 착상着想이다. 찍거나 베는 도刀의 특성상(칼등이 칼날에 비해 두껍다) 상처 부위를 벌려놓기 때문에 빼거나 회수回收하여 바로 다음 동작으로 이어지는데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하지만 검劍은 주로 찌르는 용도가 대부분이어서 일단 피부를 뚫고 들어가면 살점이 칼 몸에 달라붙어 빼기가 쉽지 않으며 힘을 주어 당길 경우 살점이 함께 찢겨져 묻어 나온다.
상당한 애로隘路가 발생하는 것이다. 물론 도刀의 경우도 찌르는 상황이 벌어진다. 더구나 극도의 효용성을 위해 곡도曲刀로 발전시킨 결과 이런 현상은 더욱 심각하다. 이를 방지하려고 일부러 칼 등을 따라 길게 [피 홈]을 내어 함께 들어간 공기의 작용과 도刀의 특성에 의한 틈새를 바탕으로 피부속의 <살점>이 달라붙는 어려움을 피한 매우 영리한 발상發想이었다.
8. 절묘한 상호소통相互疏通 능력과 자연적으로 형성된 규율規律
앞서 언급한 [위대한 수렵狩獵 방식]을 통해 유목제국군대는 멀리에서 보내는 신호信號를 통해서도 정확한 의사소통 능력을 키웠다. 이를 바탕으로 오차誤差가 없는 정확성을 기르는 기동능력을 서로 조화시키며 다양한 상황에서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해야 할 일들을 분명하게 인식하였다.
즉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현명한 행동을 개시하는 솜씨를 기르는 훈련을 반복하였으며 [제국帝國의 지배자]는 사냥 놀이이자 훈련인 이런 행사를 통해 자신의 군사적인 목표와 전략을 현명한 장군將軍들에게 주입注入시키고 부하部下들 사이의 단결과 신뢰를 쌓는 발판을 만들었으며 전투에서는 용맹하고 강력한 군대의 기강紀綱을 다지곤 하였다.
또한 초원의 기마전사騎馬戰士들은 마치 핏속에 규율規律을 지니고 태어난 듯이 한마디의 명령 없이도 스스로 전열戰列을 가장 알맞은 형태로 정돈하고 신호信號가 내리기도 전에 명령을 기다렸으며 젊은 용사勇士들은 초원의 생활 속에서 배어난 행동으로 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직업군인으로 길러져 갔다.
이는 원정군遠征軍의 행동에서 더욱 두드러지는데 혹독한 추위나 참을 수 없는 더위는 물론 생존生存을 위협하는 가혹한 생활환경 속에서도 흐트러지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또한 긴 기간에 걸쳐 몽골군에게 잘 훈련된 아시아지역의 <투르크 집단>이나 <러시아>가 후일 막강한 군사적 능력을 보이며 크게 일어선 것을 보아도 여실하게 입증立證된다.
※ <쿠빌라이Kublai> 휘하麾下에 있던 투르크Tu가 병사兵士들은 함께 아시아 전체를 정복활동의 무대로 삼았고 <킵착칸국> 아래에 있던 그들은 비엔나Vienna 성문城門까지 치달았으며 <훌레구Hulἅgu>가 거느린 투르크 병사兵士들은 이집트Egypt의 강기슭까지 다다랐다.
◀■ [결론적으로 이 모든 걸 갖추었으며 또한 더욱 뛰어나게 발전시킨 역사적*기술적*문화적 배경을 가진 민족만이 당연하게 [초원의 지배자]로 우뚝 서며 [제국帝國]을 건설할 수밖에 없다] ■▶
제5장 유목귀족계급遊牧貴族階級의 등장과 군사민주주의체제軍事民主主義體制 완성
1. 유목적遊牧的 군사계급집단軍士階級集團의 <파워엘리트> 역할 강화
광대한 초원草原에서의 거리 감각과 고정적인 시간 개념을 초원超越하기 위한 생존방식의 발전 과정에서 자연적으로 체질화되어 형성된 기마騎馬와 궁술弓術로 무장한 전사戰士 엘리트 [1]들의 역량力量은 정주문화권定住文化圈의 농경민農耕民이 접하였을 때 가공할만한 위력이었으며 공포의 결정체였다.
[1] 실제로 이들은 긴급을 요할 경우 한 달 이상을 건량乾糧과 <말> 젖으로 때우며 <말> 위에서 내리지 않고 잠자거나 쉬면서 계속 행군行軍할 수도 있었다. 그러므로 종종 농경부족農耕部族이 상상할 수 없는 시간에 미처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서 전혀 짐작하지도 못할 만큼 많은 전사戰士 집단들과 부딪쳐 궤멸적潰滅的인 타격打擊을 입곤 했다.
어린 아이들은 양羊을 탈 수 있으며 활을 쏘아 새나 쥐를 맞출 수 있다. 좀 더 자라면 여우와 산토끼를 사냥하여 양식糧食으로 이용한다. 어른이 되면 <활>을 맬 수 있을 만큼 건장해지며 모두 뛰어난 기마병騎馬兵이 된다. 그들의 풍습은 평화 시에는 가축을 따라 이동하고 짐승과 새를 사냥하는 것을 생업生業으로 하지만 위급한 상황에서는 누구나 군사기술을 연마하여 침공侵攻한다. 이는 그들의 타고난 본성本性이다. <사기史記 권110 흉노열전匈奴列傳>
이 집단들이 <유목사회>에서 중추적中樞的인 계급으로 성장하는 가운데 전쟁 수행은 물론 정복지征服地에서의 지배와 통제과정에서도 가장 효율적이고 신속한 결과를 만들어주는 [파워 엘리트]로 두각頭角을 나타내었다.
[유목사회구성체遊牧社會構成體]에서 탄생시킨 특수한 신분身分이며 또한 오직 그 사회에서만 만들어질 수 있는 독특한 집단이었다. 즉 [유라시아 초원 세계]에서 등장한 진정한 유목계급遊牧階級일 뿐만 아니라 기존의 역사적 관념을 뛰어넘는 전혀 새로운 신분계층身分階層이기도 하였다.
1) 기마騎馬를 내 몸의 일부분처럼 자유롭게 이용한 전사戰士들은 경이로울 만큼 먼 거리를 관제管制할 수 있었으며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떨어져 있던 공동체共同體를 제압制壓하거나 통제統制할 충분한 능력을 보유하였다. 그야말로 동서東西로 길게 펼쳐진 [유라시아 초원벨트]를 효과적으로 경영經營하기에 가장 알맞은 수단을 그들은 개발하고 있었다.
2) 그래서 중앙아시아나 유럽의 군주君主들은 전혀 예기치 못한 장소와 시간에 종종 그들의 공격 대형隊形을 맞닥뜨린 후 경악했으며 눈에 보이는 몇 사람의 기마병騎馬兵을 쫓아 무심코 언덕을 넘고 나서야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구릉丘陵 뒤에서 즐비하게 늘어서 전투준비를 하고 있던 엄청난 수의 병단兵團을 보고 제 눈을 비비면서 좌절감을 맛보곤 했다.
그들은 적敵을 매복 장소로 유인하여 공격하는 기술이 발달하였다. 적敵을 발견하면 사냥감을 찾는 새떼가 모여드는 것처럼 행동한다. 곤경困境에 빠져 패배하면 와해瓦解되어 구름처럼 흩어진다. <사기史記 권110 흉노열전匈奴列傳>
이 특별한 [유목전사귀족遊牧戰士貴族]들은 정주집단定住集團의 혈연적血緣的 융합체계融合體系보다 더 복잡한 정치체제를 운영할 수 있었고 종족적種族的이거나 경제적으로 뒤섞인 사회조차도 확실하게 통제할 능력이 있었다.
또한 군사적 기능과 효율적인 제어방법制御方法을 통해 자신들의 위력을 부각浮刻시키는데 탁월하였으며 이미 역사 이전시대의 느슨한 [결합사회구조結合社會構造]를 벗어나 역사 초기부터 유목적정치공동체遊牧的政治共同體는 [국가國家]라는 형태를 이루는데 필요한 전제조건前提條件이었던 <단순한 혈연집단血緣集團을 능가하는> 정치단위政治單位를 구성하고 있었다.
즉 중앙의 권력을 핵심권역核心圈域에 두고 정교한 계급적 군사구조에 기초한 지배층을 형성한 형태는 여러 시기를 거치면서 자체진화 과정을 밟고 있었는데 <춘추春秋-전국시대戰國時代>에 이르도록 정주사회定住社會라는 테두리 안에 침몰한 한족漢族들은 [북방 초원]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이러한 심상치 않은 변화를 전혀 깨닫지도 못하였다.
따라서 겨우 기지개를 편 이 시기에 들어와서야 인식認識의 지평地坪이 열려진 북중국北中國에서 마주친 이방異邦 세력들에 관해서는 [변경지대邊境地帶]라고 표현한 그들의 시각視覺 속에서 변질變質되어 직간접적으로 상호 관련되어 있던 자신들의 정치적 과정 내부 문제로만 철저하게 윤색되고 말았다.
즉 제후국諸侯國들 사이에 벌어진 주도권主導權 쟁탈爭奪과 생존을 위한 정치적 <장기판>에서 다만 보잘 것 없는 볼모신세로 전락되어지고 마는 수모受侮와 치욕恥辱의 곡필曲筆 대상으로 철저히 놀아난 것이다.
□□□□□□□□□□ [뒤집어 보기] □□□□□□□□□□ (군사민주주의軍事民主主義)
통치자統治者는 다른 부족집단의 끊임없는 협상協商을 통해서만 유지된다. 따라서 결코 통치권統治權이라는 개념을 연상시키는 절대 권력의 극단적 형태로 발전하지 않는 내부적 제약요인制約要因을 갖게 된다.
지도자指導者는 오히려 평등平等한 자者들 가운데 일인자一人者였으며 권력자權力者로서의 지위地位는 궁극적으로 구성원構成員들과 여타 수장首長들로부터 획득한 동의同意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러한 동의同意는 강요될 수는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카리스마적 지도자指導者도 측근側近인 조언자助言者들과 군사지휘관軍事指揮官들 그리고 출신 구성원構成員들로부터 획득한 자발적 동의同意를 기반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절대적인 협력 없이는 권력자權力者로 부상浮上할 수 없었다.
또한 이러한 지지자支持者들도 계속해서 복종하는 위치에 머물러 있지는 않았다. 바로 이런 체제體制를 북방제국운영北方帝國運營의 기초이며 핵심 동력動力이었던 [군사민주주의체제軍事民主主義體制]라고 부른다.
하지만 한족漢族들은 이를 저들의 절대권력자絶大權力者인 [황제권皇帝權]에 곧잘 비유하여 [부족협의체적部族協議體的 수장권首長權]이라고 왜곡歪曲시키고 있다. 그러나 실상實狀을 보면 군사권軍事權과 종교적宗敎的 권위權威와 현세적現世的 정치권력을 독점獨占한 형태인 통치자統治者의 개인적 자질資質을 초월하며 결코 도전할 수 없는 위치로 자리매김한 [개인적이며 절대적인 황제권皇帝權]은
오랜 역사적인 전통傳統을 가지면서 군사적軍事的인 지도력指導力을 갖춘 지도자指導者 그룹들이 서로 견제牽制하고 인정하는 과정(부족회의部族會議*평의회評議會)을 통해 합의合意된 통치 권력을 만들어내는 북방민족北方民族의 방식이 훨씬 더 오늘날 국민과 국회國會를 통해 선출選出하는 [민주주의적民主主義的 방식方式]의 선구先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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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군사귀족국가軍事貴族國家의 주변부周邊部 지배 및 위압威壓
초기 [유목사회]가 <군사엘리트>를 주축主軸으로 귀족적인 국가를 형성하면서 주변부에 위력적인 존재로 발돋음하게 된 바탕에는 기술상의 진보進步와 떨어질 수 없는 관계를 이루고 있다. 광대廣大한 영역국가領域國家로 발전하는 과정의 중심에는 최초로 <말>의 효용을 인식한 영리한 판단과 바퀴와 <말>을 이용한 마차馬車를 창안創案하여 이동성을 배가倍加시킨 현명함의 모범을 보여준다. 따라서 농경農耕의 주요 동력원動力源이었던 행동이 느린 <소>를 활용한 수레를 가진 정주문명定住文明이 맞이할 운명은 처음부터 결정되었다.
고정된 농경지農耕地에 발목을 잡힌 정착민定着民들이 발전시킨 집단부락集團部落의 이점利點을 이용한 보병步兵 무기체계와 전술戰術은 목축牧畜이라는 환경 속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기마술騎馬術과 궁술弓術이라는 기술적인 진보進步와 생활화된 이동과 수렵狩獵을 통해 익힌 포획捕獲과 살상殺傷이란 생활습속에 기초한 전술을 체질화 시킨 전사조직戰士組織의 우월성優越性에 종종 절망감을 맛보았다.
[유라시아 초원] 환경에 성공적으로 적응시킨 진화방식進化方式은 전투에 참가하는 일이 주요 임무였을 것으로 보여 지는 전혀 새로운 [파워엘리트 계급-고구려高句麗의 좌식전사계급坐食戰士階級을 생각해 보라]을 탄생시킨다. 이들은 비록 [정주문명定住文明]의 잉여생산물剩餘生産物로 형성된 유한계급有閑階級과는 본질적으로 같은 양태樣態의 발전 과정이었지만 파괴적인 위력에 있어서는 본질적으로 차원次元이 달랐다.
아마도 붙박이 토지土地에 인적人的*물적物的인 투자投資를 집중하기만 하면 되는 농지農地와는 달리 환경環境에만 의존하던 초지草地 확보를 위한 경쟁과 목축동물을 방어해야만 하는 절박한 조건에서 등장한 새로운 양태樣態의 잉여생산물剩餘生産物 소비계급이었음이 확실하다. 그리고 이들은 [정주문명定住文明]에 대한 지배력과 정치적 영향력을 확산시키는 데에 충실히 그리고 폭력적으로 작용하였다.
이 단계에서 귀금속과 보석 등으로 치장된 장신구(裝身具-부장품副葬品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차츰 압도적으로 변화한다)들이 만들어준 [유목국가 지배계급]의 변신變身은 주목할 만하다. 용맹과 지위地位의 상징이나 위신재威信財로서 기능하는 가운데 이들이 유통하는 거점據點과 생산물의 원천을 통제하기 위한 지배구조를 확대하는 과정은 [군사엘리트 계급]에게 권력을 집중시키고 군사적인 팽창膨脹을 이루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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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목사회가 국가 형태로 발전했을 때마다 가공할 위력을 보였던 원인)
이 부분에서 우리가 흔히 착각하는 사실들이 있다. 환경적 차이로 인해 다른 생존방식을 선택하였을 무렵과 이를 바탕으로 모범을 보일만한 성공을 이루어 월등한 군사력과 잠재적 위력을 지닌 국가구조를 이루었을 시기의 식량생산구조食糧生産構造와 잉여생산물剩餘生産物 비축備蓄 방식의 진화를 동일시하는 학문적인 연구태도와 분석 경향들이다. 그만큼 [유라시아 유목제국]의 발현發顯 형태는 세계역사에서 유례類例가 없을 만큼 위압威壓을 떨쳤던 근본적인 이유가 있으며 또한 매우 독특하다.
1) 제국帝國 자체의 넓은 영역을 지리적 이점利點으로 한 보조식량생산補助食糧生産과 항상적恒常的 비축양태備蓄樣態의 등장
자체 경작지耕作地의 운영 [1] 과 우세優勢 지역에서 수확收穫한 농작물農作物의 강압적 획득獲得이 유목생활과 상호보완적으로 이루어졌는데 가장 기본적인 자기완성 구조로서 [농경農耕 보조補助*유목 중심의 국가경영체계國家經營體系]를 지향指向하고 있는 점이 눈에 띤다는 사실이다.
[1] 흉노匈奴를 비롯한 모든 제국帝國의 탈취奪取 행위에서 한 축軸을 형성한 것이 바로 [가축家畜과 사람의 약탈掠奪]이었음이 기록 분석 결과로서 인정되고 있다. 제국帝國 안에 이루어진 경작지耕作地에 소요되는 인력人力과 각종 기물器物들을 제작하기 위한 수공업자手工業者 집단의 확보가 그 목적이었다.
즉 일정한 정착지定着地를 중심으로 중핵지대中核地帶를 형성하여 국가의 중심축中心軸으로 삼고 다음으로 거점據點이 될 지역을 기반으로 산재散在한 부족部族들과의 연결망連結網을 확보하는 전형적인 통치 구조를 가지고 있다.
지속적인 전사집단戰士集團의 양성養成과 수혈輸血을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다. 이는 지난 역사를 통하여 어째서 어떤 부족들이 어떤 방식으로 대제국大帝國을 형성하여 경영했는지를 조금만 눈여겨보면 금방 이해가 간다.
한결같이 [중핵지대中核地帶(농경지農耕地가 있는 초원草原)-거점지역據點地域(유목遊牧)-주변지대周邊地帶(확장지역擴張地域)의 기본 양상樣相]을 띠고 있음이 감지感知된다. 일례一例로서 후일後日까지 유목집단遊牧集團들이 [초원의 지배자]가 되거나 다른 세력들을 굴복시키면서 제국帝國으로 일어서면 중심지는 언제나 농경農耕이나 안식처安息處로서 유용한 오르콘Orkhon 강江 상류上流 지방에 자리를 잡았다(투르크계인 흉노匈奴-몽골계인 선비鮮卑와 유연柔然-투르크계인 돌궐突厥과 위구르와 키르키즈-몽골계인 거란契丹과 케레이트와 나이만-몽골계인 몽골 등). .
2) 서부西部의 [비옥肥沃한 초승달지대]에 대한 변함없는 영향력 확보
오늘날 <터어키를 포함한 서남아시아> 지역을 말하는데 이곳은 원래 두 개의 큰 강(티그리스Tigris*유프라테스Euphrates)을 지닌 울창한 숲으로 뒤덮인 비옥肥沃한 땅으로서 [가축화家畜化와 작물화作物化]가 동시에 가능한 풍부한 동식물動植物이 있었음이 고식물학자古植物學者와 고고학자考古學者들이 공통적으로 입을 모으고 있다.
그래서 <수메르Sumer> 이후 BC 4000년 이전의 <히타이트Hittite>와 <바빌로니아Babylonia-아시리아Assyria-페르시아Persia>에 이르기까지 줄곧 이름을 빛내었으며 그 후로도 [중국-중앙아시아-인도-지중해 국가와 유럽 지역]을 이어주는 중심축中心軸으로서 기능하여 몽골에 이르러 비로소 완전한 속령屬領으로 만들었을 만큼 모든 <유목민족>들이 역사 이래 지속적으로 관여關與한 거점據點 지역이었다.
3) 유라시아에서 생태학적生態學的으로 격리隔離되어 [대륙 남방南方의 거대한 섬]이라 일컬을 만큼 모든 생산자원生産資源들이 밀집密集되어 자체완성적인 농경문화農耕文化를 이루고 있던 중국中國의 정주국가定住國家에 대한 집요한 관심과 지배력 확장擴張(공납체계貢納體系의 형성과 황하黃河 이북以北 지역에 대한 점유占有)
비록 출발은 뚜렷하게 달랐지만 국가체제가 완성되어가는 시점時點에서 보여주는 이러한 [정착농경문화권定着農耕文化圈]과 [유목문명권遊牧文明圈]의 접촉과 혼합 양상樣相은 대동소이大同小異하였다. 다시 말해 [정착농경사회定着農耕社會]에서도 <작물화作物化>의 효율성 촉진(促進-비료생산肥料生産*운송수단運送手段*영농보조營農補助 등)과 단백질 섭취의 필요성으로 말미암은 자연스러운 <가축화家畜化>가 [유목목축사회遊牧牧畜社會]에서도 <가축화家畜化>의 부족 부분과 탄수화물 섭취를 위한 보완책補完策으로서 소규모小規模였지만 <작물화作物化> 경향이 진행되었다.
하지만 두 세계가 맞부딪쳤을 때 우열優劣의 결과에 있어서는 언제나 [유목제국遊牧帝國]의 승리勝利로 마무리되었는데 그 원인은 정착문명定着文明의 태생적인 결함이자 운명이었던 막강한 군사능력과 가공할만한 기동력機動力 분야에서 보여준 매우 차별적인 발전 양상樣相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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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초원草原의 지배자支配者로서 군림君臨한 위대한 지도자指導者들
1. 역사歷史 시기 [북방사회구성체北方社會構成體]의 존재 - 제국帝國 경영의 진실眞實
대부분의 학자들은 상商 무렵 이미 북방에 매우 다른 독립된 문명을 가진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여러 가지 접촉을 인정하고 있다(William Watson Cultural Frontiers in Ancient East Asia 1971 96p-124p).
그 후 주周가 일어나면서 조금씩 형체形體를 갖추고 기지개를 켠 한족漢族의 기본적인 인식 속에서는 북방 변경邊境이란 종종 두 가지 생태적 영역 즉 북쪽의 삭막한 초원 또는 사막과 남부의 기름진 농경지農耕地를 구분하는 관념적인 분계선分界線으로만 줄곧 이해되었다.
결국 이질적異質的인 문명지대에 대한 겸손함과 정치적 상호 관계에 관한 이해력이 없는 이런 식의 아전인수격我田引水格인 해석(중심과 주변이란 도식적圖式的인 사고思考)에서 얻을 수 있는 유용有用한 정보는 아무 것도 없다(Victor H. Mair & Kathryn Linduff).
하지만 그동안 새롭게 나타난 여러 고고학적考古學的 증거證據들은 BC 2000년경에도 다양한 생산 양식과 사회 조직 그리고 환경적응 방식을 통해 이미 일련의 [생태적生態的 변경邊境 Ecological Frontier]이 전개되고 있음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중심부中心部인 농경지역農耕地域과 주변周邊인 초원지대草原地帶라는 전통적인 이분법二分法의 구도構圖가 무너지고 있다(Victor H. Mair & J. P. Mallory 1998).
BC 2000년 초기부터 [유목적遊牧的 국가國家]의 존재를 대변代辯하는 첫 번째 지표指標의 출현이 두드러진다. 즉 상商 문명 핵심지역 너머에 있던 [유라시아 초원벨트]와 한족漢族 지역을 잇는 [중간지대中間地帶]로서 상商의 역할을 짐작케 하는 매우 이질적인 유적지遺蹟址의 존재이다.
이로보아 [내몽골-요령성遼寧省-섬서성陝西省과 산서성山西省과 하북성河北省 북부를 잇는 지역]이 상商 시대에도 충분하게 자립적인 [북방문화지대北方文化地帶]였으며 이 사회구성체社會構成體가 <시베리아 남부-중앙아시아>와도 연결되어 한족농경정주문화漢族農耕定住文化와 구별되었던 [유목문명 복합사회遊牧文明複合社會]로 기능했음이 밝혀졌다.
한족漢族의 사가史家들이 애써 무시하려하였던 [느슨한 형태의 초기 유목제국에서 완전한 북방제국]이 이미 싹튼 것이다. 따라서 그 이전以前이나 이후以後에 등장한 [동호東胡라 불렸던 제국帝國이나 흉노제국匈奴帝國] 등이 결코 돌발적이고 우연한 결과가 아니었음이 명확해지는 부분이다.
1) BC 3000년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이 문화는 넓은 지역을 포괄包括하였으며 북중국北中國 전반全般에 걸쳐 단단히 결합된 [야금술冶金術 네트워크]가 형성 발전되는 바탕으로 작용했다.
2) 이러한 [유목사회구성체遊牧社會構成體]를 하나로 묶어주는 가장 핵심지역들이 BC 3000년 무렵의 [서북부의 제가齊家 문화 [1]*중북부의 주개구朱開溝 문화 [2]*동북부의 하가점夏家店 하층下層 문화[3]]였다는 사실은 거의 의심할 바가 없다.
3) 이들 문화가 [유라시아 초원벨트] 지역과 긴밀하게 연결되고 있다는 사실은 [세이마Seima-트루비노Turbino 공동체共同體*로스토브카Rostovka와 소브카Sovka 유적군遺跡群*미누신스크 문화 등]와 연결되는 청동제품(靑桐製品-자루에 고리 하나가 달린 투겁도끼*기하학幾何學 문양文樣이 있는 청동도靑銅刀*뼈 손잡이로 된 단도短刀) 등을 공유共有하고 있음에서도 증명되고 있다(Louisa Fizgerald-Huber Quijia and Erlitou, The Question of Contacts with Distant Cultures 1995 40p-52p).
[1] 감숙성甘肅省을 핵심으로 동쪽과 북부는 내몽골지역과 황하黃河 상류上流 유역*위수渭水와 황수湟水 상류上流 유역에 널리 퍼져있던 선진적인 청동기靑銅器 문화(청하성淸夏省의 락목홍諾木洪*감숙성甘肅省의 화소구火燒溝와 서패西壩 그리고 신점辛店과 사와寺洼)이다. 목축牧畜이 우세優勢한 가운데 농경農耕이 다소 결합된 혼합사회로서 <말>을 사육飼育하였던 유적(遺蹟-대하장大何莊*진위가秦魏家)이 뚜렷하다.
[2] 한족漢族 문화와 접촉선接觸線에 있으면서도 아주 뚜렷하게 구분되는 특징을 보인다(Katheryn Linduff Zhukaigou, Steppe Culture and the Rise of Chinese Civilization 1995 133p-145p). 내몽고 북부와 중부*섬서(陝西-청간현淸澗縣 이가애李家崖 등)와 산서山西 북방(보덕현保德縣 임차욕林遮峪)*오르도스 지역이 핵심지대이다(내몽고주개구유지內蒙古朱開溝遺址 고고학보考古學報 1983-8 301P-333P*중국고고학논총中國考古學論叢 1995 256P-266P).
이들이 [북방 유목문명]의 한 축軸이라는 것은 특징적인 장식토기(裝飾土器-뱀 문양 장식*아가리나 목 부분에 진흙 끈을 붙인 후 손톱이나 연장으로 눌러 무늬를 넣은 세발솥인 화변력花邊鬲 등)와 뼈로 점占을 치는 관습 그리고 상문명商文明과 관련성을 보이는 청동단도靑銅短刀*끝에 고리가 달리고 날 끝이 위로 향한 통째로 주조鑄造된 도刀*세발솥과 발 달린 술잔인 작爵*꺾창 등 때문이다(고고학보考古學報 1983-8 257P-275P*문물文物 1991-2 50P-57P).
[3] [주개구朱開溝 문화]의 마지막 단계와 친연성親緣性을 보여주는 [하가점夏家店 하층下層 문화]는 상商의 얼리강二里岡 상층上層 문화와 중복된다. <내몽골 동남부-요령성遼寧省-하북성河北省 북부>가 중심 지대이고 특히 남변南邊은 하북河北 이현易縣과 래수현淶水縣 부근에서 만나며 청룡현(靑龍縣-초도구抄道溝)과 북경北京부근에 이르는 곳까지 두 문화가 만나는 거대한 띠를 형성한다. 북방문명의 핵심지대로서 유목遊牧을 겸한 정주농경定住農耕이 주主를 이루었다.
상商 시기를 거치는 가운데 이들 <세 문화지대>를 보다 훨씬 응집력凝集力 있게 밀착시킨 [청동기문명복합사회구성체靑銅器文明複合社會構成體]가 [한족漢族 정주농경문명定住農耕文明]과는 특징적으로 문화적 경계를 이루는 양태樣態로 등장하고 있다.
[군사적 엘리트 집단]의 주도적인 부상浮上에 따라 청동기靑銅器와 무기武器에서 전형적으로 차별성을 보이는데 [1](Lin Yun A Reexamination 263p-266p) 장도長刀의 경우 북방北方의 특징인 자루까지 통째로 주조鑄造한 후 끝에 고리나 동물 머리 모양 등을 장식했으며 기하학幾何學 무늬가 눈에 띤다. 도끼는 길고 두꺼우며 좁다. 뚜렷한 차별성으로는 날과 직각直角을 이룬 <관상투겁>이다.
[1] 단도短刀*독특하게 구부러진(유선형流線型) 자루를 가진 도刀*짧은 투겁도끼*관상 투겁도끼(장공부長銎斧)*거울(주목할 점으로 상商에서 나온 것들은 모두 태양숭배의 문양文樣이거나 대부분 비한족非漢族 계열의 표현기법이다)*활 모양 청동기靑銅器(궁형기弓形器)*투구 등
장식裝飾을 한 자루 끝을 양羊 머리로 꾸민 단도(短刀-양수곡병단검羊首曲柄短劍)*관상투겁도끼(동월銅鉞)*딸랑이 또는 양羊 머리 자루에 칼등이 휜 영수도鈴首刀나 환수도環首刀*수레방울과 말방울*마구馬具들은 이들 지역을 하나의 [북방유목사회구성체北方遊牧社會構成體]로 묶어 규정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오진록吳振錄 보덕현신발현적은대청동기保德縣新發現的殷代靑銅器 문물文物 1972-4 62p-66p).
이 때문에 북경北京 북부의 백부白浮 유적도 [북방문명]으로 새롭게 재분류되었다(Mrea Csorba The Chinese Northern frontier-Reassessment of the Bronze Age Burials from Baifu 1996 564p-578p).
마지막으로 눈여겨 볼 사실들이 있다. [북방유목문명]과 매우 친밀한(특히 청동무기靑銅武器의 양식) 동부지역 즉 요령성遼寧省 서부지대가 더 동쪽인 <요령성遼寧省 동부문명>과의 밀접한 관계를 통해 보다 풍부하고 다양한 양식樣式들의 영향을 깊게 받았음을 일견一見할 수 있다는 점이다(허옥림許玉林. 요령상주시기적청동문화遼寧商周時期的靑銅文化 고고학문화논문집 3 1993 311p-334p*적덕방翟德芳 중국북방지구청동단검분군연구中國北方地區靑銅短劍分群硏究 고고학보考古學報 1983-8 277p-299p)
바로 이쯤에서 [유라시아 초원벨트]를 관통貫通하는 [유목문명遊牧文明]이 어떻게 경제적*사회적*정치적으로 성숙해 왔는지? 그리고 마침내 자생적自生的 진화 과정을 거쳐 [유목사회연합체遊牧社會聯合體]를 이루었는지? 그래서 이윽고 어떤 방식으로 [유목제국遊牧帝國]을 이루어갔는지? 그 생명력生命力의 원천과 발전 양태樣態까지 비로소 이해하게 될 것이다.
하나가라 우리나라 에서 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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