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신정선 기자의 눈빛] 뒷광대 50년… 연극史가 된 아흔살 '열정 소녀'
이해랑연극상 특별상 받은 '무대미술 개척자' 이병복씨
"난 지문이 없어… 하도새끼들 붙들고 조몰락거리다보니까"
"평생 무대 뒤에서 일을 했는데, 저 같은 사람은 무대 뒤에서 있어야 하는데, 이 영광스러운 앞 무대에다가 세워주셨으니 정말 송구스럽고 되게 힘들어요. 한눈 한 번 팔 여유 없이 발등에 불이 떨어지니까 북 치고 나팔 불었는데, 그러다 보니 제 몫의 시간이 가고 말았네요. 어휴, 감사드리고…. 시간이란 상(賞)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말끝에 눈물이 맺혔다. 지난달 20일 서울 중구 조선일보사미술관에서 제25회 이해랑연극상 특별상 수상자로 연단에 선 무대미술가 이병복씨는 검은 한복 차림이었다. 1991년 한국인 최초로 '프라하 세계무대미술경연대회'에서 무대의상상을 받았을 때 "아무도 한국을 몰라서 오기로 입었다"던 한복이다. 곧추세우듯 도도한 자존심을 드러낸 흰 동정도 여전했다.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독특한 미감'(유민영 서울예대 석좌교수)의 예술가, 배경이나 장치로만 여겨지던 무대 미술과 도구를 예술의 지위로 끌어올린 개척자, 살아 있는 연극사로 불리는 그는 시상식 참석자들을 향해 몇 번이나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머리 위로 시간이라는 상을 대신이라도 할 듯 기립박수가 쏟아졌다.
올해 우리 나이로 구순(九旬). 세상에 알려진 약력에는 1927년 경북 영천생(生)이지만, 실제로는 1926년 태어났다. 아들로 태어나지 못한 죄로 한 해가 지나서야 호적에 올라갔다. "내가 사주에 쥐가 셋이래. 쥐가 환한 데 돌아다니는 거 봤어요? 껌껌한 데서 후다닥 댕기지. 늘 그늘에서, 뒷전에서 남들 안 보이게 살았지. 집에서는 아버지 뒤에서, 남편 뒤에서, 그리고 무대 뒤에서…."
무대 뒤에서 보낸 세월이 50년, 스스로를 '뒷광대'로 부르는 그를 지난 4일 서울 장충동 작업실에서 만났다.
‘뒷광대’ 이병복은 아들만 자식이던 시절에 딸로 태어나 아버지의 뒤에서, 그림에만 미쳐 살던 남자를 만나 남편의 뒤에서, 배우만 눈에 띄던 시대에 무대의 뒤에서 평생을 보냈다. “사랑해서 버텼느냐”는 질문에 “사랑 같은 고답적인 건 모르겠고, 좋았는갑제”라고 했다. 좀체 크게 웃지 않는 구순의 예술가는 지난 4일 서울 중구 장충동 작업실에서 ‘내 새끼 같은’ 작품들 얘기를 하다 열여섯 여중생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 이태경 기자
- [Why] [신정선 기자의 눈빛] 뒷광대 50년… 연극史가 된 아흔살 '열정 소녀'
- ▲ 아흔살 "열정소녀" 원로 무대미술가 이병복ㅣ
지금이야 무대 디자인, 소품, 의상 담당이 전문적인 분야로 인정받지만, 50년 전만 해도 연출가와 배우 외에는 '기타 등등'이었다. 숙명여고를 나와 이화여대 영문과를 졸업한 이병복은 1948년 극단 여인소극장의 연극에 참여하면서 처음 무대에 발을 디뎠다. 크지 않은 배역으로 한 번 무대에 섰다가 "광대짓이 웬 말이냐"며 노기등등한 할머니가 곡기를 끊는 소동이 빚어졌다. 다시 연극을 시작한 것은 1966년.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의상 디자이너로 일하던 그가 연출가 김정옥씨와 극단 자유(自由)를 창단한 때다. 박정자, 김용림, 윤소정, 김혜자가 창단 단원이었다. 극단 자유는 120편가량을 올리며 연극 열기에 불을 지폈다. 극단 대표로, 아무도 안 하려던 뒷일 챙기기에 나선 그는 무대 의상은 물론이고 적당히 배치하면 끝이던 소품을 "내가 맹근(만든) 배우, 내 새끼"로 부르며 직접 만들었다. "내가 지문이 없어. 지워져버렸어. 하도 새끼들 붙들고 조몰락거리다보니까. 내 소품도 다 배우야. 대사가 없을 뿐이지."
―의상 디자이너로 돈도 벌고 명성도 얻었는데, 어떻게 연극을 하게 되셨나요.
"아직 무대 의상이라는 개념도 없던 시절에 나도 잘 모르면서 의상을 전담하게 됐지. 연극을 하려고 극단은 만들었는데, 돈이 없어서 남에게 맡길 수도 없었고. 마침 옷집을 하니까 공방도 있고 해서 직접 만들기 시작했어. 살다가 보면 음양이, 기복이 한도 끝도 없이 눈 감는 날까지 지속이 되지 않나."
―연극의 어떤 점에 끌렸나요.
"껌껌하고 텅 빈 무대에 올라가면 '아, 이게 내 세상인데, 이게 내 건데' 싶거든. 아무것도 없는 무대가 가장 연극적이야. 내가 어설프게 만들어 붙여봤자 거짓말이고. 깜깜한 무대에 비쳐 들어오는 광선, 그 냉기, 귀신스러움. 이걸 상하게 해서는 안 된다, 그대로 흡수되는 환경을 만들어야겠다고 달려들었지. 그 뒤로 이제까지 무대 뒤에서 검은 포장 쳐놓고 기어다니고, 전깃줄 걸려서 자빠지고, 짐짝 들고 다니다 거꾸러지며 살았지."
―남들보다 주목받고 싶은 것이 예술가의 생리입니다. 앞에 나서고 싶지 않았나요?
"팔자라고 생각했지 뭐. 주변에서 다들 그랬지. 빛은 딴 놈이 다 보는데 어떻게 지내느냐고. 나도 매일 자문자답해요. 아마도 내가 나 자신을 보는 눈이 있어서 그런 거 같아. 그 일에 미쳐서 일할 수 있는 나를 내가 알잖아. 찍소리 안 하고 이걸 할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엎드려 살다 보니까 그 세월 다 갔지."
그의 작업실은 장충동 도로변 5층 건물의 4층에 있다. 장충단공원이 내려다보이는 커다란 창가에 40년이 넘은 재봉틀과 다리미를 나란히 뒀다. 그의 '새끼'가 만들어지는 곳이다. 다리미 옆구리에 'General Electric'이라고 적힌 영문자는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닳았는데, 반질반질한 윤기는 방금 전에 닦은 듯하다. "이 다리미가 아직도 제 몫을 하나요" 물었더니 "그럼, 나도 40년 더 됐는데 쓰잖아" 했다. 그는 수십 년을 헤아리는 반짇고리와 가위를 들고 거북등 같은 손끝을 놀려 한 땀 한 땀 바느질을 한다.
―뒤에서만 어떻게 버티셨나요.
"더러는 싸할 때 있었지. 일하면서 버텼지. 미친 것처럼. 일하면 아픈 걸 모르거든요. 속상하고 말 못 할 때도 일을 하고 있으면 시간이 가. 아무리 힘들고 슬퍼도 온머리와 온마음으로, 필사적으로 덤비면 돼. 에라, 지성이면 감천이지, 내가 언제는 자신 있어서 일했나. 그 마음만 있으면 이 세상에 못 할 일이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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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복의 작업실에는 2011년 별세한 남편 권옥연 화백의 사진(오른쪽)이 곳곳에 걸려 있다. / 이태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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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미술가 이병복은 오전 7시에 일어나 오후 9시까지 쉬지 않고 움직이며 작업을 한다. 독일에서 구한 책상은 옷감 재단할 때 주로 쓴다. 재봉틀, 가위, 다리미, 반짇고리 등 수십년 된 도구를 반질반질 윤이 나도록 닦고 관리해 아직까지 쓴다. 한쪽 벽에는 오탈자 하나 없이 완벽하게 손으로 기록한 작품 연보가 커다랗게 붙어 있다. / 이태경 기자
이병복을 말할 때 서양화가였던 남편 권옥연(1923~2011)을 빼놓을 수 없다. 두 사람은 권옥연 생존 당시 유일한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 부부였다.
이병복은 청상과부 외아들로 고집투성이였던 남편을 6·25 전쟁 중 피란지 부산에서 만나 결혼했다. 느닷없는 권옥연의 청혼은 따귀 한 대로 마무리됐다. 무작정 결혼하자는 억지에 이병복이 퇴짜를 놓자 말이 끝나게 무섭게 손이 날아왔다. "끝이야!" 외치며 도망갔던 이병복은 그다음 날 언제 그랬느냐는 듯 권옥연과 화해하고 결혼했다.
이병복은 "쌀 한 톨 없이 만난 알거지와 이북 따라지의 행진"이라고 했다. 농림부 양정국장과 대한식량공사 이사장을 지낸 아버지 이홍(李泓)이 납북된 후, 10남매 장녀인 이병복에게는 물려받을 재산이 없었다. 몰락한 함흥 양반 가문의 자식이던 남편도 무일푼이었다. 이후로도 평생 생활비는 이병복이 벌어서 댔다. 부부는 1957년 프랑스 파리로 유학 갔다. 이병복이 부산 광복동 PX에서 일하며 악착같이 모은 돈이 밑천이 됐다. 이병복은 소르본대에서 불어 교육을 받으면서 의상과 조각을 배웠다. 1961년 귀국해 의상실인 '살롱 네오'를 시작했다. 당시 마나님들만 옷을 맞춰 입던 곳이었다.
―권 화백을 헌신적으로 내조한 걸로 유명합니다. 선생님에게 권 화백은 어떤 존재였나요.
"신앙이었나 봐. 그 사람은 그림밖에 생각을 안 했어요. 난 우리 영감의 그런 철저한 데가 참 좋았어. 그 사람이 가장이다, 애들 아부지다 생각해본 적이 없어. 그냥 권옥연은 그림쟁이니까 그림이나 그리시오 했지. 그래서 뒤에서 열심히 뛴 거지."
―권 화백의 철저함은 어느 정도였나요.
"처음부터 대놓고 '나는 다섯 살이다' 하더라고. 화가는 다섯 살 넘으면 그림 못 그린다고. 그 말이 얼마나 절실해. 거기에 반박할 말이 있어요?"
―가정은 돌보지 않고 예술만 추구하겠다는 뜻인데, 어떻게 받아주셨습니까.
"받아준 게 아니라 어쩌지도 못하니까 받아준 걸로 된 거지. 철저할 수 있는 게 아무나 안 돼요. 계산이 똑똑하게 돌아가면 그림 못 그려. 나는 '시어머니가 뭐라고 할까, 남편이 어떻게 볼까, 아이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하고 계산을 하니 이만큼 희망을 가졌던 일도 요만큼밖에 못 했거든요. 근데 그이는 철저했지. 아무나 못 해."
―두 분이 당시로는 드물던 프랑스 유학파셨죠.
"4년 지냈지. 권(권옥연씨를 지칭)은 그림 그리고, 나는 내조하고 의상 공부하며 살았어요. 그때나 지금이나 자투리 시간도 가만두질 못 해. 양재학교도 등록하고 불어도 배우고 계속 뛰어다녔지."
―가난한 유학생이 자신의 공부만 하기에도 바빴을 텐데요.
"좋아하는 사람이 근사한 화가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지. 눈깔(눈)에 깝질(껍질)이 씌었던 게지."
―권 화백을 한국의 피카소로 만들겠다고 하셨는데, 성공하셨나요.
"도중하차했지. 정식으로 외국 화랑과 계약이 돼서 당당하게 데뷔를 했어야 하는데, 파리 유학 도중에 '대단한 양반'이 '내 환갑이니 들어오라' 해서 들어왔지."
'대단한 양반'이란 그의 시어머니다. 스물일곱에 남편을 잃고 외아들을 홀로 키웠다. 이병복은 신혼 초기에 남편을 가운데 두고 시어머니와 셋이서 한방에서 잤다. 파리에서 유학하던 둘에게 귀국의 구실이 된 시어머니의 환갑잔치는 한 해 뒤였다. "내 환갑은 적어도 1년은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 시어머니의 주장이었다. 이병복은 동네에 소문이 자자하게 날 정도로 "떠억 벌어진" 환갑상을 차려 올렸다. '떠억'이라는 단어에서 이병복은 입을 오래 커다랗게 벌렸다.
남편 권 화백은 소문난 멋쟁이였다. 키 180㎝에 옷 잘 입고 노래 잘 부르던 그에게는 이병복이 '광신도(狂信徒)'라고 부르던 여성 팬이 매우 많았다. 별명이 '40대1'이었다. 정원 40명인 버스를 여성으로 꽉 채워서 권 화백 혼자 데리고 놀러다닌다는 뜻이었다.
―권 화백이 인기가 많으셨다면서요.
"내가 그랬지, 버스 운전기사한테. 권 선생이 누구하고 언제 어디에 갔는지를 나한테 말하지 말라고. 남편한텐 한마디만 했어. '내가 겁이 덜컥 날 여자 좀 데리고 다녀봐'라고. 그랬더니 '당신 얼굴 보면 (무서워서) 웬만한 사람 안 와' 하더라고."
―예술가로서는 몰라도, 여자로서는 받아들이기 쉽지 않으셨을 텐데요.
"약 오르고 화딱지 났지. 그 사람 좋아하는 여자들이 시어머니에게 접근해서 같이 밥해 먹고 그랬어. 눈에서 불이 났지. 그래도 어쩔거야. 그러니까 내가 '살아냈다'고 하잖아. '살았다'가 아니라."
이병복은 부부를 이어준 것이 예술가로서의 질투였다고 말했다. "내가 작업하고 있는데 와서는 한마디 해요. '(무대는) 객석하고 거리가 먼 데, 이것도 작품인가? 세 배는 돼야지.' 그러면 그날 작업 끝난 거지. (맘이 상해서) 하던 일을 중단하고 다시 보면 확실히 그래. 다음번엔 내가 남편 이젤에 걸린 그림을 보고 한마디 해. '그만 그려. 조금만 더 그리면 극장 간판이야, 간판.' 그러면 권도 그 그림 그날 다 그린 거지."
그리고 '아쭈'가 있었다. 며칠을 아무 말 않고 지내다가도 어느 날 이병복이 무심결에 읊은 하이쿠 한 줄을 권 화백이 노래하듯 받았다. 부부가 한 줄씩 흥얼흥얼 하다가 서로 잊어버린 시구를 상대편이 읊어주면 절로 "아쭈" 소리가 나왔다. 통했다. 이병복은 "그 순간, 우리가 이래서 사는가 보다 했다"고 말했다.
'영원한 다섯 살'의 절망을 끌어안은 것도 이병복이었다. 권 화백이 "여보, 나 무서워, 하얀 캔버스가 무서워서 못 그리겠어"라고 울먹이면 등을 쓸어주며 같이 울었다. 권 화백은 2011년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병실에 누워 잠들 듯 떠난 권 화백의 마지막 말은 "미안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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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권옥연 화백이 아내 이병복을 모델로 그린 ‘부인상’(1951). / 롯데갤러리 제공
이병복은 2013년 생애 최대 규모의 전시회를 열었다. 대학로 아르코미술관에서 열린 '3막3장'전(展)이다. 연극 '피의 결혼' '햄릿'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 등에 나왔던 그의 의상이 전시됐다. 이병복이 천착한 주제는 모성(母性)과 죽음이다. 30대에 암(癌)으로 세상을 떠난 장남 태진씨에 대한 그리움이 그의 심장을 둘로 찢었다. 당시 전시실에서 만난 이병복은 바닥에 엎드려 우는 어머니 인형을 가리키며 "이게 나야"라고 했다.
한지와 삼베 등 전통 재료에 한국인의 혼이 담겨 있다고 믿는 이병복의 무대 의상은 가장 한국적인 소재로 전통을 살렸으되, 가장 단순하고 꾸밈없는 표현으로 '모던하다'는 평을 받는다. 1993년 6월 독일과 프랑스에서 공연한 '햄릿'에서는 무대를 삼베 200필로 꾸며 현지의 찬사를 받았다.
―연극성을 '요기(妖氣)'라고 정의하셨습니다. 종이는 요기를 드러내는 소재라서 쓰게 됐나요.
"연극 '수탉이 안 울면 암탉이라도'(1988)를 하는데, 의상 78벌이 필요했어요. 옷을 사려니 돈이 너무 많이 들어서 종이로 하면 싸겠다 싶었지. 막상 해보니 더 들었지. 자꾸 찢어져서 여분을 많이 만들어야 했으니까. 한지는 매긴 풀의 강도에 따라서 소리가 달라요. 풀을 많이 먹이면 와삭와삭 소리가 커지니까 소름이 쫙 끼쳐. 박정자씨가 '피의 결혼'을 할 때 종이 옷을 입고 객석으로 뛰어들었는데, 와작와작거리는 소리에 관객이 아연실색했지. 그게 요기야. 헝겊으로는 그 느낌이 안 나요."
―삼베 의상으로 올린 '햄릿'도 있었죠.
"삼베는 구겨지잖아요. 구겨지면 빛이 들어가면서 천변만화하지. 파리에 공연하려고 삼베를 말아서 가져가니까 잔뜩 구겨졌잖아요. 그 많은 삼베를 무슨 재간으로 다리겠어. 그대로 걸었더니 조명이 들어가면서 전부 색깔이 달라지더라고. 구겨진 삼베 자락 사이로 춤추는 빛을 보면서 눈물을 펑펑 흘렸지."
―울고 있는 어머니, 자식을 안고 있는 어머니가 작품에 자주 나오는데요.
"죽음이라는 게 항상 가까운 데 있잖아요. 내 아들도 부모 잘못 만나서 스트레스받아서 죽었어. 그 어려운 시간 버티려고 보니까 이거 만들었던 거고."
그가 '이거'라거나 '내 새끼'라고 하는 작품은 작업실 곳곳에 놓여 있다. 이병복은 인터뷰 중간 중간 기자에게 "어서 가라, 더 할 말 없다"며 연신 밀어내다가도 기자가 "어머, 이 작품 너무 멋있어요"라며 감탄하면 금세 잊어버리고 "아, 그거는…" 하면서 자랑하러 나섰다. 자식 자랑하는 마음과 똑같다.
건강 비결? 고통까지 흠뻑 느껴라
작품에 대해 설명하는 그를 보면 구순인데도 환갑을 앞둔 소녀 같다. 기억에도 오차가 거의 없다. "건강 비결? 좋다, 쓸쓸하다, 화난다, 오만 가지 감정을 고루고루 다 가져야 해요. 속상하고, 즐겁고, 약오르고 슬픈 감정을 마음껏 가져요. 그러고 쉴 새 없이 움직여요. 그러면 전체적인 생리 순환이 잘 돌아가지. 그게 보약이라고."
―'시간을 상으로 받고 싶다'고 하셨는데, 만약 받을 수 있으면 뭘 하고 싶으신가요.
"연극을 해야지. 외국 뮤지컬을 요즘 많이 하잖아. 난 판소리만 가지고 연극을 하고 싶어. 그게 한국적인 뮤지컬이지. 한옥에 둘러싸인 연못에서 판소리 연극. 그것까진 만들어놓고 죽어야 하는데…."
그는 오전 7시에 일어나 오후 9시까지 쉴 새 없이 일한다. 일주일에 절반은 경기도 남양주 금곡의 무의자(無衣者)박물관을 돌본다. 기왓장이며 처마며 마당 관리를 위해 곡괭이 들고 뛴다. 무의자박물관은 그가 권 화백과 함께 10년에 걸쳐 사들인 2만6400㎡(8000평) 부지의 복합문화공간이다. '무의자'는 권 화백의 아호로, 욕심을 벗어던진 사람이라는 뜻이다. 박물관 부지에는 순조의 큰며느리 신정왕후 조씨의 친정집이던 군산집 등 고택 9채가 복원돼 있다. '연극계 고려장 사태'로 기록된 2006년 '화형식'도 이곳에서 했다. 당시 이병복은 "내 새끼들이 집이 없어 썩어들어간다"며 삼베로 만든 의상 등 자신의 작품 3분의 2를 불태웠다. 공연 자료를 간수하는 공공 박물관 하나 없는 현실에 대한 준엄한 고발이었다. 이달 말에는 청강문화산업대 출판부에서 그의 생애를 구술한 책이 발간될 예정이다.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희곡 '뜻대로 하세요(As you like it)'에서 인생은 7막이라고 했다. 마지막 7막에 이르면 '제2의 천진함'을 갖게 된다고. 다시 찾아온 천진함으로, 구순 예술가의 새로운 막(幕)은 이제 막 시작이다.
조선일보에서펌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