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각이 사람차이

자신과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

modest-i 2015. 2. 9. 14:26

 

 

 

#1. 버드제독 이야기

 

 

내가 원하는 건 단순히 지리적인 의미에서의 은둔이 아니었다. 나는 삶을 완성하는 철학에 뿌리를 내리고 싶었다.

 

 

 

 

오후 4시, 영하 31도, 오늘도 역시 산책을 하다가 침묵을 듣기위해 멈춰 섰다....

낮은 죽어가고 있었으며, 밤은 거대한 평화와 함께태어나고 있었다.

여기에는 조화롭고 소리 없는 우주의 가늠할 수 없는 작용과 힘이 있었다. 조화, 바로 그것이었다!

 

그 조화는 바로 침묵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것은 평온한 리듬, 완벽한 화음이 내는 선율,, 어쩌면 천체가 내는 음악이었다.

 

그 리듬을 듣는 것만으로 잠깐 동안 나는 그것의 일부가 되었다.

순간 나는 인간이 우주와 하나임을 의심할 수가 없었다.

리듬은 너무도 질서정연하고 조화롭고 완벽해서, 그것이 우연한 행운의 산물일리가 없다는,

그러므로 그 모든 것에는 분명 목적이 있을 것이고 인간은 그 전체의 일부이며 우연한 부산물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느낌이었다.

절망의 핵심에 닿아보고

 그 절망이 근거 없는 것임을 깨닫는 느낌이었다.

 

질서정연한 우주, 즉 코스모스(cosmos)는 절대 혼돈(chaos)이 아니었다.

인간은 낮과 밤이 그런 것처럼 합법적으로 그 우주의 일부였다.

 

 

 

 

 

이전에는 제대로 소유하지 못했던 것을 비로소 얻을 수 있었다.

순전한 아름다움과 살아 있다는 기적,

그리고 모든 소박한 것들이 지니는 가치에 대한 감사....

문명으로 돌아왔어도 내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지금 나는 더 단순하게, 더 평화롭게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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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위니콧은

아이가 과도기적 대상을 사용한다고 해서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점을 특히 강조한다.

 

그런 대상이 아이에게 안정감과 위안을 주면서 엄마의 대체물 역할을 한다고 해도,

엄마가 제 역할을 못하기 때문에 아이가 그런 대상을 사용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아이가 과도기적 대상에 지지와사랑을 줄 수 있기 때문에 그런 물건을 사용하는 것뿐임을 지적한다.

그런 지지와 사랑을 줄 수 있으려면 아이는 실제로 지지와 사랑을 받아 보았어야 한다.

 

아이가 엄마를 적어도 부분적으로라도 좋은 대상으로 받아들여야만 지지나 사랑을 과도기적 대상에 투사할 수 있다.

 

그러므로 혼자 있는 능력이 내향성의 표현이라기보다 안정감의 표시이듯,

 

과도기적 대상에 애착을 표현하는 능력은 박탈감이 아닌 건강함의 신호다.

 

사람에 대한 애착을 형성하는 능력이 훼손되었을 수도 있는 보호시설 아이들이

귀여운 장난감에 대해서도 좀처럼 애착을 보이지 않는다는 관찰 결과가 이 사실을 뒷받침한다

 

 

 

 

뿐만 아니라 좀 더자라서 주변의 장난감이나 다른 물건에 큰 관심을 보이는 아이들 또한 안정된 아이들이다.

 

앞에서 말했듯,

안정감을느끼는 아이들은 독립적으로 주변을 탐색하고 조사하지만,

확실한 애착을 느끼지 못하는 아이들은 불안해하며 엄마에게 매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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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자신과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

 

 

신경증 환자의 회복을 위한 요소는 다음 두 가지이다.

 

첫 번째 요소는 환자가 자신의 문제를 이해하기 위한 사고체계를 갖추는 것이며,

두 번째 요소는 환자가 다른 사람과 유익한 관계를 맺는 것이다.

 

 

물론 자신의 경험을 이해하는 것은 신경증 때문에만 필요한 것은 아니다.

이것은 한 사람의 인간으로 살아가는 데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지능과 의식이 발달하고 본능적 행동 형태의 지배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면서,

인간은 외부의 현실 세계와 내면에 있는 상상의 세계 모두를 해석하고

그 세계에 질서를 부여할 필요를 느끼는 성찰적 존재가 된다.

 

 

 

 

결국 조언자에게서 아무리 도움이 되는 지도를 받는다 해도 스스로 삶을 이해해야 한다.

 

세상의 객관적인 사실에 대해 어떤 견해가 다른 견해에 비해 더 가깝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정해진 행동 형태가 꼭 '진실'로 입증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행동 형태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만일 어떤 행동 형태가 외향적인 사람들, 분산형 사람들, 이야기 관심형 사람들보다

                                         내향적인 사람들, 집중형 사람들, 형태 관심형 사람들의 심리에서 더 명확하게 나타난다고해서

그것이 전자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아무리 내향적인 사람들이라 해도 어느 정도의 인간 관계는 필요하며,

아무리 외향적인 사람들이라고 해도 어느 정도 정해진 행동과 질서는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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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페르소나 뒤에 숨기

 

 

 

다른 이들과 같이 있을 때 자신의 진짜 자아를 어느 정도로 보일 수 있는가는 사람들마다 굉장히 다르다.

 

아주 어릴 때부터 낮선 사람들과 함께 있어도

거절당하거나 비난받거나 반박당하거나 바보 같은 느낌이 들거라는 두려움 없이

뭐든 느끼는 대로 표현할 수 있는 그야말로 부러워할 만한 사람들도 있는 것 같다.

 

이런 종류의 안정감은 위니콧이 말하는 경험 즉,

아기일 때 엄마가 곁에 있다는걸 알기만 하면 불안해하지 않고 혼자있었던 경험,

그리고 조금 더 자라서는 사랑받고 절대적으로 인정받는다고 느꼈던 경험을 반복하면서 생긴다.

 

 

 

 

 

#5.불운에 맞설 수 있는 내적 능력

 

 

아기가 확실하게 애착을 느끼는지의 여부를 결정하는 모든 요인을 아직은 판단하기가 어렵다.

애착은 성격과 강도가 다양하다.

 

어머니가 아이를 제대로 돌보지 않고 애정을 주지 않고 거부했다고 해도,

아이가 느끼는 불안과 애착이 전적으로 어머니의 책임은 아니다.

 

아이들은 유전적으로 다르며 어머니가 아무리 아이를 충분히 사랑하고 돌본다 해도 안전한 애착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자라서 '자폐증'을 보이는 몇몇 아이도 그렇다.

 

 

 

 

아이가 불안해하고 부모에게 지나치게 순응할 때

부모와 아이의 상호 작용에서 그 원인을 찾아 볼 수 있다.

 

부모가 아이를 무시하거나 학대하는일이 전혀 없지만, 아이는 그런 부모의 사랑이 조건부라고 느낄 때가 있다.

 

그러면서 계속 부모의 사랑을 받으면서 안전하게 지내려면,

진짜 모습이 아닌 부모가 원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믿는다.

 

아이에게 이런 믿음을 갖게 하는 부모를 보면,

대개 아이의 행복에 관심이 크면서도 '착한' 행동에 대해 지나치게 높은 기준을 요구하곤한다.

 

이럴 때 아이는 본능적인 충동과 자연스러운 반응은 잘못된 거라고 생각하게된다.

 

부모가 이런 태도를 보일 때,

극단적인 경우 아이는 부모 마음에 꼭 드는 거짓 자아를 만들고 진짜 자아는 철저하게 억누른다.

 

그렇게까지는 아니라 해도,

다른 사람들과 있을 때는 진짜자아를 감춰두고 거짓 자아를 보이다가 혼자 있을 때 비로소 진짜 자아를 드러낸다.

이것이 아이가 유독 혼자 있고 싶어하는 한 가지 이유가 되기도 한다.

 

 

 

 

부모가 자신을 조건 없이 언제까지나 사랑해줄 거라고 확신하는 아이들은     내면에서 스스로의 가치를 인식하지만,

 

불안감을 느끼며 순응하는 아이들은 그렇지 못하다.

 

자신이 이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가치있고 중요한 존재라는 확신은 누구라도 지닐 수 있는 아주 귀중한 자산이다.

이런 확신이 유전적인 요인과 관계가 있든 없든, 부모가 아이에게 베푸는 사랑에 따라 더 분명해지거나 희미해진다.

 

 

 

 

자신의 진짜 천성을 일부 부정하거나 억압하면서까지 순종해야 한다고 느끼는 아이들은

자아 존중감을 지키기 위해 외부 요소에 언제까지나 의존해야 한다.

 

그런 아이는 어른이 되어서도 성공하거나 선해지거나 모두에게 인정을 받아야만 자신이 가치있는 사람이라고 느낀다.

 

그리고 누구나 살아가면서 맞닥뜨리는 역경, 시험이나 구직 실패, 실연, 사별 등의 상실에 유독 취약해질 수밖에 없다.

 

그런 시련을 겪으면 누구나 잠시 동안은 화가 나거나 의기소침해지거나 아니면 두 가지 감정을 다 경험한다.

하지만 자아 존중감이 희박한 사람들은 심각한 우울증이라는 소용돌이 속으로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든다.

 

 

 

 

비난이나 실패, 상실을 겪을 때 너무도 심하게 낙담한 나머지 병'의 증세까지 보이는 사람은 불운에 맞설 수 있는 내적 능력이 부족한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도전으로 받아들일 법한 시련에도 그들은 완전하게 절망하고 무너진다.

 

그들은 과거에 누린 행운이나 미래의 가능성은 전혀 생각하지 않으며,

오로지 지금 하고 있는 일에서 성공을 거둬야 자아 존중감이 지켜지는 것처럼 행동한다.

 

 

 

 

과거에 받은 사랑이나 인정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 같다.

그들 내면에는 의지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으며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의식도 없는 듯하다.

 

 

 

#6.자기를 비난하는 사람들

 

 

 

정신병으로 분류될 정도로 심각한 우울증을 앓는 환자들은 공허함을 느낀다고,

 

뭔가가 빠져있다고, 절대 채워지지 않는 공간이 있다고 하소연을 하곤 한다.

 

특히 기질성 질환을 염려하면서 이런 하소연을 하면, 다른 사람들은 건강 염려증 때문에 생긴 망상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긴다.

 

 

 

 

하지만 마음속 진실을 돌려서 표현하는 것으로 이런 말을 받아들여야 한다.

심각한 우울증 환자들의 내면에는 좀 더 저항력이 강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어떤 것,

말하자면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가치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다.

 

 

 

 

이런기질, 즉 이런 정신 병리적 증세를 보이는 사람들은

다른 이들의 의견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다른 이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거나 그들에게 비난을 들을 수도 있는 일은 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가능하면 회유적인 태도를 취한다.

 

 

인정을 받으려면 순종해야 하고 그러려면 진짜 자신은 어느 정도 감춰야 하기 때문에,

이런 사람들은 남을 기쁘게 해야하는 의무에서 벗어나고 싶어 혼자 떨어져 있으려 한다.

 

 

 

타인에게 '피학적', 순종적인 태도를 보이려면 공격성을 억압해야 한다.

 

다른사람들에게 용감히 맞서질 못하거나,

당연히 그래야 할때라도 자기 의견을 주장하지못하는 사람은

자신의 적개심을 억누른다.

 

그럴 때 다른 사라들에 대한 그의 적개심은 방향을 잃고 자기 비난의 형태로 스스로에게 향한다.

 

프로이트가 그의 탁월한 논문 <애도와 우울증>에서 설명했듯,

감정을 억압하는 사람이 스스로에게 퍼붓는 비난은 사실은 가까운 누군가에게 돌리고 싶었지만

자신에게는 그의 사랑이 중요했으므로 반감을 살까봐 두려워 감히 표현하지 못한 비난일 때가 많다.

 

 

 

고독의 위로 앤서니 소트 저 / 싹을 틔우는 사람 블로그에서 펌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