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는 서로를 이해하게 하지만, 천재를 만드는 것은 고독이다. 온전한 작품은 한 사람의 예술가가 혼자 하는 작업으로 탄생한다.” -에드워드 기번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의 말은 옳다. 기번 자신을 비롯해 시인이나 소설가, 작곡가 대부분이 많은 시간을 혼자 보냈다. 화가나 조각가 역시 그렇다. 현대 이론, 특히 여러 정신분석학파가 주장하는 이론에서는, 인간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야 하며 다른 사람들의 애정을 필요로 하는 사회적 존재라고 한다. 일반인들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친밀한 인간관계를 행복의 중요한 요소로 손꼽는다. 하지만 찬찬히 살펴보면 이러한 통념은 말 그대로 통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예를 들어 세계의 위대한 사상가들 중에는 화목한 가정을 이루지도 못하고 다른 사람들과 친밀하지도 못한 사람들이 많다. 데카르트, 뉴턴, 로크, 파스칼, 스피노자, 칸트, 라이프니츠, 쇼펜하우어, 니체, 키르케고르, 비트켄슈타인 등이 그런 사람들이다. 이 중에는 한동안 이성과 관계를 맺었던 사람들도 있고 뉴턴처럼 금욕적인 삶을 산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누구도 결혼하지 않았으며, 대부분은 오랜 시간을 혼자서 보냈다.
뛰어난 창의력이라는 재능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런 재능을 타고난 사람들을 보면서 우리는 경외감과 부러움을 느낀다. 또한 그들을 특별한 존재, 즉 보통사람들과는 다른 차원의 고통과 기쁨을 느끼는 특이한 사람들로 생각하곤 한다. 이처럼 보통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이 정신병리학적으로 ‘비정상’임을 의미할까? 창의적인 사람이 고독을 즐긴다는 사실이 그들이 다른 이들과 가까운 관계를 맺는데 무능하다는 증거가 되는 걸까?
사람들과의 관계가 순탄치 못하고 정신병, 알코올 중독, 약물 남용으로 정서가 몹시 불안정했던 천재들을 열거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창의력이라는 재능과 정서불안, 그리고 만족스러운 인간관계를 맺는데 서툰 성향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창의력이라는 재능은 미심쩍은 축복, 그러니까 명성과 재산을 가져다주지만 보통 사람들은 그 재능을 지닌다 해도 행복하기가 어려운 그야말로 두 얼굴을 가진 재능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천재들은 모두 불안정하다고 믿었고, 특히 프로이트 시대 이후로 이런 경향이 두드러졌다. 하지만 창의적인 사람들이라고 해서 모두가 유별나게 정서적으로 불안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고독하게 사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모두 불행한 것도 아니다. 기번은 첫사랑에 실패하고 나서도 누구나 부러워할 정도로 아주 행복하고 편안하게 살았다. 이에 대해 기번은 이렇게 썼다.
‘대다수 사람의 운명을 생각해볼 때, 내가 인생의 제비뽑기에서 아주 좋은 패를 뽑았다는 걸 인정해야겠다. 나는 쾌활한 기질, 적당한 감수성, 활동보다는 고요를 좋아하는 성격을 타고났다. 해로운 욕구나 습관은 철학이나 시간이 바로 잡아주었던 것 같다. 학문에 대한 사랑, 삶을 즐기며 새로운 활력을 얻는 열정 덕에 내게 걸맞은 즐거움의 요소가 매일, 매시간 끊임없이 솟아난다. 내 정신능력이 쇠퇴하는 기미도 느끼지 못한다. 스위스의 기준으로 보면 나는 부자다. 아니 어느 모로 보아도 부자다. 수입이 지출보다 많고, 사고 싶은 것은 다 살 수 있기 때문이다.’
19세기 영국의 전기 작가 리튼 스트레이치는 기번에 대한 에세이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에드워드 기번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바로 행복이다. 이때 내가 말하는 행복은 즐거움과 행운까지 포함하는 가장 포괄적인 의미의 행복이다.’
사실 기번은 아버지의 강요에 못 이겨 수전 퀴르쇼와의 사랑을 포기하고 말았다. 행복의 가장 중요한 요소와 단절된 채 살았으니 기번은 병리적이라고 해야 한다고 주장할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기번이 이성과의 사랑에서는 실패했다 해도 다른 인간관계는 그렇지 않았다.
기번은 [로마제국 쇠망사]라는 대작을 완성하기 위해 오랜 시간 혼자 연구하고 글을 써야 했지만, 사람들과 어울릴 때도 그는 똑같이 행복해했다. 런던에 머무는 동안에도 활발하게 사교활동을 했으며, 부들 클럽, 화이트 클럽, 브룩스 클럽, 문학 클럽에서 활동하면서 어디에서나 매력적인 모습으로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을 키워준 포르텐 아주머니에게도 진심어린 애정을 보였다. 포르텐 아주머니는 기번에게 우정이라는 감정을 알게 해준 사람이기도 했는데, 그런 포르텐 아주머니 덕에 기번은 셰필드 경과 오래도록 가깝게 지낼 수 있었다. 기번은 지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따금 고독한 처지를 한탄하기도 하고 친척 여자아이를 양녀로 삼는 문제를 잠깐 고민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결혼에 대한 생각은 그저 백일몽 같은 것이어서 이내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친밀한 애착,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성적(性的)인 충족에서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오늘날의 주장은 기번 같은 사람들을 설명하지 못한다. 기번은 많은 사람과 우정을 쌓았지만 자아존중감과 즐거움을 얻는 것은 주로 일에서였다.
기번은 고전주의 작가로서 인간의 우둔함과 방종을 반어적이면서도 무심한 문체로 표현했다. 프랑스의 사상가이자 문학가 루소와 영국의 시인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 같은 낭만주의 작가들은 이런 이유 때문에 그를 싫어했다. 기번의 글을 보면 인간에 대한 공감의 폭이 확실히 좁다. 섹스는 그저 오락 대상일 뿐이다. 종교는 미신으로 치부된다. 하지만 그 거대한 작업을 해내려면 그런 자세가 필요했다. 동요와 혼란으로 얼룩진 오랜 역사를 정리하려면 균형 있는 시각이 필요했던 것이다. 기번의 위대한 역사서에는 그의 인간애가 표현되지 않았다. 표현될 수도 없었다. 하지만 기번이 친구들에게 보여준 따뜻한 감정과 친구들이 기번에게 보여준 애정은 그 역시 인간의 심장을 소유하고 있음을 증명했다. 사실 이전의 기준에 따른다면, 기번은 지극히 정상적인 부류에 속할 것이다. 하지만 이성애의 충족이 정신 건강에서 아주 중요한 요소라는 개념을 프로이트가 주창하면서, 기번이 보통사람들에 비해 더 행복하고 성공적으로 살았는지에 의문을 갖는 사람들이 생겼다.
인간관계 이외의 것에서 삶의 중요한 가치를 찾는 것은 비단 천재들만이 아니다. 역사를 기록하거나, 애완동물을 기르거나, 주식에 투자를 하거나, 비행기를 설계하거나, 피아노를 연주하거나, 정원을 가꾸는 등의 일에 흥미를 갖는 것은 현대의 정신분석 전문의들과 그 신봉자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행복을 얻는데 큰 역할을 한다. 위대한 창조자들의 경우에는 작품을 남기기 때문에 그 작품이 내 주장의 적절한 증거가 될 수 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보통사람들은 평생 뭔가에 몰두했더라도 그 대상에 얼마나 폭넓고 깊이 있게 흥미를 느꼈는지를 확인할 길이 없다. 다른 작가의 작품을 사들일 수 있는 부자에게는 소장품들이 쌓여있을 것이다. 열정적인 정원사라면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나무와 꽃이 있을 테고, 그 생명들은 책이나 그림만큼 오랫동안은 아니라 해도 적어도 몇 년 동안은 열정의 증거로 남을 것이다. 하지만 풍차나 귀뚜라미에 열정을 쏟았다면 증거로 남길 것이 없다. 그렇다 해도 만족스러운 인간관계를 맺었든 맺지 않았든 이렇게 다른 대상에 열정과 흥미를 쏟으면서 삶을 그야말로 가치 있게 만든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다.
오늘날 우리는 인간관계에 지나치게 큰 의미를 두고 있다. 사실 인간관계와 행복의 연결 고리는 매우 허약하다. 제대로 된 인간관계를 맺는다면 삶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할 것이고, 행복하지 못하다면 그 인간관계는 뭔가 잘못된 거라는 우리의 생각은 지나친 것이 아닐까?
물론 사랑과 우정은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중요한 부분이다. 하지만 행복의 유일한 요소는 아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은 나이를 먹으면서 변하고 발전한다. 노년이 되면 대체로 인간관계의 중요성이 덜해진다. 어쩌면 이것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이별을 덜 고통스럽게 하려는 자연의 자비로운 섭리일지도 모른다. 어떤 경우에든 인간관계에는 불확실성의 요소가 늘 있기 때문에, 그 인간관계가 완전무결한 것으로 미화되거나 무언가를 이루는 유일한 길이 될 수는 없다. 아마도 가장 친밀한 관계인 결혼이 그렇게도 불안정한 이유도 사람들이 인간관계를 과대평가하기 때문일 것이다. 결혼을 행복의 주된 요소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결혼생활을 눈물로 끝내는 일도 줄어들 것이다.
자연의 섭리에 따라 우리 인간은 인간관계뿐 아니라 인간관계 이외의 것에도 끌리며, 이런 인간 조건의 특징이야말로 삶에 적응하는데 귀중하고 중요한 부분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우리는 번식, 그러니까 우리 자신은 언젠가 사라질지라도 유전자는 영원히 생존하게 하는 생물학적 기능을 아주 중요하게 여긴다는 점에서는 다른 동물들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이렇게 중요한 번식기간을 지나서도 여전히 지속되는 삶 또한 우리에게는 가치가 있다. 이 시기에 이르면 인간관계 이외의 것을 향한 흥미와 관심이 더 큰 의미를 지닌다. 물론 이런 흥미와 관심이 더 일찍부터 존재하긴 하지만 말이다.
뒤에서 보게 되듯 위대한 창조자들 가운데 몇몇의 경우에는 다른 사람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기 어려운 불운한 환경에 의해 인간관계보다는 자신만의 노력 분야 쪽으로 기울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가 다른 것을 대신한다기보다는 무엇에 더 역점을 두는가의 문제다. 그리고 일부 정신분석 전문의들이 주장하듯, 창조 활동이 언제나 인간관계의 대안이 된다는 뜻도 아니다. 배우자도 아이도 없는 사람들이 정서적으로 편협해질 수 있듯 배우자와 가족 말고는 무엇에도 흥미가 없는 사람들 역시 편협하다고 할 수 있다.
보통사람들이 어떤 대상에게 느끼는 흥미, 그리고 진정한 독창성을 발휘하는 수많은 창조활동은 인간관계 없이도 계속된다. 내가 볼 때, 사람이 혼자 있을 때 그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과정은 그가 다른 사람들과 상호작용할 때 일어나는 만큼이나 중요한 듯하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전체 수명의 3분의 1정도를 잠이라는 고립상태에서 보낸다. 사람은 한평생을 살면서 전혀 다른 두 가지의 충동을 느낀다. 다른 이들을 사귀고 사랑을 나누는 등 어떤 방식으로든 다른 이들과 가까이 지내고 싶다는 충동이 그 한 가지고, 또 한 가지는 독립적이고 개별적이며 독자적인 삶을 살고 싶다는 충동이다. 그런데 정신분석학의 ‘대상관계’ 이론가들의 주장을 듣다보면, 고립된 개인으로 살아갈 때, 그 삶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들의 관점에서 보면,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살면서 예를 들면 배우자, 부모, 이웃 등의 역할을 맡고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면서 비로소 우리 인간은 가치를 지니는 것 같다. 개인의 존재가 정당화되려면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존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위에 열거한 위대한 사상가들 중 몇몇은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일 없이 자기 위주의 삶을 살았으며 ‘자기애’의 성향을 보였다. 말하자면 다른 사람들의 평안보다는 자신의 마음속에서 진행되는 과정에 몰두했던 것이다. 수많은 작가, 작곡가, 화가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끊임없이 자신을 발견하려 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바꾸려 하고, 자신의 창조물을 통해 우주에서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했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이 과정이 명상이나 기도처럼 다른 사람들과는 별 관계가 없지만 그 자체로 정당성을 갖는 귀중한 통합의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에게 가장 의미 있는 순간은 새로운 통찰을 얻는 순간, 다시 말해 새로운 발견을 하는 순간이다. 그리고 이런 순간은 혼자 있는 순간이다.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라 해도 대개는 그렇다.
보통사람들은 갖지 못한 탁월한 재능을 갖고 있다 해도, 창의적인 사람들 역시 보통사람들과 같은 욕구와 소망을 갖는다. 그런 그들이 자신의 작품에 사고와 감정을 담을 때, 누구에게나 존재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미처 알아채지 못하는, 고군분투하는 인간의 면들이 생생하게 드러난다. 창의적인 사람들이 고독 속에서 통합이라는 내면의 과정에 몰두할 때, 그들처럼 재능을 갖지 못해 자신의 욕구를 들여다보지 못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욕구 또한 표현된다.
[Anthony Storr 저, 이 순영 역, 고독의 위로, pp11-20]
송죽한담 블로그에서 펌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