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르미도르는 프랑스 혁명의 영웅적이며 기억될 만한 국면의 종말이다. 즉 자신들을 브루투스와 카토로 생각했던 빨간 보닛을 쓴 예절바른 시민들과 거친 상퀼로트들의 상의 종말이며, 고전적이며 고결한 인간상의 종말이다. 그러나 또한 테르미도르는 "리옹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라던가, "만 명의 군사들이 신발이 없다. 당신은 스트라스부르의 모든 귀족들이 가진 신발을 거두어 수송준비를 갖춰 내일 오전 10시까지 사령부에 인도하도록" 이라는 무시무시한 말들이 나오는 국면의 종말이기도 하다. 이는 살아가기에 그리 편한 상황은 아니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굶주리고 많은 사람들이 두려움을 안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최초의 핵폭발만큼 끔찍하고 돌이킬 수 없는 하나의 현상이었으며, 모든 역사는 이에 의해 영원히 변화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발생시킨 에너지는 유럽 구체제의 군대를 지푸라기처럼 쓸어버리기에 충분했다.
전문적으로 혁명기라고 기술되는 시기의 나머지 기간(1794~1799)에 프랑스의 중류계급이 직면했던 문제는 1786~1791년 당초의 자유주의적 프로그램에 기초하여 어떻게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발전을 성취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1870년이 되면 프랑스 중류계급은 의회제 공화국에서 하나의 실현 가능한 방법을 발견하게 될 것이었지만, 그들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이 문제를 한 번도 적절하게 해결한 적이 없었다. 급속한 정치체제의 변화 - 집정부, 통령정부, 제정, 복고 부르봉 군주제, 입헌 군주제, 공화국, 제정은 자코뱅 민주 공화국과 구체제라는 이중의 위험을 피하면서 부르주아 사회를 유지하려는 시도들이었다.
테르미도르파의 가장 큰 약점은, 그들이 부활된 귀족적 반동과 로베스피에르의 몰락을 이내 후회하게 된 자코뱅 - 상퀼로트적 파리 빈민들 양쪽으로 부터 압력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어떠한 정치적 지지도 획득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기껏해야 정치적 용인을 받고 있는 정도였다. 1795년 그들은 자신들을 이 양자로부터 지키기 위해 견제와 균형의 정교한 헌법을 고안해냈으며, 좌와 우로의 주기적 경도에 의해 가까스로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반대파를 쫓아내기 위해 그들은 점점 더 군대에 의존해야 했다. 이러한 상황은 기묘하게도 현대 프랑스의 4공화국과 유사한 상황이었으며, 또 그 결과도 유사했다. 이는 바로 장군의 지배였다.
그러나 집정부가 군대에 의존한 것은 주기적 정변과 음모 - 1795년의 각종 정변과 음모, 1796년 바뵈프의 음모, 1797년 프뤼크티도르, 1798년 플로레알, 1799년 프리레알 - 을 진압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취약하고 인기도 없는 정권에게 권력유지를 위한 유일하고도 안전한 보증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중류계급은 진취성과 확장을 필요로 했다. 군대는 이 명백히 해결 불가능한 문제를 해결하였다. 군대는 정복하였다. 군대는 자급하였다. 뿐만 아니라 군대에 의한 약탈과 정복은 정부로서도 수지 맞는 일이었다. 가장 똑똑하고 유능한 군지도자였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결국 취약한 민간정부를 제거하기로 결정하였던 것은 과연 놀라운 일이었을까?
이 혁명군은 자코뱅 공화국의 가장 무서운 산물이었다. 혁명군은 혁명적 시민의 '국민총동원' 에서 이내 직업적 전사의 군대로 바뀌었는데, 이는 1793년에서 1798년 사이에는 징병이 없었던데다가 군대생활이 적성에 맞지 않는 사람들이 대량으로 탈주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혁명군은 혁명의 특성을 지닌 동시에 기득이권의 특성 또한 가지게 되었는데, 이는 전형적인 보나파르트주의적 혼합이라 할 수 있다. 혁명에 의해 이 혁명군에는 전례 없는 군사적 우수성이 부여되었는데, 나폴레옹의 훌륭한 지휘력은 이 군사적 우수성을 이용하게 된다.
혁명군은 항상 즉석 징집군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러한 혁명군 안에서는 거의 훈련을 받지 않는 신병이 고참병으로부터 훈련과 사기를 보고 익혔으며, 정식 병영훈련은 무시해도 좋을 정도였고 병사들은 인간취급을 받았다. 공로, 즉 전투에서의 수훈에 의한 승진이라는 절대적 규칙에 의해 용기에 기초한 단순한 계급제도가 창출되었다.
이러한 사실과 오만한 혁명적 사명감 때문에 프랑스군은 보다 정통적인 군대처럼 물자에 의존하지 않을 수 있었다. 프랑스군은 유효한 보급체제를 가진 적이 없었는데, 이는 그들이 본국으로부터 독립하여 생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프랑스군은 보잘것없는 자체 수요를 조금이나마 충족시킬 수 있는 무기산업의 지원을 받은 일도 없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전투에서 매우 재빨리 승리를 거두었으므로 무기를 거의 필요로 하지 않았다. 1806년 대규모의 프러시아 군대는 전 군단을 통틀어 1400발의 포탄밖에 쏘지 않았던 군대 앞에서 무너졌다. 장군들은 무한한 공격적 용기와 현장에서의 창의에 상당히 의존할 수 있었다.
나폴레옹과 그 밖의 극소수 사람들을 제외하면 프랑스군의 장군과 참모들은 대부분 무능했다. 이는 혁명적 장군 혹은 나폴레옹의 원수들이 대개의 경우 두뇌보다는 용감성과 지도력 때문에 승진한 강인한 특무상사형 혹은 위관형 이었기 때문이다. 영웅적이었으나 매우 어리석었던 네이 원수는 극히 전형적인 예였다. 나폴레옹은 여러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나 그의 원수들은 대체로 전투에서 졌다.
프랑스군은 그 불완전한 보급체제에도 불구하고 벨기에, 북부 이탈리아, 독일과 같은 부유하고 약탈 가능한 나라들에서는 부족할 것이 없었다.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폴란드나 러시아 같은 황야지대에서는 이 불충분한 보급체제가 붕괴되었다. 위생시설이 전혀 없었기 떄문에 사상자수는 증대되었다. 1800년에서 1815년 사이에 나폴레옹은 자기 병력의 40퍼센트를 잃었다. 이 중 약 3분의 1은 탈주에 의한 것이었지만, 이 손실병력 가운데에서 90~98퍼센트는 전투 중에 죽은 것이 아니라 상처, 병, 피로, 추위 때문에 죽은 사람들이었다. 간단히 말해 혁명군은 전 유럽을 돌발적이고 격렬한 전투를 통해 단숨에 정복해갔는데, 이는 그렇게 할 수 있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기도 했다.
당시 군대는 부르주아 혁명이 재능에 대하여 개방해놓았던 다른 많은 출셋길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출셋길이었다. 따라서 군대에서 성공한 사람들은 다른 부르주아와 마찬가지로 내부적 안정 속에서 기득권을 가지고 있었다. 군대에 내재하는 자코뱅주의에도 불구하고 군대가 테르미도르 이후 정부의 중심이 되고, 군대의 지도자 보나파르트가 부르주아 혁명을 마감하고 부르주아 정권을 시작하기에 적합한 사람이 되었던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자신이 태어난 야만적인 섬 코르시카의 기준에서 볼 때 그는 점잖은 집안 태생이긴 했지만,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전형적인 출세주의자였다. 1769년에 태어난 그는 전문적 능력이 필요불가결한 육군 내 몇 안되는 부문 중 하나였던 포병대에서 완만한 출세과정을 걸어나갔는데, 그는 야심적이었고 불만을 품고 있었으며 혁명적이었다. 혁명과정에서, 특히 그가 열렬히 지지 하였던 자코뱅 독재 아래서 그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한 전선에서 한 지방위원 - 그는 우연히도 나폴레옹과 같은 코르시카인이었는데 이러한 사실이 그의 장래에 해가 되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 에 의해 훌륭한 재능과 장래성 있는 군인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혁명력 2년에 그는 장군이 되었다. 로베스피에르의 몰락에도 불구하고 살아 남았으며 파리에서 유익한 인간관계를 형성할 줄 아는 재능 덕분에 그 어려운 때를 넘기면서 앞으로 전진할 수 있었다. 1796년의 이탈리아 출정에서 그는 기회를 포착하였는데, 이탈리아 원정에 의해 공화국의 의심할 바 없는 제1의 군인이 되었으며 민간정부 당국으로부터 사실상 독립적으로 행동하였다. 1799년 외국의 침략에 의해 집정부의 취약성과 나폴레옹의 절대적 필요성이 명백해졌을 때, 권력은 반쯤 그에게 떠맡겨진 상태였고 그는 나머지 반을 움켜쥐었다. 그는 제 1통령이 되었으며, 다음에는 종신통령, 다음에는 황제가 되었다.
그리고 그의 출현과 함께 집정부 시대에 해결 불가능했던 무넺들은 마치 기적처럼 해결 가능한 것으로 변했다. 수년 이내에 프랑스는 민법전을 탄생시키고, 교회와 협약을 맺었으며, 부르주아적 안정의 가장 현저한 상징인 국립은행을 설립하였다. 이리하여 세계는 최초의 현세적 신화를 가지게 되었다.
나폴레옹의 신화는 1세기에 걸쳐 존재했기 때문에 나이 들거나 시대에 뒤진 나라에 사는 독자들은 그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 1세기 동안 나폴레옹의 흉상이 없는 중류계급의 진열장은 완전할 것일 수 없었고, 재치 있는 팸플릿 작자들은 농담삼아서라도 나폴레옹은 인간이 아니라 태양의 신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었다. 이러한 신화의 놀라운 힘은 나폴레옹이 거둔 승리에 의해서도, 나폴레옹이 확실히 가지고 있었던 천재성에 의해서도 적절히 설명될 수 없다.
비록 권력이 그를 다소 역겨운 인간으로 만들긴 했지만 한 인간으로서 그는 의심할 바 없이 매우 총명하고 재주가 많으며 지적이고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이었다. 장군으로서 그에게 필적할 사람은 없었으며, 통치자로서의 그는 뛰어나게 유능한 입안자, 장, 행정가였으며, 부하들이 하는 일을 이해하고 감독하기에 충분한 다방면에 걸친 지성을 갖추고 있었다. 한 개인으로서의 그는 위대함의 느낌을 발산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에 관해 증언하는 사람 - 괴테와 같은 - 들 대부분은 명성의 절정에 있는 나폴레옹을 보았으므로, 그떄에는 이미 신화가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는 분명히 매우 위대한 사람이었고 또 - 아마도 레닌을 제외하고 - 그의 초상화는 오늘날 적당한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대체로 역사초상 화랑에서 가장 쉽사리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작은 키, 이마 위로 빗어내린 머리카락, 반쯤 열린 조끼 속으로 찔러넣은 손이라는 세 개의 등록상표에 의해 알아보는 것에 불과하더라도).
그 를 20세기의 위인 후보자들과 비교하는 것은 아마도 무의미할 것이다. 왜냐하면, 나폴레옹의 신화는 그의 공적에 기초를 두고 있다기보다는 당시에는 유례 없었던 입신출세에 관한 사실들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를 뒤흔든 과거의 유명한 사람들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처럼 왕으로 출발했거나 카이사르와 같이 귀족으로 출발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꼬마 하사' 였으며 여기에서 출발하여 오로지 개인적 재능만을 가지고 한 대륙을 지배하는 위치에 올라섰다. 이는 엄격하게 말하면 진실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출세는 이러한 설명을 타당하게 만들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젊은 보나파르트처럼 책을 탐독하고, 서투른 시와 소설을 끼적거리며, 루소를 숭배했던 젊은 지식인은 누구든지 이 이후에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고 자기 이름의 두문자(頭文字)가 월계수로 둘러싸이는 것을 상상할 수 있었다. 모든 사업가들은 이제부터 자신의 야망에 걸맞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즉 그들 지산이 진부한 표현이라고 말하는 '재계의 나폴레옹' 혹은 산업계의 나폴레옹이 그것이다.
모든 평민들은 태어나서부터 왕관을 쓰도록 되어 있었던 사람들보다 위대해진, 일개 평민의 모습을 보고 감격했다. 이중혁명이 야심가에게 세계를 개방하였던 바로 그때에 나폴레옹은 그 야심에 개인적 이름을 부여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 이상이었다. 그는 18세기의 문명인이었으며, 호기심 많고 계몽된 합리주의자였다. 그러나 그는 19세기의 낭만주의적 인간이 되기에 충분할 정도로 루소의 제자로서의 측면도 갖추고 있었다. 그는 프랑스 혁명이 탄생시킨 사람이었으며, 안정을 가져온 사람이었다. 한마디로 나폴레옹은 전통과 손을 끊은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꿈속에서 스스로와 동일시 할 수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프랑스 사람에게 그의 신화는, 훨씬 간단한 이유에서였다. 즉 프랑스의 오랜 역사 속에서 그는 가장 성공적인 지배자였다. 그는 외국에서 영광된 승리를 거두었다. 국내에서 또한 오늘날까지 존재하고 있는 프랑스의 여러 제도상의 기구를 확립 또는 재확립하였다. 확실히 그의 사상의 대부분 - 아마도 전부 - 은 혁명 및 집정부가 예기하였던 바였다. 그의 개인적 공헌이라면 그것을 오히려 보수적 - 위계적 - 권위주의적으로 만들었다는 데 있다. 그러나 그의 선행자들은 예기하였고, 그는 실행하였다.
프랑스 법이라는 위대하고 빛나는 기념비, 즉 비 앵글로색슨적 부르주아 세계 전체의 모델이 되었던 법전은 나폴레옹 법전이었다. 지사 이하 관리의 계층제도, 법원, 대학, 학교의 계층제도는 나폴레옹의 것이었다. 군대, 관계, 교육계, 법조계와 같은 프랑스의 공적인 생활에서의 훌륭한 '출세가도' 는 오늘날에도 아직 나폴레옹적인 형태를 남기고 있다.
그는 그의 전쟁으로부터 돌아오지 못한 약 25만 명의 프랑스인들 제외하고는 모든 프랑스 사람들에게 안정과 번영을 가져다 주었다. 영국인들은 확실히 자신들의 자유를 위하여 전제(專制)와 싸우고 있다고 생각하였으나 1815년 대부분의 영국인들은 1800년경보다 가난하고 사정이 어려웠다. 반면 대부분의 프랑스인들이 더 나은 형편이었음은 거의 확실하다. 아직 무시해도 좋을 정도였던 임금노동자들을 제외하면 프랑스 혁명이 가져다준 실질적 - 경제적 이익을 상실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폴레옹이 몰락한 후에도 비정치적인 프랑스인들, 특히 비교적 부유한 농민들의 이데올로기로서 보나파르트주의가 존속하였던 것은 그렇게 불가사의한 일이 아니다. 1851~1870년에 걸쳐 보나파르트주의를 일소하는 데에는 제2의, 보다 소형의 나폴레옹이 필요하였다.
나폴레옹이 파괴하였던 것은 단 하나였다. 즉 자코뱅 혁명, 평등, 자유, 박애의 꿈, 압제를 뿌리치기 위하여 인민들이 장엄하게 봉기한다는 꿈이었다. 이것이 나폴레옹의 신화보다 더 강력한 신화였음을 우리는 보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나폴레옹이 몰락한 후 19세기의 여러 혁명들을 고무하였던 것은 그 자신의 나라에서조차 바로 이 신화였으며, 그에 대한 추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길사 『혁명의 시대』 pp.172 ~ 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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