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 관
고등학생이 읽어야 할 앨빈 토플러의 저서는 [미래의 충격] [제3의 물결] [권력이동]등이다. 이들 저서 중 가장 먼저 발표된 글이 [미래의 충격 [FUTURE SHOCK](1970)이다. 그리고 가장 널리 알려진 저서가 [제3의 물결] (1980)인데, 이 책은 [미래의 충격]을 보완 설명한 저서이다.
토플러는 1928년 10월 미국 뉴욕에서 태어났다. 뉴욕 대학을 졸업했으나 그는 공장 막노동 일을 했다. 그 체험이 토플러에게는 '대학원 과정' 이었다고 스스로 술회한다. 사회의 변환, 기업의 산업 형태와 변환 등을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토플러의 [미래의 충격]은 제1부 영속성의 종말, 제2부 일시성, 제3부 새로움, 제4부 다양성, 제5부 적응력의 한계, 제6부 생존을 위한 전략 등으로 나누어 우리가 생활에서 흔히 접하게 되고 겪게 되는 사례를 논거로 들어 문제를 다루는데, 그 문제는 기술의 변화와 사회 변화에 따른 개인과 집단의 예측할 변화의 대응 방식에 대한 것들이다. 그는 이 저서에서 저술 목적과 주제를 이렇게 기술한다. "이 책은 인간의 변화에 의해 압도당할 때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가를 다룬 것이다. 이 책은 또 한편으로 인간이 미래에 적응한, 또는 적응에 실패하는 방법을 다룬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책의 목적은 우리가 미래에 적응할 수 있도록, 다시 말해 우리가 개인적 사회적 변화에 대한 인간의 반응 방법을 보다 깊이 이해함으로써 이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돕는데 있다"고 스스로 말하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그는 지금의 변화를 제2차 산업 혁명이라고 부르지 않고 인류 역사상 최대의 변화라고 주장한다. 그 동안 우리 역사는 제1단계 농업 사회, 제2단계 산업 사회를 거치면서 많은 획기적인 변화를 겪어 왔다. 그리고 지금의 단계로 이행되었다. 이를 토플러는 '제3의 물결' 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에 따른 변화의 폭은 산업 사회로 이행할 때의 변화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과거의 삶이 느린 변화에 따른 영속성의 세계에서의 삶이었다면 현대는 이동 속도가 빠른 일시성의 삶으로 전환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일회용품과 조립식 용구의 증가, 소유 개념의 변화에 따른 임대 제도의 등장, 유행의 주기 단축, 생활 반경의 광역화에 따른 교우관계의 변화, 관료 사회의 붕괴 등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기술력 발전은 기존의 사회 제도 및 사회 관습의 변화 뿐 아니라, 새로운 제도 혹은 관습을 창출해내기에 이르렀으며 도덕적 가치 체계의 붕괴는 물론이고 동성연애자가 부모가되는 현상까지도 일어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는 미래 사회의 가장 큰 특징으로 '다양성'을 든다. 그는 과학 기술의 발전에 의한 표준화 심화로 미래 사회가 '획일화' '선택권이 소멸된 사회' 가 될 것이라는 견해를 반박한다. 그 대신 대량생산체제의 붕괴에 따른 탈표준화, 소집단문화의 양성화등에 의해 생활양식 자체가 다양화됨에 따라 오히려 선택권의 과잉이 문제 될 것이라고 내다 본다.
이에 따라 토플러는 변화의 대응책을 제시한다. 첫째, 미래의 충격 완층 장치의 필요성 역설, 둘째는 미래형 시제의 교육 창출, 셋째 기술의 길들임이 그것이다.
이러한 현대 사회의 분석과 예견은 70년대 이후 세계상의 변화에 많은 부분이 적중되었다.
그 요인은 그의 담론이 변화와 방향에 분석의 초점을 맞추었다는 점과 분석의 도구로 정치학, 경제학, 심리학, 역사학, 사회 기술 등의 이질적인 학문 분야가 제공하는 정보들을 종합해서 사용했다는 점 때문이다.
'미래의 충�' 이란 개념은 '문화 충격'이 낯설고 이질적인 문화와의 접촉에서 오는 당혹감, 좌절감, 그리고 방향감각의 상실 등에서 기인한 것이라 할 때, 시간적 현상으로서 사회적 변화 속도의 급속한 가속화의 산물로 나타나는 일종의 정신적 문화적 충격을 의미한다. 이를 이해하고 학생들은 먼저 이 고전을 읽으면서 미래 사회의 변화는 구체적으로 어떤 현상으로 일어날 것이며, 이에 대한 긍정적, 부정적인 측면을 살펴 정리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에 대응하는 구체적인 방안을 토플러는 어떻게 말하고 있으며 내 생각은 어떤가도 정리해야 한다. 새로운 패러다임이 요구되는 21세기 시작이 코 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에 이 책의 의미는 더욱 주모갇을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2) 본문 내용(발췌)
산업화시대의 학교
모든 사회는 과거·현재·미래에 대한 나름대로의 특징적 태도를 지니고 있다. 변화의 속도에 따라 이루어지는 이 시대적 편견(time-bias)은 사회적 행동의 가장 큰 결정 요인임에도 불구하고 별로 주목되고 있지 않지만 사회가 젊은이를 어른으로 키워 나가는 방법에 두드러지게 반영되고 있다.
정체된 사회에서는 과거가 현재 속에 자리잡고 미래 속에서도 과거가 되풀이되고 있다. 이러한 사회에서 자녀를 키우는 가장 현명한 방법은 과거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다. 과거의 기술은 미래에 필요로할 기술과 똑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도<옛 사람이 지혜롭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아들에게 명백히 규정된 전통적 가치관에 따라 온갖 종류의 실용적 기술을 전수했다. 지식은 학교에 모여 있는 전문가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가족·종교기관·도제제도를 통해 전달되었다. 배우는 사람과 가르치는 사람이 사회 전체에 퍼져 있었다. 과거의 교과목은 바로 과거였다.
기계화 시대는 이 모든 것을 분쇄해 버렸다. 산업주의는 새로운 종류의 인간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산업주의는 가족이나 교회가 스스로는 결코 제공할 수 없는 기술을 요구했다. 그것은 가치체계의 변호를 강요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인간이 새로운 시간관념을 발전시킬 것을 요구했다.
대중교육은 산업주의가 필요로 하는 유형의 성인을 길러 내기 위해 만들어 낸 독특한 제도였다. 문제는 매우 복잡했다. 새로운 세계, 즉 반복적인 실내노동, 연기, 소음, 기계, 밀집된 생활조건, 집단적 규율, 그리고 해와 달의 주기에 의해서가 아니라 공장의 사이렌과 시계에 의해 시간이 규정되는 세계에 어린이들을 어떻게 사전 적응시키느냐가 문제였다.
그 해결책은 그 구조 자체가 이러한 새로운 세계를 모방한 교육제도였다. 이 교육제도는 일시에 등장한 것이 아니었다. 오늘날의 교육제도조차도 산업화 이전 사회에서 유래된 시대역행적 요소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수많은 학생(원료)들을 중앙에 위치한 학교(공장)에 모아 교사(노동자)들로 하여금 다루도록 한다는 전반적인 아이디어는 산어화시대의 위업이었다. 교육행정의 전반적인 위계제도는 발전해 가는 과정에서 산업사회의 관료제도를 모방해 갔다. 지식을 항구적인 전문분야로 편성한 것 자체가 산어주의적 가설에 근거한 것이었다. 학생들은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정해진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종을 울려 시간의 변화를 알려 주었다.
이처럼 학교의 내부 생활은 산업사회를 미리 알려주는 거울, 완벽한 전주곡이 되었다. 편제화, 개성화의 결핍, 착석·배치·등급사정·채점 등의 경직된 제도, 교사의 권위주의적 역할 등 오늘날 가장 비판받고 있는 교육의 특징들이 바로 대중적 공교육을 그 장소와 시대에 알맞는 효과적 적응수단으로 만들었다.
이러한 교육제도를 경험한 젊은이들은 일의 구조·역할 및 제도가 학교를 닮은 성인사회에 편입되었다. 학생은 단순히 나중에 활용하게 될 사실만을 배우는 것이 아니었다. 학생들은 미래에 영위할 생활의 모형에 맞춘 생활양식을 배우는 동시에 경험했다.
예컨데 학교는 산업주의가 필요로 하는 새로운 시대적 편견을 교묘히 주입시켰다. 이전에 존재한 적이 없었던 상황에 직면한 사람들은 현재를 이해하는 데 더 많은 정열을 쏟아야 했다. 이렇게 해서 교육의 초점 자체가 서서히 과거로부터 벗어나 현재로 옮겨지기 시작했다.
'진보적' 방법을 미국 교육에 도입하기 위해 듀이(John Dewey)와 그 추종자들이 벌인 역사적 투쟁은 어떤 면에서 보면 낡은 시간적 편견을 고쳐보려는 필사적 노력이었다. 듀이는 전통적 교육의 과거 지향성을 타파하여 교육의 초점을 현 시점(here-and-now)에 맞추려고 노력했다. 듀이는 "과거를 본래의 목적으로 삼는 학교제도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과거를 현재를 이해하는 수단으로 인식하는 데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수십년이 지난 후에도 마리탱(Jacques Maritain)등과 같은 전통주의자들과 허친스(Robert Maynard Hutchins)와 같은 신아리스토텔레스 학파의 사람들은 여전히 교육의 균형을 현재에 유리하게 바꾸려는 사람들을 통렬하게 비난했다. 시카고대학 총장을 역임하고 현재 민주제도 연구소(Center for the study of Denocratic Institutious) 소장으로 있는 허친스는 학생들에게 현대사회를 가르치려고 교육자들은 <현실숭배자>라고 비난했다. 진보주의자들은 '현실주의' 라는 비열한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는 비난을 받았다.
시대적 편견을 둘러산 이 논쟁의 여파는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예컨대 바준(Jacques Barzun)은 그의 저작에서 "정의할 수 없는 현재를 … 가르친다는 것은 부질없는 것이다." 라고 주장한다. 이처럼 우리의 교육제도의 초산어주의 혁명이라는 새로운 혁명의 필요성이 나타나고 있는 산업화시대에 아직도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어제의 진보주의자들이 '현실주의' 라고 비난받았던 것과 똑같이 내일의 교육개혁자들은 '미래주의(Futurism)' 라는 비난을 받을 것이다. 참다운 초산업주의 교육은 우리의 시대적 편견을 다시 한번 앞으로 이행시킬 때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교육혁명
빠르고 유동적이며 자기 조정적인 내일의 기술체계에서 기계는 물리적 재료의 흐름을 처리해 나가고 사람은 정보와 통찰력의 흐름을 처리해 나갈 것이다. 또 기계는 점점 더 일상적인 일들을 수행해 나갈 것이며 인간은 지적이고 창조적인 일들을 수행해 나갈 것이다. 기계와 인간이 모두 거대한 공장과 공업도시로 집중되지 않고 지구상의 여러곳으로 흩어져 매우 민감하고 거의 동시적인 통신망으로 연결될 것이다. 인간의 노동은 공장과 지단적인 사무실로부터 지역사회와 가정으로 옮겨질 것이다.
기계는 이미 이루에서 이룩한 것처럼 10억분의 1초 단위까지 동시화될 것이지만 인간은 오히려 탈동시화(do-synchronized)될 것이다. 공장의 싸이렌은 사라질 것이고 한 세대 전에 멈퍼드가 '현대 산업화시대의 핵심적인 기계' 라고 일컬었던 시계까지도 순수한 기술적 문제와는 성질이 다른 인간문제에 미치는 영형력의 일부를 상실할 것이다. 아울러 기술을 규제하기 위해 필요로 했던 조직체들도 관료제로부터 '애드호크러시'로, 영속성으로부터 일시성으로, 그리고 현실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미래에 대한 관심으로 이행해 갈 것이다.
이러한 세계에서는 산업화시대의 가장 귀중한 속성이었던 것들이 장애물로 된다. 내일의 기술은 끝없이 반복작업에 한결같이 종사하는 교육정도가 낮은 수백만의 노동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내일의 기술은 빵의 대가는 권위에 대해 기계적으로 복종하는 것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일편단심 명령에 따르는 사람들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미래의 기술은 비판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고 새로운 환경을 헤쳐 나갈 수 있으며 급변하는 현실에서 새로운 관계를 제빨리 찾아낼 수 있는 사람들을 요구한다. 내일의 기술은 스노의 설득력이 강한 표현처럼 '뼈 속까지 미래를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
끝으로 우리가 가속적 추진력을 장악하지 못한다면 ―현재로서는 장악하리라는 징조가 별로 없다. ―내일의 개인은 지금보다 더욱 격심한 변화에 대응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여기서 교육의 과제는 분명하다. 교육의 일차적 목표는 개인의 '대응능력(cope-ability)' ―계속적인 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속도와 ―경제성을 증대시키는 데 두지 않으면 안된다. 변화의 속도가 빠르면 빠를수록 미래의 사건 패턴을 판별하는 데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사람이 과거를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현재를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충분치 않다. '현 시점' 의 환경은 곧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변화의 방향과 속도를 예상할 수 있도록 배워야 한다. 전문적으로 표현한다면 미래에 대한 반복적·개연적·장기적 가설들을 설정하도록 배워야 한다. 가르치는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초산업주의적 교육을 창출하려면 우리는 우선 미래에 관한 연속적이고 다양한 이미지들을 설정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앞으로 20년 내지 50년 안에 필요로하게 될 직업·전문직종·생업 등의 종류에 관한 가설, 앞으로 보급될 가족형태와 우리를 둘러싸게 될 기술의 종류, 그리고 앞으로 우리가 만들어야 할 조직구조 등을 말한다.
이같은 가설을 설정하여 그것을 규정하고 논의하면 체계화시키고 계속 갱신해 나가야만 미래형 인간이 가속적 추진력 속에서 살아남는 데 필요한 인식적·감정적 기술의 겅격을 연역해 낼 수가 있다.
어느 집단도 미래에 대한 통찰력을 독점할 수 없기 때문에 이 협의회들은 민주적이어야 한다. 이 협의회에는 전문가들이 꼭 필요하다. 그러나 미래협의회가 직업적인 교육가나 계획자 또는 대표성없는 엘리트들에 의해 장악된다면 성공을 거둘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출발에서부터 학생들도 참여해야 하지만 단순히 어른들의 견해에 덮어놓고 찬성하는 식이어서는 안된다. 젊은이들이 이 협의회를 사실상 발기하지 못했더라도 미래를 설계하고 여기에서 살아갈 사람들이 '가상적 미래' 를 설정하고 토론하도록 협의회를 주도해나가는 데 도움을 주어야 한다.
미래협의회 운동은 우리의 학교와 대학이 궁지에서 벗어날 방도를 제공해 준다. 교육제도가 학생들을 시대착오적 생활로 이끌어 가려고 함으로써 함정에 빠져 있기 때문에 오늘날의 학생들이 사사건건 저항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과격파 학생들은 19세기의 마르크스주의와 20세기 초 프로이드 학설을 혼합한 사회적 강령에 논거를 두려고 시도함으로써 그들 역시 기성세대와 마찬가지로 과거와 현재에 전적으로 얽매여 있음을 드러냈다. 교육분야에 미래지향적이고 미래형성적인(future-shaping) 기동 대책반을 만든다면 젊은이들의 혁명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을 것이다.
현행 제도의 파탄을 인식하면서도 다음번 조치에 확신을 갖지 못하는 교육자들에게 이 협의회 운동은 젊은이들과의 적대 아닌 협력을 통해 힘과 목적을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 운동은 지역사회와 학부모의 참여, 즉 기업가나 노동조합원·과학자 등의 참여를 유도함으로써 교육분야의 초산업주의 혁명을 위한 광범위한 정치적 지지를 구축할 수 있다. 현행 교육제도가 변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오히려 현행 교육제도는 급속히 변화하고 있다. 그러나 이 변화의 대부분은 현존의 기구를 가다듬어 시대에 뒤떨어진 목표를 더욱 효율화하고자 하는 시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밖의 변화도 자기 말살적이고 일관성이 없으며 방향 감각도 없는 일종의 브라운 운동(브라운이 1827년에 발견한 유체 속의 미립자의 불규칙 운동) 같은 것에 불과하다. 지금까지 미흡했던 점은 일관된 방향과 논리적 출발점이었다.
협의회 운동은 이 두가지를 함께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방향은 초산업주의 그리고 출발점은 미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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