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투자=전쟁:알아야

약소국가 난점을 전략전술로 극복:칭기스칸 / 출처 : www.economytalk.kr/ 구종서

modest-i 2022. 5. 31. 05:22

칭기스칸이즘⑥]


약소국가 난점을 전략전술로 극복


속도전으로 강대군 격파, 정복






글 /구종서(정치학박사 언론인, 역사소설가)





전략적 약점을 전술적 강점으로 보완


정해진 영역에 터를 잡고, 고정된 생업을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사회를 정주사회(定住社會)라 한다. 정주사회 국가들은 농사를 주업으로 하여 살아가는 농경국가(農耕國家)다. 이들은 비교적 부유하고 분명된 사회를 유지하고 있다.

정주사회 농경국가들은 특정 거주지역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으면서, 많은 시설을 만들어 놓아, 그곳을 떠나기가 어렵다. 따라서 그들은 공격보다는 방어에 치중한다. 전략적인 요지에 방어진지를 만들어 놓고, 적이 공격해 오면 요새전(要塞戰)으로 나라를 지키는 것이 정주사회 국가들의 방어전략이다.

일정하게 정해진 거주지가 없이, 계절에 따라 옮겨 다니면서 살아가는 사회를 이동사회(移動社會)라 한다. 그들은 주로 유목을 주업으로 삼아, 초원을 찾아 이동하면서 살아가기 때문에 유목국가(遊牧國家)라 한다. 이들은 대체로 가난하고 뒤떨어진 문명의 그늘지대를 이루고 있다.

이동사회 유목국가들은 수시로 옮겨 다니면서 살기 때문에, 일정 지역과 깊은 관계를 맺어놓지 않는다. 따라서 그들은 특별히 고정된 방어진지가 따로 없다. 그 대신 말로 구성되어 이동하기 쉬운 기마군(騎馬軍)을 만들어, 적이 쳐들어오면 싸워 물리치고, 패하면 말을 타고 오지로 도망하는 방식이다.

유목국가 전략의 특성은 말의 기동력을 이용한 속도전에 있다. 칭기스칸은 바로 이동형 유목국가인 몽골의 장수요, 임금이었다. 몽골의 특징은 인구가 적고 재력이 약한 후진국이라는 점이다. 칭기스칸은 후진 약소국가 몽골을 이끌고, 선진 문명대국들을 격파하여 세계를 제압하는 정복왕(征服王)되는 것이 야망이었다. 그는 몽골국의 전략적인 약점을 기마군의 전술적인 강점으로 극복하여, 결국 세계 정복왕의 꿈을 실현했다. 정복왕이 되기까지의 그의 전략·전술을 어떠했는가.




<▲승전을 외치는 기마병들. 칭기스칸의 선제공격 명령을 들으며 필승을 맹세하는 출
전 직전의 몽골기병대 모습의 재현이다.(2006년 울란바타르 남부교외 초원에서 열
린 칭기스칸의 몽골통일제국 건설 800주년 기념행사장에서).>


번개 치듯 나타나 신출귀몰하는 속도전


몽골 기병의 신속성(迅速性)과 속도전(速度戰)은 칭기스 전략의 기본특징이었다. 그는 기마의 신속성을 활용하여, 적의 요새에 대해 완벽한 공격전을 벌여, 적군을 격파하고 요새·성·도시들을 점령했다. 신속성을 자랑하는 몽골기마군의 이동속도는 상황에 따라 차이가 있다. 연락과 통신의 거점인 역참(驛站)들을 왕래하는 말은 하루 400km를 달렸다. 역참은 몽골군의 관할 지역에 설치돼있기 때문에, 통신병들은 적의 위협을 받지 않고 안심하고 전력 질주할 수 있어, 가장 빠른 속도를 올릴 수 있었다.

몽골이 1219년 중동의 회교대국 코라슴을 원정했을 때, 사막 길을 달리는 칭기스 군단의 하루 진군속도는 50km였다. 그때 다른 군단의 행군속도는 17km였다. 몽골의 외국원정군이 적과의 결전 없이 행군할 때는 하루 보통 30~40km였다. 때를 맞춰 군사와 기마들에 끼니를 제공하고, 휴식시키고, 물도 실으면서 하루 1백리 길을 달린 셈이다. 이것이 몽골 기마군의 평균 이동속도다. 그러나 적과 마주쳐 전쟁이 벌어지면, 기마의 속도를 사력을 다해 뛰고 나르는 초고속이었다.

중국 남송(南宋)의 사절로 몽골을 방문했던 서정유(徐霆有)는 몽골 기병들이 신출귀몰(神出鬼沒)하듯 갑자기 나타났다가 재빨리 사라지는 전투모습을 보고, “칸(khan)의 나라 기병들은 하늘에서 떨어지듯이 왔다가, 번개가 꺼지듯이 사라졌다.”(汗國騎兵 來如天墮 去如電逝)고 표현했다.

몽골기병의 속도전에 대한 놀라움은 유럽인들의 글에도 나타났다. 전쟁사 연구인 도는 중세사 학자들은 ‘몽골군은 난데없이 번개 치듯 갑자기 나타나 우리 군대를 격파한 다음에는, 도시로 들어와 머물러 있으면서 교회와 집에 불을 지르고 민간인을 학살하고는, 어느 날 밤사이에 소리 없이 사라졌다. 우리는 그들이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는 채, 공포에 떨면서 지하에 숨어서 기도만 드리고 있었다.’는 내용의 글들을 남겼다.




<▲적국을 향해 원정하는 몽골 기마군단의 행군 형태. 그들은 이렇게
하루 백리 길을 달리며 싸웠다.>


쾌속기동으로 기마의 왜소성 만회


몽골의 말은 유럽이나 다른 지역의 말보다 몸이 작고 다리가 짧다. 왜소성(矮小成性)을 지닌 말들이 같은 조건으로 달리면, 다리가 짧은 몽골말이 뒤처지게 돼있다. 이런 약점을 보완하지 않으면, 기마전에서는 백전백패(百戰百敗)다. 이런 점을 고려하여 칭기스가 개발한 기병전 방략이 ‘빠른 속도로 기민하게 움직이는’ 쾌속기동전술(快速機動戰術)이다.

칭기스는 전투에 임박하면, 일찍 출발하여 적보다 먼저 목표지점에 도착하라 명령했다. 목표한 요충지에 먼저 도착하면, 작전에 유리한 거점들을 모조리 차지하여, 군대를 배치할 수 있다.

전투지역에 먼저 도착하면, 군사와 기마가 쉴 수 있는 시간을 얻으면서, 여유 있게 전투준비를 갖출 수 있다. 그러면 정해 놓은 장소에서 정해진 시간에 적을 공격할 수 있다. 유리한 장소와 시간에 맞춰 전투를 치를 수 있다는 것은 작전의 주도권 장악을 의미한다. 작전의 주도권은 승리의 관건이 된다. 이런 준비가 갖춰져 있으면, 뒤늦게 도착하여 지치고 준비 없는 적을 쉽게 물리칠 수 있다. 그럴 때는 적군의 수가 아무리 많고 힘이 제아무리 강해도, 승부는 쉽게 판별된다. 기마전에서 말의 불리한 점을 보완하여 쾌속기동전술을 쓰면, 패전을 예상할 수는 없다. 발이 짧아 주력의 속도가 낮은 말의 결함을 보충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가 일병다마제(一兵多馬制)다. 기병 한 명에게 기마를 여러 마리 주어, 타고 가던 말이 지치면 힘이 있는 다른 말로 갈아타서, 속력을 높이기 위한 전술이다.

다마제도 쾌속기동을 가능케 하는 방법이다. 농경국가의 기병은 일병단마(一兵單馬)도 어려지만, 유목국가인 몽골에선 말이 많기 때문에, 다마제는 적과 싸워서 이길 수 있는 경쟁력이 된다.


공격받기 전에 먼저 공격하는 선제공격전술


적이 전투태세를 갖추기 전에 먼저 공격하는 것은 병법의 상식이다. 이것은 ‘선수를 써서 공격하여 적을 제압한다.’고 하여 선제공격전술(先制攻擊戰術)이라고 한다. 이 기습전법은 승산이 높은 전술이다.

칭기스의 세력이 강화되고 나라를 세워 임금이 되면서 국력이 증강하자, 친구이면서 경쟁자인 자무카(Jamuqa)가 반 칭기스세력들을 규합하여 연합작전을 펴서, 칭기스를 토멸키고 했다. 자무카는 지금의 몽골 동북쪽 아쿠누쿠(Aqunuqu)에 13개 국가 대표들을 모아놓고 작전계획을 토의했다.

그때 칭기스는 자기 본거지인 지금의 중부 몽골 쿠렐쿠(Kurelqu)에 진을 치고 있었다. 두 진영 사이는 말로 달려 3일 거리였다. 자무카의 연합군이 공격해 온다는 정보를 입수한 칭기스는 동맹국인 케레이트(Kereyit) 군과 합동군을 만들어, 먼저 출발하여 그 중간 지점인 쿠이텐(kuyiten)으로 가서 전투태세를 갖췄다. 칭기스의 이동을 모르고 있던 자무카 연합군은 진군하여, 쿠이텐 부근에 이르러 야영하고 있었다. 칭기스 동맹군은 밤을 이용하여 연합군 주둔지로 진격했다. 원거리 행군으로 지친 피로를 쉬면서 방심한 채 밤잠에 들어있던 자무카의 연합군은 칭기스 동맹군의 선제공격을 받아 풍비박산(風飛雹散)하여 흩어졌다.

이것이 ‘초원의 대전’으로 불리는 ‘쿠이텐전투’다. 이 전쟁에서 칭기스의 2개국 동맹군이 13개국의 자무카 연합군을 격퇴하여, 천하대세가 칭기스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이 전투는 칭기스 선제공격전술의 최대전과 중의 하나다. 칭기스의 몽골이 초원의 패권국가로 성장하자, 이를 두려워한 동맹국 케레이트가 몽골을 멸망시키기로 하고, 1202년 몽골군에 대해 공격전을 폈다. 아무 준비가 없었던 칭기스는 케레이트의 선제공격에 대항치 못하고 도망했다. 케레이트 군의 추격을 받아 마우고지(Mau Height)에서 전투가 벌어졌지만, 동맹세력으로부터 의외의 공격을 받은 칭기스는 대패하여 자기 고향 다달(Dadal) 지방으로 도망했다. 칭기스는 선제공격하면 언제나 이겼지만, 선제공격을 당하면 항상 패했다. 적을 먼저 공격하는 공격전(攻擊戰)은 져도 본전이다. 그러나 공격해온 적과 싸우는 방어전(防禦戰)은 이긴다고 해도 본전에 불과하다. 따라서 칭기스는 ‘방어전엔 승리가 없다. 승리는 공격전에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하여, 항상 밑질 것이 없는 선제공격을 펴왔다.




<▲ 필자와 함께한 칭기스칸 당시의 기병대 모습을 하고 있는 몽골 기마병의 복장.>


빨리 싸워 빨리 끝내는 속전속결전술


‘전투는 서둘러야 이길 수 있다.’는 것이 칭기스의 기본신념이었다. 적군과 싸우게 돼있고 그 전쟁을 피할 수 없다면, 칭기스는 빨리 쳐서 빨리 끝내는 쪽으로 결정했다. ‘빨리 싸워 빨리 끝낸다.’고 하여, 이것을 속전속결전술(速戰速決戰術)이라 한다. 이것은 군사력이 적고 전쟁이 많은 몽골에 알맞은 전법이다.

이와 유사한 개념들도 있다. 전쟁에서 속도를 높여 ‘서둘러서 번개 치듯 신속히 공격하는 것’을 전격기습(電擊奇襲, lightening attack)이라 한다. 적이 모르게 ‘불시에 돌진하여 맹격을 가하는 것’을 돌격기습(突擊奇襲, surprise attack)이라 한다. 전격기습이든 돌격기습이든, 기습은 모두 속전속결의 원리에서 나온 전술들이다. 속전속결 방법은 병력이 적으면서도 속도가 빠른 기병으로 구성된 칭기스의 군사에는 유리한 전법이다.

1202년 동맹국인 케레이트군의 선제공격을 받아, 마우고지 전투에서 대부분의 군사력을 잃고, 자기 고향 다달로 패주한 칭기스는 보복전을 펴기 위한 군사력 재건에 착수했다. 칭기스는 전쟁에 패하여 쫓겨 가면서도, 칭기스에 귀순해 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패하여 흩어졌던 군사들이 다시 모이고 새로 귀순해온 장정들을 모아 군사를 증편했다.

새로 편성된 군사들에게 연일 고된 전투훈련을 강행하여, 어느 정도 공격능력이 갖춰지자, 칭기스는 공격을 날을 계산하고 있었다. 그때 케레이트는 칭기스를 패주시킨 전승에 환호하여, 연일 축제를 벌이고 있었다.

칭기스는 그 틈을 타서 1203년 어두운 밤을 이용해 케레이트 왕궁을 돌격기습했다. 어둠 속에서 당황한 케레이트 군사들의 우왕좌왕(右往左往), 날랜 몽골군사들의 좌충우돌(左衝右突)이 맹렬히 계속됐다. 3일간 계속된 이 공격전에서 칭기스는 완승을 거뒀고, 케레이트는 군사의 대부분을 잃어 나라마저 멸망했다. 그 결과 칭기스는 몽골초원 제1의 강자가 됐다.

칭기스가 치룬 전쟁이나 전투는 거의가 칭기스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됐고, 그 형태는 전격기습·돌격기습의 속도전(速度戰)이었다. 칭기스는 서둘러 전쟁을 벌여 빨리 이기도록 하되, 싸워도 이길 수 없거나 싸워서 패하는 경우엔, 주저 없이 후퇴했다. 질 싸움은 하지 않고, 싸워서 지면 지체 없이 후퇴하여 피해를 줄인다는 전법이었다.

칭기스의 이 전법은 ‘유리하면 진격하고 불리하면 회피한다.’는 중국 오자(吳子)의 이진해퇴(利進害退) 병법과 일치한다. 오자는 전투력의 승산가능성을 기준으로 진퇴를 결정하되, ‘승리할 수 있다고 보이면 진격하고, 승리가 어려우면 철수한다.’(所謂見可而進 知難而退也)고 그의 병법서에 써놓고 있다.

출처 : 이코노미톡뉴스(시대정신 시대정론)(http://www.economytalk.kr)

 

각색 2022.3.31  모디스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