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한번 올린 연대기 그림을 다시 한번 올립니다. 이번 포스팅은 위 그림 하단의 동그라미로 <흉노 우위 화친>이라고 쓰인 시대를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흉노에서는 묵돌선우, 그 다음 노상선우의 시대였고, 한나라에서는 한고조 유방에서부터, 한무제가 즉위한 다음 40여년간의 전쟁을 일으키기 전까지입니다.
묵돌선우는 BC209년 선우자리에 오릅니다. 진나라가 망한 게 BC206년이니까, 이때는 아직 진나라 시절이었습니다. 묵돌은 일단 진시황에게 빼앗긴 자신들의 목초지이자 고향과 다름없는 오르도스 지역을 욕심내지 않고 몽골 고원의 동서쪽을 정리합니다.
지명이나 방향에 헷갈리 수 있으니 지도 설명으로 하지요. 오른쪽 지도는 한나라(청색선)와 흉노(적색선)의 강역입니다. 중국쪽 자료입니다.
일단 대륙의 남쪽에 동그라미를 치고 물음표를 네 개 달아놓은 것은, 이 시대에 저 지역은 한나라의 강역으로 보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저 지역에는 특별한 역사의 주체세력이 없는 지역이니까 그냥 내 것이라고 표시한 느낌입니다. 이 지역은 실제로 삼국시대 손권의 오나라가 본격적으로 개발해서 중원에 편입한 지역이지요.
한나라든 흉노든, 두 나라 모두 가장 넓었을 때의 강역을 표시한 것이라 두 나라의 강역이 중복되는 지역이 있습니다. 북중국에 중복의 띠가 형성되네요. 남북간의 전란이 끊이지 않았던 지역이지요.
흉노의 동쪽 끝 바깥에는 부여(扶餘)가 동그라미로 표시돼 있습니다. 이 중국지도에는 부여의 부를 父라고 표기하네요. 한무제가 고조선을 멸망시키자 그 후예들이 다시 세운 나라입니다.
흉노의 동부에는 선비(鮮卑)가 동그라미로 표시돼 있습니다. 그 동그라미 위에 괄호 안에는 동호(東胡)라고 기재돼 있습니다. 선비와 동호는 서만주 내지 요동지방이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아마도 선비와 동호는 엄격하게 구별하기는 어려운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만주쪽 북방민족들이라 하면 될듯.
그리고 흉노의 왼쪽 제일 큰 동그라미는 지금의 신장성입니다. 우리가 서역(西域)이라고 하는 바로 그 지역입니다.
지도에서 흉노의 奴자 아래, 한나라 강역으로는 돌기처럼 튀어나와 흉노의 강역과 겹치는 곳은 지금의 감숙성입니다. 서역으로 가는 길목입니다. 저 길목은 티벳고원과 몽골고원 사이에 낀 것으로서 한나라가 흉노를 견제하기 위해 끊임없이 공을 들인 지역입니다. 당시에 이곳은 월지(月氏, 여기서 氏는 씨가 아니라 지라고 읽습니다~)라는 나라가 있었습니다.
흉노의 북부에는 정령(丁靈)이라고 있습니다. 몽골 고원의 북부, 바이칼호 근처라고 보면 됩니다.
흉노 강역 남부에 우, 선우, 좌라고 표시된 것은 흉노의 황제인 선우가 중앙의 <선우정>에 자리를 잡고, 좌우에 2,3인자를 왕으로 봉한 것입니다. 각각 <좌현왕> <우현왕>이라고 합니다. 좌현왕은 서만주에 가깝고, 우현왕의 지역은 지금의 오르도스 지역과 중복되거나 접하는 위치입니다.
지도에서 대륙의 남부를 제외한 게 당시의 한나라였고, 흉노의 강역은 표시된 그대로이고, 흉노의 인구가 적기는 했지만 그 지배강역으로 보면 <광대한 유목제국>을 세운 것입니다. 잘 감상해보세요 ....... 저 초원에 끓어오르는 유목민의 함성과 그 에너지를 ........
여기에 표시된 흉노의 최대 강역이 바로 묵돌 선우의 업적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는 선우에 오르고나서 일단 동쪽으로 밀고 갑니다. 동호를 정벌해서 복속시키지요. 대략 요서지역과 서부 만주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고조선까지는 이르지 못합니다.
그 다음 서역으로 나가는 길목에, 자신이 볼모로 잡혀갔기도 했던 월지도 때려잡습니다. 그리고 서역의 소국, 오아시스를 거점으로 한 작은 나라들도 평정해서 복속시킵니다. 이 <월지 정벌>은 또다른 이야기의 실마리가 됩니다. 잠시 그 이야기를 좀 하고 넘어가지요~
이 월지는 묵돌선우에 밀려서 중앙아시아로 쫓겨갑니다. 월지가 흉노에 밀렸다고는 하지만 그리 만만한 존재는 아니었습니다. 중앙아시아로 가서는 그곳에 오래 전부터 살아오던 철기문화의 선진국 스키타이를 강타합니다.
스키타이는 ...... 또 서쪽으로 밀려갑니다. 스키타이는 우크라이나 지역으로 밀려가서, 조용히 잘 살고 있던 그 지역의 게르만족을 덮쳤고, 게르만은 놀란 토끼마냥 유럽 중부로, 서부로, 로마로 밀려 들어갑니다.
이 게르만족의 난폭한 유입으로 인해 나태와 안일과 퇴폐에 절어가던 늙어버린 로마제국은 맥없이 무너집니다. 결국 묵돌 선우가 유라시아 초원의 동쪽 끝에서 냅다 한방 갈기니까, 그 충격파가 유라시아 대초원을 따라 유럽까지 밀려가서는, 유럽의 고대를 무너뜨리고 중세의 유럽으로 넘어가게 한 셈입니다. (훈족 이야기는 따로 할 예정~)
우리가 기존 역사 교과서에서 서유럽 중심의 유럽사, 중원 중심의 중국사가 세계사의 줄기인 것으로 배워서 그렇지, 세계사의 중심은 이 <유라시아 초원의 길>에 있었습니다. 저 길을 통해 <스키타이의 선진 철기문화>가 동아시아로 전파돼 고대 동아시아의 비약적 역사발전의 기반이 됐습니다.
이제 흉노의 시대에, 그 반대방향으로 <묵돌 선우의 충격파>와 <그 이후 흉노의 서천(훈족)>이 차례대로 서쪽으로 서쪽으로 밀려가다가 유럽에 도달함으로써, 노년의 성인병에 맥없이 휘청거리던 유럽의 고대가 파산하고, 중세로 넘어가게 됐지요.
훗날 칭기스칸이 다시 저 길을 따라 세계가 하나로 엮어지는 <인류 역사상 최초의 세계제국>을 이룩했습니다. "쥐새끼같은 말"을 타고 온 칭기스칸의 통렬한 꾸짖음에 자지러지게 놀란 유럽이, 중세의 미몽에서 깨어나기 시작했고, 초원의 길을 통해 전달된 인쇄술을 포함한 <동양의 선진문화>가 중세 유럽이 근대 유럽으로 발전하게 한 것입니다.
그 다음은 다시 반대방향으로 더 강력한 충격이 밀려왔지요. 바로 근대화에 먼저 성공한 유럽이, 이제는 늙어버린 동아시아를 흔들어보다가는 만만하다 싶으니까 칼로 툭툭 찔러보다가 곧 난도질을 해버립니다. 아편전쟁이 그 신호탄이었지요. 그것이 <19세기 20세기, 최근 2백년의 식민지 역사>입니다.
이 시기에 실질적인 식민지의 충격파는 해군을 통해 바닷길로 몰려들었습니다만, 실크로드라고 칭해지기도 하는 저 초원의 길에서는 문화적 약탈이 광범위하게 자행됩니다. 유럽에서는 <탐험가> <학자>라고 칭해지는, 동양에서 보면 <유럽 침략군의 선발 정탐대>가 온갖 군사적 문화적 답사를 벌였고, 돈황 석굴을 비롯한 숱한 유적을 파헤치고 온갖 유물들을 가져갑니다.
스웨덴의 스벤 헤딘(1865-1592), 영국의 오렐 스타인(1862-1943), 프랑스의 폴 펠리오(1878-1945), 독일의 르 코크(1860-1930) 등이 바로 그들입니다. 이들은 오지 탐험가이자, 실크로드학을 일군 학자들이고, 거대한 도굴범 두목들이자, 돈 잘버는 고대유물 수집상이며, 문화재 약탈자들입니다.
이들이 어떤 형식이든 퍼간 유물들은, 오늘날 영국박물관, 파리의 국립도서관, 베를린박물관의 주요 콜렉션을 이루고 있습니다 ....... 장물 콜렉션이지요. 그 양이 어느 정도였다면 장물 소리까지는 안하겠지만, 그 양이 엄청나고 그 중요성으로 말하자면 필설로 할 수 없는 수준입니다. 거대 장물아비들이지요.
그러나, 그것들의 가치를 스스로 알아차리지 못한 채, 분실하고, 내버려두고, 팔아먹고, 불쏘시개나 똥딱지로 써버리고, 벽지 대신 발라버렸던 그 원래의 주인들은 죄가 없다고 면책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거시적으로 보면 공범에 가깝지요. 우리도 그렇습니다, 남만 탓하지는 말아야지요~ 내탓이 반은 넘는 거니까요.
아무튼, 백년이 넘는 식민시대와 전란의 빈사상태에서 깨어나기 시작한 동아시아는, <20세기 후반>에 들어서서 그 저력을 다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저력이 어디서 나오는지는 나중에 다시 음미하기로 하고요~
이제 <21세기 초반>, 동아시아와 유럽(서양) 사이에 서서히 힘의 균형이 잡혀가고 있습니다. 한국 일본 중국이 그 주인공들입니다. 이제 어떤 방향으로 어떤 충격파가 흘러갈지는, 아직 안개속처럼 보입니다만, 보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서는 충분히 보인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잠시 <묵돌 선우의 월지 벙벌>에서 <거시적인 세계사>로 너무 많이 너무 멀리 흘러나왔네요 ㅋㅋㅋ 아무튼, 이런 세계사의 큰 흐름의 한복판에 흉노가 있었고, 흉노의 주인공이 바로 묵돌 선우였던 것입니다.
이제 다시 흉노의 각론으로 돌아가서 .........
동쪽으로 동호, 서쪽으로 월지와 서역을 정벌한 묵돌은 중원의 판세를 지켜보게 되지요. 당시 중원은 진나라는 통일 16년만에 폭삭 거꾸러지면서 항우와 유방이 권력쟁취 내전을 벌입니다. 흉노는 지리적으로 유방과 접하는 위치였는데, 유방을 건들지는 않습니다. 유방을 건들어봐야, 그보다 강력한 힘을 가진 항우를 댓가없이 도와주는 게 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예상 외로 유방이 승리합니다. 처가의 지원과 권모술수와 정치전략의 승리, BC202년의 일입니다. 이때 묵돌 선우는 다시 동쪽으로 진출해서 연(燕)나라와 대(對)나라 지역을 치고 들어갑니다. 흉노가 기세등등하게 나오자 유방은 고민합니다.
한고조 유방은 한왕신(韓王信)에게 지금의 산서성 태원(太原)에서 흉노의 남하를 저지하도록 합니다. 이 한왕 신은 유방의 군대를 지휘했던 한신과는 다른 사람입니다. 항우와 유방이 쟁패를 벌일 때 유방을 도운 사람.
한왕신에게 중요 변방을 맡긴 것은 사실 유방의 비열한 술책이었답니다. 흉노의 방어에 성공하면 자신을 대신해 목숨을 건 충신을 얻는 것이고, 그가 패해서 죽으면 유력한 제후 하나를 피도 안 묻히고 편리하게 제거하는 것이고 .......
(당시 유방은 대업을 이루고 난 다음에는 자신을 도운 유력한 제후들을 하나씩 차례대로 어떤 때에는 몰아서 그룹으로 제거했지요. 토사구팽(兎死狗烹)의 비열한 주인공이 바로 유방이라는 거~ 오른쪽 그림이 유방입니다만, 이 그림은 특히 은근히 비열한 캐릭터로 그렸군요)
유방의 명령을 받은 한왕신은, 산서성 마읍(馬邑)을 보수하고 군수물자를 비축해서 방어에 나서는데, BC201년 가을, 드디어 흉노가 마읍을 포위하고 공격을 해옵니다.
초원의 전투에서는 강력했던 흉노가 성곽을 공격하는 데에는 약했나봅니다. 다소 지지부진하게 소강상태였답니다. 그러자 묵돌 선우는 병력을 대폭 증강해서 공세를 강화했고, 이를 견뎌야 하는 한왕신은 흉노의 공격을 늦출 계략으로 흉노 측에 사신을 보냅니다.
그러나 이런 제스처가 유방의 의심을 삽니다. 의심이 DNA에 새겨진 의심 전문가 유방은, 이 소식을 듣고 한왕신을 의심하게 되고, 한왕신을 문책하려 듭니다. 입장이 아주 난처해진 한왕신은 그대로 흉노에게 투항해버렸고, 흉노와 합세하여 의심병 또라이 유방에게 반격을 가합니다.
결국 유방은 무모한 결심을 합니다, 흉노를 직접 정벌하겠노라, 진시황도 몽염을 시켜 북벌을 했었는데 내가 왜 못하겠는가 ....... 이런 겁니다.
그리하여 유방이 친히 32만 대군을 끌고 산서성으로 진군합니다. 한왕신의 군대와 먼저 조우합니다. 한왕신의 군대를 물리친 유방은 계속 북진하는데 ....... 유방의 지략은 자기 신하를 들볶아서 토사구팽시키는 데에는 아주 강력했지만, 적군과의 실전 전투에서는 별다른 효력이 없었습니다.
초기에 거둔 약간의 승전이 미끼인 줄도 모르고, 허벌나게 북으로 추격해간 유방은, 흉노의 유인책에 말립니다.
유방은 평성(平城, 지금의 大同) 근처의 백등산(白登山)에서 흉노의 묵돌에게 완전히 포위당합니다. 이걸 중국말로는 백등지위(白登之圍)라고 하는데, 당시 전쟁을 지도에 표시한 게 왼쪽 그림입니다.
그러나 유방이 숨어들어간 백등산의 산세가 험준하여 추격하는 게 좋지 않았던 터라 묵돌은 유방을 굶겨 죽일 작정으로 봉쇄해 버립니다.
결국 일주일만에 한계에 달한 유방은 참모의 계책에 따라 묵돌 선우의 연지(부인)에게 뇌물을 바치고 포위를 풀어달라고 구걸했습니다. 구걸과 술책, 유방의 전공분야지요~
목돌 선우는 굳이 유방을 죽이고 중원을 직접 경영할 의사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중원을 누군가가 안정적으로 경영하고 있어야 자신들에게 지속가능한 효율적 먹거리가 된다는 것도 잘 아는 터라, 포위를 풀어줍니다.
한고조 유방은 겨우 목숨을 부지해서 도망가고, 묵돌이 기대한 그대로 바로 화친조약을 맺자고 합니다. 말은 화친이고 그 내용을 보면 트럭에 깔린 개구리마냥 사지를 땅바닥에 완전 깔아버리듯 엎드린 것입니다.
중원으로 돌아간 유방은 공주 하나를 묵돌에게 바쳐야 하는데, 본부인인 여태후가 몇날며칠을 울고불고 해서 여태후의 딸이 아닌 다른 친족 처녀를 보냅니다. 그리고 혼수품이라고 해야 하나요? 현금(황금) 듬뿍에다가 비단 술 음식 곡식 등등 대량의 조공 물품을 흉노에게 바칩니다.
그 이후 BC133년, 한무제가 화친조약을 깨고 북벌전쟁을 일으킬 때까지 약 70년간의 <흉노 절대우위의 화친관계>, 한나라에게는 치욕의 화친은 계속됩니다. 물론 이 기간 동안에도 흉노는 소규모이긴 해도 수시로 국경을 넘어옵니다.
약탈이라는 실리와 함께 공포의 바이러스를 계속 뿌림으로써 한나라가 딴 마음 품지 못하게 한 셈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묵돌 선우가 국경을 넘어가지 못하도록 제지하기도 합니다만, 워낙 각 지방에서 개별적으로 일어나는 일도 적지 않았던 터라 ........
이제 한무제가 즉위합니다. 그동안 한나라는 흉노와의 전면전을 피하면서, 안으로는 국부가 대폭 성장합니다. 이 이야기는 여기를 클릭하시면~ ^^
그렇게 축적된 경제력을 배경으로 흉노와의 불리한 화친조약을 파기하고, 남북 장기 전면전의 시대가 되는데,
각색 모디스티 21.03.01
[출처] 북방기행-39) 눈을 들어 북방을 보라 - 왜 흉노인가 (33) - 흉노의 역사 (2) 묵돌, 초원의 제국을 세우다|작성자 왕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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