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 자신실패 인정

디즈레일리는 여왕을 만날 때마다 “여왕 폐하나 저와 같은 작가는 말입니다…”라는 식으로 대화를 시작했다. 여왕은 가벼운 기쁨을 숨기지 못했다.

modest-i 2017. 1. 9. 23:58

여왕 마음 잡은 신하

 

작은 선물, 말 한마디도 잘 고르면 통해

 

연준혁 위즈덤하우스 대표

 

 

영국 빅토리아 여왕은 융통성이 없고 고집이 셌다. 사람들은 여왕 앞에서 될 수 있는 한 공적인 대화만 나누려 했다. 하지만 1874년 새로 총리가 된 벤저민 디즈레일리는 달랐다. 그는 여왕에게 자신이 쓴 책을 선물로 건넸다. 여왕도 자신이 쓴 책을 답례로 주었다. 이후 디즈레일리는 여왕을 만날 때마다 “여왕 폐하나 저와 같은 작가는 말입니다…”라는 식으로 대화를 시작했다. 여왕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가벼운 기쁨을 숨기지 못했다. 디즈레일리는 회의를 하다 논쟁이 벌어지면 여왕에게 사람을 보내 의견을 묻기도 했다. 이후 여왕은 디즈레일리가 하는 일이면 무엇이든 찬성했고, 해마다 밸런타인 데이가 되면 꼬박꼬박 선물까지 보냈다.



디즈레일리가 여왕의 마음을 사로잡은 비결은 간단하다. 사람들은 여왕을 완고한 인물로 여기고 두려워했지만 디즈레일리는 여왕 또한 관심 받기를 원하는 보통 여성으로 생각했다. 여왕에게 필요한 것은 사람들의 복종이 아니라 사소하면서도 개인적인 관심이라는 것을 간파했던 것이다

 

 

 

--------------------------------------------------------------------------------------------------------------------------------------------------------

 

수상 디즈레일리는 빅토리아 여왕과 무척 사이가 좋았다.
어느 날 그의 친구가 그 비결을 물어왔다.
'간단한 행위의 법칙을 지키고 있을 따름이야. 그 법칙이란 나는 모든 문제를 부정하지 않고, 결코 반박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때때로 잊곤하지.
' 빅토리아 여왕은 디즈레일리를 매우 존중하였다.
어떤 사람이 '다른 여왕의 고문들은 자주 교체되는데, 경은 어째서 그처럼 변함없는 총애를 받고 있는가' 라고 물었다.
그러자 디즈레일리는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간단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여왕 폐하를 중성으로 대합니다.
그러난 나는 여성으로서 대합니다.'

 

 

  루씨네 이야기 에서 펌함

 

 

 

----------------------------------------------------------------------------------------------------------------------------------------------------------------

 

 

 

 

1870년 대 초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은 매우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사랑하는 남편 앨버트 공이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던 것이다. 그녀는 깊은 슬픔에 사로잡혔다. 더욱이 그녀는 앨버트 공의 조언에 의지해 모든 결정을 해온 터였으므로 그 충격은 더 컸다. 사실 경혐과 식견이 부족했던 빅토리아 여왕으로서는 앨버트 공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차에 앨버트 공이 죽자, 그녀는 복잡한 정치적 논의와 정책 결정에 염증을 느끼게 되었다. 그녀는 갈수록 공개석상에 나서기를 꺼렸다. 그 결과 영국의 군주제는 무력해질 수 밖에 없었다.

 

1874년 보수당이 정권을 잡으면서 보수당 당수인 벤저민 디즈레일리가 수상이 되었다. 당시 그는 70세였고 여왕은 55세였다. 그는 수상의 의무에 따라 왕궁에서 사적으로 영왕을 접견하는 예를 갖추어야 했다. 두 사람은 셩격이나 태도가 전혀 달랐다. 먼저 유대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디즈레일리는 영국 사람이 보기에 검은 피부에 이국적인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젊었을 때부터 댄디로 널리 알려져 있었으며, 화려한 옷을 즐겨 입고 소설을 쓰기도 했다. 그가 쓴 소설 가운데에는 애정소설도 있었고 고댁풍의 작품도 있었다. 그의 소설은 사람들의 인기를 끌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빅토리아 여왕은 고집이 세고 완고했으며, 태도도 딱딱하고 취향도 소박했다. 디즈레일리의 주변 사람들은 여왕의 마음에 들려면 본모습을 감추어야 한다고 충고했다. 하지만 그는 모든 사람의 보언을 무시한 채 여왕 앞에 용감한 왕자와 같은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러고는 무릎을 꿇고 여왕의 한쪽 손에 입을 맞추며, "여왕 폐하께 충성을 맹세합니다."라고 서약했다. 그는 수상의 임무를 충실히 이행해 빅토리아 여왕의 꿈이 실현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여왕이 무안해할 정도로 온갖 아첨을 늘어놓았다. 하지남 여왕은 이상하게도 그런 그를 무례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미소로대해주었다. 아마도 여왕은 일단 기회를 주고 과연 그가 어떻게 나오나 지켜볼 생각이었던 것 같다.

 

빅토리아 여왕은 곧 디즈레일리에게 의회에서 논의된 일들에 관해 보고를 받기 시작했다. 그의 보고서는 역대 수상들이 제출한 것들과 사뭇 달랐다. 그는 "천사와 같은 여왕이시여"라는 표현을 하는가 하면, 온갖 상스러운 말로 영국 왕실의 적들을 비난하면서 자신의 보고서를 작성해 나갔다. 그는 새로 내각에 취임한 장관을 소개하는 보고서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적기도 했다. "그는 구척 장신의 거구입니다. 마치 로마의 산 피에트로 대성당처럼 처음 보는 사람은 누구도 그의 키와 몸무게를 정확히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하지만 그는 몸집이 큰 만큼 코끼리와 같은 영민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 디즈레일리의 경박하고 형식을 벗어난 보고서는 어떻게 보면 거의 불경에 가까운 것이었지만, 오히려 여왕은 그에게 매료되었다. 그녀는 그의 보고서를 탐독했으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정치에 관한 관심이 다시 불붙기 시작했다.

 

여왕을 처음 접견했을 때 디즈레일리는 자기가 쓴 소설들을 그녀에게 선물했다. 여왕도 답례로 자신이 쓴 책 한 권을 그에게 주었다. 그 책의 제목은 [하이랜드에서의 생활]이었다.

그때부터 디즈레일리는 여왕과 서신을 주고받거나 대화를 나눌 때면 으례 " 여황 폐하와 저와 같은 작가들은 말이죠." 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했다. 여왕은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자부심을 느겼다. 아울러 그녀는 다른 사라들의 입을 통해 그가 자신을 칭찬하는 말을 전해 듣곤 했다. 그는 여왕이 상식이 풍부하고 생각이 깊으며 여성적인 본능을 가진 사람으로서 엘리자베스 1세 못지않은 위대한 군주라고 치켜세웠다. 또한 그는 여왕의 생각에 반대한 적이 거의 없었다. 다른 장관들과 회의를 하다가도 갑자기 여왕의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1875년 빚에 쪼들린 이집트 총독을 부추겨 수에즈 운하를 매입한 뒤에도 그는 운하 매입이 대영제국을 확장하기 위한 여왕의 정책에서 비롯된 것처럼 해서 모든 공적을 그녀에게 돌렸다. 여왕은 영문도 모른 채 이 일로 마음이 우쭐해지면서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한번은 빅토리아 여왕이 디즈레일레엑 꽃을 선물로 보낸 적이 있었다. 그는 나중에 그에 대한 답례로 평범한 앵초를 영왕에게 선물로 보냈다. 받는 사람에 따라서는 모욕감을 느낄 수도 있는 선물이었다. 하지만 그는 꽃을 보내면서 "모든 꽃 중에서 그 아름다움을 가장 오래 지속하는 꽃은 바로 앵초입니다."라는 메시지를 함께 보냈다. 디즈레일리는 여왕을 환상적인 분위기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단순한 꽃조차도 여왕을 상징하게 만들 정도로 모든 것이 은근했다. 빅토리아 여왕은 디즈레일리의 마술에 걸려들었다. 앵초는 곧 여왕이 가장 좋아하는 꽃으로 변했다. 여왕은 디즈레일리가 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찬성했다. 그녀는 그에게 자기 앞에서 무릎을 꿇지 않고 앉는 것을 허락했다. 전에 없던 특권이었다. 두 사람은 매년 2월 발렌타인 데이 때마다 선물을 주고받았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디즈레일리가 파티에서 무슨 말을 했는지 물어보곤 했다. 그가 독일의 아우구스타 왕비에게 약간의 관심을 보이자 여왕은 질투심에 불타올랐다. 왕궁의 대신들은 그토록 완고하고 딱딱하던 여왕이 마치 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행동하자 어리둥절해질 수밖에 없었다.

 

1876년 디즈레일리는 빅토리아 여왕을 '여제"로 칭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여왕은 뛸 듯이 기뻐했다. 여왕은 그에 대한 보답으로 유대인 댄디이자 소설가였던 디즈레일리에게 비콘스필드 백작 작위를 수여했다. 결국 디즈레일리의 오랜 숙원이 성취된 셈이었다.

 

디즈레일리는 사람을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대부분 외모와 옷차림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했지만 그는 달랐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비토리아 여왕의 완고하고 절제된 외모에 속지 않았다. 그는 그 이면에 남성을 열망하는 여성적인 본능이 꿈틀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했다. 그는 비토리아 여왕이 억눌린 여성적 본능을 발산할 수 있도록 숨통을 틔워주었다.

다른 사람들은 빅토리아 여왕을 여성으로 생각하지 않았을 뿐더러, 그녀가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눈치채지 못했다. 하지만 디즈레일리는 바로 그점을 분명하게 꿰뚫어보고 있었다. 그는 사람의 비위를 맞추는 일에 타고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글래드스터과 함께 식사를 한 뒤에 자리를 뜰 때는 그가 영국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는 데 비해, 디즈레일리와 식사를 한 뒤에는 나 자신이 영국에서 가장 똑똑한 여성이라는 인상을 받게 된다."라고 영국의 한 공주는 말했다. 이처럼 디즈레일리는 언제나 상대를 편안하고 즐겁게 해주면서 섬세한 방법으로 자신의 마법을 사용했다. 정치문제를 다룰 때는 특히 더 그러했다. 일단 여왕이 경계심을 풀게 한 후 그는 더욱더 부드럽고 은근한 분위기를 만들어나갔다. 아마 드러내놓지는 않았더라도 다분히 관능적인 분위기를 연출했을 것이 틀림없다. 그는 빅토리아 여왕이 여자로서도 더없이 매력적일 뿐만 아니라 군주로서도 재능을 타고난 거처럼 느끼게 만들었다. 그런 그를 여왕이 어찌 거부할 수 있었겠는가! 그녀는 그가 원하는 모든 것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출처] 벤저민 디즈레일리|작성자 올리버

---------------------------------------------------------------------------------------------------------------------------------------------------------------

 

 

빅토리아 여왕의 다섯 남자들을 보면서

 

빅토리아 여왕(1819-1901)은 철의 여왕이라고 일컬어진다. 역사상 빅토리아 여왕의 시대만큼 영국이 찬란하게 빛났던 적이 없을 정도이다. 비록 영국에 의해 점령당한 나라들 입장에서는 빅토리아 여왕의 시대가 영광스럽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영국인들에 있어서 빅토리아 여왕 시대는 영광의 시대였다. 영국은 빅토리아 여왕의 통치 하에서 수많은 식민지들을 두었고 산업혁명을 통하여 막대한 부를 획득하였으며 의회 민주주의도 가장 잘 발달하였기 때문이다..

 

이제 생각해보려고 하는 것은 빅토리아 여왕의 생애에 있어 그녀와 관련된 남자들이 있는데 그 남자들에 대한 것이다.

 

첫째로 언급할 수 있는 남자는 빅토리아의 의붓아버지나 다름없는 존 콘로이이다. 빅토리아의 아버지는 빅토리아가 두 살 때 사망했다. 빅토리아의 어머니는 정부를 두었는데 그가 존 콘로이이다. 빅토리아의 어머니는 자신의 딸이 왕위를 얻을 가능성이 높음을 알고 후에 딸이 왕이 되면 뒤에서 지배하기 위해 딸을 강압적으로 키웠다. 자기 말을 잘 듣게 하기 위해서이다. 존 콘로이는 그 일에 동참하였고 빅토리아는 두 사람에게 환멸을 느낀다. 후에 여왕이 된 빅토리아는 어머니를 가까이 하지 않으며 존 콘로이를 모든 직책에서 해임시켰다.

 

둘째로 언급할 수 있는 남자는 빅토리아가 여왕이 되었을 무렵의 수상이었던 멜번 경이다. 사실 18살이란 어린 나이에 한 나라의 통치자가 된 빅토리아 여왕에게 탁월한 국정 수행 능력을 요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다행인 것은 멜번경이 자신의 야망을 위해 빅토리아를 이용하지 않고 어린 빅토리아 여왕의 후견인으로서의 역할을 잘 해주었다는 것이다. 멜번은 어린 빅토리아 여왕에게 여왕의 위치가 가지는 위엄이 무엇인지 심어주었으며 나라를 통치하는 비결도 가르쳐주었다.

 

셋째로 언급할 수 있는 남자는 빅토리아 여왕의 남편인 앨버트 공이다. 앨버트는 생각이 깊이 있을 뿐만 아니라 넘치는 열정을 가진 사람이었다. 처음에 빅토리아 여왕은 자신의 남편이 국정에 참여하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남편의 사람됨에 신뢰를 가지게 된 후로는 남편의 국정 참여를 전폭적으로 지지하였다. 앨버트 공은 왕실의 재산을 관리하였고 외교에 있어서도 전면에 나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빅토리아 여왕과 앨버트 공의 결혼생활이 20년이다 보니 그만큼 앨버트 공의 역할이 커질 수밖에 없었고 앨버트 경이 거의 왕의 역할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넷째로 언급할 수 있는 남자는 영국의 수상을 지낸 디즈레일리이다. 디즈레일리는 유대계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고 기독교 신앙을 가졌으며 문학에 관심이 많아 “비비언 그레이”라는 정치 소설을 발간하여 소설가로 이름을 날렸다. 웅변에도 뛰어났기에 정계에 입문하였고 1867년과 1874년에 수상이 되었다. 그의 탁월한 능력은 빅토리아 여왕 시대를 찬란하게 만드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수에즈운하주(株)를 매수하여 이집트 진출의 발판을 구축한 인물이 디즈레일리이다. 그는 빅토리아 여왕에서 충성스러운 수상이었다.

 

다섯째로 언급할 수 있는 남자는 역시 영국의 수상을 지낸 글래드스턴이다. 글래드스턴은 자유당 당수를 지냈으며 수상을 네 차례나 역임한 거물급 정치인이다. 글래드스턴은 1833년 하원의원을 시작으로 상무장관·식민지장관·재무장관 등을 역임했다. 그는 곡물법 철폐에 찬성하였으며, 상속세 설치와 소득세 감소에 따른 예산안 등으로 인해 자유주의자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디즈레일리가 보수당의 리더이고 글래드스턴이 자유당의 리더인지라 성향은 많이 달랐지만 빅토리아 여왕에게 충성스러웠다는 점에서는 동일하였다.

 

가만 보면 빅토리아 여왕은 남자 복이 참 많은 사람이었다. 어머니의 정부였던 존 콘로이를 빼면 하나같이 빅토리아 여왕에게 혼신을 다해 협력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남자 복이 없다면서 스스로를 팔세 드세다고 생각하는 여성들에게 있어서 빅토리아 여왕은 부러움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아무튼 어느 누구라도 혼자 잘해서는 큰 업적을 이룰 수 없다. 만약 빅토리아 여왕이 갓 왕위에 올랐을 때 수상인 멜번이 자기 야심만 채우느라 빅토리아 여왕이 성장할 수 있도록 돕지 않았다면, 또한 후의 남자들이 저마다 이기적인 욕심만 가득한 사람들이었다면 위대한 빅토리아 여왕의 시대는 역사상 나타나지 않았으리라.

2011년 07월 25일 (월) 20:07: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