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 자신실패 인정

사람을 대할 때 상대방이 논리보다는 감정이 있는 사람이란 사실을 잊지 말자. / 데일 카네기

modest-i 2017. 1. 10. 00:31

다른 사람의 존재란 매우 중요하다.

특히나 사업 또는 정치를 하는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얻어야만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것을 이룰 수 있다.


영국 벤자민 디즈레일리 총리.

당시 빅토리아 여왕은 국정에 별 관심이 없었다.

그리고 총리에게도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디즈레일리 총리는 이런 여왕의 열정을 일깨웠다.

그리고 결국 여왕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아

자신이 원하는 정치 세계를 펼쳐나갈 수 있게 되었다.

그에게는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는 능력과

배려하는 마음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출처] 영국 벤자민 디즈레일리 총리 이야기|작성자 케이지

 

 

1804년 생인 디즈레일리는 빅토리아 여왕보다 열다섯 살 나이가 많았다. 그는 바이런을 영웅시하던 세대의 끄트머리에 속해, 청년 시절에는 바이런적 살의 도피를 즐렸다. 그리스 해적처럼 붉은 모자를 쓰고 은단추가 달린 셔츠를 입고 말타의 거리를 휘저었다. 터번을 두르고 2미터나 되는 수연통으로 담배를 피우며 터키를 여행하기도 했다. 관능의 모험을 탐닉했고(그결과 성병이 걸려 수은 치료를 받아야 했다) 일반적으로 그는 부유한 집안 출신의 허영기 있는 사람으로 유명했다.
기독교 세례를 받았지만 유대인인 디즈레일리는 영국 상류사회의 아웃사이더였고 실제 그렇게 행동했다.
그의 외모는 원숭이 같았고 몸매도 아도니사와는 거리가 멀었다.그렇지만 그는 사람의 마음을 녹이고 환심을 사는 매력이있었고 여성을 찬미했다.
그는 빅토리아를 '요정'이라고 불렀다. 여왕의 작은 몸을 빗댄 것이다.그는 뚱뚱한 몸과 주름진 얼굴과 무겁게 내려앉은 볼살을 가진 여왕의 이면에서 행복한 젊은 여성의 흔적을 포착하고 그런 면을 칭송했다. 덕분에 빅토리아는 그와 함께 있을 때 자신의 최고 모습을 보일 수 있었다.
Disraeli and Gladstone exchange sharply divided political views in the House of Commons – but not onscreen.(왼쪽이 디즈레일리)
1868년 11월 선거에서 보수당이 참패하고 자유당의 글래드스턴이 내각의 총리가 되었다.
그는 키가 크고 자세가 곧은, 빅토리아 시대의 남성다움과 올곧음의 전형이었다. 그는 가끔씩 하원에서 네댓 시간은 족히 쉬지 않고 연설했으며, 그의 연설을 듣던 청중은 오싹한 느낌을 받았다. 그는 청중에게 경외감을 일으켰다.
글래드스턴은 유혹적으로 환심을 사고 에둘러 표현하는 디즈레일리와는 극단적으로 달랐다.
그는 솔직하고 직선적인 기운을 발산했다. 그 누구보다도 정력적이었고 근면했으며 생산적이었다. 하지만 빅토리아가 볼 때 너무 시끄럽고 쉽게 흥분했으며 타협할 줄 몰랐다. 266쪽~

내가 여왕이다

작가
캐럴리 에릭슨
출판
역사의아침
발매
2011.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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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디즈레일리|작성자 enh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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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조지 3세의 4남인 켄트공(公). 하노버왕가의 마지막 군주로서, 태어난 이듬해 아버지가 죽자 독일 출신의 어머니와 독일계 보모(保姆)의 손에서 엄하게 자랐다. 백부(伯父)인 윌리엄 4세가 죽자 18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으나, 하노버왕가에서는 여자의 상속권이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하노버왕가가 성립한 이후로 계속된 영국과 하노버의 동일군주 관계는 끝나고, 그녀는 영국 왕위만을 계승하였다.

즉위 당시의 총리 W.L.멜번이 어진 아버지와 같은 태도로 그녀를 지도해주고, 또 아버지가 생전에 휘그당과 가까웠던 관계도 있어서, 초기에는 자유당에 호의적이고 보수당 내각에 대해 불만을 가졌다. 1840년 사촌인 색스코버그 고터가(家)의 앨버트공(公)과 결혼하였다. 독일 출신인 공은 영국에서 백안시(白眼視)되고 그녀도 애정을 가지지 않았으나, 고결한 인격과 풍부한 교양으로써 여왕에게 좋은 조언자와 이해자가 되어, 공사(公事)와 가정생활에서 그녀를 두루 뒷받침하였다.

이기적인 데가 있던 그녀가 국민이 자랑하고 존경하는 여왕으로 자라날 수 있었던 것은 공에게 힘입은 바가 컸으며, 그녀도 차차 공의 인품에 감화되어 깊이 사랑하게 되었다. 1861년 공이 42세의 나이로 죽자 그녀는 비탄에 잠기어, 버킹엄 궁전에 틀어박힌 채 모든 국무(國務)에서 손을 떼었다.

그러나 B.디즈레일리의 설득으로 차차 마음을 바로잡고 동시에 그가 거느리는 보수당에 동조하였으며, 1877년 그가 바치는 인도 여제(女帝)의 제관(帝冠)을 받았다. 9명의 자녀를 두었고 독일·러시아 등과 친척 관계를 맺었으며, 행복한 말년을 보낸 뒤 보어전쟁이 한창 진행되던 도중, 64년간의 치세(治世)를 마쳤다. 여왕의 치세는 빅토리아시대로서 영국의 전성기를 이루었으며, 자본주의의 선두 선진국이 되는 동시에, 정치적으로는 디즈레일리와 W.글래드스턴으로 대표되는 2대정당제(二大政黨制) 의회정치가 전형적으로 전개되었으며, 외교면에서도 영광스런 고립을 지키면서 그 동향(動向)이 세계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한 빛나는 시대에 살면서도 그녀는 ‘군림(君臨)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따랐다. 그리하여 강한 개성으로 강경하게 적극 외교를 밀고 나가는 H.J.파머스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또, 보수주의로 기운 후반기에는 글래드스턴의 자유주의에 대해 비판적이었지만, 어디까지나 본분을 지킬 뿐 자신의 의사를 강요하지 않음으로써 오늘날과 같은 영국 군주의 패턴을 확립하였다.

출처 : 네이버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