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제력 · 리더십

왕건의 탈출전략 남과 다투지 않고 차례를 기다리는 ‘물레방아’ 리더십

modest-i 2015. 12. 13. 17:57

왕건의 탈출전략 남과 다투지 않고 차례를 기다리는 ‘물레방아’ 리더십

  • 입력 : 2015.09.24 11:3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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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건은 통합의 기술자였다. 그는 통합을 위해 때로는 칼을, 때로는 결혼을, 때로는 포용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가장 큰 왕건의 통합 기술은 때를 기다리는 순리의 정치였다. 절대 무리하지 않는, 그러면서도 목표를 향해 나가는 순간만큼은 가장 선두에서 세력을 이끌었다. 이렇게 강함과 유함을 교차하는 리더십으로 시대의 강력한 경쟁자인 궁예와 견훤을 자신의 손에 피 한방울 묻히고 않고 제거할 수 있었다.

676년 신라는 당나라의 마지막 잔재를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통일 왕국을 열었다. 그러나 통일 왕국을 다스리기에 신라의 혁신과 변화는 제자리 걸음이었다. 서라벌을 중심으로 다스렸던 작은 신라의 제도와 가치관이 그대로 계승되었기 때문이다. 수도 역시 삼국쟁패 시기 때와 마찬가지로 국토의 한 귀퉁이에 위치했고 무엇보다 뿌리 깊은 골품제도로 인해 통일 신라에는 새로운 시대정신, 새로운 인물 그리고 새로운 문화가 등장하고 또한 자리잡기 어려웠다.

더구나 수백 년을 칼을 들고 맞싸웠던 백제와 고구려계에 대한 통일 신라의 차별 정책은 반감을 사기에 충분했다. 경주를 중심으로 몇몇 성씨와 귀족들만을 위한 ‘그들만의 정치’는 자연스레 많은 백성의 민심 이반을 불러 일으켰다. 그렇게 200여 년의 시간이 흘렀다. 반도의 첫 통일 왕국 신라는 붕괴되기 시작했다. 전국 각지 약 80여 개의 지방 호족, 성주들은 서라벌의 왕궁에서 내려오는 명령을 무시했고 각자의 힘과 권위로 지역을 다스리는, 그야말로 춘추전국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수십 명의 호족 중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그룹이 형성되었다. 수많은 전투와 합종연횡을 통해 견훤, 궁예 그리고 양길이 선두에 나섰다. 정국은 백제의 부활을 들고 나와 전라와 충청도, 경상도를 기반으로 삼은 견훤의 후백제와 청주, 철원지역 호족의 강력한 뒷받침을 받고 경기, 충청, 황해, 강원도를 기반으로 한 궁예의 태봉으로 서서히 정리되어갔다.

▶마음을 얻어야 리더가 될 수 있다

그 시기에, 한 사람의 영웅이 등장한다. 왕건이다. 왕건은 877년 지금의 개성인 송악에서 그 지역의 강력한 호족으로 부와 권력을 장악한 왕륭과 한 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왕륭은 당시 개방된 송악을 기반으로 활발한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인물이다.

왕건은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장부다운 기운을 내보였다. 특히 17세 무렵 당시 명승인 도선 대사에게 군사, 천문, 예학 등 다양한 학문을 사사, 문무겸전의 기반을 닦아나갔다. 하지만 궁예와 견훤, 양강의 첨예한 대치로 인해 지방 호족들은 그 어떤 쪽으로든 자신의 정치적 성향을 드러내야 했다.

왕륭은 궁예를 선택했다. 철원을 기반으로 보기 드문 정치력과 뛰어난 군 지휘능력으로 세력을 확장하던 궁예로서는 해상무역의 중심지이자 부의 생산지인 벽란도를 끼고 있는 송악이 절대 필요했다. 그런데 이를 화살 한 발 쏘지 않고 단박에 자신의 입에 넣어준 왕륭 부자에게 대단한 호의를 느꼈음은 당연지사. 당시 20세의 왕건에게 태수 직함을 하사할 정도로 궁예는 왕륭과 왕건을 우대했다. 그리고 궁예는 수도를 송악으로 옮겼다. 왕건 등 송악 일대 호족의 도움을 받아 양길을 제거하고 중부지역의 패자가 되기 위한 포석이었다.

왕건은 충실하게 궁예를 도왔다. 왕건은 궁예나 견훤이 갖지 못한 점을 갖고 있었다. 바로 수군이다. 왕건은 수군을 이용해 후백제의 후방을 공격했다. 나주 지역이 그 목표였고 견훤으로서는 아주 골치 아픈 일이었다. 최전선에서 태봉의 궁예와 일전을 준비하기도 바쁜데 왕건이 후방인 나주 지역에 자리를 잡고 세력을 확장해 견훤의 뒤통수에 칼을 들이대는 형상이었던 것이다.

이때 왕건의 왕재로서의 리더십을 엿볼 수 있는 정치력이 드러난다. 그는 나주지역을 점령하고 있으면서도 그 지역 후백제 백성의 구휼에도 소홀치 않았다. 군사들은 백성들을 억압하거나 약탈하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의 백성인양 진심으로 어려움을 해결해 나갔다. 나주 지역의 호족과 백성들은 비록 후백제의 백성이었지만 왕건의 지배에 전혀 반감을 갖지 않았다. 왕건 리더십의 제1항목인 덕치와 포용이 돋보이는 일화다.

왕건은 수많은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며 불과 40세의 나이에 궁예의 뒤를 이어 태봉국 2인자인 시중의 자리에 올랐다. 그만큼 궁예는 왕건을 신임했고 아꼈다. 그러면서도 궁예는 왕건에 대해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양길을 제거하고 바로 수도를 철원으로 옮기면서 청주 지역 1000여 가구도 함께 이주시켰다. 송악 지역 호족과 청주 지역 호족간의 미묘한 세력다툼에서 궁예는 청주 지역 호족 세력을 자신의 친위 세력으로 결정한 것이다.

이때부터 궁예는 잔인한 성품을 드러냈다. 자신을 미륵불이라 칭하고 이 세상 모든 만물과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볼 수 있다는 이른바 ‘관심법’을 들고 나와 주변에 피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왕건은 위기를 느꼈다. 왕건의 고속 출세에 불만이 많은 다른 호족들의 시기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자신을 불신하기 시작하는 궁예에게 불안을 느낀 것이다. 왕건을 시중 자리를 내놓고 변방으로 가 직접 전투를 지휘하겠다고 궁예에게 청하고 궁예의 손아귀에서 일단 벗어났다. 그러면서 왕건은 차츰 자신의 세력을 확장했다.

어느 날, 왕건은 궁예의 급한 호출을 받는다. 궁예는 왕건을 보자마자 “어젯밤에 그대가 수백의 사람을 모아 역모를 일으킨 것이 사실인가?”물었다. 왕건은 당연히 아니라고 대답했지만 궁예의 의심은 꼬리를 물었다. “내가 관심법으로 그대의 마음을 읽겠으니 잠시 가만 있으라.” 궁예는 짐짓 왕건을 쳐다보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 순간 옆에 있던 훗날 왕건의 최측근 참모가 되는 최응이 붓을 떨어뜨린 후 왕건에게 살짝 조언을 했다. “장군, 일단 그렇다고 수긍해야 목숨을 보존할 수 있습니다.” 왕건은 순간 무릎을 꿇고 궁예에게 “맞습니다. 제가 잠깐 역심을 품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하자 궁예는 “역시 그대는 솔직하구나. 내가 이번에는 용서하고 큰 상을 내리겠노라”라고 했다. 이렇게 왕건은 죽음 앞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명분에서 앞서면 실리도 따른다

궁예의 잔혹한 짓은 점점 도를 넘어섰다. 부인인 왕비를 왕건과 간통했다 하여 죽이고 더러운 피라고 왕자 두 명도 철퇴로 때려 죽였다. 좌우에 있는 신하까지 하루에도 수십 명씩 처단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관리들은 물론 백성의 원성이 점점 높아가자 드디어 장군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홍유, 신숭겸, 복지겸, 배현경 등은 왕건에게 ‘칼을 들어 궁예를 치자’고 재촉했다. 하지만 왕건은 “어찌 부하가 자신이 모시던 왕을 해할 수 있는가”라며 주저한다. 그러자 왕건의 부인 류 씨가 “이는 인仁으로 불인不仁을 치는 것입니다”라고 명분을 알려주고 재촉하며 왕건에게 갑옷을 입혔다.

드디어 왕건은 철원궁으로 군사를 몰았다. 궁예는 이미 전세가 기운 것을 알고 변복해 도망을 가다 성난 백성들에게 그만 맞아죽고 말았다. 이때가 918년 왕건의 나이 43세 때이다. 왕건은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의미로 국호를 고려로 짓고 다음 해인 919년 수도를 철원에서 자신의 본거지인 송악으로 천도한다.

이렇게 군사정변으로 왕위에 오른 왕건이었지만 주위의 여건은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게 한다. 후백제의 견훤은 강력한 군사력으로 버티고 있었고 비록 종이호랑이로 전락했지만 천년 역사의 신라는 백성들 마음속에 강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왕건이 신경을 쓴 부분은 고려를 이루고 있는 수십 개 연합세력의 거취였다.

당장 궁예의 심복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왕건이 왕위에 오른 지 4일 만에 장군 환선길이 반란을 일으켜 회의 중인 왕건의 궁전 깊숙한 곳까지 침입했다. 하지만 너무나 태연히 앉아있는 왕건을 보고 오히려 복병이 있을 것으로 생각해 도망가다가 잡히는 사건도 있었다.

또한 궁예에게 충성스런 집단이었던 청주 출신 호족들이 반란을 도모하기도 했다. 이때마다 위기를 넘긴 왕건은 이흔암 등의 반란군을 처벌하면서도 김순식 등의 호족에게는 왕 씨 성을 하사하는 강경과 포용의 두 가지 전략을 병행하며 호족들의 세력을 정리해 나갔다.

왕건은 외교적으로도 두 가지 정책 기조를 유지했다. 발해 유민에 대해서는 유화적인 태도로 그들을 받아들여 많은 노동력과 군사력을 유지했고 신라에 대해서도 우호적인 외교전을 펼쳤다. 그러면서 견훤과는 군사적 대결과 외교적인 협상 등 양면 전술을 구사했다. 중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은 배척하고 중국을 통일한 송나라와는 친선관계를 유지했다. 즉 동시에 두 명의 친구도, 두 명의 적도 만들지 않는 노련한 외교 전략을 펼친 것이다. 그러나 후백제의 견훤 역시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백전노장이었다. 그는 군사적으로 왕건보다 한 수 위의 지휘력으로 고려군을 연파했다. 그러나 견훤이 간과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따뜻함이 무거운 힘을, 강력한 왕권보다 백성의 민심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이다.

견훤은 갑자기 경주로 쳐들어가 경애왕과 수많은 왕족을 살해하고 왕비를 겁탈한 뒤무고한 백성들을 핍박했다. 그리고 김부를 경순왕으로 내세웠다. 왕건은 군대를 이끌고 신라를 구원하기 위해 출전했다가 견훤의 노련한 포위작전에 걸려 대패하고 말았다. 바로 공산전투이다. 이때 위기에 빠진 왕건을 대신해 신숭겸이 왕건의 옷과 백마를 타고 후백제군의 이목을 자신에게 집중시킨 틈을 타 왕건은 겨우 도망갈 수 있었다. 이 전투에서 왕건은 신숭겸과 김락 등 개국공신 두 명을 잃었다.

특히 신숭겸은 왕건의 최측근으로 왕건의 상심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만큼 왕건이 그동안 보여준 부하들에 대한 태도는 부하들이 목숨을 던져 보호하고 싶을 정도로 부하들의 진정한 충성심을 유발하는 감동의 리더십이었던 것이다.

왕건은 모든 정책과 모든 군사적 행동을 시행함에 있어 독단적인 행동을 하지 않았다. 많은 부하들의 다양한 의견을 경청했고 그 안에서 최고, 최대의 효과를 낼 수 있는 안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 선택이 지향하는 목표에 대한 동기 부여를 부하들에게 확실하게 심어주었다. 그리고 그는 그 목표가 아무리 어렵고 힘든 것이라 하더라도 자신이 최전선에 나서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바로 이런 점이 왕건의 부하들을 존중하는 겸손의 리더십 그리고 자신도 예외가 되지 않는 실천의 리더십인 것이다. 이런 왕건에게 민심은 기울고 있었다. 왕건은 세금을 낮추고 빈민을 구제하는 등 친서민 정책으로 서서히 견훤의 명성을 앞서기 시작했다.

▶신뢰하면 버리지 말고, 믿지 않으면 쓰지 마라

935년, 견훤이 갑자기 왕건에게 귀순했다. 견훤이 4명의 아들 중 막내를 후계자로 정하자 장남인 신검이 둘째, 셋째와 한통속이 되어 견훤을 절에 가두고 자신이 왕위에 오른 것이다. 절에서 겨우 도망친 견훤은 고려의 왕건을 찾았다. 왕건은 그토록 자신을 괴롭힌 견훤을 아버지 격인 ‘상부’로 대접하고 많은 토지와 식읍을 내리며 극진하게 대접했다.

그리고 신검과의 마지막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통일에 한 걸음 다가섰다. 후백제마저 왕건에게 넘어가자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도 대세가 기운 것을 알고 938년 왕건에게 투항하면서 왕건은 50여년 간의 혼란한 후삼국시대를 정리하고 통일 왕조 고려의 기틀을 마련했다.

고려 왕조를 열고 새로운 통일 왕국을 연 왕건의 기쁨도 잠시, 왕건에게 최대의 난제가 주어졌다. 이해관계가 다르고, 출신이 다르고, 나라가 다르고, 민족이 다른 많은 계파와 세력을 통합하는 일이었다. 백제계, 고구려계, 발해유민계, 신라계를 비롯해 곳곳에 자리잡은 호족 세력은 여전히 그 힘을 유지하고 있었다. 왕건은 포용력과 인내심으로 그들을 하나하나 자신의 세력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첫 번째 방법은 혼인 정책이다. 왕건은 무려 29명의 비를 두었다. 즉 29개의 호족 세력과 혼인을 통해 한 가족이 됨으로서 그들을 포섭한 것이다. 그리고 왕건은 귀순해오는 호족에 대해서 넓은 포용력을 감싸 안았다. 그들에게 성씨를 하사하고 지위와 부를 그대로 인정했다. 강력한 무력을 동원한 강압적 피의 통일보다는 배려와 소통을 통한 연합세력으로의 통일을 시도한 것이다.

두 번째는 신라의 골품제도의 병폐를 과감히 없애고 인재 등용의 길을 다양하게 연 것이다. 골품제도는 신라 통치의 근본이었지만 많은 폐단을 낳았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닫힘의 문화’이다. 닫힌 문화는 소통과 융합의 열린 문화에 비해 경쟁력과 지구력에서 떨어지기 마련이고 새롭고 신선한 문화의 유입과 혁신의 정치를 방해하는 큰 걸림돌인 것이다. 왕건은 과거 시험을 실시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많은 세력의 인재들을 편견 없이 고르게 받아들였다. 골수 신라맨인 최치원을 중용한 것도 바로 왕건 포용력의 결정체이다.

세 번째로 신뢰의 정치를 시도했다. 개인적인 역량에서 궁예나 견훤은 왕건보다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였다. 정치적 수단에서 궁예는 왕건보다 앞섰고, 군사적 지휘 능력에서는 견훤이 왕건보다 분명 한 수 위였다. 그럼에도 왕건이 통일 왕국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신뢰’와 ‘인화’의 정치를 했기 때문이다.

궁예는 기본적으로 사람을 믿지 않았다. 수많은 부하와 참모들을 자신의 손으로 죽임으로써 스스로 고립된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신라 왕족 출신으로 천대받았던 기억 때문에 신라를 품에 안을 생각보다는 없애야 할 타도 대상으로 여겼다. 이 점에서는 견훤도 마찬가지다. 그는 경주를 비롯한 수많은 신라 지역을 공격해 경애왕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을 죽임으로써 민심을 얻지 못했다. 하지만 왕건은 신뢰와 인화로 결국 역사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이런 왕건 리더십의 기본은 다음과 같다.

물레방아를 돌리는 물처럼 차례를 기다려라

물레방아가 돌아가는 모습을 살펴보자. 절대 뒷물이 앞물을 앞질러서 물레방아를 돌릴 수 없다. 그저 흐르는 순서대로 물레방아를 돌리는 것이다. 기다림과 끈기 그리고 순응의 리더십이다. 왕건은 절대 자신보다 힘과 지략에서 앞서는 궁예와 견훤을 앞지르려 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실력을 쌓으면서 순서를 기다린 것이다. 왕건이 안으로는 세력을 키우고 밖으로는 어질고 배려심 많은 지도자의 이미지를 만들어 가는 동안 궁예는 스스로 ‘불신과 질시’의 늪에 빠졌고 견훤은 ‘잔인하고 포악한 군주’가 된 것이다. 두 사람은 강한 힘을 과시하려는 욕구와 공격적이고 의심 많은 성격으로 인해 민심을 잃었다.

그러나 왕건은 달랐다. 그는 잘나고, 능력이 풍부했으나 대놓고 자신을 과시하거나 내세우지 않았다. 그리고 항상 왕건은 명분에서 두 사람을 능가했다. 부하들의 권유가 있었지만 왕건은 궁예를 끝까지 주군으로 모시려 했고, 견훤에게 수없이 많은 패배를 당했지만 귀순해오자 아버지의 예로서 그를 맞았다. 경순왕도 마찬가지이다. 결코 시류와 민심의 도도한 흐름을 역류하는 행동은 하지 않은 것이다.

▶2인자도 리더십이 필요하다

왕건의 리더십은 현대 직장인에게 있어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바로 2인자 정신인 것이다. 직장은 계급사회다. 최종의 결정권을 갖고 있는 리더와 그것을 실행하는 실무 책임자가 있고 리더의 올바른 판단을 도와주는 참모 조직이 있다. 리더는 합리적인 목표를 제시하고 그 목표를 향해 조직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게 하는 힘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단순히 카리스마와 권위를 앞세우는 리더가 되라는 것은 아니다.

지금의 사회는 독불장군처럼 혼자의 힘으로 모든 것을 결정하고 행동할 수 있는 시스템이 아니다. 권한을 위임하고 그 위임된 권한이 조직의 세포까지 잘 전달되어 하나의 목표로 향하려면 당연히 최고의 리더 밑에는 유능한 2인자들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들의 열성과 충성 그리고 능력이 최고로 발휘되는 조직을 만드는 것이 바로 1인자의 역할이자 책임인 것이다. 그런 면에서 왕건의 리더십은 배려와 포용을 바탕으로 현재의 상황을 수용하는, 모든 물을 담아내는 ‘큰 저수지와 같은 리더십’인 것이다.

그는 2인자로서의 리더십을 완벽하게 수행한 사람이다. 궁예 밑에서는 절대 궁예를 넘어서려 하지 않았고 궁예가 반란에 의해 처형되고 자신이 왕이 되어서도 강력한 견제자인 견훤을 단박에 꺾으려 하지 않았다. 그는 기다린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능력과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했다. 즉 궁예 밑에서는 2인자, 견훤과 대립 시는 견훤의 강함을 인정하고 시대의 2인자로서 어떻게 생존해야 하는 지를 인지한 것이다.

2인자는 1인자를 넘어서려는 행동을 하는 순간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다. 그것은 비단 왕건이 아닌 수많은 역사적 교훈에서 찾을 수 있다. 왕건은 독특하게도 2인자로서의 처세도 훌륭했지만 자신의 지지 기반을 확대하는 리더십에도 특별한 능력을 발휘한 인물이다.

▶실패 시 탈출 전략을 갖고 있어라

왕건은 궁예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뒤 수없이 많은 견훤과의 전투에서 패배했다. 특히 몇 번의 전투에서는 그 자신의 목숨이 위험에 처한 상황까지 몰렸지만 왕건은 이 위기를 벗어나고 또다시 군비를 정비해 전투를 준비할 수 있었다. 그 비결은 왕건의 탁월한 리더십 중 하나인 탈출 전략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일단 눈앞에 적을 두고 내분을 일으킬 수 있는 ‘자기 사람 심기’나 ‘피의 숙청’을 단행하지 않았다. 왕이 되고도 궁예가 만들어놓은 정책과 조직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서서히 고려의 틀을 잡아나가는 전략을 선택했다.

이 점은 대단히 중요하다. 견훤이라는 강력한 적을 눈앞에 두고 먼저 자신의 왕권을 다지기 위해 조직과 정책을 한꺼번에 바꾸면서 혼란과 분열을 조장하는 행동을 스스로 금한 것이다. 게다가 신라와는 우호적인 외교를 통해 전선을 한 곳으로 집중할 수 있었다. 반면 후백제의 견훤은 고려와 신라 양쪽의 적을 놓고 싸우다 결국 내분이 일어 패망을 길을 걸었다.

더구나 왕건은 발해의 유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그들을 고려를 지탱하는 노동력과 군사력의 한 기둥으로 적극 활용했다. 이 점이 모든 것을 한 곳에 올인해 전투에 몰두한 견훤과의 싸움에서 수없이 패배하면서도 최후에 승리할 수 있었던 요인이 된 셈이다.

그는 자신이 잘할 수 있는 것만 실행에 옮겼다. 왕건은 육상 전투 특히 기병전에는 약했다. 대신 왕건의 수군은 강력한 힘을 갖고 있었다. 왕건은 되도록 견훤의 기병부대와 정면 승부를 하는 무모함은 피하고 대신 막강한 수군의 힘으로 견훤의 후방을 괴롭혔다. 이에 비해 견훤은 왕건의 수군을 따라잡기 위해 무리하게 수군을 증대하느라 국력과 군사력을 허비하는 전략적 실수를 저질렀다.

현대의 직장도 마찬가지다. 모든 사업에는 위험과 실패에 대한 예측과 그에 따른 만회 혹은 탈출 전략이 수반되어야 한다. 가장 무모한 것이 치밀한 계획없이 ‘모 아니면 도’ 같은 비이성적 판단으로 일을 하는 것이다. 그 순간에는 조직이 능동적으로, 활동성 있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오류나 난관에 봉착했을 때 아무런 대책을 마련치 못하고 침몰하는 경우를 종종 발견할 수 있다.

직장인 개인으로서도 마찬가지다. 개인적으로 프로젝트를 맡아서 진행할 때 아무리 보편적이고 일상적인 업무라 하더라도 꼭 지켜야 하는 것은 원칙이다. 프로젝트에는 원안 기안이 있어야 하고, 그에 따른 결재 기안과 진행, 경비지출 등과 마지막에는 결과에 대한 보고서가 있어야 하는 것처럼 순서와 원칙은 꼭 지켜야 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어떤 부분을 방심하거나 소홀히 하는 것은 나중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 문제의 원인’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상황에 빠지게 된다.

기안과 결재서류를 가만히 생각해보라. 기안자부터 시작해 팀장, 부장, 국장, 이사, 부사장 그리고 대표와 회장까지 도장이 찍혀야 하고, 그 외 협조부서인 회계나 경영관리, 영업, 기획 부서의 도장까지 많게는 수십 개의 도장이 찍혀 있는 것이 떠오를 것이다.

회사가 시간과 인력낭비 하느라 이렇게 많은 단계와 도장을 만들어놓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각 단계와 협조처를 거치는 과정에서 오류와 실패의 확률을 줄이기 위한 방편인 것이다. 또한 나중에 발생할 수 있는 책임소재를 명확히 하려는 의도인 것이다.

실패를 줄이는 최고의 방법은 도장 찍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 얼마 전까지 수많은 정권을 거치면서 관직을 유지한 모 정치인의 처세 비결이 ‘도장 찍는 일을 하지 않는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는 결재 서류를 읽어보고 나중에 정치적 부담으로 작용될 수 있는 것은 아무리 급하고 밑에서 재촉해도 결코 도장을 찍지 않았다고 한다. 훗날 어떤 사건이 벌어져도 그가 화를 면할 수 있었던 비결이지만 결코 나라의 녹을 먹는 입장에서는 권장하고 존경할 만한 수준은 아닌 것이다. 하지만 이 점 또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다. 직장에서 누구도 자신이 희생양이 되거나 순교자를 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대부분의 회사 조직은 실패와 손실에 대한 책임을 분명히 하고 또 해야 하는 것이 조직을 유지하는 방법이라고 믿고 있다.

지금, 이 순간 조금은 비겁할지 모르지만 당신은 당신이 하고 있는 모든 프로젝트에서 ‘탈출 전략’을 세워야 한다. ‘실수는 성공의 자산이다’ ‘실수를 많이 하는 자가 일도 많이 하고 발전 가능성이 있다’ 등등의 ‘아름다운 말’은 그야말로 책에나 쓰여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말은 최고의 자리에 오른 자 즉 오너나 조직의 CEO가 할 수 있는 말이지 직장인의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다.

시말서, 경위서 몇 장을 가볍게 생각하지마라. 회사가 당신이 나갈 순간을, 아니 당신을 쫓아낼 순간을 기다리며 ‘히스토리’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다. 우리는 해마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서 많게는 몇만 명, 몇천 명을, 적게는 수백 명씩 공채를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를 뒤집어 봐야 한다. 이렇게 많은 일자리가 해마다 창출될 수 있을까? 신입사원의 숫자까지는 아니겠지만 적어도 굉장히 많은 직장인들이 들어오는 자들을 위해 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그들이 자발적으로 행복하게 나갈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면 당장 직장에서의 어떤 상황에 빠지더라도 살아남을 수 있는 탈출 전략을 짜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글 박기종(커리어코칭 칼럼니스트) 사진 포토파크]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497호 (15.10.06일자)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