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사들이 용감하게 적에 맞서 잘 싸우게 하는 것은 적개심이고, 적의 이로움을 잘 빼앗게 하는 것은 재물이다.
그러므로 전차 전투에서 적의 전차를 10대 이상 노획했다면 가장 먼저 그것을 빼앗은 자에게 상을 준다.
그리고 적의 전차의 깃발을 우리의 깃발로 바꾸어 달고 아군의 전차와 함께 섞어서 사용한다.
포로로 잡힌 적의 군사는 잘 대우해주어 우리의 군사로 양성해야 한다.
이것을 일러 ‘적에게 승리할수록 더욱더 강해지는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전쟁에서는 승리를 귀하게 여기되 오래 끄는 것은 피해야 한다.
이와 같은 용병의 지혜를 아는 장수는 백성들의 운명을 맡아 쥐고, 국가의 안위를 주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것이다.
손자는 전쟁을 오래 끌어서 이로움이 된 사례가 없고 또한 군량미와 전쟁 물자를 먼 곳에 수송하는 부담이 커질수록 국가와 백성은 곤란해진다고 지적한다.
즉, 원정군과 장기전은 나라의 안전과 백성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기 때문에 절대로 피해야 하는 것이 병가(兵家)의 상사(常事)라는 얘기다.
만약 전쟁을 오래 끌어서 이로운 경우가 없다면 적 국의 침략을 방어하는 입장에서는 역으로 지연 전략을 구사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책이라는 말이 성립된다.
특히 전력이 압도적으로 열세인 상황이라면 ‘지연술’이야말로 최고의 전략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원정군의 약점을 최대한 이용한 전략이기 때문이다.
원정군의 약점을 최대한 이용하라!
예를 들어보자. 한니발의 공격 앞에 연전연패를 거듭해 역사상 최대 위기에 봉착한 로마를 구한 전략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파비우스의 ‘지연 및 게릴라 전략’이었다.
그는 한니발과의 정면 승부가 전혀 승산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병력과 군수품의 보급을 차단하는 후방 공격과 장기 소모전으로 한니발의 군사 전력을 야금야금 잠식하는 전략을 취했다.
파비우스의 전략 때문에 한니발과 병사들은 점차 지쳐갔다.
비록 전투에서는 무적이었지만 실상 ‘로마와의 전쟁’에서는 서서히 패배의 길을 걷고 있었던 셈이다.
이른바 ‘전투에서는 이기고, 전쟁에서는 패배한 신세’가 되고 만 것이다.
우리 역사 속에서 ‘지연 전략과 게릴라 전술’을 가장 효과적으로 잘 구사한 나라는 고구려였다.
고구려가 수차례에 걸쳐 중국의 강력한 통일제국인 수나라와 당나라의 대군을 물리칠 수 있었던 배경은 ‘농성전과 청야전술’로 대표되는 지연술과 ‘유인술과 매복·기습 공격’으로 대표되는 게릴라 전술에 능수능란했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지연 전략과 게릴라 전술은 훗날 고려가 거란(요나라)의 대규모 침략을 효과적으로 방어하는 데에도 큰 영감을 주었다.
원정군 특히 대규모 병력을 동원한 전쟁은 오래 끌면 끌수록 위태롭다. 전쟁 물자와 비용을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군량과 자원이 고갈될수록 군대의 전투력과 나라의 재정은 약해지는 반면 백 성들의 원망과 저항은 강해지는 법이다.
이러한 원정군의 최대 약점을 주도면밀하게 타격해 위대한 승리를 이끈 고구려의 임금과 장군이 바로 영양왕과 을지문덕이다.
고구려의 전략과 전술 ①
전력의 압도적 우세를 통해 고구려를 단숨에 무너뜨리겠다는 양제의 군사 전략 탓에 수나라는 이토록 엄청난 병력과 자원을 동원해 고구려 원정길에 올랐던 것이다.
손자의 병법과 전략에 따른다면 이러한 대규모 원정군은 상대방을 압도하는 여세로 전쟁을 빨리 끝내면 끝낼수록 좋다.
자신의 아버지(문제) 때 30만의 군사를 동원하고도 고구려의 방어 전술과 장마가 겹쳐 이렇다 할 전과(戰果)를 남기지 못한 경험을 잘 알고 있던 수나라 양제와 그 휘하 장수들 역시 속전속결의 전략을 짜고 나섰다.
그들은 요하를 건너자마자 요동에 자리하고 있는 고구려의 여러 성들을 단숨에 점령한 다음, 그 기세를 몰아 한달음에 평양성으로 진격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요하 도하 작전 때부터 고구려 군사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힌 수나라는 선봉장 맥철장이 전사하는 타격을 입는다. 겨우 도하에 성공한 후 고구려 군사 1만 명을 살상했지만, 살아남은 고구려 병사들이 요동성을 굳게 닫아걸고 전통적인 방어 전술인 농성전에 돌입하자 이렇다 할 전과를 내지 못했다.
2월에 시작한 요동성 공격이 4개월이 지나 6월이 다 돼가도록 성과가 없자 양제는 100만의 대군이 고구려의 일개 성 하나도 함락시키지 못한다면서 분노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배후에 요동성을 비롯한 고구려의 여러 성들을 그대로 두고 곧장 평양성으로 진격하기에는 ‘전략적인 부담’이 너무나 컸다. 그러나 만약 이대로 장마철을 만난다면 제1차 침략 때 겪은 악몽이 되풀이될 수도 있었다.
초조해진 수나라는 전쟁을 하루라도 빨리 끝내려면 평양성을 직접 공격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우문술과 우중문이 지휘하는 별동대 30만5000명을 선발해 고구려 깊숙이 진격해 들어갔다.
그런데 양제가 요동의 고구려 성과 맞서 있는 동안 ‘속도전과 기습 공격’을 통해 고구려를 제압하겠다는 이 군사 작전은 치명적인 약점과 허점을 지니고 있었다.
즉, 후방의 보급로가 안정되지 않은 탓에 평양성을 점령하기 전 ‘어떻게 식량과 병기 그리고 전투에 필요한 물자를 확보하는가’ 하는 문제를 근본적으로 안고 있었다.
고구려가 즐겨 사용한 방어 전술인 청야전술의 효과를 익히 알고 있던 수나라 장수들은 반드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청야전술이란 고구려가 일찍부터 사용해온 방어 전술로서 사람은 물론 식량과 생활 도구를 모두 성안으로 들여놓고 조금의 식량과 물자도 적군이 탈취하지 못하도록 말끔히 없애는 전술이다.
농성전과 청야전술이 마치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움직였기 때문에 고구려 영토에 발을 들여놓은 침략자들은 번번이 여기에 막혀 무릎을 꿇어야 했다.
그럼 당시 수나라 장수들이 찾은 해결책은 무엇이었을까? 그 들은 병사와 말 모두에게 100일 분의 식량을 지급하고, 여기에 다시 갑옷·단창·장창·옷가지·전투 기자재·장막을 지니게 했다. 이러다 보니 군사들은 도저히 그 무게를 감당할 수가 없었고, 결국 몸을 가볍게 하기 위해 식량과 전투 장비를 버리는 상황이 벌어졌다. ‘곡식을 버리는 자는 죽일 것이다’는 군령을 내려 엄하게 단속했지만 수나라 병사들은 모두 장막 밑에 구덩이를 파고 묻어 버렸다. 이 때문에 평양성을 향해 겨우 절반쯤 행군했을 때 식량이 이미 바닥나 수나라 병사들은 굶주릴 수밖에 없었다. 후방 보급을 기대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수나라의 별동대는 굶주림과 피로에 지친 상태에서 평양성을 향해 나아갈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이러한 모든 상황은 농성전과 청야전술을 통해 영양왕과 을지문덕이 노리고 있던 전략적 효과였다.
고구려의 전략과 전술 ②
손자는 병력이 열세일 때는 반드시 싸움터를 벗어나야 하고, 만약 상황이 뜻대로 되지 않아도 절대로 적군에 맞서 정면승부를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병력이 열세인 상황에서 적군에 정면으로 맞서 버틴다면, 강력한 적의 포로가 될 따름이다.”
이때는 성문을 닫아걸고 방어에 집중하되 적의 치명적인 약점인 군량과 물자의 궁핍을 십분 활용해 후방 보급로를 공격하거나 불규칙하고 예상할 수 없는 변칙 공격(매복·기습 공격)으로 적을 피로하고 초조하게 만들고 불안감에 떨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상황에 놓이게 되면 대부분은 자신의 약점과 허점을 상대방에게 쉽게 노출하게 마련이다. 바로 이때가 아군이 전력을 집중해 적을 궤멸할 정확한 ‘타이밍’이다.
을지문덕은 그 정확한 ‘타이밍’을 결코 놓치지 않았다. 그는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시 한편을 보내 자신의 유인술에 걸려든 수나라 장수와 병사들의 어리석음을 비웃었다.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상황에 빠진 수나라의 장수 우문술은 급하게 말머리를 돌려 철군을 시작했지만 끊임없이 매복과 기습 공격을 가해오는 고구려 군사에게 괴롭힘을 당하다가 살수(청천강)에 이르러 몰살당하고 만다. 30만5000명의 별동대 중 살아서 돌아간 자는 불과 2700명이었다.
‘지연 전략과 게릴라 전술’의 효과는 고려와 요나라(거란) 간의 전쟁을 통해서도 확인해볼 수 있다. 1 0세기에 들어서 동북아시아의 최강대국으로 급부상한 거란의 요나라는 모두 3차에 걸쳐 고려를 침략했다. 이 가운데 고려가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전쟁은 거란의 ‘제2차 침략’이었다. 당시 목종을 폐위하고 현종을 옹립한 ‘강조의 정변’을 구실삼아, 40만 대군을 휘몰아 고려를 침략한 거란은 순식간에 개경을 함락해 불바다로 만들어 버렸다.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는 거란의 기세에 놀란 현종은 이때 남쪽의 나주로 몸을 피해 겨우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자칫 굴욕적인 항복이나 심하면 왕조의 몰락까지도 예상할 수 있는 상황에서 고려는 어떻게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을까?
‘지연 전략과 게릴라 전술’의 효과 거란은 강조가 이끈 30만 고려군과의 정면 승부에서는 승리했지만 서경(평양)을 거쳐 개경으로 진격하는 동안 배후와 측면에서 자신들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고려 장수들의 기습·매복 공격에는 당할 재간이 없었다. 특히 거란은 현종을 사로잡아 전쟁을 빨리 끝내겠다는 생각이 지나치게 앞선 나머지 배후와 측면에 도사리고 있는 고려의 여러 성들을 미처 제압하지 못했다. 이곳에 주둔하고 있던 고려의 장수와 병사들은 발 빠르게 패잔병들을 다시 모아 거란의 배후와 측면을 기습 공격했다. 특히 양규와 김숙흥 두 장수의 끈질긴 게릴라식 공격에 거란군은 수많은 병사를 잃어야 했다.
이렇듯 거란은 패배해 물러났다기보다는 ‘스스로 지쳐 초조하고 불안했기 때문에’ 물러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고려의 입장에서 보자면 ‘큰 패배’ 이후 ‘작은 승리’가 거란의 침략을 물리칠 수 있었던 반면
거란의 입장에서 보자면 ‘큰 승리’가 아닌 ‘작은 패배’ 때문에 전쟁에서 이길 수 없었던 셈이다.
병법과 전략이란 오묘해서 때로는 전투에서 계속 이기고도 전쟁에서 패배하는 경우가 적지 않고,
또는 크게 패배하고 작게 승리해도 전쟁에서는 이기는 사례도 얼마든지 있다. ‘
지연 전략과 게릴라 전술’의 효과는 적을 궤멸시키는 것보다는 ‘적이 스스로 지쳐 물러날 때’ 가장 극대화된다. 따라서 적에게 얼마나 큰 승리를 거두었는가, 적의 병력을 얼마나 살상했는가, 적의 전력에 얼마만큼 타격을 주었는가 하는 숫자 놀음은 이 경우에 전혀 중요하지 않다.
고구려와 고려가 강력한 적에 맞서 구사한 ‘지연 전략과 게릴라 전술’은 정치와 기업 그리고 일상의 삶의 현장에서도 유용하게 구사해볼 수 있다.
강한 적과 맞설 때는 정면 승부를 피해라. 방 어에 집중하되 우회와 기습 공격을 통해 시도 때도 없이 경쟁자를 불안하고 초조하고 지치게 만들어라.
그러나 그 순간에도 자신의 실체와 전력을 상대방에게 절대로 드러내지 말라.
오히려 경쟁자인지 협력자인지 혹은 강자인지 약자인지 헷갈리게 만들어라. 그리고 초조함과 불안함에 지친 경쟁자가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고 약점과 허점을 드러낼 때 비로소 자신의 실체를 온전히 드러내고 전력을 집중해 궤멸시켜라.
만약 당신에게 공격할 힘이 남아 있지 않거나 아예 없다고 해도 걱정할 것은 없다. 그 런 상황에 놓이게 되면 십중팔구 당신의 경쟁자는 스스로 지쳐 물러나기 때문이다. |
기사: 한정주 역사평론가 (hjeongjo@hanmail.net) |
'^ (방어,생존)전략'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업 리스크, 위기 관리의 한계와 향후 개선 방향 및 위기 관리 원칙 (0) | 2016.06.14 |
---|---|
위기관리의 7 가지 핵심 디테일 / 디테일의 힘(왕중추 저) p282 (0) | 2016.06.14 |
몽골군이 군사적으로 성공한 이유는 군 고유의 구조가 아닌 작전술이 우수했기 때문이었다 / 수부타이의 전략적 감과 안목을 생각해보면 (0) | 2015.08.17 |
몽골군의 군사작전술에 관한 전문 지식은 항상 그 군사작전을 포함하는 더 큰 단위의 정치적 전략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0) | 2015.08.17 |
몽골군의 말 (0) | 2015.08.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