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 컴퓨터(Seattle Computer Products)
실수 규모: 253조원
1980년 ‘시애틀. 컴퓨터 프로닥츠’의 ‘팀. 패터슨’이라는 프로그래머는
4개월의 작업 끝에 DOS 라는 운영체계를 개발 했습니다.
한편 ‘빌. 게이츠’는 IBM에 납품자격을 얻기 위해 Operating System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IBM은 돈과 PC를 생산할 공장은 이미 갖춰져
있었으나 운영체계(operating system)을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시애틀 컴퓨터는 단돈 $50,000 에 DOS를 팔았고
그로 인해 오늘의 ‘마이크로. 소프트’가 탄생했고,
IBM은 오히려 ‘마이크로. 소프트’의 고객이 되어버렸습니다.
현재 ‘마이크로. 소프트’의 가치는 253조원 입니다
박인근의 블로그 / 비즈니스 역사상 최고 멍청했던 거래는? 에서 펌함
-------------------------------------------------------------------------------------
모디스티 첨삭 글
일머리는 현재 하는 일에 정통해야 한다
현재 하는 일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 될 것인가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앞으로 주어지는 기회를 어떻게 잡을 것인가 대응책을 가져야 하며
상황 변화에 따라 적절히 실행해야 한다
아래 본 사례를 좀더 상세히 적은 글을 펌해 왔다
2015.3.18 모디스티
--------------------------------------------------------------------------------
빌 게이츠와 DOS - 필요한 기술은 반드시 손에 넣는다
위험 요소가 따르기는 하지만 시장을 창출하고,
산업의 틀을 짜고, 세계를 재편할 수 있는 기회가 지금 주어졌다.
게이츠는 그 기회를 붙잡기로 결심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생존 인물의 이름이 실리는 것은 유례가 드문 일이다.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설립자 빌 게이츠(1955~)에 대해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이렇게 쓰고 있다.
그가 일군 뛰어난 업적으로 인해 빌 게이츠가 위대한 미국인들을 기리는 신전에 영구히 자리를 잡게 될 것인지는 지켜봐야겠지만, 적어도 역사가들이 그를 묘사할 때는 석유 하면 존 록펠러가 떠오르듯 컴퓨터 하면 게이츠라는 식이 되지 않을까.
비록 이런저런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록펠러 없는 석유산업은 상상할 수 없으며 석유가 문명에 끼친 영향 또한 엄청나다.
록펠러와 마찬가지로 빌 게이츠 역시 언짢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온갖 논란의 중심에 서 있기도 했지만 빌 게이츠 없는 컴퓨터를 생각할 수 없으며
컴퓨터가 진화하면서 그가 문명에 끼친 영향 또한 지대하다.
한마디로 빌 게이츠는 현대문명을 창조하는 데 커다란 기여를 했다.
빌 게이츠는 열세 살에 처음으로 컴퓨터 프로그램을 짰다.
고등학교 재학 중에는 학교의 임금대장 시스템을 컴퓨터로 운영하는 프로그래머들 모임에 속해 있었다.
그리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첫 번째 소프트웨어 회사를 차렸다. ‘
트라프-오-데이터’라는 이름의 이 회사는 1971년 파트타임으로 참여했던 데이터 처리 작업의 산물이었다.
그 작업이란 전략적으로 배치된 계수 상자를 이용해 위싱턴 주 켄트의 도로 교통 상황을 조사하는 것이었다. 각각의 상자는 도로를 가로지르는 호스에 연결되어 있었고 자동차가 호스 위를 지나갈 때마다 계수 상자에 숫자가 입력되어 종이테이프에 구멍이 뚫리면서 결과가 산출되었다. 당시에는 주로 이런 식으로 데이터를 저장했다. 구멍의 숫자를 헤아려 그 결과를 펀치 카드에 옮겨 적은 뒤 리포트를 작성하여 펀치 카드를 읽는 컴퓨터에 그 데이터를 이송하는 작업이 게이츠는 따분하게만 느껴졌다.
이에 꾀가 난 게이츠는 몇몇 친구들을 고용해 지루한 작업을 맡겼다.
그 중에는 졸업한 지 얼마 안 된 폴 알렌이라는 친구도 있었다. 친구들끼리의 협동 작업이 규모가 커지면서 트라프-오-데이터라는 회사로 발전했는데, 본사는 워싱턴 주립 대학에 다니던 알렌의 기숙사 방으로 정했다.
게이츠와 알렌은 국방부 계약 업체인 TRW사로부터 프로그래밍관련 프로젝트를 수주하는 한편
트라프-오-데이터에서 개발한 컴퓨터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통해 교통량을 효율적으로 조사할 수 있는 시스템을 완성하여 지방 정부에 판매하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게이츠는 1973년에 하버드대에 진학했다.
그는 1, 2학년 내내 폴 알렌과 함께 또다시 소프트웨어 개발에 몰두해 마이크로컴퓨터에서 사용할 중요한 프로그래밍 언어인 베이직(BASIC)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이에 게이츠는 더 이상 학교를 다닐 필요가 없다고 판단,
2학년이 되던 1975년 하버드대를 중퇴하고 알렌과 함께 마이크로소프트사를 차렸다.
마이크로소프트는 곧 소기업 성공 사례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빌 게이츠의 일생에서 커다란 전환점이 된 세 가지 결정 중 첫 번째 결정이 바로 이때 내려졌다.
첫 번째 결정은 그의 주요 고객들의 신분과 관련된 것이었다.
게이츠는 이제 막 시장이 형성된 신흥 산업인 컴퓨터 업계에서 자신이 어느 정도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되었다고 판단했다.
게이츠는 ‘최종 사용자’인 개별 고객들의 요구를 일일이 충족시키기보다
다수의 신흥 컴퓨터 제조업자들을 주요 고객으로 삼아 자신의 제품을 선보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기존의 프로그래밍 언어인 베이직, 코볼(COBOL), 포트란(FORTRAN), 파스칼(PASCAL) 등을 새롭게 변형한 버전을 비롯하여 컴퓨터 운영에 필요한 다양한 소프트웨어를 컴퓨터 제조업체에 공급하는,
이른바 주문자 상표에 의한 제품(OEM)의 선두주자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게이츠는 자신이 개발한 소프트웨어가 컴퓨터 제조업체에서 개발한 하드웨어와 최적의 호환성을 지닐 수 있도록 그들과 긴밀히 협조하였다.
그는 마이크로소프트와 컴퓨터 제조업체가 서로 돕는 관계에 있다고 역설하면서
앞으로 컴퓨터 산업을 주도할 업체는 소프트웨어가 될 것임을 그들에게 납득시켰다.
게이츠에게는 앞날을 내다보는 혜안이 있었다.
일은 순풍에 돛 단 듯 술술 풀려갔다.
1980년 7월 21일, 상황은 훨씬 더 유리하게 돌아갈 조짐이 보였다.
바로 그날, 게이츠는 IBM사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이후 컴퓨터 공룡 기업 IBM은 빌게이츠와 회동을 갖고 앞으로 IBM이 설계하고 제조할 모든 컴퓨터에 탑재할 소프트웨어를 마이크로소프트에서 개발해달라고 요청했다.
보통 사람들에게 I-B-M이라는 세 글자는 컴퓨터와 동의어였다.
이는 빌 게이츠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게이츠는 언젠가 사무실 책상과 각 가정마다 컴퓨터가 놓이게 될 날이 올 것으로 믿었는 데,
IBM사도 같은 생각이었다.
하지만 게이츠는 직원이 고작 40명인 자신의 회사가
IBM이라는 골리앗에 견줄 만한 다윗조차 될 수 없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빅 블루(BIG BLUE-IBM의 애칭)’와 같은 기업들은 마치 점심 식사처럼 작은 기업을 먹어치우면서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공룡 기업에 잡아 먹힐지도 모른다는 위기뿐만 아니라,
정장 차림으로 해외 출장을 다니는 거대 기업의 경영진과
청바지에 샌들을 선호하는 마이크로소프트의 경영진 사이에는 문화적으로 커다란 간극이 존재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소규모 기업을 운영하는 데 만족할 게이츠가 아니었다.
위험 요소가 따르기는 하지만 시장을 창출하고,
산업의 틀을 짜고,
세계를 재편할 수 있는 기회가 지금 주어졌다.
게이츠는 그 기회를 붙잡기로 결심했다.
이것이 전환점을 이룬 그의 두 번째 결정이었다.
IBM과 맺은 첫 번째 거래의 계약서 잉크가 다 마르기도 전에
게이츠는 마이크로소프트의 포트폴리오에 무엇인가 빠져 있음을 직감했다.
IBM이 원한 것은 ‘개인용 컴퓨터(PC)’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선보일 기계와
소프트웨어를 세트로 판매하는 것이었다.
게이츠는 IBM이 소프트웨어를 구입하기 위해 마이크로소프트와 거래를 튼 것에 무척 고무되었지만,
머지않아 IBM과 같은 하드웨어 제조업체에 다양한 소프트웨어를 공급하는 업체들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에게 필수적인 소프트웨어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컴퓨터 하드웨어와 컴퓨터 사용자가 운영하고자 하는 온갖 유용한 프로그램들을 상호 연결해주는 ‘운영체제’였다.
운영체제는 키보드가 보낸 입력 사항을 인식하고,
모니터에 출력 사항을 띄우고,
파일과 디렉토리를 추적하며,
디스크 드라이브와 프린터 같은 주변기기의 제어를 비롯한 기본적인 과제를 수행하였다.
처음에 IBM은 단순히 마이크로소프트가
다른 회사로부터 허가를 받은 운영체제 재고품을 구입하고 싶다고 했다.
그 운영체제는 ‘마이크로컴퓨터 제어 프로그램(CP/M, Control Program for Microcomputers)이라 불렸는데,
컴퓨터 산업이 걸음마 단계에 있을 당시 표준 운영체제로 체택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후보였다.
다만 CP/M의 호환성이 다양하지 않아
당시로서는 ‘표준’이라는 단어가 별 의미가 없기는 했지만 말이다.
게이츠는 CP/M을 처음으로 만들어낸 디지털 리서치와 기막히게 좋은 조건으로 거래를 체결했다.
이로 인해 마이크로소프트는 보다 다양한 제품을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의 CP/M은 8비트 마이크로칩으로만 작동이 가능하도록 고안되어
사용 범위가 매우 제한적이었다.
게이츠는 IBM을 설득해 곧 출시될 개인용 컴퓨터에는 한창 연구가 진행 중인 16비트 칩을 장착하도록 했다.
이는 처리 속도나 처리 용량 모두 대폭 강화시킬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16비트 칩을 겨냥한 디지털 리서치의 운영 체제인 CP/M-86이 아직 기획 단계에 있는 데다 진행 속도 또한 매우 느리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보니 아직도 개발 중에 있는 CP/M-86에 대한 거래는 제대로 궤도에 오를 수 없었다
.
그 사이 게이츠와 IBM의 협상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지만
디지털 리서치의 CP/M-86 개발 속도가 예상보다 훨씬 느려지자
게이츠는 완전한 파국과 절호의 기회라는 갈림길에 놓이게 되었다.
16비트 운영체제가 완성되지 않으면 마이크로소프트와 IBM의 거래는 물거품이 될 것이고,
그러면 컴퓨터 산업 자체가 좌초되거나 다른 누군가가 나타나 IBM과 제휴하거나 둘 중 하나가 될 터였다.
바로 이때 폴 알렌에게 떠오른 인물이 하나 있었다.
그는 컴퓨터 엔지니어인 팀 패터슨이었다.
당시 패터슨이 운영하는 시애틀 컴퓨터 프로덕트에서 만든 QDOS(Quick and Dirty Operating System, ‘날림으로 만든 운영체제’라는 뜻)라는 제품은 어느 정도 지명도가 있었다.
패터슨과 게이츠 사이에 선이 닿으면서 QDOS는 재빨리 16비트 운영체제인 86-DOS로 발전했다.
당시 시애틀 컴퓨터는 자사의 86-DOS 제품과 병용하기 위해
마이크로소프트의 베이직 사용허가를 받고 싶어 했다.
패터슨은 자신의 회사가 베이직을 비롯한 마이크로소프트의 모든 프로그래밍 언어 사용 허가를 얻는 대신
마이크로소프트에게는 86-DOS의 사용 허가권을 넘기겠다고 제안했다.
이제 게이츠는 마침내 IBM에 운영체제를 제공할 수 있게 되었다고 확신하면서 그들과의 협력을 지속할 수 있게 되었다.
게이츠는 단돈 1만 달러를 지불하고 최종 사용자들에게 86-DOS를 무제한으로 판매할 수 있는 비독점적 권한을 확보했다.
그는 또 1만 달러를 지불하고 OEM 고객들에게 86-DOS를 판매할 수 있는 재실시권을 확보했으며,
운영체제의 핵심인 소스코드가 완비된 86-DOS에 대한 재실시권 역시 1만 5천 달러에 손에 넣었다.
게다가 시애틀 컴퓨터사는 운영체제 향상을 위해 애쓸 뿐 아니라 마이크로소프트는 언제든 업그레이드된 운영체제를 사용할 수 있다는 데 합의했다.
마이크로소프트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거래임은 분명했다.
이후 마이크로소프트는 IBM과 여타의 고객들을 상대로 재실시권을 행사하면서 대박을 터뜨렸다.
마이크로소프트는 IBM에 어학 소프트웨어에 대한 재실시권을 넘기면서 상당한 돈을 벌었다.
뿐만 아니라 DOS프로그램 사본 하나당 1달러에서 15달러 사이의 로열티를 받으면서
단순히 DOS라 불리는 운영체제에 대해서는 대략 40만 달러라는 꽤 많은 선수금을 받았다.
게다가 그 계약은 일방적으로 비독점적이었다.
즉 IBM은 제3자에게 DOS와 마이크로소프트의 다른 프로그램에 대한 허가권을 넘기는 것이 금지된 반면 마이크로소프트는 DOS(와 자사의 기타 프로그램)를 시간과 대상에 구애받지 않고 판매할 수 있었다.
하지만 거래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IBM과 마이크로소프트 사이의 DOS계약이 체결되고 나서 몇 개월이 지나
IBM의 PC가 매장에 진열되기도 전에 다른 컴퓨터 제조업체들,
특히 일본 업체들이 마이크로소프트의 DOS에 관심을 보였다.
IBM과 맺은 계약 조건 덕분에 게이츠는 거리낌 없이 일본 업체에 DOS 사용 허가권을 줄 수 있었다.
보다 짜릿한 소식은 최대 경쟁업체의 DOS 및 CP/M을 독립적으로 공급하는 주요 업체인 라이프보트 어소시에이츠로부터 제안이 들어온 것이었다.
라이프보트는 CP/M이 아닌 DOS를 자사의 표준 16비트 제품으로 삼을 수 있는 권리를 취득하기 위해 마이크로소프트에 수백만 불을 제공했다.
빌 게이츠는 IBM에 운영체제를 판매하는 것이 IBM의 PC를 궤도에 올리는 수단이 될 것이라고 파악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컴퓨터 산업의 미래를 확실히 다지고 자사의 다른 소프트웨어 제품들도 판매할 수 있는 시장을 개척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운영체제는 더없이 소중했지만,
게이츠가 이미 간파했듯이 그것은 어디까지나 목적에 이르는 수단일 뿐이었다.
그런데 여기저기서 DOS 사용 허가권을 달라는 요청이 쇄도하다 보니
게이츠는 운영체제가 목적 그 자체, 곧 컴퓨터 소프트웨어 산업을 줘락펴락하는 열쇠가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문득 여기에 생각이 미친 게이츠는 또 한번의 중요한 결정을 하기에 이른다.
그와 마이크로소프트의 운명에 커다란 전환점이 된 세 번째 결정이었다.
게이츠는 알렌과 더불어 시애틀 컴퓨터로부터 무조건 DOS를 사들이기로 결심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또 다른 핵심 인물인 스티브 발머는 이렇게 설명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DOS가 다른 어느 누구도 손을 댈 수 없는 우리의 소유임을 확실히 하고, 그것을 이용해 우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유연성 있게 시도할 수 있다고 빌은 직감적으로 판단했다.”
마침내 마이크로소프트사는 단돈 7만 5천 달러를 지불하고 DOS의 소유권을 완전히 넘겨받았다.
빌 게이츠가 세계 최대 부자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고,
마이크로소프트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회사 가운데 하나가 된 오늘
돌아보면 그러한 거래는
네덜란드의 서인도 회사 총독 피터 미누이트가 인디언들에게 단돈 24달러를 주고 맨해튼을 구입한 것과 유사해 보인다.
그러나 1981년 당시 산업계에서는 이러한 거래가 지닌 의미를 명확히 깨닫는 사람이 없었다.
IBM 스스로 ‘산업의 표준’이라 일컬은 CP/M의 개발을 포기하고 이처럼 새로운 운영체제를 채택한 것에 대해 일생일대의 실수라고 혹평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IBM이 DOS를 인정하면 CP/M은 무용지물이 될 게 뻔했다.
게이츠는 IBM사를 설득해 DOS-원래는 Microsoft DOS였지만 지금은 MS-DOS라 불리는-를 채택하게 함으로써 CP/M에 강펀치를 날렸다.
게이츠가 이미 예측한 대로 IBM의 PC가 컴퓨터 시장을 주도하게 되었으며,
바로 그런 IBM의 PC가 MS-DOS로 운영되기 때문에 마이크로소프트에게 매우 유리한 운영체제 시장 또한 형성되었다.
그리고 IBM에 맞서는 여러 신흥 경쟁 업체들이 자사의 제품을 선보일 준비를 하자 게이츠는 그들 모두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귀사는 별 볼 일 없는 소수가 집착하는 케케묵은 운영체제인 CP/M을 쓰시겠습니까? 아니면 IBM이 승인한 MS-DOS를 쓰시겠습니까?
대답은 자명했다. 그 대답이 곧 마이크로소프트의 사업을 폭발적으로 확장시키는 촉진제가 되었다.
아울러 MS-DOS가 널리 채택되면서 걸음마 단계에 있던 컴퓨터 산업의 성장을 가로막았던 호환불가의 문제가 해결되었다.
게이츠는 표준 규격의 위력이 막강함을 절감했다.
내가 이렇게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어떤 면에서 표준 규격은 자연스럽게 독점으로 이어진다.
그렇게 되면 어떤 이가 특정한 패키지에 대한 자료를 적절히 제공하고,
그 패키지를 적절히 다룰 뿐 아니라 촉진시키기도 한다.
여기에 탄력이 붙으면 사용에 따른 로열티, 명성, 영업 인력 및 가격 등이 그 제품 안에서 매우 막강한 위치를 구축한다.
한편 ‘자연스런 독점’이라는 표현은 훗날 1990년대 중반 되살아나 빌 게이츠를 괴롭히게 된다.
마이크로소프트는 반독점법을 위반했다는 혐의로 연방 검찰로부터 기소되어
엄청난 희생과 비용을 치르지만,
‘자연스런 독점’이라는 표현은 꼭 필요한 기술을 손에 넣고야 말겠다는 빌 게이츠의 결심에서 비롯된 오늘날의 컴퓨터 산업을 가장 잘 묘사해 주는 말일 것이다.
브래태니커 백과사전은 ‘석유 하면 록펠러가 떠오르듯 개인용 컴퓨터 하면 빌 게이츠가 떠오른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브래태니커가 암시하듯 이러한 사실과 그것을 사실로 만든 결정에 힘입어
게이츠는 현대사회와 문명에서 으뜸가는 역할을 차지하게 되었다.
스마트 휴먼, 스마트 소사이어트 에서 펌함
'ㅁ 미래대비<-관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머리, 배울 때는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면 어떻게 하지 하는 마음으로 해야 하고,/ 다시 굴러떨어지면 어떻게 하지 하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 (0) | 2015.03.18 |
---|---|
박정희 일머리: 중심부 서울만 장악하면 나머지는 다 따라온다 / 6·25전쟁 때 보니, 6개월 전에 예상했던 침투경로 그대로 내려왔어 (0) | 2015.03.18 |
일머리 혁명: 불리한 정보야말로 반드시 들어둔다 (0) | 2015.03.17 |
일머리 혁명: '지쳤다, 힘들다, 싫어졌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 "지쳤다" 라고 말하면 뇌는 움직이지 않는다 (0) | 2015.03.17 |
일머리 단련법: 다양한 경험과 학습을 하라 / 다양하게 생각하라 / 시간을 두고 생각하라 (0) | 2015.03.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