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원(태종)이 아버지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소식을 듣고 모친 2명(모친과 후처)을 데리고 개성에서 평양으로 달아났다
달아나면서 중간 지점에서 멈추고 한 말이 "최영은 일을 모르니 우리를 쫓치 못할 것이라고" 했다
이한우가 쓴 대학연의에 나온 내용이다.
일을 알았었던 이방원은 태종이 되고, 이성계보다 높은 최영은 죽음을 당한다
이 글을 읽고 <<일머리>>를 생각해 보았다
일머리가 있는 이방원은 형을 왕으로(경종)모시고 이후 형에게서 왕위를 물려받는다
세자 안녕을 파하고 충녕(세종)을 세자룰 책봉하고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며 외척들을(심지어 세종의 장인까지) 제거하여
외척의 간섭이 없도록 하면서 세종을 밀어주어 세종이 성군이 되고 500년 이씨조선이 이어진다.
왕조를 튼튼하게 구축한 이방원의 일머리......
최근의 현대사를 통하여 본 일머리는 박정희이다
그가 얼마나 일머리가 좋은지를 느꼈기에 두서없이 자료를 펌했다
쿠테타를 전복시킬 수 있는 장도영(육군 참모총장)
쿠테타를 진압시킬 수 있는 이한림(1군 사령관, 박정희와 동기생)
장도영을 쿠테타의 우두머리로 내세운 박정희
이한림에게는 여러 방편을 통해 설득을 하다가 5월18일 체포한다
걸림돌을 용이주도하게 이용하고, 제거하는 그를 나쁘게만 볼 것이 아닌, 일머리로 그를 분석하여 보았다
2015.3.23 모디스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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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8> 5·16 최종 점검
형님 집서 핵심 25명 마지막 회의
'신이 계시다면 도와달라' 기도
'공수단, 장면 숙소 반도호텔 장악'
출동부대 구체적 점령 목표 결정
D데이 H아워는 5월 16일 새벽 3시
박 장군 "세 번 연기는 없다" 다짐
거사 계획 누설돼도 군 수뇌 무덤덤
"성공하겠다" 은근히 자신감 생겨
역사는 기록되는 게 아니다. 기록하는 것이다. 미래는 그냥 오는 게 아니다. 인간이 만들어가는 것이다. 박정희 소장을 지도자로 옹립한 5·16 핵심세력들은 운명의 순간들을 헤쳐나가고 있었다. 거사 날짜를 두 번이나 바꿔야 했다. 이제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간이다. 그들은 하늘의 도움을 구했다.
그 무렵 나는 기도를 했다. 혁명의 성공을 간절히 구했다. 신이 계시다면 도와달라고 했다. 영어로 ‘메이 가드 블레스 어스(May God bless us·신이여 축복하소서)’를 되뇌었다.
그때 한국군이 60만 명, 미군이 5만6000명인데 3600명의 병력으로 세상을 뒤집었으니 누구는 기적이 아니냐고 묻기도 한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 적은 병력이 서울로 진입하는 데 별로 저항이 없었다. 석 달간 거사 준비 과정에선 비밀 누설이 여러 번 있었다. 그래도 군 사령탑은 이렇다 할 진압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어 그래’ ‘그게 사실이야?’ 하는 반응 정도였다. 일이 되려면 그렇게 되는 것 같다.

1961년 5월 14일 오전. 거사 계획을 확정 짓는 마지막 회의가 서울 약수동 셋째 형님 댁에서 있었다.
종락(鐘洛) 형님은 한일은행에 다녔는데 우리 일을 헌신적으로 도왔다.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형님은 회의가 끝날 때까지 집 앞 골목길 입구에 나가 군 방첩대(CIC)나 범죄수사대(CID)의 감시가 따라붙었는지 망을 봐주었다. 형님 댁이 25명의 혁명주체들로 꽉 찼다. 거사 당일 움직이게 될 책임자들이다. 한 달여 전 박정희 소장을 지도자로 옹립할 때 29명이 모인 이래 가장 많은 숫자였다.
내가 총괄기획 및 조정 역할을 맡아 회의를 진행했다. 박정희 소장은 D데이 H아워가 5월 16일 새벽 3시임을 선언했다. 그 순간 긴박감이 고조됐다. 그 전에 잡았던 거사일 4월 19일과 5월 12일이 두 번이나 연기됐기에 선언의 무게감은 더했다. 박 소장은 엄숙한 표정으로 “이제 어떤 일이 있더라도 D데이 H아워의 변동은 없다. 최후의 1인까지 싸워서 혁명을 성공으로 이끌어야 한다”고 말했다.
참석자 중 누군가 “출동병력이 한 곳으로만 몰리는 것 아닌가. 대구나 부산, 인천, 수원 등 지방 주요 도시는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걱정했다. 박 소장은 “서울이 중요하다. 서울만 장악하면 나머지는 다 따라 나온다”고 안심시켰다.
적은 병력으로 큰 군대를 상대할 땐 중심부를 쳐야 한다는 게 박 소장의 생각이었다.
혁명은 기습이다. 예상치 못한 시점에 핵심부를 전격적으로 집중해 치는 것이다.
대상이 움직이기 전에 이쪽의 선제(先制)공격이 승부를 가른다.
칭기즈칸이 10만의 군사로 몽골에서 동유럽에 이르는 사상 최대의 지역을 평정한 비결도 이것이었다.
주변부를 버리고 중심부만 장악하는 방식이다.
칭기즈칸은 광대한 지역의 주요 도시, 요충지에 소수 병력만 남겨 놓고 앞으로 전진했다.
회의에서 나는 이런 말을 했다. “혁명은 숫자로 하는 게 아닙니다. 의지로 합니다. 의지는 자기 몸을 집어던지는 겁니다. 이순신 장군이 사즉생 생즉사(死卽生 生卽死)의 결의로 부하들을 독려했습니다. 죽기를 각오하는 의지가 우리를 살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작전 기안을 맡은 박원빈 중령(6관구 작전참모)은 “16일 0시를 기해 예하부대에 비상훈련을 가장한 혁명군 출동명령을 하달하겠습니다”고 보고했다. 6관구는 혁명 지도부의 첫 지휘소로 결정됐다. 6관구는 수도권을 방위하는 사령부다. 참모장 김재춘 대령이 거사 책임을 맡았다. 첫 지휘소 임무가 끝나면 두 번째 지휘소는 남산 KBS방송, 세 번째는 육군본부로 옮길 예정이었다. 박원빈 중령이 발표한 거병과 점령 목표는 이랬다. 괄호 안은 거사 책임자.

◆제1공수단(단장 박치옥 대령)=장면 총리의 숙소인 반도호텔과 방송·통신 기관, 중앙청, 국회의사당 ◆해병1여단(여단장 김윤근 준장)=내무부, 치안국, 서울시경 ◆6군단 포병단(단장 문재준 대령)=육군본부 ◆30사단(작전참모 이백일 중령)=청와대, 시경탄약고, 서대문형무소, 연희송신소 ◆33사단(작전참모 오학진 중령)=기독교 방송국, 국제전신전화국, 중앙우체국 ◆특수임무(오치성 대령, 옥창호·김형욱·이석제·유승원 중령, 박종규 소령)=출동부대 독려 및 요인 체포.
마지막 분위기는 비장했다. 지금 우리가 헤어지면 다음에 만날 곳은 육군본부이거나 하늘나라가 될 것이다. 이승의 끝이 될지 모르는 동지들을 그냥 돌려보낼 수 없었다. 나는 신문지에 싸서 미리 준비한 100만환(지금 1000만원 정도)을 그들에게 쪼개서 나눠줬다. 한 사람당 쌀 한 가마는 살 수 있는 돈이다. “오늘 집에 돌아가서 가족에게 양식이라도 사주시라”고 말했다. 그 돈은 남상옥 사장(사업가·뒤에 타워호텔 사장)한테 마련했다.
무산된 두 차례 거사가 무익한 것만은 아니었다. 첫 번째 4월 19일 계획은 4·19기념 1주년 행사를 맞아 대학생들의 대규모 시위를 예상하고 준비한 것이다. 시위가 벌어지면 진압군으로 투입되는 혁명 주체세력이 궐기군으로 전환한다는 구상이었다. 그날 동대문 서울운동장 야구장에 3만 명이나 모여 기념식이 있었다. 기대했던 데모는 일어나지 않았다.
군부 궐기는 자동적으로 취소됐다. 나는 발상과 접근 자세를 바꿨다. 상황이 조성되어야 거병하는 소극적 방식은 안 되겠다는 교훈을 얻었다. 역사는 스스로 써야 하고 미래는 만들어가야 한다.
이튿날 대구의 박정희 소장(2군 부사령관)을 찾아가 폭동 진압 계획에 편승하려는 소극적 계획을 수정하자고 했다.
우리는 주변 조건과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출동할 수 있는 혁명군을 편성하기로 했다.
두 번째 계획은 5월 12일이었는데 주체세력 중 한 명의 부주의로 비밀이 누설됐다.
육본의 이종태 대령이 경인 통근버스 안에서 옆자리에 앉은 동료를 포섭하기 위해 혁명 준비 상황을 발설한 것이다.
이 동료는 방첩대에 밀고했다.
거사 계획은 서울지구 방첩대장(이희영 대령)→육본 방첩대장(이철희 준장)→장도영 참모총장(중장) 순으로 보고됐지만 방첩대의 손길은 우리에게 미치지 않았다.
이 대령 한 명만 구속시키고 수사를 확대하지 않은 것이다. 다만 쿠데타 소문이 날짜까지 박아 군내에 널리 퍼지게 돼 부득이 그날 궐기를 중단했다. 우리들의 거사 계획은 여러 쪽에서 올라갔다. 그럼에도 보고를 받은 장도영의 군 수뇌부는 ‘그럴 리가 없다’고 신빙성을 두지 않든가 ‘대단치 않은 일’이라며 안이하게 대처했다.
거사 기밀이 누설됐다는 소식들이 들려왔다.
그러나 나는 위기감을 느끼지 않았다. 두렵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군과 정부의 무관심과 나태함이 어느 정도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사가 성공하리라는 자신감이 은근히 생겼다. 기묘한 상념이 일었다.
1950년 6·25 남침 때다.
정보국의 박정희 작전정보실장(무관)과 북한반장(중위)인 나는 49년 12월에 전쟁 발발 시점과 징후를 정확하게 분석해냈다.
군 수뇌부에 보고하고 대비할 것을 건의했다.
하지만 군과 정부의 어느 누구도 우리의 보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대책 없는 안일함, 근거 없는 자신감이 그들을 지배했다.
그때 군 수뇌부는 알면서도 남침을 당했다.
그 11년 뒤 군 지휘부는 군사혁명을 눈치챘으면서도 당할 운명에 처해 있다.
전영기 기자, 유광종 작가 chun.younggi@joongang.co.kr
월 12일 거사 계획이 새어 나가자 5·16 주체세력은 거사일을 5월 16일로 조정했다. 16일은 화요일이었다. 16일 택일에 대해 김종필 전 총리는 크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될 수 있는 대로 빠른 날짜를 정하자고 해서 16일이 됐다. 별다른 뜻은 없었다”고 회고했다.
1963년 국가재건최고회의가 펴낸 『한국군사혁명사』는 다르게 설명한다. 16일 선택에 극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이 책에 따르면 핵심 멤버들 사이에 날짜를 놓고 의견이 엇갈렸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즉각 실행에 옮겨야 한다는 쪽과 계획 검토와 정세 판단에 시간이 필요하다는 신중론이 대립했다. 결국 박정희 소장이 제시한 16일로 결정됐다.
그날을 택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일단 일요일인 14일은 피했다. 정부 관료들이 주말여행과 고향 방문 등으로 서울을 떠나 있어서다. 출동 예정 부대의 장병들도 외출에서 돌아오지 않을 수 있었다. 15일 월요일은 장면 총리가 ‘제1군 사령부 창설 7주년 기념식’ 참석을 위해 원주에 가기로 한 날이었다. 장 총리를 체포하는 데 변수가 생길 수 있었다. 따라서 총리가 서울로 돌아온 뒤인 16일로 결정했다.
5·16에 반대했던 이한림 1군 사령관은 16일 택일이 자신을 무력화하기 위한 조치였다고 주장한다. 그는 회고록 『세기의 격랑』에서 이렇게 말했다. “쿠데타 주동세력은 북한이 일요일인 6월 25일, 즉 토요일인 6월 24일 국군의 외출 외박을 노린 공백의 새벽인 다음 날을 택한 것처럼 지휘관들이 비어 있을 5월 15일 다음 날인 5월 16일 새벽을 D데이 H시로 정해 놓고 있었다.”
실제 15일 기념식엔 1군 휘하의 전 군단장과 사단장이 참석했다. 이들은 이날 저녁 원주에서 만찬을 열고 하룻밤 묵은 뒤 다음 날 원대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이한림 사령관을 포함한 대부분은 16일 새벽에 닥칠 일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한애란 기자 aeyani@joongang.co.kr 에서 일부 펌함
-거사 소문이 퍼졌는데도 장면 정권이 막지 못한 건 미스터리입니다.
“장면 총리는 소문에 신경도 안 쓴 거 같았어.
그때 이런 얘기가 이후락(※장면 국무총리실 직속 정보위원회 실장)씨 같은 사람 귀에 왜 안 들어갔겠어.
다 듣고 있어도 설마 그러랴, 하는 정도의 인식이었겠지.
이한림 1군 사령관은 보고를 받고 혁명군을 칠 준비를 했어.
그런데 우리가 먼저 가서 잡아왔지.
민심이 우리 편이었어.
아, 저 윤보선 대통령도 5·16 보고를 받고 ‘올 게 왔구나’ 첫마디가 그거였어.
현직 대통령이 올게 왔구나 했으면 알 만하지. 허허.”
-5·16을 성공시킨 배경엔 박정희 전 대통령과 김종필 전 총리의 국가 개조를 위한 권력의지가 있기 때문 아닌가 보는데요.
“박정희 대통령 돌아가시고 내가 무슨 생각했는지 알아?
박 대통령의 구국의 기초가 된 것은 유신이었어.
유신체제를 만들어서 비난을 하건 말건 밀어붙여서 70년대 중화학공업화 기반까지 만들어놔야겠다, 그러고서 유신을 했어.
박 대통령이 돌아가시고 나서 나는 인제 박 대통령과 더불어 유신체제는 없어졌다,
80년대 대통령은 유신체제를 승계하는 세대가 아니라 민주화하는 세력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지.
그래서 헌법 바꾸자고 했어. 결과적으로 안 됐지. 최규하 전 대통령하고 그 뒤에 있던 신현확 전 총리의 협조가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5·16 당시 박정희 소장의 매력, 리더십은 어떤 것이었나요.
“내가 한때 박 대통령을 좌익이 아닌지 의심한 적이 있어요.
6·25전쟁이 나고 나서 그 의심이 풀렸어.
6·25가 났을 때 그가 빨갱이라면 한강을 넘지 않을 것이고, 아니라면 한강을 넘을 거라고 생각했어.
우리가 최후로 한강을 넘었는데, 그때 강 너머가 채소밭이거든, 바지 타고 넘어갔어, 가는 도중에 쭉 그 생각이야.
수원에 도착하니까 거기 계시단 말이야. 야, 거기서 의심이 완전히 풀렸지.
하지만 CIA 서울지부장 실버는 5·16 당시에도 박정희 소장을 빨갱이로 의심했지.”
-혁명을 구상한 장교들은 박정희의 어떤 점에 반했을까요.
“강직, 청렴이야.
정군(整軍)운동이 혁명으로 발전했지만,
그때 장군들 다 썩었다구.
박정희는 웬만큼 생각 있는 장교들의 존경을 받고 있었어. 이분밖에 없다. 그런 생각이 퍼져 있었지.
그땐 내가 (박정희의) 조카를 (아내로) 맞이하기 전이야.”
-청렴과 강직이군요.
“게다가 유능하고,
그건 뭐냐면, 1949년 종합적정(敵情)보고서라는 걸 만든 적이 있는데,
그걸 보고 박정희가 이북이 곧 쳐들어온다고 하는 거야.
공격 준비 1단계가 됐기 때문에 쳐들어올 거다 그러는데 그대로야.
6·25전쟁 때 보니까 박 대통령이 6개월 전에 예상했던 침투경로 그대로 내려왔어.”
대담=전영기 편집국장, 정리=배영대 기자, 사진=변선구 기자 CHUNYG@JOONGANG.CO.KR 에서 일부 펌함
JP "비밀누설, 불길한 출발" … 박정희 "가자, 나를 따르라" … 새벽 4시 한강 건넌 박 소장 "장도영이 나를 쐈어"
[중앙일보] 입력 2015.03.23 01:15 / 수정 2015.03.23 01:31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10> 역사상 가장 긴 하루
30예비사단서 거병 계획 새나가
장도영 "반란군을 체포하라" 명령
한강 인도교서 헌병, 궐기군에 발포
해병 병력, 응사하며 저지선 돌파
난, 광명인쇄소서 혁명공약 준비
경찰관 두 명 다가와 가슴 졸여
창경원 앞 6군단 포병단 트럭 행렬
인쇄소 2층서 보고 "휴~ 이제 됐다"
그날은 JP 인생에서 가장 긴 하루였다. 1961년 5월 16일의 거병은 비밀누설 속에 시작됐다. 출발은 불길했다. 그렇다고 되돌릴 수는 없다. 화살은 활시위를 떠났다. 긴장과 불안, 긴박감과 안도감이 팽팽하게 충돌하면서 시간은 흘러갔다. 그 하루는 역사를 새로 쓰는 날이었다.

5월 15일 밤 11시30분. 우리는 신당동의 박정희 소장 집을 떠났다. 박 소장의 지프 뒤칸엔 한웅진(육군정보학교장) 준장과 내가 동승했다. 장경순(육본 교육처장) 준장의 차가 따라왔다. 목적지는 영등포구 문래동의 6관구 사령부. 혁명 제1지휘소다. 6관구는 수도권 일대를 관할한다. 그 때문에 서울을 장악하려는 혁명 부대를 지휘하기 적격이다. 박 소장이 6관구에 도착해 작전 명령을 내림으로써 5·16 궐기는 시작될 것이었다.
길을 나서는 우리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거사 비밀이 누설됐기 때문이다. 집을 감시하던 방첩대(CIC) 요원들이 차량 두 대로 우리를 미행했다. 박 소장에게 급보가 들어온 건 오후 8시쯤부터였다. “거사 기밀이 샜다” “무장 헌병들이 6관구 사령부를 차단하고 있다. 궐기군 장교들을 포위하려 한다”는 등의 내용이다. 6관구의 김재춘 대령과 6관구 부근에 나가 있는 동지들의 전화는 긴박감과 걱정으로 차 있었다. 박 소장은 옆에 있던 우리에게 “오늘 저녁 일이 탄로 났다는구먼”라고 했다. 다소 놀란 그의 표정은 금방 단호함으로 바뀌었다.
누설의 진원지는 30예비사단이었다. 거사 참여자 사이에 알력이 생겨 이상국 사단장에게 밀고가 들어갔다. 거병 책임자인 이백일(중령) 작전참모는 인근 야산으로 도피했다. 이상국은 이철희(준장) 방첩대장, 장도영(중장) 참모총장에게 “반란이 일어났다”고 보고했다. 장도영은 육본 헌병대에 “6관구의 반란군을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그런 상황 파악 때문에 출발은 지연되고 있었다. 나는 초조했다. 움직여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나의 주요 임무는 혁명공약문의 인쇄와 라디오방송이었다. 내가 입을 열었다. “더 이상 미룰 수 없습니다. 밀어붙이셔야 합니다.”

박 소장은 대청마루 의자에서 전투화를 신은 채 앉아 있었다. 그는 담배를 문 채 30여 분 묵묵히 있다가 일어났다. “가자, 나를 따르라. 가다 죽더라도 올바른 역사가 있다면 평가해줄 것이다”고 했다. 선언 조의 그 말은 우리의 결연함을 더했다. 일부에선 박 소장이 이때 취기가 있었다고 기억한다. 하지만 그날 우리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성스러운 행동을 하는 마음가짐이었다.
우리는 신당동 집을 떠났다. 자정 직전 종로 화신백화점 앞에서 나는 내렸다. 박 소장에게 “내일 새벽에 뵙겠습니다”라고 인사하고 헤어졌다. 안국동에 있는 광명인쇄소로 달려갔다. 이학수 사장은 인쇄소의 문을 걸어 잠근 채 대기하고 있었다. 나는 직원들에게 이렇게 부탁했다. “만약 일이 잘못돼 붙들려 갈 경우 당신들은 내가 총으로 위협해 강제로 일을 시켰다고 진술하시라. 대신 아침 6시까지만 묵비권을 행사해 달라.”
인쇄기가 돌아가는 ‘쩔그럭 ’ 소리가 왜 그렇게 큰지 가슴을 졸였다. 나는 2층으로 올라가 창문을 통해 바깥을 감시했다. 새벽 2시쯤이었다. 경찰관 두 명이 순찰을 돌다가 인쇄소 문 앞에 섰다. ‘수상한데 들어가 볼까’하는 눈치였다. 나는 속으로 ‘이 안으로 들어오면 감금을 하든지 총을 쏠 수밖에 없다. 제발 들어오지 마라’고 간절히 빌었다. 둘은 공장 문에 한동안 귀를 대고 듣더니 “야간작업이겠지”라며 그냥 지나갔다. 그들이 고마웠다.
새벽 3시쯤. 원남동의 창경원 앞길에 40여 대 트럭이 쾅쾅거리며 지나갔다. 헤드라이트의 행렬이 어둠을 대낮처럼 밝혔다. 포천에서 출발한 6군단 포병단이 예정대로 진입한 것이다. 삼각지 육군본부를 진주하기 위해 내려온 혁명군이다. 인쇄소 2층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나도 모르게 “휴~ 이제 됐다”고 했다. 걱정과 긴장감이 잠시 풀렸다.

6군단 포병단은 방첩대의 감시망에 잡히지 않았다. 문재준 포병단장과 홍종철 6군단 작전참모, 신윤창·구자춘 대대장이 1300명 장병을 이끌었다. 포병단은 트럭에 대포를 달았다. 그 부대 출동에는 미군의 의정부 검문소 통과가 가장 큰 문제였다. 사전 작전회의 때 나는 신윤창 중령에게 “절대 미군을 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검문소 미군은 7~8명 정도. 그들이 통과를 거부하면 그냥 몸으로 껴안아 서울까지 데려오라고 얘기했다. 신 중령은 “미군이 발포를 하면 어떻게 하나”고 물었다. 나는 “그래도 응사하지 말라. 우리 쪽 희생자가 나더라도 맨손으로 대응하라”고 했다.
그 얘기를 들은 박 소장은 “잘했다. 우리의 혁명은 무혈이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때 검문소 미군과의 다툼이 없었다. 신 중령에 따르면 미군 위병은 “헤이 헤이, 훈련 잘하라”고 웃으며 교통정리까지 해주었다. 미군은 포사격 훈련을 가는 줄 알고 의심 없이 통과시킨 것이다. 일이 되려면 그렇게 되는 것이다.

나는 전화통을 계속 돌려댔다. 6관구 사령부는 연락두절이었다. 박 소장이 짜놓은 실병력의 주력은 해병 1여단과 공수단(김포)이다. 이들이 한강 인도교를 돌파해 서울 시내로 진입해야 했다. 하지만 기밀 누설로 중대한 차질이 생겼다. 장도영 총장은 진압의 자세를 취했다. 박 소장은 상황을 역전시키려 했다. 신속하게 현장으로 달려갔다. 영등포의 6관구 사령부를 나와 김포 쪽으로 갔다. 새벽 1시쯤 김포의 해병 1여단 1500여 명은 김윤근 준장의 지휘하에 서울로 들어오고 있었다. 김 준장은 박 소장을 만났다. 그리고 노량진쪽에서 한강 인도교로 진입했다. 상황은 험악해졌다. 인도교에서 해병대와 육본 헌병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졌다. 헌병대는 50여 명, 장 총장의 지시로 급파된 저지 병력이다. 헌병대는 GMC 트럭 7대로 바리케이드를 쳤다.
해병대는 그 차량 봉쇄를 뚫었다. 하지만 한강 다리 중간 지점에 헌병대의 새로운 저지선이 있었다. 박 소장은 차에서 내렸다. 헌병대 쪽에서 총알이 날아왔다. 박 소장은 무시한 채 다리 위를 앞장서 걸었다. 그 장면은 지도자의 강력한 의지와 침착한 솔선수범이었다. “나를 따르라”는 박 소장의 결의는 극적으로 실천되고 있었다.
광명인쇄소에 있던 나는 그 일을 알 수 없었다. 초조감이 엄습했다.
새벽 4시25분쯤 수십 발의 총성이 새벽의 고요함을 깼다. 그 총소리는 거꾸로 내게 안도감으로 다가왔다. “혁명이 무산되진 않았구나.” 총소리는 장면 국무총리 체포조에서 나왔다. 체포조는 박종규 소령 주도하에 차지철 대위 등 공수단 중대장 6명으로 구성됐다. 제2공화국 내각책임제의 실권자인 장 총리의 숙소는 반도호텔(현 롯데호텔 자리)에 있었다. 체포조가 급습하기 10분 전에 장 총리는 피신했다. 장 총리는 혜화동의 카르멜 수도원으로 숨었다. 총리 체포조는 작전에 실패했다. 그 화풀이를 하는지 그들은 공중에 대고 총을 쏜 것이었다.
그리고 10분이 지났을까. 인쇄소 앞에 지프가 급정거하는 소리가 났다. 박 소장이 인쇄소에 들어왔다. 그는 흥분하고 있었다.
“장도영이가 헌병을 시켜 나를 쐈어. 내가 목숨 걸린 우리들의 혁명계획서까지 그에게 전부 주었는데. 이럴 수 있나” 하고 분노에 부들부들 떨었다. 나는 “어떻게 된 겁니까” 하고 물었다. 박 소장은 그 직전의 긴박했던 상황을 간략히 말해줬다. “한강 다리를 건너는데 헌병들이 쏜 총알이 막 날아와. 나는 지프에서 내렸지, 그리고 다리를 걸어서 건너갔지. 이쪽에서 응사하니까 잠시 후 헌병대가 싹 사라졌어.”

● 인물 소사전 김재춘(1927~2014)= 육사 5기 출신의 5·16 주체. 거사 때 제1혁명지휘소였던 영등포 6관구 사령부의 참모장(대령)이었다. 비밀누설로 6관구에서 궐기군과 헌병대가 대치할 때 상황을 장악했다. 국가재건최고위원과 3대 중앙정보부장을 지냈다. 8, 9대 국회의원. 5·16 주체 가운데 5기 세력의 대표로 육사 8기 출신을 이끌던 김종필(JP)과 정적(政敵) 관계였다. 최고회의와 군부 내 반JP세력을 규합해 김종필의 1차 외유를 압박했다. 정보부장 땐 JP의 비리를 캐려 했다
정리=전영기·한애란 기자 chun.younggi@joongang.co.kr
'혁명' 기정사실 만든 궐기방송 … 최초의 질서가 탄생했다 … 장도영 "출동부대 돌아가라" … JP "허튼짓 하면 엎으려 했다"
[중앙일보] 입력 2015.03.25 01:50 / 수정 2015.03.25 01:57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11> 5·16 D데이의 24시간
새벽 5시 KBS 박종세 아나운서
"은인자중하던 군부는 …" 첫 방송
박정희, 육본에서 장도영과 담판
"조국에 반역이 되면 자결하겠다"
5월 16일, 긴박한 상황의 연속이다.
그 격한 흐름을 주도해야 한다.
수단은 선제 공세와 신속한 기정사실화다.
상대의 허(虛)를 찌르고 심리전도 펼쳐야 한다.
궐기군의 세력은 작다.
전체 60만 대군 중 3600명에 불과하다.
기습적인 상황 장악으로 장애를 돌파해야 한다.
그 기세로 거사를 성공시킬 수 있다.
16일 새벽 4시15분 김윤근 준장과 오정근 중령의 해병1여단은 한강다리를 돌파했다. 선두 해병대 대열의 박정희 소장은 안국동 광명인쇄소로 왔다. 그는 총격전의 흥분과 분노에 휩싸여 있었다. 그에게 혁명 취지문을 건넸다. 막 인쇄된 활자의 냄새가 풍겼다. 박 소장은 차분하게 자세를 바꿨다. 혁명의 격문을 한 자 한 자 점검했다. 그리고 박 소장과 나는 남산의 KBS 라디오방송국으로 향했다. TV가 없던 시절이다. 방송국은 공수단이 점령하고 있었다.
숙직 직원 대부분이 도망쳤다. 우리는 “박종세 아나운서(당시 26세), 어디 있느냐”고 소리쳤다. 그는 조그만 외신(外信) 텔레타이프실의 책상 구석에 숨어 있었다.
그는 와들와들 떨었다. “공비(共匪)가 나타난 줄 알고…”라며 잔뜩 겁을 먹고 있었다. 나는 그의 어깨를 두드려 안심시켰다. 6개 공약이 들어 있는 혁명취지문을 주었다. 박종세는 ‘혁명’이라는 글자에 흠칫 놀랐다. 나는 그에게 방송요령을 주문했다. “‘오늘은 국민 여러분께 중대한 발표를 해드리겠습니다’란 말을 먼저 한 뒤 차분하게 읽어 달라”고 했다. 도망쳤던 기술요원들도 공수부대원들이 찾아 데려왔다.

박 소장과 우리 일행은 스튜디오 바깥 유리창을 통해 박종세의 방송을 지켜봤다. 애국가가 울렸다. 이어 “친애하는 애국 동포 여러분, 은인자중하던 군부는 드디어 금조(今朝) 미명(微明)을 기해 일제히 행동을 개시하여 국가의 행정·입법·사법의 3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하였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처음에 떨렸다가 차츰 안정감을 찾고 있었다. 그 방송은 역사 전환의 거대한 굉음(轟音)이었다. 혁명은 이제 국민 속으로 파고들었다. 방송은 구시대의 낡은 질서에 치명타를 가했다. 기정사실화의 효과다. 우리의 혁명은 분수령을 넘고 있었다.
방송은 작전 신호였다. 부산·대구·광주 등 전국 주요 도시의 여러 부대도 궐기했다. 지역 행정기관을 접수하기 시작했다.
방송이 끝났다. 희미하게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박정희 소장은 군부의 심장부로 향했다. 우리 일행은 삼각지 육군본부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참모총장 장도영 중장은 상황을 점검하고 있었다.
박 소장은 이날 새벽에 장 총장에게 편지를 보냈다. 혁명을 진두지휘해 달라는 협조 요청이었다. 편지는 “참모총장 각하의 사전승인을 얻지 않고 독단 거사하게 된 것을 죄송하게 생각하옵니다. ··· 만약에 우리들이 택한 방법이 조국과 겨레에 반역(叛逆)이 되는 결과가 된다면… 전원 자결하기를 맹세합니다”로 돼 있다. 박 소장은 자신의 결연과 비장함이 전달되길 바랐을 것이다.
육본광장은 6군단 포병대 1300여 명이 점령하고 있었다. 6군단 포병대는 혁명부대 최초로 서울로 진입한 부대다. 해병대 1개 소대가 본부건물을 포위했다. 그 순간 긴장감이 더욱 고조됐다.
박 소장은 2층 총장실로 들어갔다. 장 총장과 대좌(對坐)했다. “혁명군 선두에 서달라”는 박 소장의 요청을 장도영은 거절했다.

이어 오전 8시 담판이 벌어졌다. 장 총장의 군부지휘부와 박 소장의 혁명군 주체들 사이에 합동회의가 있었다. 장 총장은 이성호 해군·김신 공군 참모총장, 김성은 해병대사령관을 불러놨다. 주변엔 군사혁명 참여 장교들이 몰려들었다. 대부분 그들의 눈에 핏발이 서 있었다.
▶박 소장=“우리는 죽음을 각오했습니다. 출동할 때 유서를 쓰고 손톱까지 깎아 놓았습니다. 혁명에 동참해 주십시오.”
▶장 총장=“이번 행동으로 장면 정부에 충분한 경고를 주었으니 출동부대들은 원위치로 돌아가야 한다.”
장도영의 주장은 우리 측 장교들을 격앙시켰다. 흥분한 일부 장교는 권총을 빼들었다. “장 총장을 체포하라”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새로운 고빗길이다. 궐기의 의지가 무뎌지면 안 된다. 그들이 허튼 수작을 하면 뒤집을 수밖에 없다.
장도영의 군 수뇌부를 계속 압박해야 했다. 박 소장은 계엄령 선포를 요구했다. 장 총장은 “내 소관이 아니다. 윤보선 대통령과의 면담이 필요하다”고 버텼다.
나는 그 상황을 지켜보다가 슬그머니 빠져나왔다. 다시 일을 저질러야 했다.
새로운 선제적인 공세다. 남산 KBS에 다시 갔다. 이번엔 강찬선 아나운서가 눈에 띄었다.
나는 품속에서 포고문을 꺼냈다. “방송해달라”고 했다. 그 문서는 내가 미리 작성해 둔 것이다.

오전 9시. 강 아나운서는 포고문 1호부터 4호를 읽어 내려갔다.
“군사혁명위원회는 공공의 안녕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단기 4294년 5월 16일 오전 9시를 기해 대한민국 전역에 비상계엄을 실시하며 일체의 옥내외 집회는 금지한다….”(1호) “군사혁명위원회는 5월 16일 오전 7시 장면 정부로부터 모든 정권을 인수했다. 민의원·참의원 및 지방의회를 16일 오후 8시를 기해 해산한다.…”(4호)
포고문의 명의는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겸 계엄사령관 장도영 중장’이었다. 장 총장의 허가는 없었다.
그 일방적인 발표는 상황을 기정사실화하기 위한 부득이한 조치였다.
라디오와 신문으로 세상을 접하는 시대였다. 국민들은 장 총장이 혁명을 주도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혁명군이 이미 세상을 평정했다는 인식을 심어줬다. 방송 포고문의 위력이다.
육본의 숨막히던 대치상태는 풀려갔다. 장 총장 측 장군들의 기세는 꺾이고 있었다. 낭패와 주저의 심리가 그들 마음속에 스며들어갔다. 군부에 새로운 질서가 탄생되기 시작했다. 최초의 신질서다.
오전 10시30분 박 소장과 장 총장은 청와대에 들어갔다. 윤보선 대통령은 “나는 계엄을 추인할 수 없다”고 답변했다. 대통령 입에서 무심코 새어나온 말이 있다. “올 것이 왔구먼.” 그 말은 그 시대의 모든 상황을 압축한다. 그 무렵 민심, 군심 대다수가 변화를 요구하고 있었다. 민주당 정부의 무능과 혼선, 사회의 무질서와 혼란에 국민 8할이 지쳐 있었다는 게 내 판단이다.
오전 11시 주한 미군사령관 매그루더 대장은 “우리는 합법적인 정부를 지지한다. 군사 쿠데타는 무효”라는 성명을 냈다. 거사에 중대한 장애물이 등장했다.
나는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주한 미군 사령관은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갖고 있다. 그런 점에 매그루더로서 성명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 성명이 상황을 변경할 수는 없다. 그 시점에서 우리는 너무 많은 걸음을 내디뎠다.
매그루더는 대통령을 찾아갔다. 윤보선은 진압군 동원에 반대했다. 유혈사태를 피해야 한다는 명분이었다. 장 총장은 흐름에 순응했다. 계엄사령관직을 받아들였다. 오후 4시30분이다. 밤 10시30분 윤 대통령은 대(對)국민방송을 했다. 장면 총리와 장관들에게 빠른 사태수습을 촉구했다. 실권자인 장면 총리는 피신처 수녀원에서 여전히 연락을 끊고 있었다. 디데이의 24시간은 이렇게 종료됐다. 승부는 우리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내 기억에 빼놓을 수 없는 건 완장 제작이다.
그날 저녁 나는 명동 상패가게로 갔다. 하얀 천에 검은 글씨로 ‘혁명군’이라고 쓰게 했다. 밤을 새워서라도 4500장을 제작해달라고 부탁했다. 이튿날 아침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거사병력에게 완장을 나눠줬다. 왼쪽 팔뚝에 완장을 차고는 모두들 좋아했다. 혁명군에게 자부심과 책임감을 넣어주려 한 것이다. 궐기군 사이에 동지애도 솟아났다. 대군에 둘러싸인 소수의 혁명군에겐 이런 심리적 도구가 필요했다.
하지만 혁명군 완장은 사흘 뒤 회수했다.
그때부턴 군부의 통합이 중요했고 다른 부대에 위화감을 주지 않아야 했다.
정리=전영기 기자, 유광종 작가 chun.youngg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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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장의 사전 준비는 어려웠을까?
만약 진압군이 나오면
완장 차는 것이 좋을까?
혁명 시작되고 나서 바로 차는 것도 방법이네
진압군과의 식별, 혁명군의 사기 진작
15.3.26 모디스티 첨식함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12> 18일, 5·16의 완결
20개 전투사단 휘하에 둔 이한림
진압군 동원설에 궐기군 불안감
1군 조창대 중령, 체포팀 만들어
새벽 관사 급습해 덕수궁 압송
화려한 제복 생도 행진 강렬한 인상
오후에는 장면 내각 총사퇴 선언
잠 한숨 못자고 사흘 만에 집으로
통금 지키려는 시민 모습에 감동
역사는 의지로 쓰여진다. 5·16의 성패는 인간 의지로 갈렸다. 거사의 설계자인 김종필(JP)은 “성공 요체는 의지”라는 확신을 전파했다. 전격적으로 실천했다. 이한림 1군사령관의 체포는 그가 주도했다. 장면 정권 쪽에도 반격의 기회와 역전의 공간이 있었다. 저지의 수단도 있었다. 하지만 반대 세력의 진압 의지는 허약했다. 그들은 분산된 채 파산했다.
5·16 당일은 격랑(激浪)의 24시였다. 우리는 목표를 점령했고 상황을 잡아챘다. 박정희 장군이 이끈 궐기군은 한강 다리를 돌파했다. 수도 서울, 군의 심장부를 장악했다. 새벽 KBS 라디오 방송은 군사 혁명을 역사의 운명으로 진입시켰다.
하지만 거사는 미완성이었다. 그 물결 속에 불길한 기운이 퍼지고 있었다. 주한미군 사령관 매그루더의 비판적인 자세, 육군 참모총장 장도영의 모호한 처신, 1군사령관(중장) 이한림의 거부 언동은 주요한 장애물로 등장했다.
한국군 작전 지휘는 주한미군 매그루더(대장)의 권한이었다. 매그루더는 궐기군 출동을 작전지휘권의 이탈과 훼손으로 규정했다. 그는 저지와 진압 작전을 구상했다. 윤보선 대통령은 진압군 동원에 반대했다. 내각제의 총리는 실질적인 군 통수(統帥)권을 갖고 있었다. 장면 총리는 피신 상태였다. 그것은 우리에게 유리한 여건으로 작용했다.
나는 “의지가 핵심이고 병력 숫자는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을 가다듬었다. 하지만 이한림의 1군 존재는 우리 혁명 세력을 긴장하게 했다. 다음 날인 17일 ‘이한림 야전군’의 반격설이 퍼졌다. 이한림(40세)은 우리의 거병을 쿠데타로 규정했다. 1군(당시는 3군이 없었음)은 대규모 야전부대로 구성됐다. 5개 군단, 20개 전투사단을 보유했다. 우리 병력은 3600명, 1개 사단도 못 된다. 1군의 1개 군단이 진압군으로 나선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육군본부 혁명지휘소에 초조와 불안감이 감돌기도 했다.

장도영 참모총장의 어정쩡한 태도는 계속됐다. 그는 궐기 취지에 동참했다. 군사혁명위 의장에도 올랐다. 하지만 여전히 상황 추이와 미군의 눈치를 봤다. 그 때문에 육본 장군들의 과반수가 관망적인 자세를 취했다. 혁명 대열은 아직 일사불란하지 못했다. 우리는 신속하게 결론을 내리고 실행에 옮겼다. 이한림 장군을 현지 체포하기로 했다. 상황 주도권을 확산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 세력에 반전의 기회가 주어지는 걸 막아야 했다.
박정희·이한림 장군은 젊은 시절 우정과 경쟁의 사이였다.
둘은 만주군관학교(2기)→일본 육사(57기, 편입) 동기다.
네 살 어린 이 장군은 먼저 한국군 장교로 임관(군사영어학교)했다.
이 때문에 계급 차이가 있다.
만주군관학교 졸업 성적은 박 소장이 1등, 이 장군은 2등이다.
졸업 성적 우수자에겐 일본 육사 3학년 편입 특혜가 있었다. 둘은 일본 육사에 들어갔다.
졸업 때 두 사람의 성적은 바뀌었다. 1등이 이 장군, 3등이 박 장군이었다.
그때 이 장군은 박 소장에게 “야, 꼬맹아. 내가 너한테 늘 질 줄 알아. 어때 봐. 이게 내 실력이야”라고 자랑했다.
박 소장은 그런 이야기를 내게 들려줬다. 그러면서 박 장군은 “나는 그냥 빙그레 웃으면서 (이한림 얘기를) 무시했다”고 회상했다.
거사 준비 단계 때다. 박 소장은 이한림 사령관한테 동참을 제안했다.
이 장군은 피식 웃었다. ‘네가 무슨 혁명을 하겠느냐’는 식으로 일축했다.
그런 이 사령관은 우리의 감시 대상 1순위였다. 나는 ‘이한림 대책’을 모색했다.
1군 사령부 내부에 믿을 만한 동지를 찾았다. 작전처에 육사 8기 동기 조창대 중령이 있었다. 그
를 거사 대열에 끌어들였다. 같은 8기 동기생인 박용기·이종근·심이섭·엄용길 중령(8기)도 참여했다.
그 덕분에 이 사령관의 동향 정보는 나에게 즉각 들어왔다. 나는 1군의 8기 동기생들과 수시로 교신했다. 이 사령관은 “내 승인 없이 군사 혁명은 절대로 성공 못한다”고 호언했다. 그리고 “동원한 부대를 전원 복귀시켜야 한다”고 요구했다. 17일 오후엔 매그루더 사령관이 사령부(원주)로 날아갔다. 매그루더는 그에게 진압부대 출동을 종용했다. 이 사령관의 진압 의지는 주춤했다. 그의 지휘 부대 내부 균열 때문이다. 문재준 6군단 포병단장은 이미 혁명군에 가담했다. 이어 채명신 5사단장, 박춘식 12사단장이 그에게 반기를 들었다.
하지만 ‘이한림의 존재’는 골치 아팠다. “진압하겠다. 나의 승인 없인 안 된다”는 그의 언행은 혁명군으로선 용서할 수 없었다. 그냥 놔두면 그가 무슨 일을 할지 모른다. 결행은 불가피했다. 나는 이 사령관을 체포하라고 지시했다. 그때는 많은 말이 필요 없었다. 모두 같은 목적에 목숨을 내놓았다. 호흡이 탁탁 맞았다.

18일 새벽 조창대 팀은 이 사령관의 관사를 급습했다. 관사 주변을 지키는 헌병들도 길을 열었다. 헌병부장이 조창대 팀에 포섭됐기 때문이다. 라디오 방송을 통한 ‘혁명 기정사실화’의 효과였다. 대다수 1군 장교들의 마음은 흔들리고 있었다. 이 사령관은 권총을 빼어 든 조창대 체포 조에 저항하지 않았다. 그것으로 혁명은 성공의 길을 달리고 있었다.
이 사령관은 18일 정오께 서울 덕수궁으로 압송됐다. 그곳에 주둔하던 공수특전단이 그를 감금했다. 누군가 이 사령관을 어떻게 처리할는지 물었다. 나는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조금 있다가 ‘혁명, 계속 반대하느냐’고 물어봐라. 그러고 반대 않겠다면 함께 일하게 만드는 게 좋다”고 답해줬다. 박 소장도 “그거 잘했어. 그 친구 머리가 좋아. 성격은 좀 뭐하지만…”이라고 말했다. 이 사령관이 공수단한테 총살 위협과 모욕을 당했다는 얘기도 있는 모양이다. 내가 아는 한 그런 일은 없었다.
18일은 거사 완결의 하루였다. 이 장군이 압송당하던 그 시간. 젊은 생도들이 군사혁명 무대에 등장했다. 육사 생도들의 혁명 지지 시가행진이다. 1~4학년 생도(18~21기)와 육사 장교단 전원이 참여했다. 800여 명 생도는 흰색 바지와 X자 멜빵, 화려한 예복 차림이었다. 그들은 서울 동대문에서 시청 앞까지 행진했다. 시민들도 거리로 몰려나왔다. 젊음의 패기, 원색의 복장은 시민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었다. 그 광경은 혁명의 안착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시가행진의 반환점인 시청 앞 광장에서 생도 대표는 “조국아, 민족아, 상기하라. 부패와 무능에 감연히 항거하여 일어난 국민의 군대는 새로운 조국 건설의 역군이 될 것임을”이라고 외쳤다.
군사혁명위 장도영 의장은 상기된 표정이었다. 그는 격려사에서 “국가 백년대계를 위해 부패·무능의 상징인 기성 정치인을 배제하고 국가 재건의 새로운 역사를 만들게 되었다”고 말했다.
박 소장은 마이크를 잡지 않았다. 장 총장의 대중연설은 우리의 궐기 대의(大義)와 같았다. 그전의 모호했던 모습과 사뭇 달랐다. 육군본부 장군들의 흐릿한 자세도 사라졌다. 육사 생도에 이어 이튿날 공군 사관생도들은 서울에서, 해군 생도들은 부산에서 각각 혁명을 지지하는 시가행진을 벌였다. 사관생도의 시위가 군내 기회주의적 분위기를 몰아내는 역할을 했다.
이어 낮 12시30분 피신했던 장면 총리가 중앙청에 나왔다. 5·16 새벽 0시부터 사흘, 긴박과 불안이 겹쳤던 60시간의 상황이 막을 내리는 순간이다. 장 총리는 내각 총사퇴를 선언했다. 군사혁명위가 선포한 비상계엄령과 각종 포고문을 추인했다. 민주당 정권은 9개월 만에 구질서가 되었다.
나는 사흘간 눈 한 번 제대로 붙이지 못했다. 그날은 집으로 갔다. 늦은 저녁 귀가길, 용산 전차역 광경이 내 눈에 들어왔다. 시민들은 전차에 서로 올라타려고 했다. 계엄령의 통행금지 시간은 밤 10시부터. 서둘러 귀가하는 모습이었다. 국민들은 새로운 질서에 순응, 협조하고 있었다. 그 장면은 내게 잔잔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정리=전영기 기자, 유광종 작가 chun.youngg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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