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로서는 처음 보는 미군의 155㎜ 야포(榴彈砲)였다. 그 전까지 우리가 운용했던 대포로는 105㎜가 최대의 크기였다. 우리 눈앞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155㎜는 정말 우람했다. 국군 1사단 장병 수십 명이 그 주위를 에워싼 채 정신없이 155㎜의 이쪽저쪽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걸음을 옮겨 화이트 대령을 찾았다.
나는 화이트 대령을 보자마자 “당신들이 가지고 있는 지도를 내게 조금이라도 줄 수 있는가, 지금 지도는 어느 정도 가지고 있는가”라고 물었다. 화이트 대령은 느닷없는 내 요구에도 “지도는 충분하다. 필요하면 주겠다”고 시원하게 대답했다.
그들이 가지고 온 지도는 축적 5만분의 1 지도였다. 나는 그 지도를 들여다보면서 눈이 어질어질했다. 지도는 아주 다른 전쟁의 가능성을 설명해주고 있었다. 그곳에는 작전지역 일대의 산과 하천, 낮은 구릉과 작은 실개천이 모두 그려져 있었다.
숫자로 말하는 전쟁
전쟁이 벌어지고 나서 화령장에 도달하기까지 국군 1사단이 사용했던 지도는 학교 교실에 걸려 있던 전도(全圖)가 다였다. 작전은 그 전도를 보면서 어림잡아 어느 곳을 지정하면 그곳으로 이동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니 작전이란 게 주먹구구식으로 펼쳐지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축적 5만분의 1 지도는 그와 양상이 전혀 달라지는 전쟁을 예시하고 있었다. 아울러 미군의 지도에는 상세한 좌표(座標)가 종으로 횡으로 그어져 있었다. 5만분의 1 축적이라 그 좌표는 아주 정밀했다. 그 지도를 사용하면 전쟁의 여러 상황을 숫자로 설명할 수 있었다. 적이 있는 곳, 우리가 머무는 곳의 정확한 위치도 수치로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155㎜도 대단하기는 대단했다. 105㎜로는 흉내조차 낼 수 없는 화력을 뿜어내는 거대하고 웅장한 야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관심은 정작 그 야포의 화력을 상대의 머리 위에 정확하게 투사(投射)할 수 있는 5만분의 1 지도에 더 쏠렸다. 나는 그때까지 지켜본 미군이 사실 걱정스러웠다.
오산에서 마주친 스미스 대대, 그 뒤를 이어 대전에서 분전했던 24사단이 모두 북한군의 T-34 전차와 압도적인 기동에 의해 맥없이 물러나버렸기 때문이었다. 화령장에서 다시 미군과 만날 때 나는 그 우려를 불식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기대했다. 그런데 화이트 대령의 미 24연대는 마침내 포병화력의 주력인 155㎜를 끌고 우리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 점이 우선 든든했다. 그러나 나는 그를 운용해서 정확하게 적을 타격할 수 있는 다른 무엇인가를 갈망했다. 새로 온 미군은 그런 점에서 믿음직했다. 적을 압도할 수 있는 155㎜ 야포에, 그로부터 나오는 엄청난 화력을 적진에 정확하게 투사할 수 있는 5만분의 1 지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그 지도가 절실했다. 앞으로는 미군과의 연합작전이 불가피했다. 그들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서는 당장 그 지도가 필요했고, 우리 스스로 움직이며 적과 접전을 펼치면서 승리를 이루기 위해서도 그런 상세한 지도가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화이트 대령으로부터 경북 일원을 그린 상세한 지도를 얻었고, 그는 그에 덧붙여 상황판을 그릴 수 있는 그리스 펜과 아스테이지(표지물) 등을 듬뿍 안겨줬다.
5만분의 1 지도는 원래 일본이 한반도를 강점했을 때 우리 땅의 모든 구석을 실측(實測)해 만들었다. 그로써 만들어진 동판(銅版)은 일본 패망 뒤 점령군으로 일본에 진주한 도쿄의 맥아더사령부가 보관했었다. 한국 정부는 그 원판을 인쇄해 지도를 확보했고, 전쟁 전 각 부대에 그 지도를 보급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부대가 전쟁이 발발하자 지도를 챙기지 못한 채 밀리고 말았다.
나는 화이트 대령을 보자마자 “당신들이 가지고 있는 지도를 내게 조금이라도 줄 수 있는가, 지금 지도는 어느 정도 가지고 있는가”라고 물었다. 화이트 대령은 느닷없는 내 요구에도 “지도는 충분하다. 필요하면 주겠다”고 시원하게 대답했다.
그들이 가지고 온 지도는 축적 5만분의 1 지도였다. 나는 그 지도를 들여다보면서 눈이 어질어질했다. 지도는 아주 다른 전쟁의 가능성을 설명해주고 있었다. 그곳에는 작전지역 일대의 산과 하천, 낮은 구릉과 작은 실개천이 모두 그려져 있었다.
숫자로 말하는 전쟁
전쟁이 벌어지고 나서 화령장에 도달하기까지 국군 1사단이 사용했던 지도는 학교 교실에 걸려 있던 전도(全圖)가 다였다. 작전은 그 전도를 보면서 어림잡아 어느 곳을 지정하면 그곳으로 이동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니 작전이란 게 주먹구구식으로 펼쳐지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축적 5만분의 1 지도는 그와 양상이 전혀 달라지는 전쟁을 예시하고 있었다. 아울러 미군의 지도에는 상세한 좌표(座標)가 종으로 횡으로 그어져 있었다. 5만분의 1 축적이라 그 좌표는 아주 정밀했다. 그 지도를 사용하면 전쟁의 여러 상황을 숫자로 설명할 수 있었다. 적이 있는 곳, 우리가 머무는 곳의 정확한 위치도 수치로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155㎜도 대단하기는 대단했다. 105㎜로는 흉내조차 낼 수 없는 화력을 뿜어내는 거대하고 웅장한 야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관심은 정작 그 야포의 화력을 상대의 머리 위에 정확하게 투사(投射)할 수 있는 5만분의 1 지도에 더 쏠렸다. 나는 그때까지 지켜본 미군이 사실 걱정스러웠다.
오산에서 마주친 스미스 대대, 그 뒤를 이어 대전에서 분전했던 24사단이 모두 북한군의 T-34 전차와 압도적인 기동에 의해 맥없이 물러나버렸기 때문이었다. 화령장에서 다시 미군과 만날 때 나는 그 우려를 불식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기대했다. 그런데 화이트 대령의 미 24연대는 마침내 포병화력의 주력인 155㎜를 끌고 우리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 점이 우선 든든했다. 그러나 나는 그를 운용해서 정확하게 적을 타격할 수 있는 다른 무엇인가를 갈망했다. 새로 온 미군은 그런 점에서 믿음직했다. 적을 압도할 수 있는 155㎜ 야포에, 그로부터 나오는 엄청난 화력을 적진에 정확하게 투사할 수 있는 5만분의 1 지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그 지도가 절실했다. 앞으로는 미군과의 연합작전이 불가피했다. 그들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서는 당장 그 지도가 필요했고, 우리 스스로 움직이며 적과 접전을 펼치면서 승리를 이루기 위해서도 그런 상세한 지도가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화이트 대령으로부터 경북 일원을 그린 상세한 지도를 얻었고, 그는 그에 덧붙여 상황판을 그릴 수 있는 그리스 펜과 아스테이지(표지물) 등을 듬뿍 안겨줬다.
5만분의 1 지도는 원래 일본이 한반도를 강점했을 때 우리 땅의 모든 구석을 실측(實測)해 만들었다. 그로써 만들어진 동판(銅版)은 일본 패망 뒤 점령군으로 일본에 진주한 도쿄의 맥아더사령부가 보관했었다. 한국 정부는 그 원판을 인쇄해 지도를 확보했고, 전쟁 전 각 부대에 그 지도를 보급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부대가 전쟁이 발발하자 지도를 챙기지 못한 채 밀리고 말았다.
일본의 원판으로 만든 지도는 미군이 새로 만든 지도와 달랐다. 미군은 컬러를 입혔고, 일본이 만든 지도에 없던 좌표를 그렸다. 입체감에서 전혀 다른 지도였던 셈이다. 그 좌표로 인해 탄착지점을 설정하는 일이 훨씬 정교해졌다. ‘감’에 의존하는 포격에서
‘수치’로 중심이 옮겨지는 포격이었다.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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