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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병용'과 장기적 대책 / 형세를 살펴 물러나 기회를 살피다 / [외교가 육고(陸賈)] -작성자 염생이에서 펌함

modest-i 2021. 8. 22. 14:00

문무병용(文武幷用), 강온겸시(强溫兼施)의 외교가 육고(陸賈)

 염생이  2021. 1. 24.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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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고는 초(楚) 출신의 서한 초기 대신이자 유방의 모사로 역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언변에 능해 늘 제후들에게 사신으로 파견되어 크게 활약했다.

강·온책을 동시에 구사하여 위타(尉佗)를 복속시키다

기원전 202년, 유방이 한 왕조를 건립했다. 위타(尉佗, 본래 성은 조(趙), '위'는 관직 이름이다)는 진정(眞定, 지금의 하북성 정정현) 출신으로 진나라 때 용천현(龍川縣, 지금의 광동성 용천현)의 현령을 지냈다가 그뒤 남해군위를 지냈기 때문에 '위타'라 불렸다. 그는 항우의 초와 유방의 한이 천하의 패권을 다툴 때 계림과 상군을 병합하여 남월왕으로 자립했다. 남월(南越)은 고대 남방에 살았던 월인(越人)의 한 갈래로 남월(南粤)이라고도 불렸다. 주로 지금의 광동·광서 그리고 호남성 남부에 흩어져 살았다.

유방은 중원이 여러 해 동안 전란에 시달려 백성들이 많은 고통을 받은 사실을 깊이 생각하여 남월에 대해 강경책을 쓸 수 없었다. 기원전 196년, 유방은 육고에게 봉인을 주어 남월로 보내 위타를 정식으로 왕에 봉하게 했다.

육고는 위타를 만났다. 하지만 위타는 육고를 영접하기는커녕 방망이 모양의 상투를 틀고 두 다리를 쩍 벌리고 앉은 채 육고를 접견했다. 유방의 책봉 따위에는 애당초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위타는 유방에게 신하로 복종하고 싶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남방에서 한에 맞서 위세를 과시하고 싶었다.

위타의 오만방자한 모습을 본 육고는 다음과 같이 점잖게 그러면서도 엄중하게 경고했다.

"귀하는 중국 사람으로 조상의 무덤과 친척·형제가 모두 진정이란 곳에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지금 보잘것없는 이 작은 나라를 믿고 황상에 맞서려 하니 장차 큰 화가 닥칠 것입니다. 지난날 진나라는 나라를 잘못 다스려 제후와 호걸들이 들고일어났고, 우리 한왕께서 맨 먼저 함곡관에 들어와 함양을 차지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항우가 약속을 저버리고 자신이 서초의 패왕 자리에 올랐고 제후들도 모두 그에게 복속하니 그 기세가 대단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한왕께서 파·촉에서 일어나 천하 백성을 다스리고 여러 제후를 정복하여 마침내 항우를 물리쳤습니다. 5년 만에 천하가 평정되었으니, 이는 사람의 힘이 아니라 하늘이 일으켜주신 것입니다.

천자께서는 귀하가 남월왕이 된 뒤 천하를 돕기는커녕 오히려 폭도와 반역자를 감싼다는 소식을 들으셨습니다. 그러자 한의 장군과 재상들이 군대를 일으켜 귀하를 죽여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으나 천자께서는 다시 백성들을 힘들게 하는 것을 불쌍하게 여겨서 잠시 그들을 쉬게 하는 대신 신을 여기로 보내 귀하께 왕의 도장을 내리고 황제의 부절(符節)을 나누어 사신을 왕래하도록 하신 겁니다.

따라서 귀하는 교외로 나와 사신을 맞이하고 북쪽을 향해 신하됨을 아뢰어야 마땅한데 안정되지도 못한 신생 남월국의 뭘 믿고 이처럼 강경하게 나오십니까? 한에서 이 사실을 안다면 귀하의 선조들 무덤을 모조리 파헤쳐 불 지르고 종족을 모두 없애려 할 것이며, 부장 한 사람에게 10만 대군을 이끌고 남월을 공격하게 할 것이 뻔합니다. 그렇게 되면 월나라 사람들이 귀하를 죽여서 한에 항복할 것이니, 이 정도야 손바닥 뒤집듯 쉬운 일입니다."

육고의 이 말에 위타는 깜짝 놀라며 벌떡 일어나 자세를 바르게 한 다음 육고에게 "오랑캐 땅에 오래 살다보니 실례가 많았소이다"라고 말하고는 "나를 소하·조참·한신에 비교하면 누가 더 낫습니까?"라고 물었다. 육고는 "귀하가 조금 더 나은 것 같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에 위타는 "그럼 황제와 비교해서는 어떻소이까?"라며 당돌한 질문을 던졌다. 이에 육고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우리 황제께서는 풍·패 지역에서 일어나시어 포악한 진을 토벌하고 강력한 초를 멸망시킴으로써 천하를 위하여 해로움을 제거했습니다. 이는 오제와 삼왕의 대업을 계승하여 중국을 통일하는 대업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중국의 인구는 헤아릴 수 없이 많고, 사방 만리의 기름진 땅에 살고 있습니다. 사람도 많고 수레도 많으며 모든 물산이 풍부하며 정치는 황실 일가에 의해 통일되었습니다. 이런 일은 천지가 개벽한 이래로 전례가 없었습니다.

반면 귀하의 나라는 인구 수십만에 그나마 모두 오랑캐에 지나지 않습니다. 땅은 험한 산과 바다 사이에 끼어 있어 우리 한나라의 군 하나에 불과한데 어찌 한나라와 비교하려 하십니까?"

육고의 대답에 위타는 크게 만족하여 그를 몇 달이나 머물게 하면서 함께 술 마시고 즐겼다. 그는 육고에게 자신과 더불어 대화를 나눌 사람이 없었는데 육고가 와서 이런저런 소식을 듣게 되어 매우 기쁘다면서 천 금과 그에 상응하는 보물을 내려주었다. 육고는 위타를 남월왕에 임명하고, 한의 신하가 되겠다는 맹서를 하게 했다. 육고가 돌아와 고조 유방에게 보고하자 유방은 매우 기뻐하며 황제 곁에서 여러 일을 논의하는 태중대부에 임명했다.

육고는 서한 초기 대외관계를 안정시키는 데 적지 않은 공을 세운 외교가였다. 지도는 서한 시대의 형세도다.

'문무병용'과 장기적 대책

육고는 학문이 상당했던 인물로 황제에게 올릴 말이 있으면 늘 유가의 경전인 『시경(詩經)』이나 『상서(尙書)』 등을 인용하곤 했다. 무식한 고조 유방은 이런 육고의 말이 잔소리로 들렸던지 육고에게 욕을 하면서 "나는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다. 『시경』이니 『상서』가 무슨 쓸모가 있단 말인가?"라며 고함을 질렀다. 이에 육고는 침착하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폐하께서는 말 위에서 천하를 얻으셨는지는 몰라도 말 위에서 천하를 다스릴 수는 없습니다. 그 옛날 은의 탕왕과 주의 무왕은 천자를 내쫓고 천하를 얻었지만 민심에 따라 나라를 지키셨습니다.

이렇게 문무를 함께 사용하는 것이 국가를 영원히 보존하는 방법입니다. 옛날 오왕 부차와 진의 지백은 무력을 지나치게 사용하다 나라를 잃었으며, 진은 가혹한 형벌만 믿고 변화하지 못하다가 역시 멸망했습니다. 당시 진이 천하를 통일한 뒤 어진 정치를 펼치고 옛 성인을 본받았다면 지금 폐하께서 어떻게 천하를 차지할 수 있었겠습니까?"

고조 유방은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부끄러운 기색을 보이며 육고에게 "그렇다면 시험삼아 진이 천하를 잃은 까닭과 내가 천하를 얻은 까닭이 무엇인지, 그리고 옛날 성공하거나 실패한 나라의 역사적 사실을 기록해보시오"라고 명령했다.

이에 육고는 국가 존망의 징조들에 대해 약술하여 모두 12편의 『신어(新語)』라는 책을 지었다. 매 편을 완성하여 고조 유방에게 올릴 때마다 고조는 칭찬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좌우 사람들은 모두 만세를 부르며 환호성을 울렸다. 그의 저술은 지금까지도 그 가치를 잃지 않고 있다.

형세를 살펴 물러나 기회를 살피다

봉건사회에서 황제의 권력은 지고무상하다. 따라서 대신의 생사는 모두 제왕의 좋고 나쁜 기분에 따라 언제든 뒤바뀔 수 있다. 유방이 죽은 뒤 아들 유영(劉盈, 재위 기원전 194∼188년)이 즉위하니 이가 효혜제다. 하지만 조정의 대권은 여후(呂后, 유방의 아내인 여치呂雉)에게로 넘어갔다. 그녀는 자신의 권력을 다지기 위해 인척인 여씨들을 왕으로 삼았다. 유방을 오랫동안 보좌했던 육고는 여후가 얼마나 독한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이들을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한 육고는 병을 핑계로 사직한 다음 고향으로 돌아갔다.

기름진 땅이 있는 고향에서 편안하게 세월을 보낼 생각이었다. 그에게는 다섯 명의 아들이 있었다. 육고는 남월에서 돌아올 때 위타가 준 많은 보물을 다섯 등분하여 아들들에게 나눠주면서 집과 땅을 사게 했다. 그리고 자신은 늘 네 마리 말이 끄는 편안한 수레를 타고 춤추고 노래하고 연주하는 시종을 10여 명씩 데리고 다녔다. 또 100금이나 나가는 보검을 찬 채 친한 친구집을 찾아다니거나 아들집들을 차례로 돌면서 밥 먹고 술 마셨다. 그는 일찍이 아들들에게 다음과 같이 약속한 적이 있다.

"내 너희들과 약속하마. 내가 너희들 집에 들리면 내가 데려온 사람과 말들에게 술과 먹을 것을 주어라. 실컷 놀고 즐기다 열흘이 지나면 다음 아들집으로 옮기겠다. 그러다 내가 죽는 집에서 내 보검·수레·말 그리고 시종들을 가지도록 해라. 일 년 중 남의 집에 머무는 것을 빼면 대략 두세 번 정도 너희들 집에 들릴 것이다. 자주 보면 싫어할 테니 오래 묵으면서 너희들을 귀찮게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표면적으로 보아 육고는 조정을 떠나 시골에 머무르며 정치를 떠난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조정의 정치에 대해 단 한 순간도 신경을 쓰지 않은 적이 없었다. 여후가 병약한 효혜제를 끼고 유씨 정권을 위협하자 우승상 진평조차 그 부담을 견디기 어려워했고, 이 순간 육고는 기발한 모략을 내서 여후의 음모를 좌절시켰다. 이어 여씨 일족들을 주살하고는 바로 효문제를 옹립하는 데 큰 힘을 썼다. 육고는 한나라 초기 조정에서 명성을 크게 떨친 대표적인 정치가이자 외교가였다.

인물소개 육고(陸賈)
육고는 서한 초기 대외관계를 안정시키는 데 적지 않은 공을 세운 외교가였다. 그는 고조 유방의 식객으로 활약하며 천하를 평정했으며, 말솜씨가 뛰어난 유세객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유방을 가까이에서 보좌하며 늘 제후국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육고는 천하를 재통일하는 과정을 직접 경험하고 이를 바탕으로 성공하거나 실패한 나라들의 역사적 사실들을 탐구하여 국가의 존망에 따른 징후를 기록한 『신어』를 저술하여 한나라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 그는 외교전략가이자 훌륭한 정치 이론가였다.

그가 12편에 이르는 『신어』를 한 편 완성하여 발표할 때마다 황제와 신하들은 모두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출처] 문무병용(文武幷用), 강온겸시(强溫兼施)의 외교가 육고(陸賈)|작성자 염생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