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료는 전국시대 말기
위(魏)나라 대량(지금의 하남성 개봉시) 사람이다.
만년에 진나라로 건너와서
진시황에게 6국 통일을 위한 대책을 건의했다(진시황 10년 무렵).
당시 진나라는 6국을 멸망시킬 준비를 적극적으로 추진했고,
위료는 6국의 합종을 깰 책략을 진시황에게 올려 크게 칭찬을 들었다.
위료는 진시황에게 이렇게 말했다.
"강력한 진나라가 있는 상황에서
제후들은 군현의 우두머리 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제가 걱정하는 것은 각국이 합종연맹을 결성하여
갑자기 진을 기습하는 것입니다.
진(晉)의 지백 순요는 조·위·한 3가에 의해 멸망당했고 자신도 피살되었습니다.
오왕은 부왕의 복수 때문에 월나라를 크게 무찔렀습니다.
그뒤 진과 패권을 다투던 중 월이 기회를 잡아 공격하여
오는 망하고 오왕 부차는 자살했습니다.
기원전 284년 제나라는 5국의 연합공격을 받아
민왕이 상국 요치에게 피살되었습니다.
이런 사례들이 모두 교훈이 될 만합니다.
바라옵건대 대왕께서는 재물을 아끼지 말고
각국 대신에게 뇌물을 써서 그들의 합종모략을 혼란에 빠뜨리십시오.
그래봐야 30만 금이면 충분하고 제후들은 전부 수습될 것입니다."
이 모략은 진시황의 뜻과 들어맞았다.
그리하여 진시황은 그의 계책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후로 진시황은 위료를 만나면 자신과 같은 예로 대했고,
옷과 음식까지 위료와 같이했다.
하지만 위료는 진시황의 인품에 대해
그다지 탐탐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이런 평가를 내리기까지 했다.
'진왕의 모습을 보면 높은 코, 긴 눈, 맹금류 같은 가슴,
승냥이 울음소리 같은 목소리에 인덕이 부족하고
호랑이나 이리 같은 사나운 마음을 가져서
어려울 때는 쉽게 다른 사람 밑에 처하지만, 일단 뜻을 얻으면 바로 사람을 잡아먹을 것이다.
내가 평민이거늘 나를 볼 때마다 늘 자신의 몸을 낮춘다.
진왕이 자기 뜻을 이루는 날에는 천하 사람이 모두 그의 노예가 될 것이다.
그와는 오래 교류하기 힘들다.'
진시황에 대해 이런 인상을 갖고 있었기에
위료는 진나라에서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진시황이 굳이 그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고,
게다가 최고 군사령관에 임명하여 시종 그의 모략을 채용했다.
위료의 모략사상이 진의 통일에 매우 크게 공헌했음을 알 수 있다.
병법서들만 전문적으로 모아놓은 『무경칠서(武經七書)』에 들어 있는
『위료자(尉繚子)』는
위료의 언론을 모은 것으로
선진시대 대표적인 병서의 하나로 꼽힌다.
이는 풍부한 군사사상으로
전략·전술 등 각 방면을 포괄하고 있어
위료의 모략사상이 집중적으로 표현되고 있다는 평가다.
위료는 전국시대 후기에 살았다.
『손자병법』은 중국에서 가장 이른 비교적 완전한 병가 전문서로
중국 선진시대 군사사상의 최고봉을 이룬다.
『오기병법』과 『손빈병법』은
각각 전국시대 초기와 중기 병가사상의 발전상황과 수준을 대변한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이 둘은 선진시대 군사사상의 두 번째 세 번째 봉우리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위료는
새로운 전쟁형태를 인식하고 연구할 수 있는 전국시대 후기라는 조건하에서
선배들의 사상을 종합적으로 흡수하여 새로운 이론수준에 이르렀다.
말하자면 위료는 선진시대 병학의 마지막 대가이며,
그가 남긴 『위료자』는 선진시대 병학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다.
위료 모략사상의 우수성은
다음 몇 가지 방면에서 집중적으로 드러난다.
우선 위료는 전략수립과 그 결정을 대단히 중시했다.
그는 승리에는
도승(道勝)·
위승(威勝)·
역승(力勝) 세 종류가 있으며,
그 중에서 '도승', 즉 모략으로 승리하는 것이 가장 수준 높은 승리로 본다.
이는 전쟁에 앞서 모든 것을 주도면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준비하여
주도권을 장악함으로써 불패의 위치에 서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말이다.
'도승'은 다른 말로 '지승(智勝)'이다.
최고 수준의 전략사상으로
'싸우지 않고 상대를 굴복시킨다'는 전승 사상과 일맥상통한다.
다음으로 '권(權)'을 핵심으로 하는 용법이다.
쉽게 말해 '주도권'에 관한 전문적인 토론이다.
그는 '병권(兵權)' 편에서
적과 나 쌍방의 상황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하게 장악하여
상호비교하고 연구한 다음에야
비로소 전쟁의 주도권을 잡고 상대를 물리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용병에서는
속임수, 가짜와 진짜, 허와 실을 적절하게 구사하여
적이 나의 진짜 의도를 모르게 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는 경솔하게 공격하는 행동을 강력하게 반대한다.
전쟁의 원칙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사전에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철저하게 생각하고 준비해야 한다.
만약 경솔하게 공격했다가
막상 싸움이 붙고 난 다음 불리하다는 것을 발견하면 그때는 이미 늦었다.
설사 그 순간 철수를 결정하고 물러난다 하더라도 주도권은 이미 상대에게 넘어간 뒤다.
정공법과 변칙을 동시에 구사하는 자가 적을 잘 막을 수 있다는 점도 강조한다.
이는 중국 고대 군사모략의 중요한 모략으로, 춘추시대 병가의 선구자 손무
가 제기한 바 있는 사상이다.
위료는 전쟁이 발전하면서 직면하게 된 새로운 특징들에 주목하여
특별히 정공과 변칙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용병모략을 중시했다.
그는 군과 형세에 근거하여 빠르게 적을 제압할 것과
기발한 전략으로 승리할 수 있는 작전 원칙을 명확하게 지적했다.
이와 함께 적의 튼튼한 곳은 피하고 약한 곳을 공격하라는 점도 잊지 않았다.
그의 이런 논리는 대단히 정교하다.
솔선수범과 동고동락을 통해
병사들을 통제하는 사상도
위료의 논리에서 돋보이는 대목이다.
위료는 장수와 병사의 관계를 아주 적절하게 '마음'과 '팔다리'에 비유했다.
"마음이 간절하고 정성이 있으면
팔다리에 힘이 생기고, 마음에 의심이 들면 팔다리도 어긋나게 마련이다."
이를 위해 사병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동고동락할 것을 강조한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장수의 부대는 계속되는 전투에서도 피곤함을 못 느끼고,
설사 피곤하더라도 사기는 떨어지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상벌을 분명하게 하는 것이 군을 다스리는 방법이라는 점도 인식했다.
위료는 "한 사람을 죽여 군 전체를 겁줄 수 있으면 죽여야 마땅하고,
한 사람에 상을 내려 모든 사람이 기뻐할 수 있다면 당연히 상을 내려야 한다"고 말한다.
"제도를 분명하게 하는 것이 우선이고,
형벌을 내리는 것은 나중이다."
이 점을 알아야만 상을 내려도 태산처럼 무겁고,
벌을 내려도 골짜기처럼 깊을 수 있다.
위료는 상벌을 분명히 할 것을 강조함과 동시에
형벌의 남용과 잔혹한 진압을 강력하게 반대했다.
그리고 법제를 엄격하게 밝히는 것과 도덕교육이 중요하다는 점을 주장했다.
"예의와 신의가 먼저고 상은 그 다음이다.
염치가 먼저고 형벌은 그 다음이다.
병사들을 사랑한 다음 자신을 단속하라."
위료는 또한 상벌에는 지위 등급이 따로 없다고 말한다.
"아무리 귀한 자라도 잘못하면 죽는 것이고, 아무리 미미한 자라도 잘하면 상을 내리는 것이다."
벌에는 위가 없고, 상에는 아래가 없다는 말이다. 그래야만 병사들이 마음으로 기꺼이 장수를 따르고, 전쟁에 적극적으로 나서 공을 세운다.
"군대란 무(武)라는 나무와 문(文)이란 씨가 공존하는 집단이다."
위료는 전쟁과 정치는 서로 연계된다고 보았다.
그는 전쟁을 '정의를 내세우는 것과 원한을 풀기 위한 것'의 두 종류로 나누어 보았다.
그러면서 그 근원에는 경제적 이익이 도사리고 있다고 간파했다.
정치라는 집의 주춧돌이 튼튼해야 군사라는 기둥도 튼튼해진다.
둘 중 하나라도 없으면 집은 무너진다.
이 둘의 관계를 파악하는 것이 성패를 가름한다.
먼저 정치는 전쟁의 승부를 결정하는 으뜸가는 조건이다.
정치가 맑으면 국민을 단결시킬 수 있고,
국민이 단결하면 사기를 최대한 끌어올릴 수 있다.
그러면 그 군대는 무적이다.
국가는 먼저 정치를 강화해야 한다.
부패를 다스리고 사치풍조를 근절하여 떠나간 민심을 다독거려
백성들이 자기 일에 열심히 힘쓰게 해야 한다.
이런 것들이 가능하다면 군대를 굳이 출정시킬 필요가 없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천하에 그 위세를 얼마든지 보여줄 수 있다.
전쟁의 성격은 정의로워야 한다.
폭력과 불의를 다스리는 전쟁이라야 명분을 가지고 공감을 얻을 수 있다.
그래야 병기에 피를 묻히지 않고도 천하 사람들과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전쟁의 승부는 그 나라의 정부 안에서 결정난다고 한다.
군대를 다스리는 '치군'과 나라를 다스리는 '치국'은 한 몸의 두 부분일 뿐이다.
장수가 전쟁에 나가는 것은 국민들 때문이다. 이 점을 인식하지 못하면
그 전쟁은 허울뿐인 전쟁이 된다.
전쟁은 또 정치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
춘추전국시대 각국의 통치도 군사투쟁에서의 승리를 통해 보장받았다.
군대가 강하면 전쟁에서 승리하고, 또 국가의 정치와 통치에 활력을 줄 수 있다.
위료는 이와 함께 전쟁에서의 승리는
반드시 튼튼한 물질적 역량을 방패로 삼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를 위해 농업과 상업의 발전을 강조한다.
국고가 튼튼해야 전쟁을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백성들을 피곤하지 않게 하고
백성들의 재산을 축나지 않게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민심을 잃으면 그 전쟁은 할 필요가 없다.
국가가 저축이 많고 강해야 군대도 강해지는 법이다.
전쟁 때문에 백성들을 고달프게 하고
재산을 축나게 하는 것은 전쟁의 기본을 잃은 것이다.
그러나 부국이 강병의 전제이긴 하지만
부국이 강병과 같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나라와 군에서 물자가 새어나가면 막을 길이 없다.
다시 말해 상층부의 통치계급이 아무리 부유해도 백성들이 가난하면
그 재앙은 무엇으로도 구제할 수 없다.
청나라 때의 학자 주용은
『무경칠서휘해』에서
수많은 병법서들 중에
그 학문적 수준이 넓고 깊은 것으로 말하자면
『위료자』가 단연 으뜸이라고 했다.
『위료자』에 대해서는
아직 연구가 미진하고 논쟁거리가 많이 남아 있다.
그럼에도 위료가 보여준 모략사상은
그 자신을 전국시대 말기 가장 위대한 모략가로서 보증하기에 충분하다.
위료는
병법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통일이 무르익었던 시대상의 반영이기도 하다.
그는 병가의 또 다른 걸물이었다.
위료는 군사와 정치의 관계를 철저하게 이해한 현실론자였다.
정치는 전쟁의 승부를 결정하는 첫 번째 조건이다.
따라서 정치가 맑으면 국민의 힘을 하나로 모을 수 있고,
결과적으로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
정치가 부패하고 단결하지 못하면 필패다.
따라서 전쟁의 성격이 정의로워야 한다.
위료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전쟁이 정치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는 점도 명쾌하게 지적한다.
오늘날 전쟁에서 이 점은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어
위료의 군사모략이 얼마나 강인한 생명력과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지 증명하고 있다.
그에 대한 연구는 아직 초보적이지만
일부 전문가들이 지적하고 있듯이,
많은 병법서들 중에서 학문적 수준이 최고의 경지에 오른 것만큼은
틀림없어 보인다.
- 김영수 역, 5000년 중국 50인의 전략가
한자 문화 뜨락
https://cafe.daum.net/hsc122 에서 펌함
'^ 투자=전쟁:알아야'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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