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인홀트 메스너는 이탈리아 남티롤에서 태어나
어린시절부터 등반을 익혔고 알프스를 500회 이상 등반했다.
1986년 인류 최초로 히말라야 8000m 14좌 완등이라는 신화를 이뤄냈다.
1978년에는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정을 해냈고, 8000m 봉을 단독 등반하는 역사적인 기록을 세웠다.
그 후에도 남극대륙 도보횡단, 사막횡단 등 끊임없이 극한에 도전하고 있다.
이 책은 극한 영역에서 쓴 극한 영역에 관한 책이다. -라인홀트 메스너 후기
라인홀트 메스너의 등반철학
"탐구해야 할 것은 인간이다.
나는 에베레스트를 정복하려고 오르지 않았다.
나는 그저 자연의 최고봉에서 자기 자신을 체험하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에베레스트의 장대하고 준엄한 모든 것을 내 품에 안고 싶었다.
이런 일을 산소 마스크의 힘을 빌려서는 하지 못한다.
나는 유토피아에서 한번 살아보고 싶었을 뿐이다.
나의 유토피아는 의사, 물리학자. 등반가들의 논쟁의 초점이던
8848m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정, 바로 그것이었다."
나는 왜 산에 오르는가?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나 자신과 싸우면서 얻는 새로운 약이 필요해서인가?
나는 정말 산에 병이 든 것일까?
그 해답을 찾아나서다 이 책을 쓰게 되었다.
죽음의 지대
나는 지난 30여년간 산에 올랐으며 최근 10년간은 산소마스크 없이 자이언트급 거봉을 등정했다.
그때마다 수직암벽의 추락 위험이나 산소가 적은 '죽음의 지대'가 나타나곤 했다.
무덤과 정상은 종이 한장 차이다.
추락하거나 나쁜 날씨를 만나면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고,
사람은 이것을 계기로 완전히 새로운 삶의 비전을 연다.
'죽음의 지대'의 희박한 공기는 대뇌 안의 혈액순환을 급격히 떨어뜨리고,
백만이나 되는 뇌세포를 파괴한다.
뇌 속에 산소가 아주 부족하면 여러 망상들이 일어나고 환상이 보인다.
추락
내 경험으로는, 극한영역에서는 의식이 둔화되는게 아니라 오히려 지각이 투명하고 민감해진다.
그런데 추락에 관한 보고들을 보면, 다른 등반가들의 체험들도 하나로 관통하는 것이 있다.
떨어지면서 '이제 죽는구나'하고 생각하는 순간,
완전한 무의식 상태에서 불안이 가시고 지난 날들이 눈앞을 스치며 시간 감각이 없어진다.
추락해서 굴러떨어지는 순간부터 '이젠 끝장'이라는 한 가지 생각밖에는 하지 않는다.
사실상 의지력이 마비된 거나 다름없는 심리상태가 된다.
의지가 모두 사라지면 무의식을 덮고 있던 뚜껑이 단번에 젖혀진다.
의식의 밑바닥에 깔려있던 무수한 기억과 영상과 표상이 한꺼번에 표출되는 것이다.
그리고 갑자기 가족과 친구가 생각나며 자신이 몸 밖으로 빠져나와 있다고 느낀다.
자기가 자신의 관찰자가 되는 체험이다.
죽음의 지대에서는 묘한 소리가 들리거나 환각증상이 일어나며,
대자연과 일체감을 느끼고, 말을 하지 않아도 뜻을 전달할 수가 있다.
out of body
'떨어진다고 느끼는 순간, 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밖으로 돌리며 두 발로 바위를 찼다.
떨어지던 힘에 밀려 다시 몸이 거꾸로 되면서 그대로 추락했다. 이렇게 바운드가 심하면 절벽 밑바닥까지 떨어지고 말겠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바닥에 산산조각이 난 내 몸이 보였다. 동료들이 내 몸을 부대에 넣고 골짜기로 끌어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 W.M
죽음의 위협을 피할 수 없으면 추락자는 '자기를 관찰하는 자'가 되며,
자기 몸에서 빠져나와 '떨어지고 있는 자기를 뒤쫒는다.
추락하고 있다는 사실에 지배되지 않고 냉정해지며, 마침내 시간과 공간 감각이 사라진다.
'죽음의 지대'라는 한계영역에서는 무엇이 중요한가.
자신의 죽음에서 생을 인식하는 일이며, 때로는 자신과 세계를 한데 껴안는 감정이다.
한계영역
낭가 파르바트에서 동생이 눈사태에 묻혔을 때 겪었던 나의 체험을 통해
나는 죽음에 가까울수록 오히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진다는 것을 알았다.
알 수 없는 세계로 넘어가는 불안이나 회의는 없어지고, 죽음의 현실만이 자기 것이 되어야 한다.
이 체험으로 나는 죽음의 새로운 의미를 알았다.
전에는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지금은 죽음이 언제나 나와 함께 있으며,
그러면서도 나를 괴롭히지 않는다.
나는 죽음도 삶의 일부이고 죽음과 내가 하나며 그밖의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자기 능력의 한계를 넘어서 부담을 걸머지게 되거나 죽음을 피할 길이 없게 되면
어떠한 곤궁에 빠졌을 때보다도 강한 반응을 나타낸다.
이러한 '죽음의 지대'를 통해서 자신을 더욱 강하게 인식하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인다.
확장된 존재
사람들은 대체로 자기의 머리나 몸이 곧 자신이라고 알고 있다.
그들은 스스로 관찰자가 되어 밖에서 자기 자신을 바라볼 줄도 모른다.
또 종교적인 영혼의 존재를 믿는 사람은 많으나,
영혼과 직접 대면한 일이 없으므로 영혼이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실감하지 못하는 것이다.
인간의 본질을 파헤치면 그 특징은 누구나 거의 같다.
다만 사람들에게 '자기 자신'을 아는 계기가 주어지는 행운이 따르지 않을 뿐이다.
열반
나는 지금도 8000m 봉에 올라가는 궁극적인 동기가 무엇인지 잘 모른다.
그런데 한 번 정상에 서면 다시 내려가기 싫어진다.
내려가면 마음이 허전해지기 때문이다.
그것은 성공했다는 의식으로도 채워질 수가 없다.
정상에 서는 순간에 새로운 공허감을, 나의 전 존재를 붙드는 해방에서 오는 공허감을 종종 느꼈다.
"정상에 나는 앉아 있었다.
주위의 지평선이 내 마음의 공허감처럼 부풀어 올랐다. 표현하기 어려운 해탈감이 다가왔다.
나는 이 조화를 이룬 상태, 열반과도 같은 경지에서 깨어났다." -<도전>
8000m 정상까지 가는 길은 멀다.
그것은 인생의 길인 동시에 죽음의 길이다.
모험에 나서려면 우선 목숨을 거는 결단이 필요하다.
주위 사람들과 작별하고, 자기를 인식하고 자기의 한계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로써 떠나 온 세계와 자기 자신을 멀찌감치 떨어져서 관찰하는 자가 된다.
높이 오를수록 스스로가 더욱 맑고 뚜렷하게 보이며 감각이 예민해진다. 온 정열을 쏟은 정상이 구체적인 모습으로 그의 것이 된다. 그는 가장 이상적인 경우, 열반 속으로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론 자연의 현실적인 지각을 떠나서 정신적 감명과 마음의 깨달음이다.
나는 8000m 높은 곳에서 내려오고 나서 정신적으로 다시 태어난 듯한 느낌을 여러 번 가졌었다.
자신에게 가는 길
존재 의미에 대한 물음은 합리적으로 풀리지 않는다.
종교적인 믿음을 가지게 될 때까지 누구에게나 붙어다닌다.
자기 자신을 찾아 길을 가다보면 사람은 인생의 끝인 죽음에 이르게 되는데, 바로 이때 인생의 의미를 알게 된다. 그렇게 되면 자기의 삶이 완전해지고, 그 무엇이나 어느 누구에게도 좌우되지 않는
참다운 자기를 찾게 된다.
자기 자신을 찾다가 죽음이 어떤 것인지를 안 자는 애써 노력하는 일 없이 자유롭게 '놀이를 계속'할 수가 있다.
등반에서는 실존적인 근본 경험이 가능하다.
산은 자기를 찾는 길로서 가장 적합한 곳이다.
산 위에서 자기 인식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피니스트들은 이미 100년 전부터 알고 있었다.
나는 처음으로 대원정을 마친 뒤, 인생이 넓어진 것같이 느껴졌으며 생각도 깊어졌다.
세 번째 8000m 봉을 끝내고 내 마음은 차분히 가라앉았는데. 그뒤 나는 열반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으며 생명을 초월하는 존재의 향기를 마셨다.
에베레스트 정상에서 나는 일종의 정신적 쾌감의 극치를 체험했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이 없는 곳에서 일어나는 내면의 진동이었다.
그때 나의 이성은 완전히 배제되어 있었다.
나는 이 책에서 산악문학에서 다루지 않았던 환상체험을 다루었다.
이 체험은 극한 상황에서 인식의 능력이 확장되는 것으로서,
짧은 순간이긴 하지만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참다운 자기를 인식하게 만든다.
우리가 19세기식 '정복을 위한 등반'에서
21세기의 '존재를 위한 등반'으로 가기 위해서는 알피니즘이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가?
정상을 획득했다는 생각은 '정상의 노예'가 되는 셈이다.
자기인식을 체험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등반과 바꿔놓을 만한 것은 없다.
[출처] "죽음의 지대" -라인홀트 메스너 지음/김영도 옮김|작성자 cosmos109bis
각색 모디스티 21.0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