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말 중국 왕정은 무능하고 부패한데다가 제국주의적인 서양 열강들의 중국대륙 진출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함으로써 몰락의 길을 걷고 말았다. 중국은 의화단사건 이후 거듭된 혁명의 진통을 거친 다음에 그들 역사상 최초의 공화정인 중화민국의 탄생을 보게 되었다. 이 공화국은 초대 지도자 손문(孫文, 쑨원)이 일찍이 사망하고 난 다음 1927년에 국민당의 장개석이 정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곧 국민당과 모택동의 공산당 사이가 결렬되면서 그때부터 중국은 양대 세력 간에 20년이 넘도록 내전을 겪게 되었다.
장개석(장제스) 군대가 주요도시를 장악한 반면에 모택동(마오쩌둥) 군대는 농촌과 산악지대로 밀려났다. 초기에 10:1로 열세했으나, 모택동은 게릴라전을 개발하여 농촌주민들의 지원을 받아가며 점차 세력을 키워나갔다. 게릴라들은 소규모 단위로 기동력을 최대로 발휘하면서 적 파견대들을 집중적으로 습격하고 도망가는(hit and run) 방법으로 전투를 벌였다. 그런 식으로 하여 모택동은 그 자신이 말했듯이 오히려 10:1의 전술적 우세를 유지하여 승리를 거두고 그런 작은 승리들을 누적시킴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전략적 우세를 달성할 수 있게 되었다.
1931년 일본의 만주침략 이후 중국은 안으로 내전을 치르고 밖으로는 대일항전을 치러야 했다. 일본이 만주점령에 시간을 보내는 동안 장개석은 공산세력을 완전히 제거하는 데 몰두했다. 위기에 처한 모택동은 1934~35년에 약 10,000㎞의 대장정을 떠나게 되었고 그리하여 본거지를 남부의 정강산(井崗山)에서 북부의 연안으로 이동시켰다. 국부군(국민당 정부군)의 공격을 피하면서 경험한 이 장정기간 중에 사실상 공산 게릴라들은 훌륭한 실전 훈련을 쌓게 되었고, 또한 농촌 지역을 장악할 수 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1937년 일본이 만주에서부터 중국을 침략하자, 중국내전은 소강국면에 들어가고 양대 세력은 일단 연합전선을 펼쳤다. 2차대전 중 장개석은 연합국, 특히 미국으로부터 대량의 군사원조를 받아냈다. 국부군과 공산군은 각각 나누어 점거한 지역에서 대일항전을 벌였는데, 종합적으로 말할 때 공산군이 훨씬 더 괄목할 만한 전과를 올렸다. 공산 게릴라들은 적 후방에서 교란작전을 벌이며 일본군을 꽤 괴롭혔으나, 국부군은 이렇다 할 만한 활약을 보이지 못했다. 연합국 지도자들은 장개석에게 크게 실망했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2차대전 종전 이후 중국이 다시 내전 분위기에 휩싸이게 되었을 때 공산당은 득의양양하고 중국국민들로부터 큰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일본과의 전쟁이 끝난 다음에 국민당과 공산당은 몇 차례 협상을 가졌다. 그러나 워낙 깊은 불신의 골은 평화적인 타결책을 찾지 못하고, 결국 1946년부터 본격적인 내전 상황으로 치닫게 했다. 이때 양쪽의 병력을 비교해보면 370만:120만 명으로 국민당 편이 우세했다. 그러나 질적으로는 공산군이 훨씬 유리했다. 공산군은 기강이 잘 잡혀 있고 용맹하게 싸우는 데 반하여 장개석 군대는 전투의지가 부족한데다가 약탈을 일삼아 주민들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했다. 게다가 장개석 정부는 부패할 대로 부패했고 군 지휘관들 가운데도 부패한 자들이 많았다.
장개석은 미국으로부터 지원받은 무기와 제공권의 이점을 최대로 살리고자 했다. 그러나 장군들과 그의 군대는 장개석이 촉구하는 신속한 승리를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하지 못했다.
한편, 모택동은 그동안 일본군과의 싸움을 통하여 성공적으로 개발시켜온 전술을 적절히 사용했다. 비록 북부의 농촌 주민들로부터 대폭적 지지를 받고 있었지만, 그는 일단 대충돌을 피하는 대신 주로 국부군의 보급선을 습격하는 방법으로 지구전을 펼치고, 후에 결정적인 순간을 포착하여 결전을 벌이는 계획을 세웠다.
1948년 중국경제는 파탄지경에 빠졌다. 약 20년간 계속된 전쟁으로 시달릴 대로 시달린 국민들은 간절히 평화를 갈망했고, 강력한 정부를 원했다. 중부와 서부지역의 흉년으로 민심은 흉흉하고 곳곳의 만연된 부정부패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속수무책이었다. 고위직 관료들과 장군들은 무능하기 짝이 없었다. 대외무역 적자가 손쓸 수 없이 증가했지만 정부는 어떠한 경제계획도 수립하지 못하는 상태에 있었다. 이러한 총체적 위기상황을 공산주의자들은 최대로 이용했다.
그들은 북경과 봉천 간 철도를 습격하여 국민당 정부 입장을 더욱 궁지에 빠뜨렸다. 1948년 10월 공산군은 봉천을 함락시키는 데 성공했으며, 이를 기점으로 하여 북부지역의 국민군 기지들을 하나하나 공략하기 시작했다. 이어서 공산군은 11월 말에는 서주(徐州)의 강력한 요새를 점령함으로써 국부군의 저항을 사실상 종식시켰다. 이듬해 남경이 함락되기에 앞서 장개석은 군사회의를 소집했지만, 휘하 장군들은 거의 참석하지 못했다. 절망 상태에 이른 국부군 잔여병력은 상해와 그 일대의 해안에서 대만과 해남으로 철수했다. 1949년 10월 1일 북경에서 공산당은 중국인민공화국 수립을 선언하고 강력한 공산정권을 탄생시켰다.
모택동의 공산 게릴라들이 성장하여 중국 천하를 장악한 것은 결코 그들이 자랑하는 게릴라 전술에 의한 승리라기보다는 부패한 국민당 정부와 기강이 빠진 국부군의 패배로 말미암아 얻게 된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전쟁 중 중국농민들은 약탈을 일삼는 국부군을 증오할 수밖에 없었고, 그 반대급부로서 비교적 군기가 잘 잡힌 공산군을 환영했었다. 중국 공산당의 승리는 민심을 얻는 데 성공함으로써 가능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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