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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수의 新史記 열전’]최고의 경략가 강태공을 다시 보다[출처] 백성을 힘들게 하는 통치자는 누가 되었건 벌을 받아야 한다. '강태공'|작성자 몽촌

modest-i 2021. 8. 18. 08:36

백가종사百家宗師’ 강태공姜太公

역대 강태공 초상화들 중 가장 전통적인 초상화이다. 튀어나온 이마와 날카로운 눈매, 그리고 상당히 큰 입과 뚜렷한 입술 라인이 인상적이다.

 

 

강태공은 전설에 나오는 늙은 낚시꾼이 아니라 실존 인물이다. 그는 기원전 11세기 주周라는 나라를 세우는데 절대적인 공을 세웠고, 이 공으로 지금의 산동성 동쪽 지역을 받아 제齊나라를 개국한 건국 군주였다. 이 제나라에서 저 유명한 ‘관포지교管鮑之交’의 두 주인공인 관중管仲과 포숙鮑叔이 태어났다.

중국인들이 이런 그에게 붙여준 별칭은 ‘백가종사百家宗師’다. 한 시대의 으뜸가는 스승이란 뜻을 가진 ‘일대종사一代宗師’란 표현은 영화 제목도 있고 해서 비교적 익숙하지만 ‘백가종사’는 생소하다.

뜻을 풀이하자면 ‘백가의 으뜸가는 스승’ 정도가 된다. 여기서 말하는 ‘백가’란 ‘제자백가諸子百家’의 그 ‘백가’로 일가를 이룬 많은 사상이나 학파 또는 문파를 가리킨다. 그렇다면 ‘백가종사’는 나름 일가를 이룬 많은 사상(가)들을 모두 아우르는 최초 최고의 스승인 셈이다.

강태공은 뛰어난 책략과 풍부한 경험으로 주周 문왕文王과 그 아들 무왕武王을 보좌하여 은殷 나라를 멸망시키고 주나라를 건국하는데 막대한 공을 세웠다. 그리고 만년에는 이런 자신의 경험을 종합한 『육도六韜』라는 중국 역사상 최초의 병법서이자 치국방략의 큰 이치를 담은 경륜서를 저술했다. 이 때문에 ‘백가종사’라는 명예로운 별칭이 뒤따르게 된 것이다.

그런데 사실 강태공이란 이름조차 그의 본명이 아니다. 태공은 ‘태공망太公望’에서 

따온 별칭인데, 주 문왕이 강태공을 만난 뒤 주나라의 선조 태공 고공단보가 언젠가는 주나라를 일으킬 훌륭한 인물을 만날 것이라고 예언했다면서, ‘태공께서 갈망하던’, 즉 ‘태공망’하던 사람이 바로 당신이라고 한 데서 비롯되었다. 강태공의 이름에 대해서는 많은 설들이 있는데 여상呂尙, 여아呂牙, 강상姜尙, 강자아姜子牙 등과 같은 다른 이름과 사상보師尙父라는 존칭으로도 불렸다. 후대에 ‘강태공’으로 많이 불렸기 때문에 흔히들 강태공이라고 하는 것이다.

한편 강태공은 그가 남긴 『육도』라는 통치 방략서 때문에 모략가의 원조로도 꼽힌다. 그래서 귀곡자鬼谷子, 장량張良, 사마의司馬懿와 함께 ‘모성謀聖’이란 별칭을 더 선사받았다.(강태공, 귀곡자, 장량, 사마의는 중국의 4대 ‘모성’이라 할 수 있다.) 출중한 지략과 모략으로 제왕을 보좌하는 모사로서 대업을 이루게 만들었기 때문에 ‘모성’이라는 영광스러운 별칭을 얻게 된 것이다.

정치가 강태공 – 때를 기다릴 줄 알았던 경륜가

강태공은 많은 직업을 전전하며 풍부한 경험을 쌓았다. 그림은 도살업을 하는 강태공이다.

동해 바닷가 동이족 출신인 강태공의 집안은 전설시대인 요, 순 때 임금을 보좌한 대신들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 왕조 때는 여呂와 신申 지역을 봉지로 받았고, 그 후 강이란 성을 얻었다. 상 왕조 때 집안이 몰락하여 평민으로 전락했다. 강태공에 이르러 집안은 거의 천민과 다를 바 없었다. 강태공은 하는 수 없이 마馬씨 집안의 데릴사위로 팔려갔으나 얼마 되지 않아 처가로부터 버림을 받았다.

이후 강태공의 인생은 말 그대로 파란만장 그 자체였다. 민간에서 밥장사, 도살업에 종사했고, 그마저 여의치 않자 고향을 떠나 상나라의 수도인 조가朝歌 부근으로 이주했다. 여기서 강태공은 장사와 종업원 생활을 전전하면서 여러 차례 거처를 옮긴 끝에 상나라의 수도 조가에 주점을 열고 많은 사람들과 접촉했다. 그러다 점쟁이 여상呂尙으로 이름을 내기 시작했고, 상나라 조정의 대신인 비간을 만나 주 임금을 잠깐 섬기기도 했다.

주 임금을 섬긴 짧은 시간 강태공은 상나라의 상황을 자기 눈으로 직접 확인했다. 그는 이내 그곳을 떠나 자신과 배짱이 맞는 다른 인재들과 교류를 확대했다. 이 때 만난 인재들이 산의생散宜生, 굉요閎夭, 남궁괄南宮括 등으로 모두 훗날 주나라 건국에 큰 공을 세웠다. 주 임금의 폭정은 도를 더해 갔고, 천하 정세의 큰 변화에 강태공의 확신은 더욱 굳어졌다.

이 무렵 희창(주 문왕)이 유리성에 유폐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희창의 측근들은 강태공을 찾아 희창을 구할 방법을 상의했다. 강태공은 주왕의 취향에 맞추어 재물과 미녀를 바치는 이른바 ‘투기소호(投其所好,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것에 맞추다)’의 모략으로 희창을 빼내는데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강태공은 상나라 내부의 부패상을 더욱 부추기는 이간책과 갖가지 유인책으로 상나라를 완전히 기울게 만드는 ‘경상책傾商策’을 제안했다.(이를 ‘문벌文伐’이라 하는데, 무력을 쓰지 않고 적의 내부를 흔들고 이간시키는 책략을 말한다. 강태공의 저술로 전하는 <육도>의 한 편이다.)

대세는 희창에게로 기울었다. 하지만 강태공은 여전히 희창을 기다렸다. 그는 이번 기다림이 자신의 생애에 있어서 마지막 기다림이 될 것임을 확신했고, 위수渭水에 낚싯대를 드리운 채 희창을 기다렸다. 희창은 강태공을 찾아 그에게 군대를 통솔하는 총사령관에 해당하는 사師라는 자리를 주어 극진히 모셨다. 이에 강태공은 희창에게 이제 무력으로 상을 멸망시키기 위한 ‘멸상책滅商策’, 즉 ‘무벌武伐’을 건의했다. 강태공의 ‘멸상책’은 희창의 아들 희발, 즉 무왕 때 가서 실현되었다.

강태공의 활동 범위는 그의 경력에서 보다시피 당대 누구보다 폭 넓었다.(오늘날 산동, 하남, 하북, 섬서성에 걸치는 지역으로 그 당시로는 천하에 해당했다.) 이런 폭 넓은 활동에서 체득한 풍부한 경험이 천하 정세에 대한 날카로운 판단력을 만남으로써 상을 멸망시키기 위한 장기적인 계책이 마련될 수 있었다. 

 

군사가 강태공 – 준비된 기다림

강태공이 주나라를 건국하는데 가장 큰 공을 세웠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다만 그가 무엇을 가지고 공을 세웠느냐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사마천은 앞서 말한 ‘경상책’과 ‘멸상책’ 등이 모두 강태공의 넓고 깊은 모략謀略에서 비롯되었다고 했다.

강태공은 정치투쟁에 군사투쟁을 접목시킨 최초의 인물이다. 그는 정치투쟁 역시 전쟁에서의 상황과 다를 바 없다고 인식하여 승부의 관건은 투쟁에 있어서 누가 자각적 능동성을 발휘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 정치투쟁이든 군사투쟁이든 주도권 싸움이라는 것이다. 『육도』는 이러한 강태공 실천적 경험과 사상을 이론화한 것이다. 이 때문에 그는 병가兵家의 시조로 추앙받고 있다.

군사 전문가 강태공의 기다림은 사람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는 때는 확신했다.

상나라가 버림을 받을 것으로 확신했고, 상나라를 무너뜨릴 책략을 치밀하게 구상했다. 문제는 자신의 책략을 받아들여 천하대세를 변화시키고 주도권을 쥘 사람이 누구냐 하는 것이었다. 희창(주 문왕)의 인재들이 강태공을 알아보고 그를 먼저 찾았다. 이어 강태공의 계책 덕분에 유리성에서 풀려난 희창도 강태공을 찾아 그에게 중책을 맡기는 것으로 강태공의 기다림에 응수했다.

강태공의 기다림은 상, 주 교체라는 커다란 변혁을 끌어냈다. 이 변혁의 과정에서 강태공은 통치 철학의 근본적인 변화를 읽어냈다. 미신迷信과 귀신鬼神을 숭배했던 풍조가 막을 내리고 인간의 의지가 모든 변화의 원동력이란 점을 정확하게 인식했다. 나아가 강태공은 천하는 한 사람의 천하가 아니라 모든 사람의 천하라는 보다 진전된 인식을 보여줌으로써 그의 봉국인 제나라가 춘추시대 최초의 패주가 될 수 있는 든든한 기반 하나를 마련해주었다. 무왕의 동생인 주공周公이 강태공의 통치 방식에 대해 듣고는 “어허! 훗날 주 왕실과 같은 동성인 노魯나라가 성이 다른 강태공의 제나라를 섬기게 되겠구나. 정치가 쉽고 친근하면 백성들이 절로 모여드는 법이다”라고 예언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기다림은 엎질러진 물과 같다. 기다려야 한다면 기다려야 한다. 강태공은 분명 때를 알았다. 동시에 사람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도 잘 알았다. 사람을 만나지 못하면 때를 아무리 잘 만나도 자신의 뜻을 펼치기 어렵다. 강태공의 낚싯대에 걸친 세월의 무게는 곧 강태공의 이런 성숙된 경륜을 의미했다. 세월을 낚는다는 것은 지난 시간,

기다림에 대한 반추이자 현재에 대한 반성이며 나아가 미래의 반응을 종합하는 입체적인 행위였다.

강태공의 기다림은 준비된 기다림이기도 했다. 준비된 기다림 앞에는 어떤 조짐도 어떤 징조도 걸림돌이 될 수 없다. 제대로 된 기다림의 마지막 수순은 확고부동한 결단이기 때문이다. 은나라를 정벌하는 날 날씨도 점복도 다 불길하게 나왔다. 모두들 조짐이 좋지 않다며 머뭇거렸다. 그러나 강태공은 모든 준비가 끝난 상황에서 이런 미신은 대업에 결코 방해가 될 수 없다며 정벌을 단행했다.

강태공과 문왕의 만남은 누가 주동적이건 상호 이해의 기초 위에서 쌍방이 서로를 선택하는 것이 최선이란 점을 잘 보여준다. 그것을 위해 기다리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모든 기다림은 최선, 나아가 최상의 만남을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강태공과 문왕의 만남은 역사의 선택이었다. 제대로 된 기다림은 중대한 순간과 상황에서 시간을 벌게 해주는 밑천이 된다.

두 사람이 서로를 견주지 않고 전격적으로 결합할 수 있었던 것도 서로를 오래 기다렸고, 그 기다림의 질이 기다린 시간을 뛰어넘게 했다. 또 기다려 보았기에 허망한 미신과 징크스를 과감하게 부정할 수 있었다. 주나라가 미신을 숭배한 상나라와는 달리 건강한 통치방식으로 백성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었던 것도 강태공의 이 같은 실용적이고 실제적인 통치 방략에 힘입은 바 크다고 하겠다.

제나라의 도읍이었던 산동성 임치臨淄에 조성되어 있는 강태공의 사당

 

 

 

 

 

통치와 경제, 둘이 아닌 ‘정경합일政經合一’의 경지

 

사마천은 춘추전국에서 한나라 무제에 이르는 약 400년 동안 크게 치부한 부자들의 기록인 『사기』 권129 <화식열전>에서 강태공의 경제정책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옛날 태공망太公望이 영구營丘에 봉해졌는데 땅은 소금기가 많고 인민은 적었다. 이에 태공은 여자들에게 베짜기를 권하여 그 기술을 최고로 만들고, 물고기와 소금을 유통시키니 물산과 사람이 모여드는데 마치 꾸러미로 동전을 꿰듯, 수레바퀴살이 안으로 모여들 듯했다. 그리하여 제나라의 모자, 허리띠, 옷, 신발이 천하에 퍼졌고, 동해東海와 태산泰山 사이의 (나라들이) 옷깃을 여미고 가서 조회했다.”

또 <제태공세가>에서는 “봉국(제나라)에 이른 태공은 정치를 고쳐 그곳의 습속에 따라 예를 간소하게 하였다. 상공업을 발전시키고 어업과 소금의 이점을 잘 살렸다. 그러자 인민들이 저절로 많이 돌아와 제는 큰 나라가 되었다.”고 했다.

경제와 관련한 강태공의 기록은 이상이 거의 전부라서 구체적인 경제정책이나 사상을 얻어내기란 어렵다. 그러나 강태공 이후 제나라의 발전상황과 춘추시대 관중의 경제정책에 투영된 강태공의 그림자를 읽어내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젊은 날부터 다양한 상업활동 종사했고, 천하 각지를 떠돌며 지역의 특성과 문화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바탕으로 제나라에 맞는 정책, 즉 상공업을 장려함으로써 제나라를 큰 나라로 만들었다는 논평은 비록 몇 글자 되지 않지만 중국 경제사와 상업사에서 강태공이 차지하는 비중을 아주 함축적이고 묵직하게 전하고 있다.

 

 

 

강태공은 병가의 원조로 잘 알려져 있다. 특히 <육도>는 그의 젊은 날 경력을 바탕으로 주나라 건국, 제나라 통치로 이어지는 천하경영의 이치를 피력한 통치 방략서라 할 수 있다.

여기에 제나라를 경영하면서 상공업을 장려하여 제나라를 큰 나라로 만들었다는 <사기>의 기록을 합쳐 보면, 강태공은 경제와 정치의 함수관계를 정확하게 인식했던 최초의 경제 전문가로서 손색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천하는 한 사람의 천하가 아니라 모든 사람의 천하이고, 천하의 이익을 함께 나누어야 천하를 얻을 수 있다는 그의 사상은 정치와 경제가 뗄 수 없는 관계라는 사실을 너무도 잘 보여주는 명언이 아닐 수 없다. 이 관계는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정경유착’과는 엄연히 그 경지와 질을 달리한다. 강태공이 보기에 정치가 되었건 경제가 되었건 실질적인 혜택을 누려야 할 대상은 통치자도, 소수 지배층도 아닌 천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부유하지 않으면 인의를 베풀 수 없고(不富無以爲仁),

베풀지 않으면 친한 사람을 모을 수 없다(不施無以合親).”   

 

(『육도』 ‘수사守士’)

 

 

 

강태공의 통치방략 – 백성이 알파요 오메가이다

젊은 날부터 천하 민간을 떠돌며 쌓은 다양하고 풍부한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강태공은 자기만의 통치방략을 수립했는데 그의 통치방략은 간소하고 쉬운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주나라 초기 강태공이 제 지역을 봉지로 받아 부임할 당시 강태공과 함께 주나라 건국에 절대적인 역할을 한 주공(周公, 무왕의 동생)은 노魯 땅을 봉지로 받아 노나라의 제후가 되었다. 그러나 주공은 중앙 왕실의 중요한 업무를 맡다보니 자신이 직접 봉지로 가지 못하고 아들 백금伯禽을 대신 보냈다.

백금은 그로부터 3년이 지나서야 주공에게 그간에 노나라를 다스린 상황을 보고하러 중앙으로 올라왔다. 주공이 이렇게 늦은 이유를 묻자 백금은 “그곳의 풍속과 예의를 바꾸고, 3년 상을 치르느라 늦었습니다”라고 답했다.

그런데 제나라로 간 강태공은 이보다 앞서 불과 다섯 달 만에 돌아와 보고를 올렸다. 주공은 왜 이렇게 빨리 왔냐고 물었다. 이에 강태공은 “소신은 그저 군신의 예의를 간소화하고 그곳의 풍속과 일처리 방식을 따랐을 뿐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에 주공은 앞서 인용한 바와 같이 “어허! 훗날 노나라가 제나라를 섬기게 되겠구나! 무릇 정치란 간소하고 쉽지 않으면 백성들이 가까이하지 않는다. 정치가 쉽고 백성에게 친근하면 백성들이 절로 모여드는 법이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주공은 강태공과 아들 백금의 통치 방식의 차이로부터 두 나라의 미래를 예견한 것이다.

 

 

 

이같은 강태공의 통치방략은 <육도>에 잘 반영되어 있는데, 핵심이 되는 몇 구절을 인용해본다.

“천하를 얻으려는 것은 마치 들짐승을 쫓는 것과 같아 천하가 모두 고기를 나눌 마음을 가지는 것이며,

또 배를 타고 물을 건너는 것과 같아 물을 건너고 나면 모두 그 이익을 고루 나누고,

패하면 모두 피해를 입는 것이다.”

 

 

 

누구나 이익을 위해 천하를 얻으려 하지만 그 이익을 고루 나눌 수 있는 자만이 천하를 얻을 수 있다는 지적이다.

“백성들과 더불어 같이 아파하고,

같은 마음으로 일을 이루고,

좋지 않은 일은 서로 돕고,

좋아하는 일에 서로 모이면

군대가 없어도 이기고, 무

기가 없어도 공격하고,

참호가 없어도 지킬 수 있다.”

강태공은 통치자가 백성들과 동고동락하면, 즉 위아래가 한 마음이면 천하무적임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백성은 사랑해야 할 대상일 뿐이다(애민이이愛民而已)’라고 했다.

“천하는 한 사람의 천하가 아니라 천하의 천하다. 천하의 이익을 함께 나누는 자는 천하를 얻고 천하의 이익을 혼자 차지하려는 자는 천하를 잃는다.”

강태공의 통치 방략의 핵심은 천하의 이익을 백성들과 함께 나누어야 천하를 얻고 제대로 통치할 수 있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 때문에 그는 상나라 마지막 임금 주의 미래를 다음과 같이 정확하게 예견했다.

“지금 상나라 왕은 자신이 살아남을 것만 알았지 망할 것은 생각하지도 않는다. 쾌락만 알았지 재앙은 모르고 있다.”

그러면서 “백성을 힘들게 하는 통치자는 누가 되었건 벌을 받아야 한다!”고 일갈했다. 춘추시대 현자 숙향은 진晉나라 공자 자비子比가 정쟁의 와중에서 나라(백성)를 얻기 힘들다면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로 정리했다.

“함께 어울려 잘 지내는 사람도 없는데 누구와 함께 미워합니까? ‘나라를 얻는 데는 다섯 가지 어려움(득국오난得國五難)’이 있습니다. 총애하는 자는 있는데 인재가 없는 것이 그 하나요, 인재는 있는데 지지 세력이 없는 것이 그 둘이요, 지지 세력은 있는데 책략이 없는 것이 그 셋이요, 책략은 있으나 백성이 없는 것이 그 넷이요, 백성은 있으나 덕이 없는 것이 그 다섯입니다.

사마천은 『사기』 곳곳에서 못난 정치와 그것이 초래하는 수많은 폐단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는데, 그는 정치 중에서 ‘가장 못난 정치란 백성과 다투는 정치’라는 천하의 명언을 남겼다. 숙향도 그렇고 강태공의 일갈 역시 사마천과 같은 의미일 것이다.

 

강태공과 같은 큰 정치가가 어느 때보다 절박한 우리 현실이다.

 

 

김영수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현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고대 한·중 관계사로 석사·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92년 박사 과정 수료 후 학위를 포기하고 본격적인 중국 공부에 나섰다. 중국 소진학회 초빙이사, 외국인 최초의 중국 섬서성 한성시 사마천학회 회원이며, 영산 원불교대학교 교수를 역임했다. 20년 동안 중국을 다니며 중국사의 현장과 연구를 접목해 인류 역사상 최고의 역사서『사기(史記)』를 통해 인간관계를 통찰하는 ‘응용 역사학’ 분야를 개척했다.

저·역서로는 『사마천과 사기에 대한 모든 것 1 – 사마천, 삶이 역사가 되다』, 『사마천, 인간의 길을 묻다』, 『성찰–김영수의 사기 경영학』, 『사기의 리더십』, 『완역 사기 본기本紀 1, 2』, 『완역 사기 세가世家 1』, 『현자들의 평생 공부법』, 『사마천과의 대화』, 등이 있다. 『고대 중국 야철기술 발전사』(역서)로 과학기술처 장관상을, 『사마천, 인간의 길을 묻다』로 섬서문학창작연구회로부터 ‘吉春史學奬’ 수상했다

 

[출처] 백성을 힘들게 하는 통치자는 누가 되었건 벌을 받아야 한다. '강태공'|작성자 몽촌

 

 

각색 모디스티 21.08.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