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아니면 살아남는 자가 강자일까. 처세학의 기준으로 본다면 후자가 정답이다. 직장인은 애초 강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래 살아남고, 승진하고, 정년퇴직하는 자가 ‘실존 처세학의 강자’인 것이다. 물론 가늘고 길게, 즉 오래 살아남는 것이 처세의 목적 그 전부는 아니다. 오뉴월 햇살처럼 한때 ‘전성기’를 누리는 호사를 맛볼 수 있다면 그야말로 직장 생활에서 천수를 누리는 셈이다.
▶전설 같은 처세 끝판왕 3인방
동서고금을 통틀어 수많은 처세 고수가 있다. 그들은 처세로 재상이 되거나 거부가 되기도 했고 전란의 시기에 자기 집 안방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이 같은 처세 고수들 가운데서 중국에서 전설급으로 회자되는 ‘처세의 달인’ 셋을 소환한다. 1900년 전 삼국 시대의 가후, 1400년 전 수나라와 당나라 때의 배구, 1100년 전 5대10국 시대의 풍도가 그 주인공이다.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많은 오너와 회사를 거치면서도 능력을 인정받았고 모두 천수를 누렸다는 것이다. 이들은 거침없는 행보를 보이면서도 유연한 사고와 능동적인 행동력으로 주군의 신임은 물론 백성의 존경까지 얻은 그야말로 역대급 처세의 달인들이다.
가후는 무려 여섯 주군을 모셨고 배구는 4왕조의 일곱 군주에게 신임을 받았다. 압도적인 것이 풍도다. 그는 ‘10조 원로十朝元老’로 불리며 ‘5조8성11군’ 즉 다섯 왕조, 여덟 성의 군주, 열한 명의 주군을 섬겼다. 무려 40여 개의 관직을 맡으면서 말이다. 범인은 상상조차 못할 인물들이다.
시골 출신에 집안은 그저 그런 형편. 그는 지방대를 졸업했다. 중소기업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해 몇 배나 큰 경쟁사에 치명타를 입히는 공적을 세웠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회사는 경쟁사에 M&A 당했다. 이 상황이라면 그의 앞날은 뻔하다. 한직으로 발령 난 뒤 몇 달을 버티지 못하고 사표를 던지고 나가는 수순이다. 하지만 그는 M&A를 한 회사에서도 회장의 각별한 신뢰를 받으며 승승장구했다. 부장으로 시작해 이사에 상무, 전무 그리고 사장까지 승진을 거듭했고 회장 아들인 부회장이 회장이 될 때까지 2대에 걸쳐 사장으로 근무하며 직장인으로서는 천수를 누렸다. 이가 바로 ‘가후’다
‘배구’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네 번이나 이직을 했다. 중간에 컨설팅을 해주면서 월급 받은 이력까지 더하면 총 여섯 회사에서 일곱 오너를 겪었다. 아무도 그를 주목하지 않았지만 그는 세 번째 이직한 회사에서는 ‘아첨꾼’ 소리까지 들으며 오너에게 맞춤형 처세를 해 이사까지 승진했다. 회장은 회사 실적보다 외부 평판, 퍼포먼스, 대외 활동을 더 중시했다. 그는 회장을 미담의 주인공으로 언론에 노출시켰고 각종 협회의 장을 맡게 함으로써 신임을 받았다. 이런 회사가 오래갈 리 만무. 회사는 경쟁사에 M&A당했다. 신임 회장은 임원급 간부를 모두 숙청했지만 그만은 중용했다. 평직원들이 그를 존경하고 따랐기 때문이다. 그는 신임 회장의 리더십에 맞추기 시작했다. 강직하고 원칙을 지키며 회장에게도 충언을 해 회사 안팎의 신임을 얻으며 승승장구했다. 회장 아들이 회장직을 승계할 때도 그는 ‘대를 이어’ 신임을 얻었다. 그가 바로 배구로, 가후보다 한 수 위다.
‘풍도’는 그야말로 ‘처세학의 끝판왕’이다. 풍도의 일생을 현대 직장인에 비유해 보자. 다섯 군데 회사에 근무하며 여덟 성을 가진 직장 오너 열한 명을 모셨고 임원을 거쳐 대표 이사로만 20년을 일했다.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일까. 사실이라면 그가 없으면 조직이 돌아가지 않는 특별한 인물이거나, 일당백 능력의 소유자일 것이다. 만약 그것도 아니라면 천하에 둘도 없는 아부와 처세로 팔색조 변신을 거듭하며 세태에 영합해 살아남았다고 밖에는 볼 수 없을 것이다. 그의 처세와 끈질긴 생명력에 대해서는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이 세 명을 처세의 달인으로 손꼽는 이유는 단지 ‘오래 살아남은 것’만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가치 있게 오래 살아남은 자’들이다. 그들은 맡은 바 직책에서 최선을 다했고 그 최선의 결과가 어떤 오너, 어떤 회사에서도 그들의 필요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결과와 평판을 가져온 것이다. 이 점이 바로 처세의 핵심이다. 단지 생존을 위해 간신과 아첨꾼이라는 오명을 감수하는 처세가 아닌, 자신의 존재 가치를 인정받기 위해 탁월한 능력과 불평 없는 한결같은 성실, 그리고 철저하고 냉정한 자기 관리를 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조직에 필요한 사람’으로 인정받았다는 점이다.
▶가후 “후배와 동료의 인정을 먼저 받아라”
가후는 147년 중국 시골에서 태어났다. 영특했던 그는 관직에 올라 머리 좋고 똑똑한 관리로 이름을 떨쳤다. 당시는 한 황실이 붕괴되고 도처에서 영웅호걸이 일어난 전란의 시기였다. 위기가 영웅을 만들어 내는 법. 가후 역시 이 혼돈의 중심부로 뛰어든다.
그는 당시 실력자 동탁 사위의 참모가 된다. 하지만 능력이 모자란 동탁은 왕윤의 계책에 말려 죽임을 당한다. 이틈에 세력을 잡은 이는 동탁의 부하 이각과 각사. 가후는 이들에게 몸을 의탁했지만 이들의 능력에 실망해 떠난다. 몇몇 영주를 찾았지만 그들 역시 가후를 품을 그릇이 아니었다. 가후는 장수에게 정착한다. 장수는 패권을 꿈꾸는 영웅. 가후는 그의 핵심 참모가 되어 당시 중원을 넘보던 조조와 한 판 승부를 벌인다. 장수와 가후를 무시한 조조는 유람 가듯 전투에 임했다가 가후의 계책에 말려 조카 조앙, 참모 조안민, 경호대장 전위 등 수족 같은 부하들을 잃고 만다. 조조의 대참패였다. 장수는 물론이고 가후는 조조의 철천지원수가 된 셈이다.
조조는 장수에게 복수하고 싶었지만 패권을 좌우할 일전이 남아 있었다. 바로 원소와의 대격돌. 원소와 조조는 각기 장수를 자신의 편으로 삼기 위해 사신을 보냈다. 장수는 당연히 군사도 많고 주도권을 장악한 원소와 손을 잡으려 했지만, 가후는 조조와 한편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조가 황제를 볼모로 잡고 있으니 명분에서 앞서고, 사람과 군사가 차고 넘치는 원소보다는 세가 부족한 조조에게 가는 것이 후에 더 대접받을 것이며, 또한 조조는 개인적 악연을 문제 삼지 않는 큰 그릇이다”라며 그 이유를 들었다. 가후의 예상대로 조조는 장수는 물론 가후를 반겼다.
조조에게는 막강 참모 군단이 있었다. 가후는 조용한 처세술을 폈다. 조조의 기를 살리는 조언에 타고난 재주가 있던 그는 간접 화법으로 자신의 의견을 전달했다. 타고난 성품 때문이기도 하지만 조언과 계략이 들어맞지 않았을 때 닥쳐올 부작용, 즉 실패의 희생양으로 죽어 간 수많은 사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손권, 유비와 적벽 대전을 앞두고 가후는 신중론을 펼쳤다. 조조 휘하의 무장과 참모들이 백만 대군을 휘몰아쳐 단숨에 유비와 손권을 쓸어 버리자고 큰소리칠 때 유일하게 가후만이 신중론을 폈다. 가후는 조조에게 ‘덕으로 다스리면 형주도, 손권도 조조에게 머리를 굽힐 것’이라고 조언했다.
후에 조조가 삼국 중 가장 강한 위나라를 창업하고 후계를 정하는 시기가 왔다. 조조는 가후에게 묻는다. “누구를 후계자로 삼으면 좋겠는가?” 가후는 답하지 않는다. 차기를 결정하는 것은 자칫 목숨과 바꾸는 일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조가 재차 묻자 답한다. “잠시 딴생각을… 원소와 유표를 생각했습니다.” 조조는 웃으면서 “직접적으로 대답하지 않는구나. 무슨 뜻인지 알겠다”고 한다. 가후는 원소와 유표가 장남을 후계로 지목하지 않아 분란이 생긴 전례를 빗대 자신의 뜻을 간접적으로 전달한 것이다. 물론 가후는 조조의 장남 조비와 친밀한 관계였다. 조비는 가후에게 모든 것을 상의했고, 가후는 조비에게 조조의 마음을 움직이는 꾀를 알려 주었다.
▶유연한 처신, 내 뜻만 고집하지 마라
가후는 물처럼 유연하고 융통성이 뛰어난 처신의 소유자였다. 그는 나설 때와 물러설 때를 알았다. 공을 다투는 논공행상에는 나서지 않았고, 위에는 순응하고 옆의 시기와 질투를 경계했다.
가후는 태위에 오르지만 자식들 결혼에도 조심했다. 권문세가의 혼담은 거절하고 대신 하급 관리, 평범한 집안과 사돈을 맺으며 주변의 경계심을 사지 않았다. 부를 축적하거나 명예에 집착하는 모습도 보이지 않았고, 목소리를 높이거나 고집을 내세우지도 않았다. 가후는 남자다움, 선비의 자세, 자존감의 표현이라고 여기는 만용과 자존심을 부리지 않았다. 조직의 논리와 상사의 뜻이 일치되어 갈 때는 그것이 비록 멀리 돌아가는 길일망정 급하게 물길을 바꾸려 무모한 짓을 하지도 않았다. 바로 이 같은 가후의 처세학이 간웅 조조 휘하에서 77세까지 장수한 비결이다.
우리는 ‘실세’라는 표현을 쓴다. 오너의 신임을 받는 특정 임원을 이르는 말이지만 오해하지 말자. 회사의 실세는 오너 한 사람뿐이다. 나머지는 오너가 나누어 준 일정 권력의 대리자다. 그들도 한밤중에 걸려 오는 오너의 전화벨 소리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고 고백한다.
직장은 때와 장소를 가려야 하는 공간이다. 자신의 생각을 발표하는 것, 특정한 사안에 찬성과 반대를 표하는 것, 대화에서 상사나 동료를 안주 삼는 것은 금기다. 농담과 진담의 구분을 모호하게 하면서 점점 양치기 소년으로 변해 가는 것, 학연·지연 등으로 파벌을 만드는 것, 자신의 주장에서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것, 권리만 주장하고 의무와 희생 그리고 팀워크라는 단어를 잊어 버리는 것…. 이 모두 때와 장소를 가려야 하는 직장에서 경계해야 할 요소다.
가후는 불리함을 극복했다. 그는 조조의 큰 그릇과 야망을 파악했기에 그에게 투항해도 목숨을 부지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사실 그것은 모험이었다. 조조는 가후를 받아들이면서 천하에 ‘하물며 가후도 받아들이는데’라는 인식을 심어 주었다. 그 표본이 가후였고, 가후는 기꺼이 그 역할에 충실했다.
일류대는 물론 해외 유학파가 우글거리는 직장에서 지방대 출신 경력직은 출세는커녕 생존 가능성마저 희박한 것이 실제 상황이다. 하지만 이런 불리함을 지렛대 삼아 승진가도를 달리는 최선의 비결은 주변 인식을 긍정적으로 바꾸는 것이다.
▶배구 “오너 성향에 맞추는 팔색조”
557년 강주 하동군 문희에서 태어난 배구는 어려서부터 시문과 역사에 능통했다. 그는 북제, 북주, 수나라, 당나라 등 네 왕조를 모셨고 중간에 우문화, 두건덕까지 무려 일곱 군주를 섬긴 이력의 소유자다. 수나라 때는 문제와 양제를, 당나라에서는 고조와 태종을 섬겼고, 특히 왕조의 멸망과 개국의 롤러코스터 같은 정국을 누볐다. 배구의 처세학이 진정 빛나는 것은 그가 모신 군주들 모두 배구의 능력을 인정했고 그를 아꼈다는 점이다.
배구가 스스로 선택해 모신 군주는 수 양제와 당 태종이었다. 두 황제 모두 역사에서 공과가 두드러진 영웅급 군주다. 배구는 두 사람에게 각기 다른 충성을 보였다. 양제에게는 리더십에 순응하는 처세로 일관했다. 직분에 소홀하거나 관리로서 능력이 부족했다는 말이 아니라, 양제의 야심과 목표를 직시했고 그것에 완벽하게 부응한 것이다.
배구는 수 문제를 보좌하는 참모로 활약했다. 그는 다방면에 박학한 지식과 뛰어난 기획력, 논리적인 지략으로 문제의 총애를 받았다. 양제가 수나라의 대를 이을 때 배구는 양제의 성격에서 ‘이벤트’와 ‘퍼포먼스’의 집착을 간파했다. 배구는 서역 근무를 자처했다. 서역은 약 40여 개 토호 세력이 있는 복잡하고 위험한 지역이었다. 하지만 이 지역은 중국과 서방, 중동 문물과 문화를 연결하는 중계소로 금과 꿀이 넘쳐났다. 이를 이용하기로 한 배구는 몇 년간 서역을 돌아다니며 이 지역의 모든 부족, 의복, 양식, 문화, 지리, 자원, 인종 등을 기록한 <서역도기西域圖記>를 집필해 양제에게 올렸다. 수 양제는 배구를 은청광록대부로 승진시키고 “배구는 나의 마음을 너무나 잘 알고 내가 생각한 것들을 실현시키는 재주가 있다”라며 극찬하고 40만 전의 상금을 내렸다. 그리고 배구에게 국가와 황실의 기밀을 관장하는 업무를 맡겼다. 배구는 우문술, 우세기, 배온, 곽연과 함께 ‘양제 5인방’으로 막강 세도가가 되었다.
양제는 고구려 정벌에 나섰지만 두 번이나 실패했다. 이는 수나라의 존폐에도 영향을 미쳤다. 수나라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양제는 지방으로 피난을 떠났다. 양제를 수행한 배구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는 수나라와 양제는 지는 태양이라고 결론 내렸다. 서산으로 떨어지는 해를 바라보며 충성을 다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양제에게 건의했다.
“군사들이 고향을 떠나 몇 년째 타향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군사들에게 이곳 과부나 여자들과 결혼해 가정을 이룰 수 있게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군사들도 마음이 안정되어 더욱 폐하께 충성을 다할 것입니다.”
양제는 배구의 의견을 받아들였고, 군사들은 배구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배구는 항상 하급 관리는 물론이고 일반 군사들에게도 웃는 얼굴과 존대로 대했다. 강도에 주둔하는 군사 대부분 이런 배구에게 호감을 가졌다. 618년, 양제의 근위대장 우문화급이 반란을 일으켜 양제를 비롯해 수많은 대신과 참모를 살해했다. 유일하게 목숨을 건진 사람은 배구였다. 우문화급이 그를 살려 주겠다고 결정하기도 전에 반란군 대부분이 ‘배구만은 살려야 한다’는 데 공감했다.
배구의 처세가 빛나는 순간이었다. 배구는 양제의 권력이 끝났음을 알고 있었다. 그는 곧 내부 반란이 일어날 것을 예측하고 군사들에게 배우자를 얻을 수 있는 정책을 펴 인심을 얻었고, 존대하는 태도와 웃는 얼굴로 호감을 사 둔 덕에 피의 쿠데타에서도 생존할 수 있었다. 배구는 이후 어떤 상황에서도 백성을 위해 주어진 역할과 책임을 다한다는 자세만은 잃지 않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배구의 최종 목적지는 당나라를 창건한 이연과 이세민이었다. 배구는 당 왕조에서도 신임을 얻었다. 특히 배구는 이세민이 황제에 즉위하자 처세를 달리하기 시작했다. 그는 당 태종이 듣기 싫어하는 간언도 주저하지 않았다. 양제의 비위를 맞추던 배구가 아니었다. 양제에게는 한마디 간언도 하지 않던 ‘예스맨’ 배구가 태종에게는 죽음을 불사한 직언과 충언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태종은 자신에게 간언한 충신들을 아낀 현명한 군주였다. 배구가 단순히 태종이 간언을 좋아하는 군주임을 깨닫고 변신한 것으로 치부하기에는 배구의 처세는 유연하고 능란했다. 역사는 양제와 태종을 섬긴 배구를 간신과 충신의 이중적 면모를 동시에 보인 인물로 평가한다. 배구는 리더십의 변화에 따라 처세를 맞춘 인물이다.
당 태종은 관리들의 뇌물 수수에 예민했다. 어느 날 태종은 몇몇 관리에게 시험적으로 뇌물을 전달했다. 일종의 함정 수사였는데, 그중 한 명이 뇌물을 받았다. 이에 분노한 태종은 뇌물을 받은 사문영사를 사형에 처하라고 명령했다. 이때 배구가 나섰다
“폐하, 뇌물을 받은 것은 당연히 처벌받을 일입니다. 하지만 폐하께서 사문영사를 함정에 빠뜨려 사형에 처한다면 올바른 일이 아닐 것입니다. 국가를 다스리는 근본은 군신 간 믿음에 있습니다. 비리를 다스리기 위해 군주가 신하를 속이는 방법을 선택한 것은 폐하의 통치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사형만은 면하게 하십시오.”
현명한 태종은 “많은 사람 앞에서도 남과 다른 의견을 말할 수 있는 인물이 배구다. 겉으로는 복종하는 척하지만 속으로 다른 마음을 품고 있는 자와는 다르다. 모든 대신들이 배구처럼 생각하고 처신한다면 내가 무슨 근심이 있겠는가?”라고 배구를 칭찬했다.
배구는 태종에게 정치를 덕으로 풀고 백성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고 충언했고, 태종은 위징, 방현령 등의 중신과 같은 반열로 배구를 아끼고 신임했다. 배구는 627년 7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수풍전호隨風轉好’ 상황에 따라 변화
배구의 처세가 달라진 것은 잔재주가 아니라 군주 때문이다. 배구는 수 양제의 보여 주기식 정치, 정복욕, 화려한 치장을 좋아하는 성격을 파악하고 그것에 맞추었다. 양제는 측근의 간언보다 자신의 판단과 능력을 과신했다. 그런 군주에게는 간언도 소용 없음을 배구는 알았다. 하지만 당 태종은 달랐다. 그는 군주, 사직, 백성의 삼위일체를 중요시했고, 백성을 위한, 군주를 위한 충언을 받아들였다. 배구는 당 태종의 성품과 통치술을 파악하고 간언과 충심으로 섬긴 것이다. 역사는 배구를 ‘수풍전호隨風轉好’ 즉 상황에 따라 변화하는 능동적인 처세의 달인으로 평가한다.
배구가 상황에 따라 능란하게 변하고 군주에 따라 ‘맞춤형 처세’를 취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 같은 처세만으로 배구가 네 왕조, 일곱 군주를 섬길 수는 없었을 것이다. 배구의 숨은 처세 비법은 바로 실력이다. 그는 수 양제를 위해 이역만리 서역에서 수 년을 보내며 그곳의 문물을 기록해 책으로 남겼고, 많은 부족을 수나라에 복속시키는 수완을 발휘했다. 또한 당 고조, 태종 치세에서는 탁월한 관리의 능력과 현명한 일 처리로 명재상이 즐비했던 당 태종 휘하에서도 신임을 잃지 않은 것이다. 배구는 권세를 누리고 높은 관직에 있었지만 사리사욕이나 부에 집착하지 않았다. 배구의 정적들도 그의 청렴함만은 인정했다고 하니 어쩌면 배구의 가장 탁월한 처세술은 청렴이었을 것이다.
정책에서 실패하고, 관리로서 능력이 모자라는 부분은 조직의 힘과 결속력으로 보강할 수 있다. 하지만 예로부터 지금까지, 부정부패와 사리사욕을 앞세운 관리들에게 재기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것은 역사의 평가가 정치적 책략과 처세에게는 관용을 베풀지만 탐욕에는 인색하기 때문이다. 그 증거가 바로 배구다.
▶풍도 “충성의 대상은 백성이다”
풍도는 882년 당나라 말기에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책과 글을 좋아했고 뛰어난 문학적 재능과 번득이는 지혜를 선보여 ‘미래가 촉망되는 기재’로 평판이 자자했다. 그는 당나라 말기 유주절도사 휘하의 속리로 첫 관직을 시작했다. 작고 힘없는 직책이었지만 풍도의 면모는 동료는 물론 상관도 함부로 할 수 없을 만큼 절도와 원칙이 있었고 인자하고 지혜가 돋보였다고 한다. 그의 이런 재능은 빠르게 다른 지역으로 퍼져 당시 거란에서도 중원을 침공할 때 제거하거나 납치해야 할 대상에 올랐다고 하니 풍도의 남다른 능력을 짐작케 한다.
풍도를 중용한 군주는 넷이다. 후당 명종이 처음으로 풍도를 재상으로 임명했고 그 다음이 요나라 태종 야율덕광, 후주 태조 곽위, 세종 시영이었다. 이들은 모두 5대10국 시대에 가장 명군으로 평가 받는 군주다. 이처럼 명군들이 풍도를 발탁하고 신임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이 바로 풍도 처세학의 요체가 되는 ‘현실주의’다.
풍도의 굳건한 생명력은 현실에 대한 올바른 직시다. 풍도는 수많은 사람이 권력이라는 불에 나방처럼 달려들다 타 죽는 것을 목격했다. 풍도는 책에서 배우는 학문과 현실 정치의 괴리를 일찌감치 꿰뚫고 있었다. 즉 이상과 이론에 치중하며 명분과 도리를 찾는 학문에서는 백성의 가난, 고통, 생명의 위협에 대처하는 현실적인 방안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풍도는 이상보다는 현실에 그리고 이론보다는 그것을 실제 적용할 수 있는 실천에 더욱 매달렸다.
기회주의자고 속물스런 인물이란 혹평을 들으면서도 그가 주변의 시선에서 자유스러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냉정한 현실 인식이 학자로서 그리고 관리로서의 책임과 의무에 바탕이 되었기 때문이다. 풍도가 수많은 왕 밑에서 자신의 재주를 펼칠 수 있었던 것은 엄격한 자기 관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풍도는 청렴하고 근면했다. 그는 막사에서 짚 더미를 깔고 자고 녹봉을 받으면 밥을 지어 부하에게 먼저 제공했다. 또한 고향에 돌아와서는 스스로 밭을 갈고 그것도 모자라 남의 밭까지 몰래 갈아 놓기도 했다. 재산이 생기면 전쟁 통에 끌려온 부녀자들을 사서 돌보다 고향으로 돌려보내기도 하고, 기근이 들면 곳간을 풀어 인근 백성들에게 양식을 베푸는 인정과 배려도 지녔다. 한번은 후량과 후당 간의 싸움에서 포로로 잡힌 ‘전토시’라는 미녀를 누군가 풍도에게 보냈다고 한다. 풍도는 그 미녀를 받아들였는데 집을 사서 그곳에 머물게 하고는 전쟁이 끝나자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가족에게 유언하기를 “땅 중에서 가장 쓸모 없는 땅을 골라 그곳에 나를 매장하라”고 할 정도였으니 그의 청렴도를 짐작할 만하다.
자신에게 엄격하고 타인에게 인자한 성품을 바탕으로, 군주보다 사직과 백성을 더 생각했기에 풍도는 오랫동안 살벌한 전쟁터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능력남’이라는 시샘 어린 질시도 있을 것이고 ‘처세꾼’이라는 모욕적인 평가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어떤 평가에도 불구하고 그는 ‘살아남았고’ 또한 ‘자신이 할 일을 수행하면서’라는 긍정의 수식어를 얻었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풍도의 일생은 처세학에 관심 있는 자라면 한 번쯤 부딪쳐야 하는 관문이자 목표점일 것이다. 그는 말년에 자신의 호를 따서 <장락노자서長樂老自敍>라는 책을 남겼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처세술과 인생관을 피력했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다. 풍도의 경우를 적용해 특정 개인이나 비선보다는 회사와 조직에 충성하고, 원칙에 입각해 맡은 바 업무와 직분에 충실하며, 동료나 후배에게 배려와 인정 베풀어야 하고 상사는 예의와 진심으로 대하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점은 다른 사람을 함부로 평가하고 단정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경계해야 할 일인가를 배우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실력을 키우고 그 어떤 상황과 역할에서도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숨은 내공’이 뒷받침이 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 처세의 고수가 전하는 처세 5계명
1. 청렴해야 명분을 얻는다·회사 일에 사적인 감정이나 이익을 개입하는 것은 당장 눈앞의 이득을 얻기 위해 미래를 포기하는 것과 같다.
2. 항상 공부하라. 그래야 지혜가 보인다·처세도 아부도 실력이 있어야 한다. 누군가의 기분과 분위기를 맞추는 것도 세상에 대한 판단과 이해 그리고 기본 실력 없이는 불가능하다. 한 번은 성공하지만 두 번째도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다.
3. 말을 할 때와 안 할 때를 정확히 구분하라·내가 해야 할 말인가, 내가 해도 되는 말인가, 이 말이 상대를 살리는가 죽이는가 혹은 칭찬인가 욕인가 충분히 생각해야 한다.
4. 이상과 현실을 이론과 실천에 접합해야 진정한 관리다·회사의 현실적 상황과 실무 감각 없이 다른 큰 회사와 비교하거나 상사를 다른 부서의 상사와 비교하는 것은 처세학은 둘째 치고 조직 생활의 기본이 없는 것과 같은 행동이다.
5. 능력을 과신하지 말라. 그래야 타인의 경계에서 벗어날 수 있다·남의 능력에 관대하고 자신의 능력에는 냉정할 필요가 있다. 자기 과신은 경쟁자를 만드는 가장 불필요한 행동이며, 자신의 밑천을 드러내는 지름길이다.
[글 박기종(커리어코칭 칼럼니스트) 사진 픽사베이, 포토파크]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641호 (18.08.14)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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