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삶과 리더십
이길진 지음
동아일보사/2004년 5월/293쪽/9,500원
▣ 저 자 이길진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졸업.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 중이며 일본 문학 작품 및 일본 문화와 관련된 많은 책들을 우리말로 옮겼다. 주요 역서로는 『설국』『사육』『도쿠가와 이에야스』『사카모토 료마』『료마가 간다』등이 있다.
▣ Short Summary
이 책은 일본 역사에서 전국시대라 불리는 일대 변혁기, 사회적 유동성이 격심했던 시기를 극복하고 천하를 통일하여 새 시대의 질서를 구축한 승리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발자취를 사실에 기초하여 기록한 것이다. 그의 인생은 문자 그대로 피와 땀투성이었다. 생명을 잃을 뻔한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때마다 이에야스는 이를 악물고 다시 일어나 위기를 벗어났다. 남이 견디지 못할 일을 참고, 남이 하지 못할 일을 인내로 일관한 지속력 - 이것이 바로 인간 이에야스의 리더십이었다.
이에야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히지 않는 의외성이 있다.
그의 행동 이면에는 이중, 삼중의 의미가 숨겨져 있는 경우가 많다.
성실인가, 신의인가 아니면 교활인가, 음험인가. 그 진폭이 크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속뜻을 헤아리기가 어렵다.
하나의 잣대로는 측정하기 어려운 깊이와 넓이, 여기에 인간 이에야스의 매력이 있다.
새로운 변혁기에 접어든 21세기에 우리는 또 한 차례 격심한 유동기가 도래할 것이라 예상하고 있다. 이러한 시기에 이에야스의 생애와 그의 리더십에서 살아남기 위한, 또는 승리하기 위한 어떤 힌트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 차 례
머리말
인고의 세월
난세의 논리
거대한 적
천하통일
새 시대의 질서
패업의 완성
인물소개
연보
인고의 세월
이에야스의 조상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조상인 마쓰다이라 가문은 현재의 아이치켄 서쪽 지역인 미카와의 마쓰다이라 마을을 발상지로 한다.
이곳의 주민들은 화전을 일구고 임업, 사냥 등으로 생활하는 집단이었다.
그런 집단을 전투원으로 조직하고
지도하는 역할을 해낸 것이 바로 도쿠가와 가문의 시조인 마쓰다이라 치카우지였다.
그는 세상을 잘 알고 있었다.
이런 메마른 땅에서 겨우 연명만 한다면 무슨 낙이 있겠는가.
치카우지는 주민들을 선동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치카우지의 지휘 하에 이웃 마을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치카우지의 비원이 당대에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들이 미카와의 중원으로 진출하여 평야로 진출하게 되는 것은 2대인 야스치카를 거쳐 3대인 노부미쓰 시대였다. 노부미쓰는 이에야스의 7대조로 도쿠가와 가문 창업의 영웅적 인물이다. 평야로 진출하겠다는 시조 치카우지의 염원은 노부미쓰 시대에 이르러 성취되어 1471년에 미카와에서도 가장 비옥한 헷카이 군의 안조 성을 아우르게 된다.
성장과 좌절
이로부터 다시 50년이 지났다. 이에야스의 할아버지인 기요야스의 시대가 되었다. 1523년에 13세의 나이로 마쓰다이라 가문의 주인이 된 기요야스는 무장의 자질을 구비한 인물이었다. 오카자키 성을 공격하여 빼앗고 야마나카 성도 함락했다. 기요야스는 몇 년 사이에 서부 미카와의 토호들을 모두 귀속시켰다. 이어서 기요야스 군단은 대거 국경을 넘어 오와리에 쳐들어갔다. 이것이 마쓰다이라 가문과 오다 가문이 격돌하게 되는 첫 시기였다. 그런데 1535년 겨울 기요야스가 오다 노부히데(노부나가의 아버지)를 공격하기 위해 모리야마에 진을 쳤을 때 가신에게 살해되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흉변이 일어났다. 이것을 역사에서는 '모리야마의 붕괴'라고 한다. 이 때 기요야스는 25세였다. 갑자기 주군을 잃은 마쓰다이라 군은 서둘러 오카자키로 철수했다. 기요야스의 아들 히로타다는 겨우 10세의 소년이었다. 이를 불안하게 여긴 노신 아베 오쿠라 등은 히로타다를 망명시키기로 했다. "우리는 어떤 고난에 부닥치더라도 기어이 주군을 오카자키로 복귀시켜야 한다." 이것이 아베를 비롯한 후다이들의 비원이자 의지였다. 그리하여 히로타다는 1537년, 12세 때 꿈에도 그리던 오카자키에 귀환했다. 그러나 마쓰다이라의 영지는 전과 같지 않았다. 전투가 있을 때마다 마쓰다이라 군은 수많은 사상자를 냈다. 게다가 거듭되는 출병에 녹봉은 부족하여 가난이 마쓰다이라를 엄습해 왔다. 그러자 마쓰다이라의 후다이들은 어린 주군 히로타다를 지키기 위해 싸움터를 누비고 처자를 먹여 살리려 밭에 나가 묵묵히 일했다. 당시에는 무사가 농사를 짓는다는 것을 큰 수치로 여겼다. 그러나 이런 비운이 있었기에 마쓰다이라는 주종 간에 누구도 흉내내지 못할 강한 유대로 맺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인질에서 인질로
히로타다의 장남 다케치요(이에야스의 아명)가 태어난 것은 1542년 12월 26일이었다. 어머니는 가리야의 성주 미즈노 다다마사의 딸 오다이였다. 그런데 이에야스가 태어난 이듬해 외조부 미즈노 다다마사의 뒤를 이은 아들 노부모토가 오다 쪽에 가담했기 때문에 히로타다는 아내 오다이와 헤어지게 되었다. 이에야스가 여섯 살이 되었을 때 숙부인 노부타카가 중신들과 짜고 히로타다를 아카자키 성에서 몰아내려 획책했다. 히로타다는 요시모토의 힘을 빌려 반대세력을 일소하려 했다 그러나 요시모토는 원병의 대가로 적자인 다케치요를 인질로 원했다. 1546년 8월, 6세의 이에야스는 수행원들과 함께 오카자키 성을 출발했다. 일행이 다와라에 상륙하자 다와라 성주이며 외조부(히로타다가 오다이와 이혼한 후 새로 맞이한 아내의 아버지)인 도다 야스미쓰가 마중 나와 있었다. 그런데 야스미쓰는 이에야스 일행을 배에 싣고 동쪽의 스루가와는 반대쪽 오다의 영지인 오와리로 데려갔다. 뜻하지 않은 횡재에 오다 노부히데는 기뻐했다. 노부히데는 즉시 히로타다에게 사자를 보내 권유 겸 협박을 했다. 그러나 자식의 생명이 걸린 일임에도 히로타다의 태도는 단호했다. "자식에 대한 애정 때문에 이마가와와 맺은 오랜 우의를 배신한다면 미카와 무사의 체면이 서지 않는다. 다케치요를 죽이든 말든 마음대로 하라." 결국 히로타다는 무사의 오기를 관철했다고 하겠으나 이에야스는 아버지로부터도 버림받은 결과가 되었다. 이때 노부히데는 이에야스를 연금했을 뿐 죽이지는 않았다. 이후 1549년 4월에 히로타다는 가신의 칼에 찔려 목숨을 잃었다.
암담한 나날
이에야스가 스루가의 수도인 슨푸에서 인질 생활을 한 곳은 지금의 다카쇼 부근이다. 여기서 그는 8세부터 19세까지, 인생에서 가장 암담한 시기를 보내게 된다. 겉으로는 평온하게 보였을지도 모르는 12년 동안이 그에게는 암담 그 자체였다. 오랜 세월 그는 얼마나 많은 굴욕을 참아야 했는가. 1555년 15세가 된 이에야스는 관례를 올리고 그 이름을 다케치요에서 모토노부로 바꾸었다. 그의 전 생애를 관통하고 있는 '조심성'이 표면화 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그는 극단적으로 경계심이 강한 인물로 야심이라거나 꿈과 같은 막연한 것은 전혀 믿지 않는 철저한 현실주의자였다. 그는 자신을 경계심과 방어본능으로 겹겹이 무장했다.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는 것이 아니라 몇 번이나 두드리고도 좀처럼 건너지 않았다. 이런 성격은 그가 모토노부라 불리던 15세 때 이미 형성되어 있었다. 후세 사람들이 보기에 이중인격이라 할 수 있는 이런 성격은 바로 10여 년간에 걸친 가혹한 환경이 가져다 준 산물이다. 배신과 음모가 다반사였던 난세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신중한 처사'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첫 출전
1557년 정월에 이에야스는 세키구치 요시히로의 딸과 결혼한다. 관례를 올리고 결혼을 하게 되면 무장으로서의 통과의례로 또 하나의 중요한 것이 첫 출전이다. 이에야스에게는 그 기회가 의외로 빨리 다가왔다. 이에야스는 첫 출전을 멋지게 승리로 끝마쳤다. 이 일련의 공격에는 이에야스다운 신중함이 나타나 있다. 부족한 병력으로 오다의 여러 성을 공격하고 가신의 소모를 최소한으로 줄임으로써 '미카와에 이에야스가 있다'는 인식을 심었다.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오랫동안 꿈꾸던 상경의 숙원을 달성하기 위해 스루가, 도토우미, 미카와에서 소집한 2만 5천의 대군을 거느리고 작전을 개시한 것은 1560년이었다. 이에야스에게 내려진 명령은 오와리 진격의 선봉이 되어 오다 군의 최전선에 있는 마루네 성채를 공략하라는 것이었다. 이마가와 군 중에서 사지에 던져지는 것은 언제나 마쓰다이라 군이었다. 이에야스는 적장 일곱 명의 목을 베어가지고 돌아와 요시모토에게 승전을 고했다. 전초전의 승리에 요시모토는 "수고가 많았다. 오타카 성에 들어가 인마를 휴식시키도록 하라."라고 명했다고 한다. 그러나 오타카 성은 오다의 영지 깊숙이 돌입한 곳에 있는 이마가와의 거점이다. 그러므로 휴식은커녕 위험하기 짝이 없는 곳이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이 오타카 성의 수비 교대가 이에야스의 목숨을 구하고 그 생애에 일대 전환기를 가져다주게 된다. 왜냐하면 이에야스가 오타카 성에 들어간지 얼마 되지 않아 요시모토가 오케하자마에서 노부나가의 기습을 받아 생명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노부나가와의 동맹
요시모토의 죽음은 이마가와의 '식민지'로부터 독립하겠다는 염원을 품고 있던 이에야스에게 분명히 절호의 기회였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신중을 기하면서 독립을 선언하지 않았다. 이마가와의 손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졌다고는 하지만 위협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이에야스의 가족을 비롯하여 가신의 가족 중에서 상당수가 인질로 이마가와의 땅에 연금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이에야스는 계속 이마가와의 동정을 살펴야 했다. 이러한 이에야스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던 것이 노부나가였다.
노부나가는 미카와만은 어떻게 해서든 안정시켜 두고 싶었다. 이에 노부나가는 이에야스에게 "오다와 마쓰다이라 두 가문이 손잡고 오다는 서쪽, 마쓰다이라는 동쪽으로 판도를 넓혀 마음껏 무위를 떨치는 것이 어떻겠나?"하고 제안했다. 이때도 이에야스는 신중했다. 자칫 판단을 그르치면 모처럼 되찾은 미카와 영지를 잃고 가문이 멸망할 수도 있다. 노부나가와 손잡을 것인가, 아니면 아직은 거대한 세력이 남아 있는 이마가와의 우산 밑에 있을 것인가. 중신들은 대부분 노부나가와의 동맹을 반대했다. 그 이유는 첫째로 오다에 비해 이마가와가 훨씬 더 강하다는 것, 둘째로 이에야스의 정실인 쓰키야마 부인이 이마가와의 일족이라는 것, 셋째로 쓰키야마 부인과 그 자녀, 중신의 상당수가 이마가와에 인질로 잡혀 있다는 것 등의 이유 때문이었다. 이에야스는 어디까지나 실리를 추구하는 인물이었다. 요시모토의 아들로 가문을 계승한 우지자네와 노부나가의 인물 됨됨이를 비교한 끝에 노부나가의 기량을 높이 샀다. 일단 판단한 이상 처자가 희생되어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중신들의 처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중신들의 반대를 뿌리치고 노부모토의 권고를 받아들여 기요스에서 은밀히 노부나가와 만나 공수동맹을 맺었다. 1562년 정월의 일로 역사에서는 이를 '기요스 동맹'이라고 한다.
이에야스는 본격적으로 동부 미카와로 진출을 감행했다. 지금까지 이마가와에 복속되어 있던 동부 미카와의 영주들이 잇달아 무릎을 꿇게 됨으로서 이에야스는 미카와의 통일적 지배를 향해 착실하게 한걸음 내디뎠던 것이다. 그리고 1563년 7월에 이르러 다시 '모토야스'란 이름을 '이에야스'로 바꾸었다. '모토'라는 글자는 요시모토의 이름에서 한 자를 빌린 것이었으므로 그 이름을 쓰면 이마가와 가문의 종속관계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개명은 이마가와 가문과의 완전한 단절, 즉 명실상부한 독립을 뜻하는 것이었다.
난세의 논리
미카와의 반란
외부로의 영지 확장에 나서기 위해서는 먼저 내부의 통일, 질서의 확립을 이룩해야 한다. 그런데 당시 미카와 일대에는 치외법권적인 집단이 남아 있어 이들 세력이 언제 적과 손을 잡고 반기를 들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것이 잇코슈 대사원이고, 또 이들 사원에 종속되어 있는 토착무사와 농민들이었다. 이들 사원은 이에야스의 아버지 히로타다로부터 '불입권', 즉 영주에 의한 수사와 체포권의 거부, 세공과 부역의 면제 등의 특권을 약속 받아 일종의 독립적인 종교왕국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하여 미카와의 영주인 이에야스에게는 충성을 바치지 않고 오직 오사카에 있는 본산인 혼간 사에 복종하여 추수한 벼를 모두 그리로 옮기고 이에야스에게는 벼 한 톨도 바치지 않았다. 1563년 9월, 이에야스에게는 눈엣가시와도 같던 잇코슈가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의 직접적인 원인은 벼의 징발에 있었다.
전국시대의 잇코슈는 광적인 열기를 띤 서민종교로, 그 조직도 웬만한 다이묘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군비를 갖춘 과격집단이었다. 반란에 가담한 자는 승려와 농민, 이에야스의 병졸들뿐만이 아니었다. 그 중에는 이에야스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유력한 가신도 포함되어 있었다. 시일이 지남에 따라 반란군은 차차 기세가 꺾이기 시작했다. 내란이 오래가면 언제 외적이 침입할지 모른다. 이에야스는 이듬해 2월 반란군과 화의를 맺고 세 가지 조건을 약속했다. 첫째, 반란에 가담한 무사의 토지는 몰수하지 않는다. 둘째, 사원과 승려는 종전처럼 대하고 압박을 가하지 않는다. 셋째, 반란의 주모자를 처형하지 않는다. 그러나 처음부터 이에야스는 약속을 지킬 생각이 없었다. 이에야스가 약속을 지킨 것은 제1항뿐이었다. 강경하게 항의하는 자는 모조리 체포하여 미카와에서 추방했다. 반란의 주모자들은 모두 영지 밖으로 도주했다. 도발과 회유, 이 양면 작전으로 이에야스는 서부 미카와의 안정을 되찾고 다시 동부 미카와로 진격하여 그 최대 거점인 요시다 성을 함락시킴으로써 드디어 미카와 전체의 통일을 완수했다. 이에야스는 조정의 칙허를 받아 성을 마쓰다이라에서 도쿠가와로 바꾸었다. 이것은 매우 의미가 깊다. 미카와를 통일한 시점에서 이에야스는 중앙정부, 즉 조정과 쇼군으로부터 미카와 전체의 지배자임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1567년 정월에 이에야스는 종5품 미카와노카미라는 관직을 받게 된다.
동맹자의 죽음
성실과 신의를 다해 20년 동안 노부나가와 동맹을 고수한 이에야스는 1581년 3월, 동부 도토우미에 있는 다케다 군의 마지막 거점 다카텐진 성을 3년에 걸친 포위 공격 끝에 탈환했다. 다카텐진 성은 이에야스에게도 요충지의 거점이었다. 다케다 가문이 패망한 뒤 노부나가는 이에야스의 공을 치하하여 스루가 땅을 그에게 주었다. 이리하여 이에야스는 미카와와 도토우미, 그리고 스루가를 합쳐 70여 만석을 가진 당당한 다이묘가 되었다. 그해 5월, 이 스루가를 준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이에야스는 노부나가가 머무는 아즈치를 향해 출발했다. 노부나가는 20여 년에 걸친 이 충실한 동맹자를 극진하게 환대했다. 5월 20일에 이에야스는 노부가와와 헤어져 소수의 수행원만 대동하고 교토로 향했다. 그는 교토, 오사카, 나라, 사카이 등을 유람하면서 노부나가의 가신과 거상들로부터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사카이는 자치제를 실시하여 무사의 지배를 받지 않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이에야스는 바쁜 나날을 보내다가 6월 2일 아침 노부나가와 재회하기 위해 사카이를 떠났다. 일본의 국부(國富)를 한데 모은 듯한 사카이 항구를 둘러보며 이에야스는 여러 가지를 깨달았다. 노부나가의 실력은 천재적인 전술의 구사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천하의 거상들을 조종하며 그 재력을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데 있다. 앞으로는 이러한 관점에 입각하여 더 경제전략에 힘을 쏟아야 할 것이었다.
이에야스는 밀려오는 감회를 누르면서 들판을 향해 천천히 말을 몰고 있었다. 멀리서 말을 달려오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나이는 교토의 상인으로 이에야스와 절친한 자야 시로지로였다. "큰일났습니다. 아케치 미쓰히데가 모반을 일으켜 노부나가 공이 오늘 새벽 목숨을 잃었습니다." 노부나가가 죽었다는 것은 바로 동맹자인 이에야스의 실추를 의미한다. "그러면 나도 교토에 들어갈 수 없겠군." 이에야스는 할 말을 찾지 못했다. 한 번도 배신하지 않고 지켜온 20여 년간의 맹약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자신도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다. 이리하여 이에야스는 생애에서 4대 위기의 하나로 전해지는 필사의 도피가 시작되었다.
이에야스 일행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산적과 폭도화한 백성들이 도처에서 길을 막고 호시탐탐 일행을 노리고 있었다. 그러나 상인 자야 시로지로는 그들을 회유하는 데에 금품이 제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리하여 가는 곳마다 돈을 뿌려 몇 번이나 어려운 고비를 넘겼다. 이에야스를 태운 배가 이세의 앞 바다에 나온 것은 6월 4일이었다. 그는 뱃머리에 서서 붉게 타오르는 바다를 감개어린 눈으로 바라보면서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노부나가가 사라졌으니 가이와 시나노는 주인 없는 땅이 되었다. 그렇다면 늦기 전에 내가 손에 넣어야 한다."
거대한 적
동부의 맹주
1582년 6월 6일, 오카자키 성에 도착한 이에야스에게는 시급히 해결해야 할 두 가지 과제가 있었다. 첫째는 노부나가를 살해한 미쓰히데에 대한 복수전이고, 그 다음은 가이와 시나노의 공략이었다. 노부나가의 죽음으로 동란의 조짐이 보이자 오다와라의 호조가 호시탐탐 가이와 시나노를 넘보았다. 가이는 이에야스가 노부나가와 함께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점령했던 곳이므로 남의 손에 넘길 수 없었다. 1582년 7월, 드디어 이에야스는 가이를 병합하기로 결심하고 반란을 진압하도록 했다. 때를 놓치지 않고 사카이 다다쓰구를 선봉으로 삼아 군사를 시나노 남부로 파견했다. 한편 호조 우지마사 군도 가이로 남하할 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8월 12일, 가이의 구로고마로 진격한 호조 우지마사 군은 대기하고 있던 모토타다 군에게 막대한 손해를 입고 패주하고 말았다. 그 후 약 80일 동안 양군은 전투를 중단한 채 대치했다. 그 사이에 계절은 엄동기에 접어들어 특히 보급로가 먼 호조 군에게는 불리했다. 이에야스는 이러한 적의 약점을 간파하고 화의를 제안했다. 호조는 이에야스의 가이와 시나노의 지배를 인정하고, 그 대신 이에야스는 둘째 딸을 호조의 아들에게 출가시킨다는 내용이었다. 이리하여 10월 29일에 화의가 성립되어 양 군은 군사를 철수했다. 그 결과 이에야스는 미카와를 비롯하여 도토우미, 스루가, 가이 및 남부 시나노에 이르는 5개 지방을 병합하여 138만 석의 거대한 영지와 동원 병력 3만4천을 소유하는 동부 지방의 맹주로 성장하게 되었다. 이로써 그는 히데요시에 대항 할 수 있는 일대 세력으로서의 입지를 확보했다.
강적의 등장
이에야스가 동부에서 5개 영지의 경영에 몰두하고 있는 동안 중앙무대에서는 히데요시가 눈부신 약진을 거듭하고 있었다. 히데요시는 하층 계급 출신이었으나 노부나가에 발탁된 뒤 놀라운 능력을 발휘한다. 무장으로서 뿐만 아니라 정치면에서도 발군의 실력을 발휘했다. 그가 노부나가 정권의 후계가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선배격인 오다의 중신들을 모두 제거하여 천하통일에 자신을 갖게 된 히데요시는 그 실력을 천하에 과시하기 위해 화려하고 거대한 대성곽의 축조를 명하고, 인근 30여 영주들을 불러 충성을 맹세토록 했다. 이것이 1583년 가을에 착공된 오사카 성으로 노부나가가 죽은 지 불과 1년 후의 일이었다. 당시 히데요시가 장악하고 있는 영지는 24개 주, 628만 석에 이르고 동원 가능한 병력은 무려 17만 7천이나 되었다.
히데요시의 행동은 민첩했다. 그러나 이에 비례해 그의 앞길을 가로막는 반 히데요시 세력도 빠르게 형성됐다. 그 중에서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장애는 노부나가의 차남으로 오다 가문의 실질적 계승자인 기요스 성의 노부카쓰이고, 또 하나는 동부의 영웅 이에야스였다. 히데요시가 볼 때 경박한 노부카쓰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은연중에 실력을 쌓아가는 이에야스의 존재는 큰 위협이었다. "도대체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신의를 지키기로 유명한 이에야스의 정체는 히데요시로서도 전혀 파악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언젠가 한번은 대결하지 않으면 안 될 숙명의 라이벌인 이에야스였다. 천재적인 모략가 히데요시는 눈엣가시인 이에야스를 회유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상대를 잘못 알았다. 회유에 실패한 히데요시는 '히데요시가 노부카쓰를 공격할 준비를 서두르고 있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소심한 노부카쓰는 이에야스에게 구원을 청했다. 기회가 무르익었다. 이에야스는 서서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에게는 '맹우인 노부나가의 아들 노부카쓰를 지키기 위한 의거'라는 대의명분이 있다. 이에야스는 그 대의명분을 내세워 의거를 위해 궐기한다는 격문을 사방에 돌리고 서쪽으로 진군했다. 1584년 3월 7일이었다.
패자가 된 승자
이에야스가 장기전 태세를 갖추자 히데요시는 당황했다. 그는 이에야스와의 대치에만 정력을 쏟고 있을 수 없었다. 규슈 평정이라는 큰일이 당면한 과제였기 때문이다. 끈질긴 줄다리기에서 먼저 손을 든 것은 히데요시였다. 1586년 정월, 양자간에 겨우 화의가 맺어졌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비록 화의를 맺기는 했지만 오사카로 올라올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히데요시는 여간 안타깝지 않았다. 이에야스를 올라오게 하여 신종의 예를 갖추게 하지 않으면 화의한 의미가 없는 것이다. 마침내 히데요시는 마지막 카드를 꺼냈다. 부인이 죽은 후 이에야스에게 정실이 없다는 점에 착안해 배다른 여동생 아사히를 이에야스와 혼인시키려 했다. 1586년 5월 이에야스는 하마마쓰 성에서 아사히와 혼례를 올렸다. 이것으로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의 매제가 되었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여전히 움직일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결국 히데요시는 최대한의 양보를 했다. 자기 어머니를 오카자키에 인질로 보내려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최고의 담보 제공이었으며 이보다 더한 굴욕은 없다. 여기에 이르도록 끈질기게 줄다리기를 한 이에야스의 뱃심과 정세 판단력은 놀라운 것이었다. 자기보다 강한 상대에게 거역하지는 않으나 굴복도 하지 않는다. 마침내 이에야스는 오사카에 가기로 결심한다.
1586년 10월 26일, 이날 밤 히데요시가 숙소로 이에야스를 찾아왔다. "나는 최고의 지위에 올라 있으나 미천한 출신이어서 다이묘들이 깔보고 있소이다. 내일 정식 회견 때는 여러 다이묘가 참석할 것이니 그 자리에서 귀하가 머리를 숙여 준다면 다이묘들도 나를 다시 보고 진정으로 복종을 맹세할 것이요. 내가 천하통일의 공을 이루느냐 이루지 못하느냐는 오로지 귀하에게 달려 있소이다." 히데요시는 간청했다. 이에야스는 그 솔직한 태도에 감화되어, 이튿날 오사카 성에 들어가 다이묘들이 있는 앞에서 공순(恭順)의 예를 올렸다. 굴복하기로 결심하기까지 이에야스는 히데요시를 무척 괴롭혔지만 일단 복종한 뒤에는 누구보다도 충실한 부하가 되었다. 이것은 그의 타고난 성격이다. 그렇다고 대망을 버린 것은 아니다. 단지 가슴 깊이 접어 두었을 뿐이다. 그는 현재로선 한 지방의 다이묘로 히데요시에게 신종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길임을 알고 있었다. 흔히 이에야스의 특징은 인내라고 한다. 그러나 이에 못지 않게 눈에 띄는 것은 재빠른 행동이다. 히데요시는 이듬해 불과 5개월 반만에 규슈 전토를 평정하고 7월 4일에 개선했다. 이에야스는 때를 놓치지 않고 오사카로 올라가 히데요시에게 축하인사를 했다. 히데요시는 이에야스의 태도에 낯간지러움을 느꼈으나, 그래도 상대를 완전히 복종시켰다고 생각하니 여간 흐뭇하지 않았다.
에도 입성
이에야스가 에도에 들어간 것은 1590년 8월 1일이다. 이 날은 오늘날의 추수감사절과 같은 날이었다. 이날 입성한 것은 길일을 택해 백성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서였다. 이에야스는 입성할 때 부대 행진을 했으나 모두가 갑옷이 아닌 흰 삼베로 만든 히토에란 홑옷을 입도록 했다. 이색적인 히토에 행진은 주민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 주었다. 이 복장은 후에 예장으로 바뀌어 해마다 8월 1일이 되면 가신들은 히토에에 긴 하카마(주름잡힌 하의) 차림의 복장으로 등성했다. 무사히 에도 입성을 마친 이에야스는 닷새째 되는 날 주민 모두에게 무료로 쌀을 배급했다. 군량으로 가져온 쌀과 고슈의 금 30만냥이 민심의 안정에 큰 힘이 되었다. 이에야스는 작은 영주나 토호에 대해 무리한 압력을 피했다. 농촌에 대한 그들의 지위를 인정하며 서서히 지배력을 침투시켜 나갔다. 당시 이에야스의 영지는 약 240만 석이고 그중에서 직할지는 1백여 만 석이었다. 이에야스는 영지의 급격한 개혁을 지양하고 점진적으로 지배를 강화시켜 나갔다. 히데요시 정권 하에서 최대의 영지를 소유하고 강대한 군대와 견고한 행정과 재정의 기틀을 구축한 이에야스가 중앙 정권에 대해 부동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을 것은 당연하다. 히데요시가 죽은 뒤 이에야스가 패권을 쥐게 된 기초는 간토 경영의 성공에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때 이에야스의 나이는 49세였다.
히데요시의 파국
천하를 평정하여 그 정점에 오른 히데요시는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린다. 폐쇄적인 상황에서 탈출구를 잃은 무사들 사이에 차차 불만이 쌓였다. 여기서 히데요시는 해외에 주목했다. 히데요시는 과대망상에 사로잡혀 명나라 침공의 교두보 확보란 구실로 1592년 7년간에 걸쳐 조선을 침략했다. 국력을 무시한 무모한 원정이 성공할 리 없다. 히데요시 정권은 와해의 길로 한 발짝씩 내디뎠다. 그 발소리를 민감하게 파악한 것은 이에야스였다. 이에야스는 서두르지 않고 내부의 모순을 슬기롭게 이용해 나갔다. 굳이 그가 손쓰지 않더라도 히데요시 정권은 붕괴의 길을 걷고 있었던 것이다. 안팎으로 좌절과 불안에 빠진 히데요시는 1598년에 접어들자 병상에 눕게 되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재기불능의 상태에 빠졌다. 히데요시는 자신이 죽은 뒤에 이에야스에게 후시미에서 정사를 담당할 것을 간청했다. 이에 대해 이에야스는 울먹이며 도요토미 가문의 수호를 맹세했다. 박진감 넘치는 이에야스의 명연기였다. 분명히 이에야스는 의리가 깊고 성실하다. 그러나 동시에 정권을 빼앗으려는 야망을 품고 있던 것도 사실이다. 1598년 8월 18일, 히데요시는 후시미 성에서 63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그때 이에야스는 57세였다.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의 죽음을 잠시 비밀에 부치고 조선에 출전해 있던 군사들에게 히데요시의 이름으로 철수를 명했다. 그리고 이 무렵부터 무장파와 문관파의 대립이 더욱 첨예화되었다.
새 시대의 질서
에도 바쿠후의 출범
1603년 2월 12일에 이에야스는 조정으로부터 우대신에 임명되는 동시에 세이이타이쇼군의 보직을 받았다. 이로써 그는 62세에 명실상부한 천하의 지배자로서 에도에 바쿠후(일명 도쿠가와 바쿠후)를 개설했다. 이에야스가 쇼군에 취임한 의도는 도요토미 가문의 2세인 히데요리와의 신분적 관계를 청산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즉 이에야스가 아무리 정치의 중추에 있다고 해도 형식상 히데요리 휘하의 다이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에야스는 쇼군이 되어 무가정권을 수립하여 히데요리와의 주종관계를 역전시키려 했다. 그러나 이에야스가 쇼군직을 택한 데에는 좀 더 깊은 의도가 있었다. 첫째는 조정의 영향력을 최소한으로 억제하고 무가의 전통에 따른 독자적 정치를 행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둘째 이유는 쇼군에 취임하여 바쿠후를 개설함으로써 도쿠가와 새 정부의 수립을 정당화하고 도요토미로부터 정권을 탈취했다는 세상의 비난을 사상적으로 극복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 같다. 이렇게 쇼군이 되어 에도에 바쿠후를 개설하여 도요토미와의 주종관계를 역전시킨 이에야스는 1605년 2월에 상경하여 후시미 성에 들어가고, 그 다음 달에는 후계자인 히데타다가 10만 대군을 이끌고 교토에 들어왔다.
오고쇼와 쇼군
1605년 4월 7일에 이에야스는 노령을 이유로 쇼군직을 3남 히데타다에게 물려줄 것을 조정에 주청하고 16일에 후시미 성에서 히데타다의 쇼군 취임식을 거행했다. 지금까지 쇼군과 다이묘의 관계는 다이묘들이 이에야스라는 개인의 힘에 굴복한 면이 많았다. 그러나 히데타다에 이르러서는 개인을 초월한 도쿠가와 쇼군 가문에 다이묘가 신종하는 관계로 이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통일된 중앙정권의 주권자 지위는 대대로 도쿠가와의 종가가 세습한다는 전통을 서둘러 확립하는 일, 이것이 이에야스가 60년에 걸친 고투와 인내 끝에 차지한 쇼군의 지위를 불과 2년 남짓만에 히데타다에게 물려준 최대의 이유였다. "히데요리, 그대는 이미 정권을 담당할 기회를 잃었다. 정권은 대대로 도쿠가와의 직계가 계승한다." 히데타다의 쇼군직 계승은 이런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이에야스는 쇼군직을 히데타다에게 물려준 지 2년 후 오고쇼가 되어 슨푸로 은퇴했다. 그러나 형식적인 은퇴일 뿐 오히려 정치의 실권을 쥐고 히데타다를 조종하면서 사실상 전국의 지배자로서 정치적 목표의 최후의 실현에 최후의 노력을 기울였다. 이에야스는 바쿠후 정치를 시작함에 있어 오고쇼가 정치적 실권자가 되고 쇼군이 중앙정권의 법적 주권자가 되는 이른바 이원정치를 채용했다. 에도의 중앙정권은 바쿠후의 기초공사를 당면 목표로 삼고 대폭적으로 인사개편을 단행하여 신세대라 할 만한 인물들을 등용했다. 이에 대해 슨푸의 이에야스는 문자 그대로 전국을 통치하는 정권으로 군림했다. 미카와 시대의 원로는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모두 교체했다. 이들 다채로운 인물은 오고쇼 정치의 강력한 브레인으로 도쿠가와 정권을 강화하고 바쿠후 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각 분야에서 강력한 정책을 추진했다. 이에야스의 인재등용의 원칙은 능력과 재능을 중시했다. 이에야스는 인간관리와 인사행정을 지향했던 것이다.
에도의 건설
이에야스가 쇼군이 되어 제일 먼저 착수한 것은 에도 성의 대대적인 확장과 시가지의 건설이었다. 쇼군이 되자 그 위광을 나타내기 위해서라도 총력을 기울여 에도 성의 대대적인 확장 공사를 서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대대적인 공사는 주로 세키가하라 전투의 공으로 영지가 추가된 다이묘들의 부역으로 행해졌다. 다이묘들은 자기 영지에서 농부들을 징발하여 에도로 데려왔다. 이는 군역이었다. 다이묘들로서는 영지를 급여받는 은혜에 대한 봉사였다. 에도 성은 1539년에 완성되었는데, 그동안 만성적인 재정 적자에 시달려 사카이와 오사카의 호상들에게 막대한 부채를 짊어지는 다이묘가 속출했다. '죽지 않도록, 그러나 살 수도 없게'라는 이에야스의 정책이 이와 같은 대대적인 부역의 강요로 나타났던 것이다. 1607년에는 나고야 성을 확장하는 등 다이묘들에 대한 부역은 그치지 않았다. 슨푸 성 공사 때는 도요토미 가문에 대해서도 인부와 자재의 차출을 강요했다.
종교의 규제와 탄압
히데요시가 설정한 정치권력과 사찰과의 관계를 이에야스는 법령과 제도로 정리했다. 노부나가는 파괴하고 히데요시는 단속을 강화한 데에 비해 이에야스는 법령으로 규제한 것으로 요약된다. 법령을 통해 바쿠후가 강조한 것은 첫째로 승려에 대한 학문의 장려다. 학문의 수행을 게을리하는 자는 사찰에 두지 않을 것, 주지나 승관, 선위는 학문에 뛰어난 자에 한하여 인정할 것 등이 규정되어 있다. 둘째로 본사(本寺)와 말사(末寺) 제도를 확립하는 것이었다. 즉 불교의 각 종파는 모두 본사를 정하고 그 밖의 사찰은 그 말사로 하며, 말사는 모든 일을 본사의 명령에 따르도록 규정했다. 그리고 각 종파에 있어 사제관계, 사찰 내부의 주지와 일반 승려와의 관계 등 상하관계를 엄히 규제한 조항도 설정했다. 셋째는 승관과 승위의 수여 등에 대해 조정의 권한을 억제한 점이 주목된다. 이것은 7개 사찰의 주지에 대해서는 칙허를 받기 전에 바쿠후의 동의를 얻도록 했다. 이 규정은 고미즈노오 천황을 분노케 만들어 천황이 양위하는 사건으로까지 번졌다. 바쿠후는 1613년에 그리스도교에 대해서도 영토적 야심을 가진 위험한 세력이므로 배척한다고 선언했다. 그리스도 탄압에 나선 바쿠후는 이에야스가 죽은 뒤 그 방침을 더욱 강화했다. 1616년 이후에는 무역도 금교(禁敎)로 인해 제한을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바쿠후는 쇄국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패업의 완성
다시 14년의 인내
이에야스는 바쿠후를 개설함에 있어 다이묘, 사찰, 조정, 그리스도교, 심지어는 천황에까지 제한을 가하거나 또는 탄압했다. 그러나 이에야스에게 가장 큰 장애물이 나라 한가운데에 버티고 있었다. 다름 아니라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존재였다. 도요토미 가문은 천하의 명문이라는 그 상징성은 잃지 않고 있었다. 안정세력의 중심이 슨푸의 이에야스였던 것처럼 사회 불안을 조성하는 세력의 중심은 오사카 도요토미 가문이었다. 전국의 로닌(실직한 무사)을 비롯하여 현상에 불만을 품은 자들은 심리적으로 오사카에 기울어져 있었다. 도요토미 가문을 동정하는 세력과 이에야스에게 반항하는 세력이 하나가 되어 폭발할 경우 지금까지 다져온 도쿠가와 정권은 뿌리째 흔들려 붕괴의 위험에 처하게 된다. 도요토미 가문은 지방의 한낱 다이묘가 아니라 반대세력의 총본산 같은 존재였다. 도쿠가와의 영구집권을 노리는 이에야스는 기회를 노렸다. 그러나 여전히 서두르지 않았다.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압박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도요토미 가문과 그 지지세력의 완전 소탕, 이것이 이에야스에게 남아 있는 최종 목표였다. 이에야스는 그 목표를 향해 59세부터 73세에 이르도록 14년을 기다렸다. 그러나 이때도 전면공격이 아니라 상대를 궁지에 몰아넣어 압박함으로써 자멸시키는 전략을 택했다.
이에야스의 끈질긴 압박작전은 1611년으로 이어진다. 그는 이 해 3월 고미즈노오 천황의 즉위식에 성인이 된 히데요리를 만나고 싶다며 회견을 제의했다. 히데요리는 실로 12년 만의 상경이었다. 이때 그는 당당한 체구를 가진 19세의 젊은이로 성장해 있었다. 더구나 그는 이에야스의 손녀의 남편이었다. 기뻐해야 할 일이었으나 이에야스는 경계심을 강화했다. 오사카 쪽에서 공손한 자세를 보이면 그를 한 다이묘로서 인정할 생각이었지만 언제 히데요리가 군사를 일으킬지 모른다. 불안한 싹은 더 자라기 전에 잘라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히데요리의 당당한 모습에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가문 소탕의 결의를 굳혔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회견은 무사히 끝났다. 형식적으로나마 히데요리를 신종시킨 이에야스는 다음 달, 상경해 있는 다이묘를 소집하여 다음과 같은 서약서를 받았다. 첫째, 에도의 법도를 굳게 지킬 것. 둘째, 법도와 바쿠후의 지시를 어긴 자를 은닉하지 말 것. 셋째, 가신 중에 반역자나 살인자가 발생했을 때는 추방할 것. 여기에는 통제를 강화하여 오사카 쪽을 압박하려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었다. 이 서약서는 4년 후에 공포한 '무가제법도'의 모태가 되었다. 이에야스의 압박작전은 도요토미 가문의 재정을 고갈시키는 방향으로도 진전되었다. 이에야스는 히데요리에게 히데요시 공의 공덕을 기리는 의미에서 사찰과 신사의 재건, 수축을 권했다. 오사카의 지출을 극대화하려는 의도였다.
오사카 성을 향하여
1614년 10월 1일 이에야스는 오사카 성에 대한 공격을 결의하고 다이묘들에게 출동을 명했다. 이 때 그는 병석에 누워 있다가 벌떡 일어났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바라던 일이다!" 이에야스는 10월 11일에 슨푸를 출발했다. 따르는 자는 불과 4백여 명이었다고 한다. 마침내 이에야스는 10월 23일에 나조 성에 도착했다. 이날 히데타다도 대군을 거느리고 에도를 출발했다. 다이묘들도 속속 오사카를 향해 모여들었다. 그 총수는 약 20만이나 되었다. 10월 23일에 교토의 니조 성에 들어간 이에야스는 히데타다의 도착을 기다렸다가 11월 15일 이 곳에서 출발했다. 그리고 17일에 이에야스는 자우스 산에, 히데타다는 오카야마에 진을 쳤다. 이에 오사카 쪽은 성에서 농성하며 날카롭게 대치했다. 마침내 각지에서 소규모의 전투가 벌어졌으나 이에야스는 본격적인 공세를 취하지 않고 유유히 포위망을 압축하면서 한편으로는 화평을 교섭하기 시작했다. 이에야스는 적의 힘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가장 유효한 방향을 모색했던 것이다. 이리하여 12월 19일에 강화가 성립되었다. 이렇게 하여 최소한의 희생으로 강화를 성립시킨 이에야스는 25일에 오사카의 본진을 철수하여 일단 니조 성으로 들어갔다가 이듬해 정월 슨푸로 개선했다.
최후의 승자
전투는 끝났으나 이 강화는 오사카 쪽에 예사롭지 않은 문제를 안겨 주었다. 강화를 둘러싼 내부의 갈등이 그것이다. 강화에 대해 심한 불만을 품고 있던 오사카 성의 로닌들은 다시 공격 태세를 취하고, 이에 따라 히데요리도 군량과 탄약을 준비하고 로닌들을 모집하는 결전의 의지를 보였다. 이리하여 모여든 로닌의 수는 7만이라고도 하고 13만이라고도 한다. 이런 상황은 이에야스가 바라는 바였다. 그는 사자를 보내 강경한 요구를 했다. "진실로 바쿠후에 적의를 품고 있지 않다면 그 증거로 히데요리가 오사카를 떠나 야마토 또는 이세로 가거나, 아니면 로닌들을 모두 추방하고 가신들만 남기도록 하라." 두 가지 모두 오사카 쪽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였다. 4월 5일에 오사카의 사자가 이에야스의 요구에 응할 수 없다는 뜻을 전하러 왔다. 이에야스는 즉시 출병을 결의하고 다이묘들에게 출전을 명했다. 그때 동원된 군사는 총 16만이었다고 한다. 이번에는 겨울 전투와 양상이 달랐다. 각지에서 격전이 벌어졌다. 7일의 전투에서 오사카 쪽은 2만의 군사를 잃어 주력이 전멸하고 말았다. 그리고 저녁에는 오사카 성이 자랑하는 덴슈카쿠도 불길에 휩싸였다.
성안에 난입한 이에야스의 군사들은 히데요리 모자를 찾았다. 이튿날 아침에야 가쓰모토가 겨우 발견했다. 히데요리와 요도(히데요시의 부인) 부인은 지하창고에 숨어 있었다. 가쓰모토의 부하들이 그 창고를 둘러쌌다. 이때 창고 안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부탁이 있어요." 요도 부인의 살려달라는 애절한 탄원이었다. 가쓰모토는 이 일을 이에야스에게 전했으나 이에야스는 잠자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이리하여 히데요시가 그토록 총애했던 요도 부인과 천하통일의 큰 꿈을 기대했던 히데요리는 서로 상대의 가슴에 단검을 찔러 목숨을 끊음으로써 도요토미 가문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그 후 이에야스는 오사카의 잔당을 철저하게 소탕했다. 도요토미 가문의 멸망은 이에야스의 집념이기도 했다. 그는 긴 생애를 통해 마지막 순간까지 여기에 목숨을 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에야스는 1616년 정월 21일에 매사냥을 하다가 복통을 일으켜 쓰러진 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4월 15일에 이에야스는 측근에게 명하여 애검인 미이케노리히로로 죄인의 목을 치게 하고 그 칼을 가져다 머리맡에 세우도록 했다. 이것은 죽어서 신이 되기 위한 신도(神道)의 의식이었다. 그가 숨을 거둔 것은 그 이틀 후인 17일이었다. 마침내 집념과 인내의 장거리 주자 이에야스는 75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유언에 따라 유해는 구노산에 매장되고 이듬해 4월 닛코산에 이장되었다.
이에야스가 남긴 유훈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사람의 일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가는 것과 같다. 서두르면 안 된다. 무슨 일이든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면 굳이 불만을 가질 이유가 없다. 마음에 욕망이 생기거든 곤궁할 때를 생각하라. 인내는 무사장구의 근본, 분노는 적이라 생각하라. 승리만 알고 패배를 모르면 해가 자기 몸에 미친다. 자신을 탓하되 남을 나무라면 안 된다. 미치지 못하는 것은 지나친 것보다 나은 것이다."
이에야스는 그 생애를 통해 거의 완벽에 가깝도록 이 모두를 실행한 인물이었다. 물론 그의 리더십과 역사적 공과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평가가 있다. 나라의 발전을 정체에 빠뜨려 스케일을 축소시켰다는 것이 그 대표적인 비판일 것이다. 그러나 이에야스가 기초를 다진 안정된 장기정권이 오늘날 일본의 번영에 크게 기여했다는 점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통기타 낭만캠프에서 펌함
각색: 모디스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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