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최대 노동조합인 전미자동차노조(UAW)에는 지난 8월 7일(현지시각)이 치욕의 날로 기록될 만하다. 이날 일본 닛산자동차 미시시피주 캔턴공장 근로자들은 UAW 가입을 압도적인 표 차이로 거부했다.
이번 투표 결과로 현대·기아차, 도요타, 혼다, 닛산 등 남부지역 외국계 자동차 공장으로 세력을 확장하려던 UAW의 계획은 또다시 좌절됐다. UAW는 3년 전인 2014년에도 테네시주 채터누가 폴크스바겐 공장 근로자들로부터 퇴짜를 맞았다. UAW의 본거지는 제너럴모터스(GM), 포드, 피아트크라이슬러 등 미국 빅3 자동차가 있는 중부지역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노조가 해주는 것은 없으면서 일자리만 위험에 빠뜨린다는 게 근로자 대부분의 생각”이라며 UAW에 일침을 놨다. 1979년 150만명에 달했던 UAW 조합원 수가 2010년 이후 41만명으로 쪼그라든 것은 이런 현실을 입증한다.
세계 자동차 산업사를 보면 흥망성쇠의 열쇠는 노사 관계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립적 노사 관계에 휩싸였던 자동차 회사들은 고비용 저효율에 봉착해 여지없이 무너졌다. 그 결과는 공장 폐쇄와 대규모 실업, 해외 매각이었다.
세계 자동차 시장을 호령하던 미국 GM은 과도한 복지 비용 부담에 시름시름 앓다가 금융위기 여파로 2009년 법원에 파산보호를 신청하는 수모를 겪었다. 정부의 공적자금에 연명하다 8개 브랜드 가운데 4개를 정리하고 14개 공장을 폐쇄하고 나서야 간신히 살아날 수 있었다. 미니, 재규어, 랜드로버 등 영국 자동차 회사는 만성적인 파업으로 경쟁력을 잃어 죄다 해외 기업에 팔렸다.
반면 일자리 보장과 생산성 확보를 위해 노사가 대타협을 이룬 자동차 회사들은 반전에 성공했다. 일본 도요타는 1951년 2개월 동안 계속된 파업으로 경영진이 총사퇴하고 근로자의 10%(1500명)가 해고되는 파국을 맞기도 했다. 그러나 1962년 회사 경쟁력을 최우선 순위에 두는 무파업 선언 이후 세계적인 회사로 도약했다. 도요타가 2010년 1000만대 리콜이라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넘길 수 있었던 것도 똘똘 뭉친 노사의 힘이었다. 공장폐쇄 직전까지 갔던 스페인과 이탈리아 자동차 회사도 협조적인 노사 관계로 발전하면서 위기를 넘겼다.
그렇다면 평균 1억원에 가까운 연봉을 받으면서도 매년 머리띠 두르고 파업하는 강성 자동차 노조의 나라 한국은 어느 쪽에 속해 가는 걸까. 그 답은 구구한 설명 대신 경쟁력 수준을 나타내는 숫자만 봐도 알 수 있다.
국내 완성차업체의 지난해 평균 연봉은 9213만원으로 일본 도요타의 7961만원(852만엔), 독일 폴크스바겐의 8040만원(6만2654유로)보다 대략 15% 높았다. 완성차 5개사의 평균 임금은 2005년 5009만원에서 11년새 83.9% 올랐다. 매출액 대비 임금비중은 12.2%로 폴크스바겐(9.5%), 도요타(7.8%)에 비해 월등히 높았다.
그러나 국내 공장에서 자동차 한 대를 생산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26.8시간으로 도요타(24.1시간)보다 11.2%, GM(23.4시간)에 비해선 14.5% 더 길다. 그런데도 자동차 수출 평균 가격(1만4200달러)은 폴크스바겐(3만6200달러), GM(2만6600달러), 도요타(2만2400달러)보다 40~60% 낮다. 부가가치가 낮은 중소형차 분야에 집중된 것이다. 임금 부담이 높은데 생산성과 채산성은 바닥인 전형적인 고비용 저효율 저수익 구조인 셈이다.
사정이 이러니 미래의 기술 경쟁력을 좌우하는 연구개발(R&D) 여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현대·기아차의 지난해 R&D 투자액은 4조원으로 폴크스바겐의 4분의 1, 도요타의 5분의 2 수준에 그쳤다. 국내 자동차 생산 대수가 2011년 466만대를 정점으로 지난해 423만대로 계속 감소한 것도 같은 배경이다. 그 결과 2015년까지 세계 5위였던 국내 자동차 생산 순위는 지난해 6위로 밀렸다. 한국이 자동차 생산기지로는 이미 매력을 잃었다.
이런 상황에서 마치 약속이나 한듯 여러 악재가 동시다발적으로 터져나오면서 한국 자동차 산업은 총체적 난국으로 빠져들고 있다. 중국의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쳬계) 보복으로 현대·기아차의 중국 판매량은 반 토막났다. 주력 모델 노후화로 미국 판매 실적도 부진하다. 한국GM의 철수설은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하지만 문제의 근원은 내부에 있다. 무엇보다 대립적인 노사 관계가 위기의 주범이다. 이런 위기에도 현대·기아차 노조는 제 잇속만 챙기겠다며 6년째 파업을 벌였다.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여론은 싸늘하다 못해 매섭다. 지난 5년동안 현대·기아차 노조의 파업으로 빚어진 생산차질대수는 무려 62만대, 금액으론 12조3000억원 규모다.
제품 경쟁력에서도 경고음이 커지고 있다. 고급차와 미래형 자동차에선 글로벌 경쟁사에 밀리고 중소형 양산 모델에선 중국산에 쫓기고 있다. 문재인 정부들어 최저임금 대폭 인상, 법인세 인상, 비정규직 제로, 근로시간 단축, 통상임금 이슈 등 비용부담을 높이는 정책까지 쏟아지고 있다.
자동차 산업은 한국 제조업 생산의 13.6%, 고용의 11.8%, 수출의 13.4%를 담당하는 핵심 산업이다. 한국 경제의 지속 가능성과 일자리 창출을 위해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분야다. 하지만 노사간 대타협 등 획기적인 변화없이 이대로 간다면 산업 자체가 공멸할 수 있다.
낡은 것이 작동을 멈추고 새로운 것이 아직 오지 않았을 때 중대한 위기가 닥친다는 말이 있다. 한국의 자동차 산업이 이 지점에 근접한 게 아닌지 매우 걱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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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9/14/2017091402906.html?main_col#csidxbe18f5fe1500b0eb32a8cc91332bb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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