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 백가락
가야금 명인 황병기 지음 / 풀빛
아마 내가 논어에 매료된 이유가 내 지척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이야기하는 바로 그 평범함 때문이 아닐까 한다.
군자란 태생적으로 만들어진 사람이 아니라, 부단한 노력에 의해 만들어지는 사람.
많은 국악인들은 한국 사람이라면 국악을 좋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도 편견이다. 음악을 애호하는 것에까지 애국심을 발휘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인류의 많은 음악 유산 중 서양의 클래식 음악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것도 문제지만, 한국 사람이니까 한국 음악을 좋아해야 한다는 생각도 편견이다.
지자와 인자, 지혜로운 사람이고 어진 사람. 지자는 서양적이고 인자는 동양적인데, 공자는 지자보다는 인자를 선호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동중정 정중동.
펀지나 이메일을 받고 답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내일 또는 나중으로 미루지 말고, 그 당장에 하는 게 최선이다. 미적이다가 보면 금방 일주일이 지나고 심지어 한 달도 지나 결국 답장을 안 하게 되기 때문이다. 지적인 사람이 후덕하기가 어려운 것 같다.
말은 통하면 그뿐이다 – 그 억양과 완급이 특이하여 마치 말과 노래의 중간처럼 느껴진 것이 잊히지 않는다. 성경린 선생이야말로 <악기>에서 ‘말만으로는 부족하여 노래가 나오고, 노래하는 것으로는 부족하여 손과 발이 움직여 춤을 추게 된다’는 것을 체험한 분이 아닌가. 공사 간의 행사에서 행해지는 인사말, 추천사, 건배사 등은 말이 장황해지기 쉽다. 마이크를 잡은 사람은 자신의 말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내용보다 흘러가는 시간이 훨씬 중요하게 여겨진다. 말을 줄여서 시간을 절약하는 편이 바람직하다.
‘홀로 프르고 프르기’ 즉 ‘독야청청’ 이러한 변함없는 푸름은 예로부터 군자의 절개를 상징하는 것.
흔히 악기를 배우려는 사람들이 처음에는 아무 선생에게나 배우다가 좀 잘하게 된 뒤에 좋은 선생한테 배우려고 하지만, 사실은 반대로 해야 한다. 바탕을 잘 잡으면 나중에는 웬만한 선생한테 배워도 되는 것이다. 공자는 사람의 천성은 원래 비슷한데 후천적인 습관과 교육에 의하여 서로 다르게 된다. ‘본성은 서로 가까운 것이지만, 습성이 서로를 멀어지게 한다.’ 양화편
인간의 본성, 자연처럼 ‘스스로 그러함’ 자연현상은 벼락이 치고 지진이 일어난다고 악하고 일기가 화창하고 꽃이 핀다고 선한 것도 아니다.
정직이 최선이다. 정직하게 산다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대아를 위하여 소아를 버리는 극기를 실천하는 것. 저울추를 이리저리 옮겨서 무게를 맞추듯 어떤 일을 처리할 때 사리에 맞게 변통하는 능력, 즉 ‘권(權)’ 특히 지도자의 자질 중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자신부터 올바른 것 즉 정직함이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사람들은 사후에 자신의 이름과 업적을 길이 남기려고 애를 쓴다. 자비를 들여서라도 전집과 자서전, 사진집을 내고, 흉상을 세우고… 만해 한용운 님의 침묵 후기인 ‘독자에게’를 보면 “나는 나의 시를 독자의 자손에게까지 읽히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그때에는 나의 시를 읽는 것이 늦은 봄의 꽃 수풀에 앉아서 마른 국화를 비벼서 코에 대는 것과 같을는지 모르겠습니다.”
교만한 것보다 고루한 것이 낫다 - 공자는 정당하게 돈을 벌 수 있으면 직업의 귀천을 따지지 말고 벌어야 한다. 말하자면 실용주의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분. 그래서 사람의 부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생각했던 것.
내가 이룬 가야금 산조를 ‘정암희제 황병기류’라고 하는데, 정만희라는 명인의 가락을 기본으로 삼아 황병기가 완성한 산조라는 뜻. 산조에서 어떤 가락을 만드는 것은 작곡이라 하지 않고 ‘짠다’고 한다. 마치 목수가 가구를 짜는 것과 같은 개념이다. 옛것을 있는 그대로 보존하는 인간 민속촌 같은 존재가 되고 싶지 않다.
음악을 물에 비유하면 나의 후배들은 여러 가지 청량음료와 이온음료처럼 맛있는 음악을 만들려고 하는데 , 나는 그저 생수, 더 나아가서 깊은 산 속의 약수처럼 순수한 물 같은 음악을 만들려고 했다. 더 쉽게 말하면, 나의 후배들은 재밌는 음악을 만들고 있는데, 나의 음악은 재미없는 음악이라고 생각한다. 법정스님이나 소설가 김훈처럼 음악보다는 조용한 것을 선호하는 분들이 내 음악을 좋아하는데, 그 이유가 바로 내 음악이 재미없기 때문인 것 같다.
공자는 후배들이 두려운 존재이지만, 어느 후배가 불혹의 나이인 마흔 살이나 지천명의 나이인 쉴 살이 되도록 이름이 알려지지 않는다면 두려워할 대상이 못 된다고 한다. 공자의 이 지적은 특히 음악의 경우에 더 심하다. 음악가는 스무 살이나 아무리 늦더라도 서른 살까지 이름이 알려지지 않으면, 두려운 존재가 못 된다. 음악의 꽃은 연주인데 연주는 스포츠처럼 육체적 행위이기 때문에 스무 살 이전에 그 기교를 숙달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떠한 악조건 속에서도 사람이 발분하면 오히려 더 뛰어난 정신 활동을 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된 소중한 경험이다. 3월에 수술 후유증으로 기저귀를 차고 연주, 5월에 독일 하노버의 현대음악제에 참가하여 가야금 독주를 했다.
서양에서는 20대의 청춘 시절이 인생의 전성기이고, 그 이후에는 차츰 쇠퇴하는 것으로 보지만, 동양에서는 청춘 시절은 미숙한 단계이고, 나이가 들수록 인간으로서 원숙해진다. 공자가 말씀한 인생 최고의 단계는 “일흔에는 마음이 원하는 바를 따라도 법도를 넘지 않게 되었다.” 최고의 원숙 단계.
가난 속에서 즐거움을 찾다 – 공자는 부유한 것이나 귀한 것을 나쁘게 본 것은 아니다. 다만 의롭지 않은 부귀공명을 멸시했을 뿐이다. 설령, 거친 밥을 먹고 물을 마시더라도 즐거움의 기준이 바뀌지 않는다는 뜻이다.
하늘을 원망하지도 않고 사람들을 탓하지도 않는다. 낮은 것을 배워서 위의 것에까지 도달했으니 나를 알아주는 이는 하늘일 것이다. - 헌문편 얼핏 공자의 인간적인 외로움이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 외로움은 추운 겨울 여전히 푸른 소나무의 그것처럼 청아하다. 공자의 꿋꿋한 기개와 청아한 자존심은 포기하고 싶은 순간마다 나의 등을 다독이는 따뜻한 손과도 같다.
선친은 자기 관리를 철저히 하는 분이었다. 회사에서 퇴근할 때 자가용을 두고도 약 30분간 걸어서 귀가했고, 귀가하면 손발을 씻고 손수 옷을 갈아입고, 자신의 거처인 사랑방 청소를 직접 하고, 자리를 깔았다. 방 안의 정리 정돈을 철저하게 하여 정전이 되어 깜깜한 속에서도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고요한 것을 즐겨서 TV는 물론 라디오도 일체 듣지않고, 신문만 열심히 읽었으며, 한국 소설은 잔소리가 많아서 못 읽겠다고 하면서 오직 중국 고전을 원문으로 읽었다.
억측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보면 중대한 결정을 내릴 때 누군가와 의논을 하려고 한다. 즉 자신의 억측에서 나온 결정에 힘을 싣기 위하여 의논이라는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다.
나는 덕을 좋아하기를 여색을 좋아하듯이 하는 사람을 아직 못 보았다. 아주 재미 있고 고급스러운 농담이다. 이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얼마나 놀라고도 웃음이 터졌을까. 아무리 덕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덕보다는 여색을 더 좋아한다고 했을 뿐, 그래서 좋다 나쁘다 하는 가치 판단을 일체 하지않은 점이 절묘다. 공자 자신조차 덕보다 여색을 더 좋아했는지도 모른다.
공자 하늘에 빌다 – 우리가 실제 살아가는 세상에서 크고 작은 것은 우리 몸이 척도가 된다. 사람보다 큰 코끼리는 크다고, 사람보다 작은 개미는 작다고 한다. 음악에서 빠른 곡은 박(拍)의 빠르기가 사람 심장의 박동보다 빠른 것이고, 느린 것은 사람 심장의 박동보다 느린 것이다. 서양음악에서 가장 느린 박이 1분에 40번, 한국 음악에서는 가장 느린 박이 1분에 20번이어서 그만큼 우리 민족이 느린 음악을 선호했다고 할 수 있다.
천재적인 예술가 백남준의 작품에 <태내자서전>이 있다. 어머니의 태내에 있었던 시절을 적은 것이다. 그중에 ‘나는 지구에 태어나기 싫으니 바로 하늘나라로 가게 해달라’ 인간세계에는 예술이 있다. 순전히 인간이 만든 인위적인 소리다. 종교도 인간이 만든 것이기 때문에 언어 못지않게 가짓수가 많다.
“하늘 무서운 줄을 알아야 된다.” “하늘에 죄를 지으면 빌 곳이 없게 된다.” 절대 왕권 국가인 조선왕조에서도 왕은 하늘이 무서워 함부로 권력을 휘두르지 못했다.
하늘에 대한 공경보다 사람에 대한 사랑이 우선이다
안연이 탄식하듯 우러러볼수록 더욱 높고, 뚫을수록 더욱 깊으며, 바라보면 앞에 계시다가도 문득 뒤에 계신다 - 자한 10장- 다른 제자들은 공자의 위대한 일면만을 말했지만, 안회는 이처럼 공자의 전모를 종합적으로 평했다. 특히 우러러볼수록 더욱 높다던가, 앞에 계신 줄 알았는데 문득 뒤에 계신다고하면서, 아무리 따라가려 하나 따라갈 길이 없다고 극찬한다. “어찌 선생님을 두고 제가 먼저 가겠습니까?”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공자는 하늘이 나를 망친다고 원망의 마음을 내비쳤다. 공자는 자신의 깊은 병 앞에서도 천명을 따르고자 했던 의연함을 갖춘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제자의 죽음 앞에서는 하늘을 원망하는 마음을 표현했다. 그것은 왜일까? “선생님, 통곡이 지나칩니다.” 통곡이 지나치다고? 그를 위해 통곡하지 않고 누구를 위해 통곡하겠느냐?
여류명창 김소희 선생도 안향련이 자기보다 낫다고 했다. 1981년 서른일곱의 젊은 나이에 약을 먹고 자살을 하자, 제자를 ‘몹쓸년’이라고 원망하면서 울었다. 그리고 제자를 위해 ‘진도 씻김굿’을 해 주었다.
“상을 치를 적에는 형식을 갖추기보다는 차라리 슬퍼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전통적으로 상을 당하면 곡을 했다. 본래 곡은 슬퍼서 우는 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슬프지도 않은데 ‘아이고, 아이고’ 하면서 곡을 한다. 어떤 사람은 곡을 하다가 뚝 그치고 돌아서서 미소를 짓기도 하지만, 곡은 반드시 슬퍼서 하는 게 아니라 고인에게 바치는 일종의 장송곡이다. 그래서 목청이 좋고 곡을 잘하기로 소문이 난 사람은 돈을 주고 모셔다가 곡을 시키기도 했다.
고인을 추모하는 행사는 고인의 위업을 기리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슬프기보다는 기쁜 행사다. 조선조의 예의에서도 장례는 흉례지만 제례는 길례다. 하늘을 원망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적인 것이다. 공자의 이런 인간적인 태도야말로 진정한 예라고 했다.
미와 선을 다한 음악
음악을 하는 사람은 연주할 때 열심히 들어주는 사람이 제일 고맙다. 음악을 연주 하는데 잡담을 하거나 딴청을 부리고 있는 사람처럼 얄미운 사람은 없다. 그래서 나는 청중이 먹거나 마실 때에는 절대로 연주하지 않는다.
음악은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연주되는 순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같은 예술이라도 미술이나 문학은 오랫동안 전해진다.
공자가 소음악을 듣고 석 달 동안 고기 맛을 잊었다고 하는데 여기서 석 달이라는 기간이 국악인에게 각별하다. (유학에서도 능구의 시간) 국안인들은 산(山)공부라는 것을 한다. 스승이 제자들과 함께 산에 들어가서 잠자고 먹는 시간 외에는 음악 공부만을 하는데, 그 기간이 보통 석 달 열흘간이다.
영국의 시인 키츠는 그리스의 항아리에 그려진 악기 연주 그림을 보고, “들리는 멜로디도 아름답지만, 들리지 않는 멜로디는 더욱 아름다워라.” 동양에는 예부터 줄 없는 거문고인 ‘무현금’ ‘몰현금’이 있는데, 줄이 없기에 소리를 낼 수 없어서 무릎 위에 놓고 바라보기만 하는 악기이다.
학생들의 정기연주회 때, 학생들이 기성인처럼 아름다움을 다한 연주는 못 하더라도 있는 정성을 다한 음악회, 즉 선함을 다한 음악회가 되도록 하자고 강조한다. 연주에서도 순수한 마음으로 혼신의 힘을 다한 연주는 그 선함이 청중에게 전달된다고 생각한다. 조용필은 목소리가 좋은 편은 아니지만, 전신 투구를 하여 부르는 그 선함이 대중에게 전달되어 국민가수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예술이 추구해야 하는 중용의 미
공자는 예술작품에서 무엇보다 예술 정신에 사악함이 없는 것, 다시 말해 순수한 것이라고 하였다. ‘사무사’다. 가시리나 청산별곡은 질투나 증오의 염이 전혀 없이 끝까지 믿고 기다리겠다는 여인의 말에서 사악함이란 찾아볼 수 없다. 삼국사기에 우륵이 눈물을 흘리며 좋은 음악을 “즐거우면서도 흐리지(질탕하지)않고 슬프면서도 비통하지 않으니 가히 아정(雅正)하다.” <관저>는 중용의 미를 지니고 있다는 극찬이다.
사람은 음악에서 완성된다
공자는 음악을 열심히 듣고 잘하면 앙코르를 요청하고는 이에 맞추어 자신도 함께 부르는 음악 마니아였다. 예술작품은 무엇보다도 그 정신이 순수해야 한다고 했다. ‘사무사’다.
공자는 철저한 인본주의와 생명주의자였다. 예술은 신과 자연에는 없고 인간세계에만 있는데, 예술 중에서도 가장 인간적이고 생명적이 음악이다.
사람은 태어나기 이전 태아 때부터 심장이 맥박 즉 리듬을 지니고 살다가 이 맥박이 그칠 때 자연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음악처럼 철저하게 시간적인 흐름인 것이다.
19세기 철학자 윌터 페이터 “모든 예술은 음악의 조건이 되기를 열망한다.” 공자는 “사람은 음악에서 완성된다.” 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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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90년대,
한 동안 나는 황병기 가야금에 매료된 적이 있었다.
국악도 음악도 가야금도 모르지만, 전통 녹차를 마시면서
테이프로 CD로 수도 없이 들었으니, 어쩌면 그 당시 시절의 겉멋이었을지 모른다.
신문이나 잡지, 혹은 TV를 보다가 황병기 선생이 나오면,
자세를 바르게 고쳐앉아 한 글자 한 순간도 놓치지 않으려고 밑줄 그어가며 집중한다.
그리고 결혼하고 아주 빈곤했던 시절이었을 때,
황병기선생이 부산에서 공연을 한다기에, 내 형편으로는 거금을 주고 표를 두 장 샀다.
그날, 남편은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를 데리러 간다고 펑크를 내어
나 혼자 아주 불안하게 연주를 감상했었다.
아슴한 기억이지만, 계속 제자들만 나오고
맨끝 무대에서 두루마기를 학처럼 곱게 입으신 선생이 나왔었다.
숨도 참아가며 뵈었다.
어느 행사, 사석에서 황병기선생의 부인 소설가 한말숙 선생을 만났다.
나는 다가가서 술 한잔을 따르면서(방파제 횟집) 황병기선생의 열렬한 펜이라고 까불었다.
유명인사들의 유언을 적은 책을 읽은 적이 있다.
한말숙선생이 "너희 아버지 재혼은 절대 안된다" 기발한 글을 읽으며
그런 부부도 되고 싶었다.
황병기 선생의 <논어 백가락>은 제목부터 국악인 답게 '가락'으로 멋지다.
내용이 건조한듯 밋밋하면서도 재미있게 읽었다.
선생의 글은 도덕경에 '상선약수'와도 같이 물맛이다.
조용하고 깊다
본래 살아온대로 표현되는것 같다
사람도 글도 책 안에 등장하는 지인들도 일반인이 만날 수 없는
유명한 사람들과 격조있는 인생이다.
글을 읽으면서, 내가 썼던 <논어 에세이, 빈빈> 가난하게 빈빈해서 기가 죽었다.
그래도 말하고 싶다.
삶은 다 제 각각이다.
논어 백가락은 황병기선생님다운 논어고,, 나는 내 꼴에 맞는 애환이 서린 서민 논어다.
그렇다해도 부끄러운 마음이 있다.
류창희 블로그에서 펌함
공자는 철저한 인본주의자이고 생명주의자였다. 예술은 신과 자연에는 없고 인간세계에만 있는데, 예술 중에서도 가장 인간적이고 생명적인 것이 음악이다. 사람은 태어나기 이전 태아 때부터 심장의 맥박 즉 리듬을 지니고 살다가 이 맥박이 그칠 때 자연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인생은 음악처럼 철저하게 시간적인 흐름인 것이다. 그래서 19세기 철학자 월터 페이터Walter Pater는 “모든 예술은 음악의 조건이 되기를 열망한다.”라고 했을 것이다. 인본주의자이자 생명주의자인 공자가 “사람은 음악에서 완성된다.”(〈태백〉편 8장)라고 한 것은 지언이라 하겠다.
-283쪽, <8부 사람은 음악에서 완성된다>
공자는 예악에서 세련된 것보다는 차라리 질박한 것을 좋아한다고 했다. 세련된 것보다 질박한 것이 인간의 원초적인 순수함과 생명력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 세련된 것은 좋지만 질박한 것, 흙내 나는 것이야말로 좋다. 세련된 것과 질박한 것은 반대의 의미지만, 질박하면서도 세련된 것이 최고일 것 같다. 판소리에서는 그냥 맑고 예쁜 소리는 알아주지 않는다. 그건 ‘노랑 목’일 뿐이다. 목소리가 쉬어서 탁해졌다가 탁함 속에서 피나는 공력으로 다시 맑아진 소리를 알아주는 것이다. 그렇게 맑아진 소리는 아무리 노래를 해도 다시 쉬지 않는다는 것이다. 산으로 백일 공부를 들어가서 잠자고 먹는 시간 외에는 소리를 하다 보면 목소리가 완전히 쉬어서 말하는 목소리조차 안 나오게 되지만 어느 날 그 쉰 소리 속에서 맑은 소리가 떠오르는데 그때의 기쁨이란 말할 수도 없다고 한다.
-273~275쪽, <8부 사람은 음악에서 완성된다>
인사회 카페에서 펌함
사람은 음악에서 완성된다
음악을 하는 사람은 연주할 때 열심히 들어주는 사람이 제일 고맙다. 연주를 하는데 잡담을 하거나 딴청을 부리는 사람처럼 얄미운 사람은 없다. 그래서 나는 청중이 먹거나 마실 때에는 절대로 연주하지 않는다. 공자는 남이 노래 부를 때는 열심히 들었을 뿐만 아니라, 잘 부르면 다시 불러달라고 재청을 하고 뒤이어 함께 따라 불렀다니 정말 음악을 들을 줄 아는 모범적인 청중이었다. 공자는 식욕이 좋았고 특히 고기를 즐긴 분이다. 하지만 제齊나라에서 ‘소韶’라는 음악을 듣고 3개월간이나 고기 맛을 잊을 정도로 심취한 끝에, 음악이 이러한 경지에까지 이르는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고 감탄을 했다.
'소’는 순임금 때부터 전해오는 고전음악인데 공자가 이런 정도로 감탄했으니 아마도 대단한 음악이겠지만, 실제로 어떠한 음악인지는 알 길이 없다. 고대의 미술이나 문학은 오랫동안 전해진 것이 많은 반면 악보도 녹음 기술도 없던 시절의 음악은 연주하는 순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서양에서도 고대 그리스의 문학이나 미술은 지금까지도 전해지지만 그리스의 아폴론 제전이나 디오니소스 제전에서 연주하던 음악이 실제로 어떤 음악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공자가 그토록 좋다고 한 ‘소’를 우리가 들을 수 없는 것이 안타깝지만 오히려 다행인지도 모른다.
공자의 말씀에 의거하여 각자가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중국 둔황의 동굴에서 발견된 옛 악보를 해독하여 오늘의 중국 음악가들이 연주한 CD를 어렵사리 입수한 일이 있는데, 듣자마자 크게 실망한 기억이 있다. 둔황의 석굴 안에 수백 년 동안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채 있던 악보가 발견되었다는 사실은 대단한 신비감을 자아내서 궁금증과 기대감을 가지고 사는 게 좋은데 현대 음악가들이 자기 식으로 해석하여 연주해버리면 싸구려 음악이 되어 듣는 이를 실망시키는 것이다. 영국의 시인 키츠는 그리스의 항아리에 그려진 악기 연주 그림을 보고, “들리는 멜로디도 아름답지만, 들리지 않는 멜로디는 더욱 아름다워라”라고 읊었는데 그럴법한 말이다.
우리 전통음악 중 남녀가 함께 부르는 ‘태평가太平歌’라는 가곡이 있다. 이 정도의 노래면 ‘소’의 수준일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서양음악 중 ‘소’의 수준에 달한 곡을 꼽으라면 J.S.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독주곡 파르티타 2번 중 ‘샤콘chaconne’을 들고 싶다. 바흐는 다성부로 구성하는 대위법의 달인이지만 ‘샤콘’에서는 특히 바이올린의 단음만으로 약 18분간을 끌고 가는 그의 작곡 솜씨는 참으로 경이롭다. 예수, 석가, 소크라테스 같은 성인들은 음악에 대한 언급을 거의 안 했지만, 공자는 <논어>에서 음악에 대한 말씀을 많이 했다.
예술은 신과 자연에는 없고 인간 세계에만 있는데 예술 중에서도 가장 인간적이고 생명적인 것이 음악일 것이다. 사람은 태어나기 이전 태아 때부터 심장의 맥박, 즉 리듬을 지니고 살다가 이 맥박이 그칠 때 자연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인생은 음악처럼 철저하게 시간적인 흐름인 것이다. 인본주의자이고 생명주의자이던 공자가 “흥어시 입어례 성어악興於詩 立於禮 成於樂”, 즉 “사람은 시에서 흥취를 일으키게 되고, 예에서 서게(인격을 갖추게) 되고, 음악에서 완성된다”고 한 말씀은 참으로 지언知言이라고 하겠다. 음악은 인류 역사에서 삶과 떨어질 수 없는 호흡 같은 것이었습니다.
누구나 기쁘면 저절로 멜로디를 흥얼거리고 노동을 할 때면 고단함을 잊으려 노동요를 부르고 슬프고 괴로울 때엔 공감 가는 노래에서 위로를 받기도 하지요. 글을 쓴 황병기 가야금 명장은 서울대 법대에 다니면서 동시에 국립국악원에서 가야금을 배웠습니다. 그 실력이 출중해 1959년 법대를 졸업하던 해부터는 같은 대학에 신설된 국악과에서 4년간 후학을 가르쳤습니다. 1962년 첫 가야금 곡인 ‘숲’을 작곡한 후 현대 창작 국악의 기원이 되었고, <침향무><비단길><미궁><달하 노피곰> 등의 가야금 연주 음반이 있습니다. 여러 권의 음악 관련 저서를 냈으며, <논어>를 풀어낸 <가야금 명인 황병기의 논어 백가락>으로 생의 지혜라는 특별한 연주를 들려줍니다.
글 황병기 담당 김민정 수석기자
음악은 인류 역사에서 삶과 떨어질 수 없는 호흡 같은 것이었습니다. 누구나 기쁘면 저절로 멜로디를 흥얼거리고 노동을 할 때면 고단함을 잊으려 노동요를 부르고 슬프고 괴로울 때엔 공감 가는 노래에서 위로를 받기도 하지요. 글을 쓴 황병기 가야금 명장은 서울대 법대에 다니면서 동시에 국립국악원에서 가야금을 배웠습니다. 그 실력이 출중해 1959년 법대를 졸업하던 해부터는 같은 대학에 신설된 국악과에서 4년간 후학을 가르쳤습니다. 1962년 첫 가야금 곡인 ‘숲’을 작곡한 후 현대 창작 국악의 기원이 되었고, <침향무><비단길><미궁><달하 노피곰> 등의 가야금 연주 음반이 있습니다. 여러 권의 음악 관련 저서를 냈으며, <논어>를 풀어낸 <가야금 명인 황병기의 논어 백가락>으로 생의 지혜라는 특별한 연주를 들려줍니다.
행복이 가득한 집 웹에서 펌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