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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신과 한니발의 배수진

modest-i 2017. 3. 29. 23:19

한신과 한니발의 배수진

 

                                                KISTI전문연구위원/국방대학교 명예교수 김 충영

기원전에 동서양에서 배수진을 쳐서 승리한 유명한 전투가 있다. 동양의 유명한 배수진은 한(漢)나라 한신(韓信)에 의해 실행되었으며 사마천 사기(史記) 회음후(淮陰侯)열전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한(漢)나라 유방이 초(楚)나라 항우에게 팽성에서 대패하여 (BC204년경) 한에 복수했던 제후들이 한을 떠나 초에 항복하고 말았다. 이러한 위기에 한나라 유방은 한신과 장이(張耳)를 조나라와 대(代)나라를 공격케 하였다. 한신은 대군(代軍)을 알여성(閼與城)에서 대파하고 병사 수만을 이끌고 동진하여 정형(井 :河北省 井 縣)으로 접근하여 趙나라를 공격하려 하였다. 이때 조왕 헐(趙王 歇)과 성안군(成安君) 진여(陳餘)는 한군의 공격에 대비하여 정형입구에 병력 20만을 집결시켜 대비하고 있었다. 이때 광무군(廣武君) 이좌거(李左車)가 주장인 진여에게 다음과 같은 전략을 제시하였다. “한장 한신은 황하를 건너서 위왕(魏王) 표(豹)를 잡고 대(代)나라를 공격해 재상 하열을 사로잡아 알여성을 피로 물들였다고 합니다. 이제 장이의 도움을 받아 조(趙)나라를 공격할 태세이며 승세를 타고 있으므로 예봉을 막기란 어렵습니다. 그러나 천리먼곳에 군량을 보내면 수송하기가 어려워 兵士들에게 밥을 지어 먹여도 배불리 먹일 수 없음으로 해서 兵士들 얼굴에 굶주린 빛이 돕니다. 지금 정형의 길은 협소하여 두 대의 수레가 나란히 갈 수 없고 기병도 대형을 지어 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행로가 수백리되고 치중은 반드시 후미에 있음이 틀림이 없기 때문에 기병 만만 저에게 주시면 다른 길을 통하여 치중을 차단하겠습니다. 장군께서는 물길을 깊이 파고 누벽을 높이 쌓아 진영을 굳게 지키기만 하고 漢군과 싸우지 마십시오. 그러면 한군은 전진해 싸울 수도 없고 후퇴하려 해도 돌아갈 수 없으며 기습병이 적 후미를 차단하고 식량을 치워버리면 10일 이내에 한신과 장이를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진여(陣餘)는 유학자라 기습작전을 택하지 않고 “병법에 병력이 10배면 적을 포위하고 2배면 대적한다고 했는데 한신의 병력은 수도 적고 천리먼 곳에 와서 피로가 극에 달했을 것이므로 이런 적을 대적하여 격파하지 않는 다면 후일 제후들이 우리를 비겁하다하고 가벼이 덤벼들 것이다.”라고 하여 광무군 계책을 쓰지 않았다.

정형로가 협소한 것을 우려한 한신은 간첩을 조나라에 풀어 알아 본 결과 광무군 계책을 쓰지 않는다는 것을 안 다음에 감연히 정형로로 이동시켰다. 정형구에서 30리쯤에 숙영하고 야반에 경기병 2천을 선발하여 붉은 기를 하나씩 들고 다른 길로 조군에 접근케 하여 조군이 패할 때 조군의 성벽에 올라가 붉은 기(漢나라 상징)를 세우도록 지시하고 전군에 식사를 배급한 다음 조군을 격파한 후에 모두 식사하도록 하자고 지시했으나 한군은 한신의 지시에 따랐으나 조군을 그렇게 빨리 격파할 지는 예측하지 못했다.

한신은 일만 군사를 먼저 출발시켜 정형구로 나가 배수진을 치게 했다. 날이 새자 한신은 북을 치며 진격하여 조군이 있는 정형구로 나아갔다. 조군은 정형구에 설치한 누벽을 열고 나가 싸웠다. 한참 격전이 벌어지고 있을 때 한신과 장이는 거짓 패하여 하수가 있는 한군진으로 도망을 가니 배수진을 치고 있던 한군은 한신과 장이를 맞아들인 다음에 죽기로 싸웠다. 이때 조군은 누벽을 비웠기 때문에 기습병 2천기가 누벽을 점령하고 붉은 한나라 기를 세웠다. 조군은 배수진(背水陣)을 친 한군을 도저히 이길 수 없어 누벽으로 돌아와 보니 누벽은 한군이 점령해 있음으로 해서 크게 놀라 병사들이 어지러이 도망하게 되어 조군을 크게 격파하고 성안군 진여를 저수(低水)에서 베고 조왕(趙王) 헐(歇)을 사로잡았다. 한신은 광무군 이좌거를 절대 죽이지 말고 생포하는 자는 천금 상금을 걸어 이좌거를 생포하자 포승을 풀어주고 스승으로 섬겼다. 모두 전승을 축하하며 이 기이한 작전에 대해 토의가 있었다. “ 병법에 산능을 등지고 수택을 앞으로 한다고 되었는 데 이번에 장군께서는 하수를 등지고 포진하여 조군을 격파하고 식사하자고 하였으니 저희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결국 승리했는 데 이것은 도대체 어떤 전술을 적용한 것입니까?“하고 한 장군이 물었다. “제군이 병법을 읽고 깨닫지 못해서 그렇지 이것도 병법에 있는 것이다. 병법에 사지에 몰아 넣음으로서 살고 망지에 둠으로서 멸망치 않는다고 하지 않았는가(孫子 九地篇, 死地則戰 死地 吾將示之以不活) 그리고 내가 평소 정예병사를 거느린 것도 아니었고 시정인을 몰아 전투에 참가시킨 형편이므로 사지에 두어 사람마다 자기가 살기 위하여 싸우게 하였던 것이다. 만약 생지에 이들을 두었다면 모두 달아나고 말았을 것이니 이래서야 어째 전투할 수 있겠는가?”라고 한신이 대답하였다. 이때 모든 제장들은 한신의 말에 감탄하였다.

유능한 장군은 역시 유능한 장군을 알아본다고 한신은 광무군 이좌거에게 연(燕)과 제(濟)를 치는 방법을 물었다. 광무군은 패군지장(敗軍之將)이라 사양하다가 광무군은 말했다.

“똑똑한 사람에게도 천번 생각하여 한 번 실수할 수 있고, 어리석은 자에게도 천 번 생각하여 한 번 득을 볼 수 있다(知者千慮一失, 愚者千慮一得)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광인의 말도 성인이 취할 말이 있다고 합니다.” 라고 한 다음 한신장군에게 연(燕)과 제(濟)나라를 공격할 계책을 진언하였고 한신은 이들 진언을 취하여 연과 제를 점령하여 중국천하를 유방, 항우 그리고 한신으로 삼분할 위치에 서게 되었다. 사실 이 때 유방은 항우에게 패하여 세력이 외로운 상태이고 항우의 용장 용저(龍沮)는 유수(산동성에 있음)에서 한신의 수공전에서 패하여 항우 역시 유방과 한신을 양면에서 대적해야 함으로 역시 외로운 처지였다.

이때 괴통은 한왕 밑에 들어갈 것이 아니라 독립왕이 될 것을 건의했으나 한신은 듣지 않았다. 뒤 한왕이 중국을 통일한 후 한신을 체포했을 때 “빠른 토끼가 죽으면 좋은 사냥개는 삶아 죽게 되고 높이 나는 새가 없어지면 좋은 활을 창고속에 둔다. 적국이 멸망하면 똑똑한 신하는 망한다.”(巧兎死 走狗烹, 高鳥盡 良弓藏 敵國滅 謀臣亡)는 옛말이 지극히 당연하다고 탄식하면서 괴통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한탄했다고 전한다. 한신은 조나라를 진무하고 연나라를 평정하고 항우(項羽)의 초나라군을 해하(垓下)에서 무찔렀으나 전투에 승리한 이를 최대로 활용하지 못하였으며 통일 후에 너무 자기 공에 대해 자만하고 다른 공신들과 같은 동열에 서는 것을 불만스럽게 생각하다가 결국 漢高祖(유방)의 부인 여후(呂后)에게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시실리 전투에서 아테네군이 패하게 되고 뒤이어 육군을 주력으로 하는 스팔타군이 해군을 주력으로 하는 아테네에 승리하게 되자 지중해의 제해권은 서서히 칼타고로 옮겨지고 지중해의 중심권인 시실리도 칼타고 식민지가 되어버렸다. 칼타고는 살르디아를 종속시키고 북부 아프리카를 지배하고 더 나아가 스페인 일부까지 손을 뻗었다. 한편 로마인은 삼늄인과 에톨스키인을 복속시키고 이태리 전역을 점령한 다음에 地中海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제1차 로마 칼타고 전쟁(제1차 포에니 전쟁)이 발발하였고 이때 칼타고의 번개장군 하밀카르는 육전에서 6년간 지탱하였으나 막강한 칼타고 海軍이 패하므로 해서 로마의 승리로 끝나고 말았다.

그후 하밀카르는 칼타고를 안정시키고 스페인으로 가서 새 영토를 개척하고 육로로 로마로 침공하여 제1차 포에니 전쟁에서 잃었던 지중해 제해권을 되찾고 이태리 땅에서 결정적으로 승리함으로써 궁극적으로 로마 공화국을 해체시켜 로마의 위협을 영원히 분쇄하려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으나 준비가 채 익기도 전에 세상을 떠나고 이 계획은 그의 아들 한니발(Hannibal)이 수행하게 되었다. 여기서 푸르타크 영웅전에서 기술하고 있는 칸네회전을 중심으로 한 기록을 정리하여 기술해 보면 다음과 같다.

한니발은 아페닌 산맥을 넘어 이태리로 순조롭게 진군하여 B.C.218년 트레비아(Trebia)강변에서 B.C.217년 트라시메누스(Trasimenus)호반에서 로마군을 대파하고 이태리 전역을 휩쓸게 되었다. 이때 로마는 파비우스 막시무스(Fabius Maximus)將軍을 내세워 지연전(遲延戰)으로 한니발에 대응하여 지루한 지구전이 전개되었다. 파비우스는 한니발과 진지쟁탈전을 피하고 동맹국들을 강화하고 동맹국 중에서 이탈하는 나라가 없도록 단속하는데 치중하였다. 이때 성격이 무모하고 호언장담하기를 좋아하여 일반대중에게 인기가 좋은 헤렌티우스 바로가 로마 집정관(執政官)이 되자 바로는 경험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너무 자신에 차서 일전에 한니발을 격멸 시키려고 하였으며 파비우스 같은 인물이 장군으로 있으니 전쟁에 아무전전이 없이 백성들만 피해를 본다고 비난하고 자기는 적을 만나는 즉시 정벌하겠다고 호언하여 백성들의 인기를 얻어 로마가 일찍이 구경도 못했던 대군을 모았는데 그 병력수가 8만 8천에 달했다. 파비우스와 다른 현명한 인사들은 만일 실패하면 많은 로마 壯丁을 잃게 되면 로마가 다시 일어나기 어려울 것으로 염려하여 또 한사람의 집정관 파울루스 아에밀리우스(Paulus Aemilius)에게 무모한 결전을 피하도록 간청하였다. 그러나 파울루스는 애석하게도 인민이 싫어하는 사람이며 인민이 잘 따르지 않는 사람이었다. 파비우스는 파울루스에게 나라의 안전을 도모하려면 한니발과 싸우는 것 못지않게 헤렌티우스 바로(Terentius Varro)와 싸워야 한다고 지적하면서 바로는 자기 힘을 모르고서 싸우려 하고 한니발은 자기의 약점을 알고 어서 싸우려 한다고 말했다.

바로는 민중의 지지를 얻어 파울루스의 決心을 꺾고 하루 건너 군을 지휘하기로 결정하고 칸네(Cannae)라는 촌락 부근 아우리푸스江가에 한니발軍과 가까이 진을 쳤다 (B.C.216). 지금까지 파비우스의 지연전술로 무수히 참아온 로마군의 용기는 충만해 있고 여기에 더하여 방대한 대군이 집결해 있었으므로 이를 본 칼타고군은 기가 질릴 지경이었다.

한니발은 수적으로 열세하고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된 용병임을 감안하여 江을 뒤로 두고 배수진(背水陣)을 쳤다. 그리고 좌우익에 강한 군대를 배치하고 약한 군대를 중앙에 두어 활모양으로 중앙의 군대를 적 앞으로 나오게 배치하였다. 이른 새벽이 되자 로마군에게 전투신호가 올려지고 한니발은 진형을 갖추도록 명령을 내리고 산에 올라 적을 내려다보았다. 기스코라는 장군이 적의 수효가 놀랄 만하다고 말 했을 때 한니발은 기스코장군에게 이렇게 물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을 왜 보이지 않소?” 그것이 무엇이냐고 기스코가 묻자 한니발이 말하기를 “당신이 보는 저 많은 사람들 속에는 기스코라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요” 이 말은 웃음거리가 되어 곧 진중에 퍼졌고 칼타고군은 용기를 얻었다.

이른 새벽 억센 바람이 심한 먼지를 일으키면서 칼타고군 등을 지나 전진해 오는 로마군 안면에 내리 끼얹었다. 칼타고군의 중앙부대는 먼저 전진해오는 로마군을 맞아 지는 듯이 뒤로 물러서자 로마군은 중앙부대를 추격해 들어오자 한니발군은 반월형이 되면서 좌우강군이 로마군의 측면을 공격하여 반월형 안에 있는 로마군을 무차별로 도살하고 포위를 면한 병사만이 간신히 살았다.

전쟁 중에는 우연한 일이 벌어졌는데 로마군이 진격하는 중에 집정관 파울루스의 말이 상하여 파울루스가 말에 떨어졌다. 이때 막료들이 그를 구하려 말에서 내렸는데 이것을 본 군대는 하마령이 내린 줄 알고 모두 말에서 내려 싸웠다. 한니발은 이러한 전황을 보고 “적의 손발을 모조리 묶어 내게 넘겨준 것보다 더 반가운 일이다” 라고 말했다고 하고 또는 “그 놈들은 자기를 쇠사슬에 얽매어 두고 내 앞에 나타나겠다는 말인가” 라고 말했다고 한다. 바로는 소수의 부하를 데리고 베누시아로 도주하였고 파울루스는 전중에서 용전분투하다가 “나는 먼저 바로한테 지고 다음에 한니발한테 졌다” 라는 말을 전하고 자살하였다. 이 전투에서 로마군 전사자는 4만, 포로된 자는 4천이며 전투가 종료된 후 로마진지에서 잡힌 자가 근 1만 이었다고 한다.


대전과를 거둔 뒤 한니발 참모들은 적을 쫓아서 로마로 바로 입성할 것을 권고했으나 한니발은 무슨 이유인지 그 말은 쫓지 않았다. 그래서 바르카라라는 칼타고인은 한니발에게 “승리를 거두기는 잘하지만 그것을 전혀 이용할 줄 모르는군요” 라고 말했다고 한다.


 한편 한니발은 칼다고에 전령을 보내 승리를 보고하고 지원을 요청했다.


현명한 장로 한농은 “승리를 이용하여 로마와 화평을 맺어야 한다. 승리를 했을 때 좋은 조건으로 화평을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싸우다가 패배한 다음에 화평을 맺는다면 이미 때가 늦은 것이다.


칼타고는 로마를 격파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을 로마에 보여주는 것으로 목적을 달성했거나 다름없다.


더욱이 승리한 지금 욕심을 더 부리다가 원상태로 되돌아가는 일이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이 제안은 거부되고 말았다. 마키아벨리는 이 부분에서 이렇게 평하고 있다. “인간이란 자기 희망을 어느 선에서 끊어야 할 줄을 모르기 때문에 결국은 실패하며 자기 실력을 냉정히 평가하려 하지도 않고 끝없이 막연한 희망에 기대를 걸다가 결국은 파멸하는 것이다.”


그후 한니발은 16년간의 영광을 차지한 이태리를 떠나 조국 칼타고를 구원하려 귀국했으나 스키피오에 의해 폐허가 된 칼다고에서 궁지에 몰리게 되었고 결국 자마의 일전에서 스키피오에게 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명장은 역시 명장을 대우할 줄 알았다. 스키피오는 한니발을 풀어주고 유명한 명전술가에 관해 토의하게 되었다. 이때 한니발은 역사상 명장 중에 뛰어난 전술家를 첫째 알렉산더대왕 둘째 피루스왕 셋째 자기 한니발이라고 말했다고 하고 또는 첫째 피루스 둘째 스키피오 셋째가 자기라고 말했다고 전하기도 한다.


분석하면 한니발은 전투에는 천재였으나 전투의 利를 최대로 활용할 줄을 몰랐다. 반면에 로마장군 스키피오는 칼타고 식민지인 스페인을 로마 식민지로 전환하고 아프리카에서 칼타고를 제외하고 누미디아등 모든 나라를 로마에 복속시키는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한니발은 이태리에서 많은 전투에서 승리했으나 어느 부족도 복속시키지 못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