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음의 향기, 비움

오은선: 안나푸르나 정상 아래서 포기하다가 생각한 것 "마음이 발보다 앞서면 안 된다" / 다시 힘을 내자고 다짐했다

modest-i 2016. 5. 11. 03:42
세계 제10위 고봉에서 14개 거봉 레이스 끝내

4월 27일 12시(이하 네팔 시각), C4(6,900m)를 출발한 지 11시간이 넘었다. 영하 30도, 고글 아래 조금 드러난 얼굴 살이 얼어붙는 것 같다. 바람이 세차게 분다. C4에서부터 먹은 게 별로 없다. 온몸이 으슬으슬 자꾸 춥다. 해가 뜨면 따뜻해져야 하는데 오늘은 이상하다. 포기하고 싶어진다. 내려갔다 다시 올라오면 되지 않을까?


▲ 1 안나푸르나 정상에서 태극기를 휘날리고 있는 오은선 대장(왼쪽). 정하영 촬영감독이 등정 장면을 카메라에 담고 있고, 그 위에서 옹추 셰르파가 확보를 봐주고 있다. 2 베이스캠프를 출발하는 오은선 대장. 촬영을 담당한 나관주 대원이 뒤따르고 있다. 3 등반을 앞두고 라마 제단에서 기도를 올리는 오은선 대장.



‘이젠 죽음의 고지에서 벗어나야 한다.’

대원들에게 “돌아가자!”고 외쳤다. 내 말을 듣고 대원들은 모두 그 자리에 주저앉는다. 정하영 KBS 촬영감독은 “정상까지 2~3시간만 더 가면 된다”며 힘을 내라고 한다. 딱히 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올라갈 이유보다 내려갈 이유가 훨씬 더 많았을 그때,

 한 여성 산악인이 내 앞을 지나간다. 폴란드에서 온 깅가다.

그녀는 C4를 출발할 때부터 거북이보다 더 느린 걸음으로 등반했다.

저렇게 해서 언제 정상에 가려는지 속으로 답답한 생각도 들었다.

그런 그녀가 그 느린 속도로 내 앞을 지나가고 있다.



그래 저 정도 속도로만 걷자.


   >>  마음이 발보다 앞서면 안 된다  << .


다시 힘을 내자고 다짐했다.




사실, 이 고통을 다시 겪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컸다.

다시 일어서서 “자네!(네팔 말로 ‘가자’는 뜻)”라고 외쳤다. 정하영 감독, 나관주 대원, 셰르파 옹추와 페마·체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12시30분, 쿨와르(협곡) 아래에 도착했다. 만년설이 발에 밟혔다. 이제 마지막 고비다. 초속 18m 강풍이 계속 불었다. 숨이 턱까지 차서 허리를 굽혀 한참 쉬었다 다시 움직이길 반복했다. 힘이 모자란다는 게 온몸으로 느껴졌다. 지금까지 먹은 거라곤 파워젤 두 개, 사탕, 물 몇 모금이 전부였다. 어제도 C2에서 C4까지 11시간 정도 걸었다. 캠프 하나를 건너뛴다는 것은 단순히 두 배 더 힘드는 일이 아니다. 서너 배 아니, 열 배는 더 힘이 든다. 

한 발씩 오르길 다시 3시간. 정상이 눈에 보였다. 눈물이 났다. 태극기를 피켈에 묶었다. 태극기를 묶고 있을 때,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마음이 차분해지고 힘이 났다. 발걸음이 가벼웠다. 힘차게 피켈을 찍으며 한 발씩 정상으로 향했다. 가파른 경사 끝에 오르고 나니 온 세상이 내 발아래 있다. 통쾌하고 시원한 기분이다. 세상을 다 얻은 것만 같다. 오후 3시. 더 이상 오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고마웠다.

이번 등반은 내내 고통스러웠다. C4를 출발한 지 13시간15분, 처음 히말라야를 밟은 지 17년, 처음 히말라야 8,000m 고봉 정상(가셔브룸2봉)을 밟은 지 13년 만에 나는 눈물 겨운 사연이 많은 이곳 안나푸르나 정상에 섰다. 지현옥 선배도 생각나고, 미영이도 떠올랐다. 배낭에 들고 간 미영이 사진을 정상에 묻을까 생각하다 그만뒀다. 정상은 너무 춥다. 이 차가운 곳에 미영이를 두고 오고 싶지 않았다.

BC에서 유지철 KBS 아나운서가 무전을 통해 계속 질문을 건넸다. 지금 내 모습이 한국에 생방송되고 있다. 카메라를 들고 있는 정하영 감독은 울먹이며 “물 한 모금 마시고 12시간 넘게 걸어왔다. 히말라야의 여왕이 탄생했다”고 외쳤다. 고맙다는 말 밖에 생각나는 말이 없다. 두 손을 모아 정하영 감독에게, 정 감독이 들고 있는 카메라에 인사를 올렸다.


“지금 이 기쁨을 대한민국의 온 국민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부모님 생각이 났다. 그리고 그때,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나는 해발 8,000m, 죽음의 고지에 있는 것이다.





 

▲ 1 C2에서 숨을 고르고 있는 오은선 대장. 2 BC에서 만난 14개 거봉 완등 레이스 라이벌이었던 에두르네 파사반과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오은선 대장(왼쪽). 3 베이스캠프에서 바라본 안나푸르나 남면. 가운데 솟은 봉이 정상이다.
C1에서 눈사태 후폭풍 밀려오면서 신고식 톡톡히 치러

BC를 떠나 본격적으로 등반을 시작하기 전부터 사실 걱정이 앞섰다. 내 나이 44살. 지난 2년간 9개 봉우리에 도전, 8개 봉에 올랐다. 몸이 견디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내가 뱉는 작은 기침 소리에도 깜짝깜짝 놀랐다. 몸에 이상이 없길 기도할 뿐이었다.

3월 8일 출국해 안나푸르나 남쪽에 있는 타르푸출리(5,663m)에 올랐다. 조금이라도 고소에 빨리 적응하기 위해서였다. 3월 30일 안나푸르나로 향하는 길목 레테(2,400m)에서 KBS방송단과 만났다. KBS 직원 21명이 나의 등정 모습을 생중계하기 위해 안나푸르나 BC까지 동행했다. 대규모 인원이 함께 움직인다는 사실이 적지 않은 부담이지만 방송단은 모든 방송 스케줄을 나를 위해 맞춰주며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애썼다. 각자 일에 최선을 다하는 방송단원들의 모습을 보면서 오히려 내가 힘을 얻을 수 있었다.

툴루부긴(4,600m) 고개를 넘을 때 지난해 안나푸르나가 생각났다. 겨울로 가는 길목에서 폭설이 끊이지 않았다. 해발 7,600m쯤이었던 것 같다. 화이트아웃이 길을 막았다. 그냥 계속 가자는 얘기도 있었지만 많은 이들에게 약속했듯, 나는 살아서 돌아가야 한다. 그렇게 돌아서서 BC에 내려오니 눈물이 났다. 라마제단 앞에서 기도했다.

‘무사히 돌려 보내주셔서 고맙습니다. 내년에 다시 오겠습니다’라고. 벌써 반년이 흘러 나는 다시 안나푸르나에 왔다. 이번에도 신이 받아주지 않으면 오르지 못할 것이다.
레테를 떠나 원정대와 방송단의 캐러밴이 시작됐다. 캐러밴 첫날, 먼저 BC로 출발한 포터 120명 중 100명 정도가 툴루부긴 고개에서 도망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눈이 쌓인 툴루부긴은 사람 목숨을 위협하고 실제 목숨을 잃은 사람도 있다. 포터들이 지레 겁을 먹고 도망가 버린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캐러밴을 강행했다.

이틀 뒤 다행히 툴루부긴에는 눈이 거의 녹아 있었다. 우리는 레테를 출발한 지 3박4일 만인 4월 4일 BC에 들어섰다. 대부분 히말라야가 초행인 KBS방송단원들도 무사히 BC에 올라섰다. 미리 도착해 텐트를 친 선발대가 환영해줬다. 지난해 가을 우리 팀이 텐트를 쳤던 자리에 스페인 여성 산악인 에두르네 파사반이 캠프를 치고 정상을 노리고 있었다. 후아오 가르시아가 속해 있는 국제대와 유명 산악인 후아니토 오이아르자발 원정대도 이미 들어와 있었다.

파사반은 4월 17일 먼저 안나푸르나 정상에 섰다. 포르투갈의 후아오 가르시아도 파사반 팀과 함께 정상에 섰다. 후아오는 14좌 완등에 성공했다. 사실 파사반이 캠프를 구축하고 있다는 소식이 캐러밴 중에 계속 들려왔지만 마음속에 큰 동요는 없었다. 나는 그저 내 길을 갈 뿐이다. 파사반 덕분에 짧은 기간 많은 봉우리에 오를 수 있는 에너지를 얻을 수 있어서 오히려 감사하게 생각한다.

이번 안나푸르나 라마제는 성대했다. 방송단이 함께하니 참여 인원부터 많았다. 향을 태우는 연기가 모두 나에게 날아왔다. 숨쉬기가 조금 힘들었지만 연기를 많이 맞으면 더 좋을 것 같아 가만히 앉아 기도했다. 라마의 불경도 평소보다 더 엄숙했다. 내 마음이 그만큼 엄숙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지난해 안나푸르나 라마제에서는 조그만 사고가 있었다. 갑자기 바람이 불면서 향불이 크게 일어 부처가 그려진 천을 태운 것이다. 크게 신경 쓰진 않았지만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번 라마제는 완벽하게 사고 없이 끝났다.

액땜이라고 하면 첫 눈사태일 것이다. 4월 18일 C1 위에서 큰 눈사태가 났다. 후폭풍이 C1까지 밀려 내려왔다. 모두 정신 없이 바위 뒤에 숨고 나도 텐트 속으로 몸을 피해 텐트 기둥을 꼭 잡고 버텼다. 아찔한 순간이었다. 다행히 다친 사람은 없었다. 신고식을 제대로 치렀다고 생각했다.

4월 22일, BC를 출발했다. 4월 25일 정상을 시도하고 싶었다. 예보는 괜찮았다. 몸 상태가 최상은 아니었지만 최상일 때만 등정에 성공한 것은 아니다. C2에서 하루를 자고 다음 날인 23일 C3(6,400m)를 향했다. C2에서 C3까지 안나푸르나에서 가장 위험한 구간이다. 눈사태가 복병처럼 곳곳에 숨어 있다. 아찔한 순간을 두 번 겪었지만 후폭풍의 세기는 강하지 않았다. 배낭을 위쪽으로 올리고 머리를 숙여 피했다.

C3에 모든 대원이 무사히 도착했다. C3는 건너 뛸 계획이었지만 방송 촬영을 고려해 이번엔 모든 캠프를 다 치기로 했다. 다음 날 24일, C3를 출발했다. 그러나 바람이 거셌다. BC에 무전을 치니 “25일에는 초속 20m의 강풍이 예보됐다”는 답이 돌아왔다.

초속 17m만 넘지 않으면 도전이 가능하지만 그 이상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셰르파, 대원들과 상의한 끝에 하산을 결정했다.

다시 C1으로 후퇴했다. 방송단원들이 반갑게 맞아줬다. BC에서 올려 보낸 순대와 불고기를 맛있게 먹었다. 내일 다시 오르기로 했다. 정상 등정 예정일은 27일이라고 BC에 통보해줬다.

4월 25일 C2에서 하루를 보내고 26일 새벽 4시25분 C2를 출발했다. 위험한 눈사태 구간에 다시 올라야 한다. 지난 가을보다 안나푸르나는 더 가팔라 보였다. 컨디션이 좋지 않은 데다 가팔라 체력 소모가 더 많았다. 다행히 오전 9시 모두 무사히 C3에 도착했다. 잠시 쉬고 곧바로 C4로 향했다. 전날 C3에 와 있던 외국대들은 아직 출발하지 않고 있다. 결국 우리가 제일 앞장서서 갔다. 그들이 길을 내놓으면 우리가 좀 수월하게 오를 수 있을 거라는 나의 예상은 여지없이 빗나갔다.

 

하산길에 조난 당한 스페인 대원 위해 C4에서 16시간 대기

C3 바로 위에 오버행 구간이 있다. 배낭을 메고 오르면 힘이 많이 들기 때문에 사람 따로 배낭 따로 오른다. 23일 처음 오버행에 오를 때 옆으로 배낭 하나가 툭 떨어졌다.

이내 1,000m 아래로 사라졌다. 그 배낭 안에 셰르파들이 쓸 산소통과 식량이 들어 있다고 했다. 식량이 충분치 않은 상태다. 무릎까지 눈이 쌓여 있다. 셰르파들이 러셀을 하며 앞으로 나갔다.

C4에 도착하니 오후 2시가 넘었다. 오늘만 11시간 정도 운행했다. 셰르파들은 체력이 많이 떨어진 것 같다. 내 몸 상태도 좋지 않다. 텐트 안에 들어가 눈으로 물을 끓여 마셨다. 텐트 문을 조금만 열어도 살을 에는 듯한 찬바람이 들어온다. BC와 교신하며 “내일 시도는 해보겠지만 컨디션이 좋지 않다”고 말했다. 내일 바람 예보는 초속 15m 정도라는 무전이 왔다. 잘할 수 있을지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4월 27일 새벽 1시 30분, 두통이 심해 잠에서 깼다. 대원들은 출발을 준비하고 있다. 셰르파 3명과 정하영 감독, 나관주 대원과 나는 로프로 몸을 묶었다. 어둠과 추위 속에서 우리는 정상을 향해 출발했다. 아이젠이 잘 박히지 않았다. 얼음이 그만큼 꽁꽁 얼어 있다는 증거다.

오전 6시50분 해가 떴다. 그나마 조금 따뜻해졌다. 조금 더 오르다 보니 낯이 익은 구간이 나왔다. 바위와 낭떠러지, 지난해 후퇴를 결정한 바로 그 지점이었다. 시계를 보니 오전 8시가 다 됐다. 벌써 운행을 시작한 지 6시간 반이 지났다. 여기에서 정상까지 한참을 더 올라야 하는데, 바람이 계속 거세게 불었다.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정신을 차려 다시 정상을 향해 발을 옮겼다. 몸이 생각처럼 빠르게 움직여주지 않았다. 이대로 얼마나 더 갈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1993년 처음 히말라야를 찾았을 때, 나는 27살이었다. 태어나 처음 하는 해외 여행이었다. 지현옥 선배를 대장으로 한 한국여성에베레스트원정대의 식량담당이었던 나는 정상조에 포함되지 못했다. 그때 나는 정말 만년설을 밟아보고 싶었다. 히말라야처럼 맑은 정신으로 살 수만 있다면 세상에 무서울 게 없을 것 같았다.

지금 눈을 밟으며 한 걸음 한 걸음 오르는 나는 내가 바라던 내 모습이다. 힘을 내야 한다. 1993년부터 시작한 히말라야 여정, 오늘만 참고 오르면 나는 14좌에 모두 오른다. 꿈을 이루고 역사 속에만 남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한 발 한 발 오르다 보면 언젠가 정상에 도달한다. 안나푸르나도 마찬가지였다.

정상에 섰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빨리 내려가야겠다’는 것이었다. 산악인에겐 신화와 같은 존재인 라인홀트 메스너가 말했듯 “최고의 등반은 살아 돌아오는 것”이다. 정상에서 내려오는 길도 쉽지 않았다. 밤 9시가 넘어서야 C4에 도착했다. 우리 대원 모두 무사히 도착했다는 것을 확인하고 정상에 섰을 때처럼 기분이 좋았다. 오늘 하루 20시간 넘는 운행을 마치고 모두 탈진한 상태였지만 대원 모두 기분은 좋아 보였다. BC에 씩씩한 목소리로 “이만 자겠습니다. 내일 뵙겠습니다”라고 무전을 보냈다. 그리고 모든 게 잘 끝났다며 텐트에 쓰러져 블랙홀 같은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다음날 새벽 6시도 안 되어서 스페인 팀에서 긴급히 구조를 요청해왔다. 7,700m 지점에 톨로라는 대원 1명이 탈진으로 쓰러져 있다고 했다. 6~7시간 거리, 어제 20시간 넘게 운행한 우리 셰르파에게 차마 올라가란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도와줘야 한다고만 말했다. 상황을 지켜보자고 전하고 우리도 C4에서 하산을 멈췄다. 다행히 구조 헬기가 곧 올라올 예정이라고 했다. 셰르파들은 산소가 모자라 구조작업을 할 수 없다고 전했다.

C4에서 물과 음식이라도 지원해주자며 이들을 붙잡았다. 오후 1시까지 헬기는 오지 않았다. 식량이 떨어진 상태에서 더 지체할 수가 없었지만 그렇다고 조난당한 팀을 두고 내려오는 일도 마음에 걸렸다. 산 너머에서 구름이 밀려오며 날씨가 나빠지기 시작하자 셰르파들이 서둘러 짐을 싸기 시작했다. 계속 있다가는 우리 팀원들도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이제는 우리도 안전하지 않다. 남은 식량과 자일을 스페인 팀에 건네주고 하산을 시작했다.


▲ 1 C2로 향하는 대원들. 2 1997년 가셔브룸2봉 등정 이후 13년 만에 안나푸르나 정상에 올라 14개 거봉 완등에 종지부를 찍은 오은선 대장. 3 정하영 촬영감독이 가파른 설사면을 오르고 있다.

나의 등정은 모든 사람이 도와주고 응원해준 덕분

하산 길에 화이트아웃이 됐을 때도 있었지만 눈사태 구간을 거꾸로 내려가 C1에 도착하니 모두 환호성을 지르며 우리를 반겨줬다. BC까지 갈 기운이 없다. 오늘은 이곳에서 보내야겠다. 4월 28일 오후 4시30분. 22일 BC를 떠난 지 1주일이 지나가고 있었다. 너무 많이 굶었더니 가만히 있어도 구역질이 났다. 안나푸르나는 어려운 산이다. 눈사태와 수직 벽이 길을 가로막았다. 내 컨디션도 좋지 않다. 곧바로 하산하지 못하고 C4에서 16시간을 기다린 것도 체력을 떨어뜨렸다.

해발 7,000m가 넘는 곳에서는 가만히 앉아 있어도 체력이 떨어진다. 산소 농도가 해수면의 30% 정도에 불과하다. 조난 당한 스페인 대원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팠다. 아마도 쿨와르 근처에서 만난 후아니토 일행 중 한 명일 텐데……. 마음이 무거워 하산 길에 나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곤 했다. 결국 톨로는 구조되지 못했다. 그리고 C4에서 기다리던 톨로의 동료들은 헬기로 구조됐다.

안나푸르나는 정말 어려운 산이다. 이 어려운 산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내 능력 때문이 아니다. 나를 성원해주는 많은 사람의 기도 덕분이다. 목숨을 걸고 함께 정상에 오른 셰르파와 카메라맨이 있었고, 정상에 오르는 고통스런 모습을 전국에 생중계한 BC의 방송단이 있었고, 그 모습을 보며 박수를 치고 응원해준 국민 여러분이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내가 받은 사랑을 돌려주는 것뿐이다.

4월 29일 오후 12시30분. BC에 도착했다. BC는 눈물 바다가 됐다. 라마제단 앞에서 감사의 기도를 올리고 BC의 단원들과 일일이 포옹했다. 집에 온 것처럼 편안했다. 마침 점심 시간이었다. ‘서밋식(食)’으로 간장게장과 비빔국수가 나왔다.





산이 좋다 산으로 출발에서 펌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