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손통과 풍도는 공통점이 많다.
숙손통은 진시황부터 2세 황제 호해, 항량, 초 희왕, 항우, 한고조 유방, 혜제에 이르기까지 10여명의 주군에게 몸을 맡겨 높은 벼슬을 지냈다.
풍도는 당 멸망 뒤 후당·후진 등 다섯 왕조에 걸쳐 열한 명의 천자를 섬기며 고위관리로 30년, 재상으로만 23년을 살았다.
풍도는 자신의 사후 들어선 송나라 때 ‘지조 없는 파렴치한’이란 혹평을 받았다.
강력한 중앙집권제로 충성이 강조되던 송대 역사관의 반영일 게다.
하지만 피비린내 나는 쿠데타가 10년이 멀다고 이어졌던 그 시절,
여러 왕조에 거듭 기용된 풍도의 실력과 처세는 남다른 데가 있었다고 봐야 한다.
누구와도 다투지 않고, 실무를 중시하는 게 그의 처세 원칙이었다고 한다.
숙손통도 처세에 능한 인물이다.
기원전 209년 진승·오광의 난이 벌어지자 다른 박사 유학자들은 “모반이니 토벌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그는 진 2세 황제가 ‘반란’이란 사실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을 눈치채고 “그저 소란일 뿐”이라고 입에 맞는 말을 해 처벌을 피했다.
항우를 버리고 유방에게 귀순했을 때는 유생을 싫어하는 유방의 비위를 맞추려 유생 옷을 버리고 유방의 고향에서 입는 짧은 적삼으로 바꿔입기도 했다.
그가 아첨만 한 건 아니다.
그는 의례를 제정하고 종묘와 원묘를 건립한 유학의 거장이었다.
유방이 태자를 폐하려 했을 때는 “그러려면 나를 죽인 뒤 하라”고 반대하기도 했다.
사마천이 <사기>에서 “‘참으로 곧은 길은 굽어보이며 길은 원래 꾸불꾸불한 것’이란 말은 숙손통을 두고 하는 말”이라고 찬양한 것도 이런 까닭이다.
그러나 그가 분서갱유를 한 진시황에겐 침묵으로, 2세 황제에겐 거짓말로, 유방에겐 떠받들기로 모습을 바꿔가며 권력의 파도타기를 한 것만은 부인하기 어렵다. 오늘, 총리나 장관으로 거론되는 우리의 고위 공직자들은 또 어떨까.
여현호 논설위원 yeop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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