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날아든 적의 포탄
자칫 상황이 악화되면 대한민국이 임시 수도를 다시 부산으로 옮길 가능성이 높았고, 피란민들이 자꾸 몰려들면서 대구의 분위기는 아주 긴장감이 높아지고 있었다. 전쟁 전에 인구 30만 명이었던 대구에는 1950년 8월 낙동강 전선에서 전투가 불붙고 있던 무렵에는 70만 명의 인구로 북적이고 있었다.
그런 분위기에서 8월 18일 대구 북방의 가산산성을 점령했던 북한군이 박격포를 쐈다. 대구를 직접 노린 포격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18일 새벽에 북한군이 가산산성에서 쏜 포탄 일곱 발이 대구역에 떨어지고 말았다. 대구는 금세 요동쳤다. 우선은 역무원 1명이 사망하고 민간인 7명이 부상했다.
인명 피해는 크지 않았으나, 적의 포탄은 기름을 가득 머금은 볏짚에 그어댄 성냥불과 같았다. 대구 전역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이로써 임시 수도는 부산으로 옮겨가는 게 정해졌고, 피란령이 발동했다. 시민들 일부는 대구에 북한군이 진입한 것으로 착각까지 했다고 한다. 삽시간에 불어난 피란대열로 인해 군 부대 이동도 불가능할 정도로 대구는 혼돈의 도가니로 깊이 빠져들었다.
당시 내무장관은 조병옥(趙炳玉·1894~1960) 박사였다. 그는 한때 이승만 대통령이 한민당과 결별하면서 이 대통령과 협력 관계를 끊었다가 전쟁이 터진 뒤인 7월 15일 다시 정부의 요직인 내무장관을 맡고 있었다. 조병옥 박사는 많이 알려진 사람이다. 그는 당시 이승만 대통령 등 몇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는 해외 유학파 경력을 지닌 최고의 지식인 중 한 사람이었다. 연희전문을 다니다가 미국으로 유학해 명문 컬럼비아 대학에서 박사학위까지 받은 인물이었다. 최고의 지식수준을 갖췄던 데다가 선이 굵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유력한 리더 중 한 사람이었다.
자칫 상황이 악화되면 대한민국이 임시 수도를 다시 부산으로 옮길 가능성이 높았고, 피란민들이 자꾸 몰려들면서 대구의 분위기는 아주 긴장감이 높아지고 있었다. 전쟁 전에 인구 30만 명이었던 대구에는 1950년 8월 낙동강 전선에서 전투가 불붙고 있던 무렵에는 70만 명의 인구로 북적이고 있었다.
그런 분위기에서 8월 18일 대구 북방의 가산산성을 점령했던 북한군이 박격포를 쐈다. 대구를 직접 노린 포격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18일 새벽에 북한군이 가산산성에서 쏜 포탄 일곱 발이 대구역에 떨어지고 말았다. 대구는 금세 요동쳤다. 우선은 역무원 1명이 사망하고 민간인 7명이 부상했다.
인명 피해는 크지 않았으나, 적의 포탄은 기름을 가득 머금은 볏짚에 그어댄 성냥불과 같았다. 대구 전역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이로써 임시 수도는 부산으로 옮겨가는 게 정해졌고, 피란령이 발동했다. 시민들 일부는 대구에 북한군이 진입한 것으로 착각까지 했다고 한다. 삽시간에 불어난 피란대열로 인해 군 부대 이동도 불가능할 정도로 대구는 혼돈의 도가니로 깊이 빠져들었다.
당시 내무장관은 조병옥(趙炳玉·1894~1960) 박사였다. 그는 한때 이승만 대통령이 한민당과 결별하면서 이 대통령과 협력 관계를 끊었다가 전쟁이 터진 뒤인 7월 15일 다시 정부의 요직인 내무장관을 맡고 있었다. 조병옥 박사는 많이 알려진 사람이다. 그는 당시 이승만 대통령 등 몇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는 해외 유학파 경력을 지닌 최고의 지식인 중 한 사람이었다. 연희전문을 다니다가 미국으로 유학해 명문 컬럼비아 대학에서 박사학위까지 받은 인물이었다. 최고의 지식수준을 갖췄던 데다가 선이 굵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유력한 리더 중 한 사람이었다.
- 1959년 10월 10일 조병옥(왼쪽)과 장면. 유석(維石) 조병옥 (趙炳玉ㆍ1894~1960) 박사는 초대 경무국장(경찰총수)을 지냈다.
급기야 피란민이 죄다 몰려 있던 대구역에 나타나 카랑카랑한 음성으로 정부의 대구 사수 의지를 연설하면서 분위기를 안정시켰다. 대구가 적의 포탄이 날아들어 금세 혼란의 와중으로 빠져들었음에도 비교적 빠른 시간 내에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던 데에는 조병옥 박사의 공이 매우 크다고 알려져 있다.
조병옥 내무 수습에 안간힘
실제 조 박사는 7월 15일 내무장관에 취임한 뒤 많은 일을 수행했다. 그가 내무장관에 올라 먼저 살핀 점은 경찰병력이었다. 전선에서 작전을 수행하는 군대를 도와 후방에서 상황을 관리해줘야 했던 경찰병력이 북한군 남침과 국군의 급한 후퇴로 많이 줄어있었다.
약 2만5000여 명의 경찰 병력은 조 박사가 내무장관으로 취임할 때는 1만3000명 정도로 감소한 상태였다. 지닌 무기도 칼빈 소총 6000정 정도가 고작이었다. 후방의 치안을 책임져야 할 내무장관으로서 조 박사는 당장에 경찰병력 증원과 무기 확보에 나섰다고 했다.
고급 수준의 지식인이었고, 아울러 미국에서 박사학위까지 받아 영어에도 능통한 조 박사였다. 그는 자신의 그런 장점을 충분히 살렸다. 경찰병력을 6만5000명으로 늘릴 계획을 잡은 뒤 대구와 부산에 경찰관 훈련소를 만들어 집중적으로 경찰요원들을 길러냈고, 미군과 탁월한 교섭을 벌여 무기를 크게 늘렸다.
나중에 알려진 기록에 따르면 조 박사의 활약에 힘입어 경찰 병력은 1950년 말 4만8000여 명으로 늘었고, 미 8군 참모장 앨런(Leven C. Allen) 소장과 협의해 미군으로부터 칼빈 소총과 기관총, 박격포 등을 지원받아 무기를 7만 여 점으로까지 증강했다.
아울러 조 박사는 미 8군 사령관 워커 중장에게 요청해 한국의 경찰을 미군부대에 배속토록 했다. 이는 워싱턴 미 행정부의 승인을 얻어 곧 현실화했다. 한국 경찰이 미군을 따라 함께 작전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한 계기였다. 이들 경찰은 미군 부대의 전선에 진출해 낙동강을 넘어서는 피란민 중에 섞여 들어온 ‘오열(五列)’을 색출하는 일에 종사하면서 한국 경찰의 성가를 높일 수 있었다.
전선에서는 처참한 아군의 희생이 매일 벌어졌다. 솜털이 얼굴에 나있는 신병과 학도병도 기꺼이 고지에 올라 적과 싸우다가 세상을 등졌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아주 많은 노무자들도 전선의 병사들에게 밥과 탄약을 날라주다 목숨을 버렸다. 후방에서도 조병옥 박사처럼 분투를 보이는 대한민국 사람도 아주 많았다. 그런 피어린 노력에 힘입어 대한민국은 위기의 깊은 그늘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을 수행하면서 들은 풍문으로는 믿고 싶지 않은 내용도 적지 않았다. 일부 군인들의 탈선도 있었다. 그보다는 부산에서 밀항을 준비하는 사람들에 관한 내용이 자극적이었다. 대한민국의 패망을 미리 짐작해 제주도와 일본으로 먼저 건너가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연세대학교 박명림 교수의 소개에 따르면 부산을 빠져나가 일본으로 가는 밀항은 당시에 ‘돼지몰이’로 불렸다고 한다. 밀항 주선 비용은 1인당 50만원에서 시작했다가 100만~150만원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선박 임대료는 500만원에서 1000만원까지 ‘호가’했다는 것이다.
이런 행동은 자신을 지켜주지 못하는 정부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했을 것이다. 정부의 역량이 부족했다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위기에서 먼저 제 목숨만 건지려고 들었던 사람이 적지 않았던 것은 안타까운 일이었다.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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