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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 소련과 좌익의 책임 <= 남북한 인구 비례에 따른 선거로 한반도에 단일정부를 수립하게 하자는 유엔 결의는 소련의 반대로 무산

modest-i 2014. 12. 7. 11:29

광복의 기쁨은 미소(美蘇)에 의한 남북한 분할점령과 신탁통치안 발표로 찬물을 맞았다.

 

민족 전체가 반대해 일어났지만

소련공산당의 지시를 받던 좌익은 곧 찬탁으로 돌아섰고

남북한 인구 비례에 따른 선거로 한반도에 단일정부를 수립하게 하자는 유엔 결의는

미국과 본격적 냉전에 돌입한 소련의 반대로 무산됐다.

 

선거는 부득이 남한에서밖에 치를 수가 없었다.

 

 

 

[이인호 칼럼]대한민국, 자랑스러운 나라다 에서 발췌

 

 

                                                                     2014.12.07   모디스티

 

 

1945년 8월 광복 후 10월에 귀국한 그(이승만)는

독립촉성중앙위원회 총재, 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의장, 민족통일총본부 총재 등을 역임하면서

 미·소 등의 신탁통치안 반대,

 좌우합작 반대,

 미소공동위원회 참가 거부,

 김구(金九)·김규식(金奎植) 등의 남북협상 거부 등

 반탁과 반공노선을 견지하였다.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무산되자,

그는 1946년 6월부터 남한 단독정부 수립 불가피론을 주창하고

이의 실현을 위해 1946년 12월부터 1947년 4월까지 워싱턴을 방문하여 그곳에서 로비활동을 전개하였다.

 

미국 방문 기간중(1947년 3월)에 발표된 트루만(Harry Truman) 대통령의

대 소(對蘇) 봉쇄 및 반공주의적인 트루만 독트린은

그의 반공·단정노선의 입지를 강화시켜 주었다.

 

 

1947년 11월 유엔총회에서 총선거를 통해 한국을 독립시키기로 결의한 다음

유엔임시한국위원단(UNTCOK)의 감시하에 1948년 5월 남한에서의 총선거가 실시된 다음 제헌국회가 구성되자,

 

그는 초대국회의장에 선출되었다.

국회의장으로서 그는 대통령 중심제 헌법을 제정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그리고 그 해 7월 20일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함께 대통령직에 취임하였다.

 

초대 대통령으로 그는 농지개혁을 단행하여 농민들의 불만을 해소하고,

의무교육제를 도입하고 각급 학교를 증설하여 전 국민의 교육수준을 높이는 한편,

국내의 공산주의운동을 분쇄하고,

일본에 대해서는 강경외교를 견지하였다.

 

 

 

 

이승만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며 정치인입니다.

대한제국 시대에 협성회 회보와 독립신문 주필, 교육계몽운동 등으로는 독립협회 활동 등을 하였습니다.

1898년 정부전복을 획책하였다는 혐의로 독립협회 간부들과 함께 투옥되었는데, 동지 한 사람과 탈옥을 꾀하다가 붙들려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종신형으로 감형되어 복역 중 1904년 민영환의 주선으로 7년 만에 석방되어. 그 해 겨울 미국에 건너가 미국정부에 일본의 한국침략저지를 호소하였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계속 머물면서 조지워싱턴대학교·하버드대학교 등에서 수학, 1910년 프린스턴대학교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그후 프린스턴대학교 대학원에서 국제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이후 하와이에서 한인학원과 한인학교 등을 운영하였는데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운동 방법을 놓고 의견이 갈라섰을 때 그는 국내의 사정을 외국에 알리고 양해를 구하는 외교독립론을 주장하였습니다. 특히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었으나 국제 연맹에 위임통치를 건의 한 것을 계기로, 임시의정원에 의해 탄핵·파면되었습니다.

 

 

 

그의 경력을 보면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한성 임시정부와 각지에서 수립된 임시정부의 수반을 거쳐 1919년 9월부터 1925년 3월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직을 역임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 위원장, 국무위원회 외교위원 등을 역임했습니다. 주로 미국에서 외교 중심의 독립운동을 벌였습니다. 1933년 3월 6일의 제25회 임시 의정원 회의에서 무임소 국무위원에 보궐 당선되었습니다.

이후 1933년 11월에 다시 시정부 국무위원에 선임되고 1934년 4월 2일에는 임정 외교위원에 선임되었습니다. 일제 강점기 중반에는 스위스 등을 상대로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는 한편 일본의 미국 침략을 경고하였으며 태평양 전쟁 이후 미군 OSS와 임시정부 간의 연결을 주선하였습니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미국 체신청에서 발행한 태극기 모양 우표 발행에 크게 기여했으며, 항일 단파 라디오 방송 연설 등에도 참여하였습니다.

1945년 12월부터는 김구·조소앙·김성수 등과 함께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관하였으며 정부수립 방법으로는 남한단독정부 수립을 지지,추진하였습니다. 대한민국 초대 대한민국의 국회의장, 대한민국 초대·2·3대 대통령을 역임하였습니다. 11960년 4·19 혁명 직후 부정선거의 책임을 지고 대통령직에 하야하고, 미국 하와이로 망명후 사망 했습니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그 공적에서 민족사의 위대한 인물에 들어가야 할 인물인데

그럼에도 이 전 대통령은 국내외로 과소평가받고 있습니다.

 

 친북세력, 위선적 지식인뿐 아니라 그의 노선을 계승한 후대 정권에 의해서도 무시됐고,

그의 자주노선에 진저리를 쳤던 미국과 일본으로부터도 외면당하고 있습니다.

 

그가 남긴 것은 주로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것들이라, 눈에 보이는 것이 많았던 박정희 전 대통령과 대조적입니다.

 

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 체제, 한미동맹, 농지개혁, 교육개혁, 국군건설은 이승만의 5대 업적인데,

 

너무 크고 보이지 않으므로 선전하기도, 설명하기도 어렵습니다.

 

이 전 대통령은 안목이 높은 사람, 생각이 깊은 사람, 역사를 아는 소수의 의인들에 의하여 높게 평가되고 있을 뿐입니다.

 대한민국의 정신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건국 대통령을 제대로 평가하고 구체적으로 기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승만
과 김구

 

김구선생은 마지막까지 북한과의 협상으로 통일된정부를 세우려 했고

 

이승만 대통령은 현실적으로 북한과의 협상이 안될걸로 믿고 단독정부를 세우려 했습니다.

 

 

일제하에서 독립 투쟁에 한마음 한뜻으로 헌신하여 활동했던 사람들.

 그 중에서도 해방 이후에까지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기억되고 추앙 받았던 인사로는 단연 김구와 이승만일 것입니다.

 

해방된 후 우리 민족의 당면 과제는 통일된 자주독립 국가의 수립이었습니다.

이 문제의 해결 방안으로 연합국이 제시한 안에 대하여 이승만은 동조하며 협조했던 반면

김구는 반대하며 독자적인 노선을 추구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남북협상을 통한 남북 통일 정부 수립이었습니다.

결국 이승만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선출되었고

 

 대한민국 출범후에 김구는 뜻을 이루지 못한 체 안두희에게 암살 당합니다.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하자 미군과 소련군이 연합군으로 한국에 남아있던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하려는 목적으로

38선으로 진주하여 남북으로 갈리게 됩니다.

 

이때부터 소련은 자기입맛에 맞는 사람인 김일성을 내세워 전체 한국의 지도자가 되게 하려하고

미국은 역시 이승만을 내세웁니다.

 

이때 미국에 살며 세계정세를 잘아는 이승만은 공산주의자들의 행태를 보니

남북통일정부가 세워지기는 힘들다고 생각해서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을 생각하고

 

김구선생은 아무리 그래도 통일된정부를 세워야 한다는 의견을 내세우고

남북협상까지 하려고 평양에 갑니다.

 

그러나 북의 김일성은 자기네가 유리한 방향에서 정부를 세우려고 해서 협상이 지지부진하게 됩니다.

 

유엔에서는 선거를 감시할 유엔인사를 북에보내려고 했으나 북에서 거부합니다.

해서 유엔결의에 따라 선거가 가능한지역인 남한만의 정부가 서게 된것 입니다.

 

 

이승만초대 대통령은 왜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했을까?

학계를 포함해 적잖은 이들이 이승만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론'을 백범 김구의 '통일정부론'과 대비하면서

이승만의 주장을 "정권욕에서 나온 발상"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국제정세에 해박한 이승만

 미국과 소련 즉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가 대립한 냉전이 해소될 가능성이 희박함을 내다보고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직후

단독정부론을 제기하며

남한의 독립을 추진해 나갔습니다.

 

중국에서의 냉전이 악화되자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유엔에 상정해 남한에 단독정부를 수립하는 쪽으로 전략을 짜게 됩니다,

이승만은 이런 미국에 앞서 국제정세의 변화를 미리 예견한것입니다.

 

소련 붕괴 이후 공개된 문서를 근거로

실제로 스탈린은 45년 9월 20일에 이미 '북한 지역에 단독정부를 수립하라'는 비밀 지령을 내렸습니다.

 

이런 사실을 당시 남한 정치인은 물론 미국도 몰랐습니다.

 

북한에선 '북조선 중앙은행'창설,

              조만식 등 우익 인사 배제, 

              토지개혁 등

              남북 분단을 기정사실화하는 정책들이 일방적으로 진행했습니다.

 

이승만의 단독정부론과 김구의 통일정부론은 두분의 애국심에서 나온것이기는 하나

국제정세를 잘아는 이승만의 예견이 맞았다고 생각 합니다.

 

 

이승만
이 없었으면 대한민국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