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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군대는 정복하였다. 군대는 자급하였다. 뿐만 아니라 군대에 의한 약탈과 정복은 정부로서도 수지 맞는 일이었다

modest-i 2014. 11. 30. 10:34

테르미도르파의 가장 큰 약점은, 그들이 부활된 귀족적 반동과 로베스피에르의 몰락을 이내 후회하게 된 자코뱅 - 상퀼로트적 파리 빈민들 양쪽으로 부터 압력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어떠한 정치적 지지도 획득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기껏해야 정치적 용인을 받고 있는 정도였다. 1795년 그들은 자신들을 이 양자로부터 지키기 위해 견제와 균형의 정교한 헌법을 고안해냈으며, 좌와 우로의 주기적 경도에 의해 가까스로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반대파를 쫓아내기 위해 그들은 점점 더 군대에 의존해야 했다. 이러한 상황은 기묘하게도 현대 프랑스의 4공화국과 유사한 상황이었으며, 또 그 결과도 유사했다. 이는 바로 장군의 지배였다.

 

그러나 집정부가 군대에 의존한 것은 주기적 정변과 음모 - 1795년의 각종 정변과 음모, 1796년 바뵈프의 음모, 1797년 프뤼크티도르, 1798년 플로레알, 1799년 프리레알 - 을 진압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취약하고 인기도 없는 정권에게 권력유지를 위한 유일하고도 안전한 보증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중류계급은 진취성과 확장을 필요로 했다.

 

군대는 이 명백히 해결 불가능한 문제를 해결하였다. 군대는 정복하였다. 군대는 자급하였다. 뿐만 아니라 군대에 의한 약탈과 정복은 정부로서도 수지 맞는 일이었다. 가장 똑똑하고 유능한 군지도자였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결국 취약한 민간정부를 제거하기로 결정하였던 것은 과연 놀라운 일이었을까?

 

이 혁명군은 자코뱅 공화국의 가장 무서운 산물이었다. 혁명군은 혁명적 시민의 '국민총동원' 에서 이내 직업적 전사의 군대로 바뀌었는데, 이는 1793년에서 1798년 사이에는 징병이 없었던데다가 군대생활이 적성에 맞지 않는 사람들이 대량으로 탈주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혁명군은 혁명의 특성을 지닌 동시에 기득이권의 특성 또한 가지게 되었는데, 이는 전형적인 보나파르트주의적 혼합이라 할 수 있다. 혁명에 의해 이 혁명군에는 전례 없는 군사적 우수성이 부여되었는데, 나폴레옹의 훌륭한 지휘력은 이 군사적 우수성을 이용하게 된다.

 

혁명군은 항상 즉석 징집군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러한 혁명군 안에서는 거의 훈련을 받지 않는 신병이 고참병으로부터 훈련과 사기를 보고 익혔으며, 정식 병영훈련은 무시해도 좋을 정도였고 병사들은 인간취급을 받았다. 공로, 즉 전투에서의 수훈에 의한 승진이라는 절대적 규칙에 의해 용기에 기초한 단순한 계급제도가 창출되었다.

 

이러한 사실과 오만한 혁명적 사명감 때문에 프랑스군은 보다 정통적인 군대처럼 물자에 의존하지 않을 수 있었다. 프랑스군은 유효한 보급체제를 가진 적이 없었는데, 이는 그들이 본국으로부터 독립하여 생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프랑스군은 보잘것없는 자체 수요를 조금이나마 충족시킬 수 있는 무기산업의 지원을 받은 일도 없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전투에서 매우 재빨리 승리를 거두었으므로 무기를 거의 필요로 하지 않았다. 1806년 대규모의 프러시아 군대는 전 군단을 통틀어 1400발의 포탄밖에 쏘지 않았던 군대 앞에서 무너졌다. 장군들은 무한한 공격적 용기와 현장에서의 창의에 상당히 의존할 수 있었다.

 

나폴레옹과 그 밖의 극소수 사람들을 제외하면 프랑스군의 장군과 참모들은 대부분 무능했다. 이는 혁명적 장군 혹은 나폴레옹의 원수들이 대개의 경우 두뇌보다는 용감성과 지도력 때문에 승진한 강인한 특무상사형 혹은 위관형 이었기 때문이다. 영웅적이었으나 매우 어리석었던 네이 원수는 극히 전형적인 예였다. 나폴레옹은 여러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나 그의 원수들은 대체로 전투에서 졌다.

 

프랑스군은 그 불완전한 보급체제에도 불구하고 벨기에, 북부 이탈리아, 독일과 같은 부유하고 약탈 가능한 나라들에서는 부족할 것이 없었다.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폴란드나 러시아 같은 황야지대에서는 이 불충분한 보급체제가 붕괴되었다. 위생시설이 전혀 없었기 떄문에 사상자수는 증대되었다. 1800년에서 1815년 사이에 나폴레옹은 자기 병력의 40퍼센트를 잃었다. 이 중 약 3분의 1은 탈주에 의한 것이었지만, 이 손실병력 가운데에서 90~98퍼센트는 전투 중에 죽은 것이 아니라 상처, 병, 피로, 추위 때문에 죽은 사람들이었다. 간단히 말해 혁명군은 전 유럽을 돌발적이고 격렬한 전투를 통해 단숨에 정복해갔는데, 이는 그렇게 할 수 있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기도 했다.

 

당시 군대는 부르주아 혁명이 재능에 대하여 개방해놓았던 다른 많은 출셋길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출셋길이었다. 따라서 군대에서 성공한 사람들은 다른 부르주아와 마찬가지로 내부적 안정 속에서 기득권을 가지고 있었다. 군대에 내재하는 자코뱅주의에도 불구하고 군대가 테르미도르 이후 정부의 중심이 되고, 군대의 지도자 보나파르트가 부르주아 혁명을 마감하고 부르주아 정권을 시작하기에 적합한 사람이 되었던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자신이 태어난 야만적인 섬 코르시카의 기준에서 볼 때 그는 점잖은 집안 태생이긴 했지만,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전형적인 출세주의자였다. 1769년에 태어난 그는 전문적 능력이 필요불가결한 육군 내 몇 안되는 부문 중 하나였던 포병대에서 완만한 출세과정을 걸어나갔는데, 그는 야심적이었고 불만을 품고 있었으며 혁명적이었다. 혁명과정에서, 특히 그가 열렬히 지지 하였던 자코뱅 독재 아래서 그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한 전선에서 한 지방위원 - 그는 우연히도 나폴레옹과 같은 코르시카인이었는데 이러한 사실이 그의 장래에 해가 되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 에 의해 훌륭한 재능과 장래성 있는 군인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혁명력 2년에 그는 장군이 되었다. 로베스피에르의 몰락에도 불구하고 살아 남았으며 파리에서 유익한 인간관계를 형성할 줄 아는 재능 덕분에 그 어려운 때를 넘기면서 앞으로 전진할 수 있었다. 1796년의 이탈리아 출정에서 그는 기회를 포착하였는데, 이탈리아 원정에 의해 공화국의 의심할 바 없는 제1의 군인이 되었으며 민간정부 당국으로부터 사실상 독립적으로 행동하였다. 1799년 외국의 침략에 의해 집정부의 취약성과 나폴레옹의 절대적 필요성이 명백해졌을 때, 권력은 반쯤 그에게 떠맡겨진 상태였고 그는 나머지 반을 움켜쥐었다. 그는 제 1통령이 되었으며, 다음에는 종신통령, 다음에는 황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