됭케르크의 미스터리 (기회가 왔을 때 이를 받지 않으면 화가 된다 <괴철:항우책사>)
히틀러의 명령
1940년 5월 24일, 히틀러가 프랑스 샤르빌(Charville)에 위치한 독일 A집단군 사령부를 직접 방문하여 사령관 룬트슈테트(Gerd von Rundstedt)에게 영-불연합군에 대한 공격을 중지하라는 기상천외한 명령을 내렸습니다. 당시 프랑스를 침공한 독일은 불과 보름 만에 총 30만여 명에 달하는 영-불연합군 주력을 몰아붙여 영불해협 인근 북부 프랑스의 작은 도시인 됭케르크(Dunkirk)에 가두어 버린 상태였습니다.
[ 룬트슈테트 A집단군 사령관과 히틀러 ]
연합군은 도망갈 곳이 없었던 독안에 든 쥐 신세였고, 이제 독일은 최후의 일격만 가하면 전쟁사에 보기드믄 엄청난 대승을 거둘 수 있는 감격스러운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승리를 목전에 두었던 바로 그 순간, 히틀러가 직접 나서서 공격을 멈추라고 명령을 내린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히틀러의 한마디는 당연히 지휘부를 커다란 혼란에 빠뜨렸고 모두를 경악하게 만들었습니다.
[ 연합군 주력을 포위하였는데 히틀러는 공격 중지 명령을 내렸습니다 ]
제1차 대전에서 패하였던 치욕을 한시도 잊지 않고 이날이 오기를 그동안 학수고대하였던 독일 군부에게 이는 그야말로 청천벽력 같은 명령이었습니다. 기갑부대를 몰고 진격에 앞장섰던 일선 장군들은 물론 육군 최고사령부(OKH-Oberkommando des Heeres)나 국방군 최고사령부(OKW-Oberkommando der Wehrmacht)같은 최고 지휘부의 요원들까지도 한목소리로 히틀러에게 반대 의견을 피력하였습니다.
[ 히틀러의 명령에 독일군 최고 지휘관들은 경악하였습니다 ]
하지만 히틀러의 결정은 번복되지 않았고 3일이 지난 5월 27일에 재공격 명령이 하달 될 때까지 독일의 맹공은 멈추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평소에 히틀러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던 많은 장군들은 비록 불만이었지만 명령을 따랐던 반면, 전쟁이 끝날 때까지 돌쇠처럼 히틀러에게 맹종하던 친위대의 디트리히(Josepp "Sepp" Dietrich)는 유일하게 총통의 명령을 어기는 아이러니를 연출하였습니다.
[ 히틀러의 총애를 받던 디트리히의 친위대만이 명령을 어기고 진격하였습니다 ]
그는 '친위 히틀러 경호연대(LSSAH)'를 계속 진격시켰는데, 그 이유는 이렇게 튀는 행동이 총통에게 잘 보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일개 연대의 단독적인 진격만으로 전선에 커다란 변화를 일으킬 수는 없었지만 웜하우트(Wormhoudt) 전투에서 항복한 연합군 포로를 학살하는 악행을 범하여 친위대 최초의 전쟁 범죄 행위를 전사에 기록하였습니다. ( 관련글 참조 )
[ 나치 친위대의 전쟁 범죄가 처음 벌어진 웜하우트 전적지 ]
어쨌든 히틀러가 내린 공격 중지 명령은 됭케르크에 고립되어 최후를 눈앞에 두고 있던 30만의 연합군에게 천금 같은 시간을 주었습니다. 이런 천우신조를 이용하여 연합군은 도버 해협을 안전하게 건너 6월 4일까지 영국으로 철수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승기를 잡고 있던 독일은 물론이거니와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여 있던 연합군 스스로도 놀랄만한 엄청난 반전을 이룬 유명한 '다이나모 철수작전(Operation Dynamo)'이었습니다.
[ 배를 이용하여 됭케르크의 포위망을 탈출하는 연합군 ]
후일 독일 측에서 이 정도의 대병력이 안전하게 철수하도록 방임하였던 결과에 대해 두고두고 통탄하는 목소리가 쏟아졌을 만큼 기적 같은 결과였고 이렇게 영국으로 피신한 연합군 자원은 4년 후 노르망디로 다시 쏟아져 들어와 독일의 목에 비수를 겨누는 힘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전사를 보면 '왜 히틀러는 공격명령을 중지하여 적들을 몰살 할 수 있는 확실한 기회를 스스로 놓쳐 버렸나?'하는 물음표가 항상 따라다닙니다.
히틀러는 왜 미스터리로 남는 명령을 내렸을까요?
이처럼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히틀러의 미스터리가 왜 벌어졌는지,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연합군이 어떻게 사지를 안전하게 벗어날 수 있었는지는 전쟁사에 있어 상당히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물론 명령을 내린 당사자인 히틀러가 정확히 이 부분에 대해 설명한 내용이 없기 때문에 앞으로의 분석이 정답이 될 수는 없겠지만 제2차 대전의 가장 미스터리했던 순간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 계속 ) [ august 의 軍史世界 ]
됭케르크의 미스터리 [ 3 ]
마른의 악몽
대성공이 눈앞에 보였음에도 독일군 수뇌부는 잊을 수 없는 뼈아픈 기억을 떠올렸는데, 바로 26년 전 겪었던 '마른 전투(Battle of Marne)'였습니다. 프랑스가 수도를 보르도(Bordeaux)로 옮겨야 하였을 만큼 제1차대전 초기의 전황도 지금처럼 독일군에게 절대 유리하였습니다. 그렇게 승승장구하던 독일이 참호전의 늪에 빠져 결국 패전하였던 것은 마른의 기적이라 불리는 단 한 번의 결정적인 프랑스의 반격에 의해서였습니다.
[ 지난 전쟁 당시에 독일은 마른 전투에서 결정적인 실기를 하였습니다 ]
이 때문에 훗날 베르덩(Verdun) 전투나 솜므(Somme) 전투보다 규모가 작았음에도 전쟁사에서 마른 전투가 차지하는 의의는 상당히 큽니다. 전쟁 개시 후 계속 독일에게 밀린 프랑스가 결정적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적시에 반격함으로써 역사의 분수령을 만들었지만, 사실 이런 빌미는 독일 스스로가 제공하였습니다. 당시 독일은 계속 진격하여도 되는 상황에서 부대 간에 정보가 단절되어 전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 한 번의 실책은 참호전을 가져왔고 결국 독일은 전쟁에서 패했었습니다 ]
이런 역사를 독일 전쟁지도부는 두고두고 악몽으로 기억하고 있어서 일방적인 진격 중에도 부지불식간 출몰할 수도 있는 연합군의 반격을 항상 염두에 두었습니다. 불과 한 세대 전에 눈앞의 전과에 너무 고무되어 다음 대책을 게을리 한 대가가 어떠했는지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던 신중하게 고민하였습니다. 이런 역사를 몸소 최전선에서 겪어 보았던 히틀러 또한 마찬가지였을지 모릅니다.
[ 1940년 프랑스 전선은 승자도 놀랄만한 예상외 결과였습니다 ]
당시 독일은 면(面)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체 선(線)으로만 전선을 돌파하고 있어서 의외의 변수에 대해 더욱 조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실 어느 전쟁 지휘부가 빠른 승리를 원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조그만 우려라도 있다면 이를 해소하고 다음으로 가는 것이 맞습니다. 그렇다면 히틀러의 결정은 어쩌면 당연하였고 이런 측면에서 생각한다면 그의 공격 중지 명령은 신중함의 결과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 히틀러의 명령이 신중함의 발로였다면 잘못된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
항복을 받는 것이 유리하다
이와 더불어 됭케르크의 미스터리와 관련하여 많이 언급되는 또 다른 주장이 '항복 유도설'입니다. 쥐도 막다른 골목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는 말이 있는데, 아마도 히틀러는 이점도 걱정하였는지 모릅니다. 고양이를 물어도 쥐가 이기기는 힘들겠지만 고양이는 상처를 입을 수 있습니다. 20개 사단 규모의 연합군을 됭케르크 해변으로 밀어붙여 포위를 완성하였지만 그 이상의 압박은 오히려 격렬한 최후의 저항을 불러올 가능성이 컸습니다.
[ 너무 강한 압박은 극렬한 저항을 불러올 가능성도 있었습니다 ]
그러한 상황은 독일군의 출혈도 강요당할 가능성이 충분히 예견되므로 당연히 이 정도에서 총을 쏘지 않고 항복을 받는 것이 훨씬 유리하였습니다. 당시 포위된 적에게 살포한 항복 권유 전단을 보더라도 그러한 독일의 의지를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이는 당시만의 특별한 상황이 아니라 전쟁 중에 흔히 벌어질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하고 일반적인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 연합군 측에 살포 된 항복 권유 전단 ]
항복을 권유하였다면 적어도 최후통첩 전까지 상대에게 생각 할 수 있는 여유를 주는 것이 전쟁에서 적을 대하는 도리중 하나입니다. 이처럼 독일은 불필요한 출혈을 막고 항복을 유도하기 위해 공격을 멈추었을 가능성도 있었던 것인데, 그렇다면 히틀러의 공격 중지 명령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더구나 당시까지 독일은 단지 프랑스의 5퍼센트만 점령한 상태여서 전쟁은 아직도 한참 남아 있는 것으로 판단되던 상황이었습니다.
[ 포위망 밖에는 아직도 많은 프랑스군이 있었습니다 ]
프랑스는 이 전투를 끝으로 전의를 급속히 상실하고 얼마 후에 항복하게 되지만, 당시 됭케르크 포위망 밖에는 200여만의 프랑스군이 계속 남아 있어 포위망 안의 30만 연합군을 소탕해도 종전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는 없었습니다. 따라서 독일도 다음의 전투를 염두에 두고 전력을 최대한 보존하여야 했고 그것은 전쟁을 지휘하는 자라면 당연한 대응이었습니다. ( 계속 ) [ august 의 軍史世界 ]
됭케르크의 미스터리 [ 5 ]
영국 공군의 살신성인
히틀러는 역사에 너무나 굵고 뚜렷한 한 획을 그은 인물이지만 현인이 아닌 이유는 그 자신도 광인이지만 그 주변에 모리배들이 많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히틀러의 환심을 사기 위해 혈안이 되었던 독일 공군 총사령관 괴링(Hermann Goering)은 됭케르크의 미스터리를 만드는데 크게 일조한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연합군이 포위망에 갇히자 공군의 폭격만으로 포위된 적들을 섬멸 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였습니다.
[ 그렇게 의도했다고 볼 수는 없지만 괴링은
됭케르크의 미스터리를 만드는데 크게 일조한 인물이었습니다 ]
연합군이 포위망에 갇혀버리고 독일의 승리가 확실시 되자 괴링은 전공을 육군에게 빼앗길까봐 초조해하면서 포위망에 갇힌 연합군을 청소해 버리겠다고 나섰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의 진위 여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한 편이지만 어쨌든 히틀러의 명령으로 육군의 진격은 멈추었고 대신 독일 공군이 전면에 나섰습니다. 연일 이어지는 당대 최강 루프트바페의 공습으로 말미암아 됭케르크에 고립 된 연합군은 많은 피해를 당했습니다.
[ 됭케르크 일대를 폭격하는 루프트바페 ]
그런데 독일이 한 가지 간과하고 있던 점이 있었는데 영국 공군 또한 가까운데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영국 전투기들은 해협을 건너와 고립된 아군을 공격하는 독일의 폭격기들을 요격하였는데 뒤에서 달려드는 독일 전투기의 요격을 회피하지 않고 오로지 임무에만 충실하였습니다. 한마디로 내 목숨을 적에게 내놓고 벌인 극단적인 전투였고 이 같은 살신성인의 노력으로 많은 병사들이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 죽음을 각오한 영국 공군의 맹렬한 대응으로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습니다 ]
이처럼 영국 공군의 활약은 독일의 예상을 뛰어넘었을 만큼 대단하였습니다. 결국 공군만으로 연합군의 소탕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얼마 지나지 않아 밝혀지면서 지상군이 다시 나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실 제공권의 확보 없이 전쟁을 이기기 힘들지만 전쟁은 공군만으로 이길 수도 없습니다. 괴링의 허풍을 너무 믿은 히틀러가 그 달콤한 말에 혹하여 진격을 멈추었던 것은 아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공군만으로 포위망 안의 연합군을 제거하기는 무리였습니다 ]
넘을 수 없는 벽
이와 더불어 그동안 간과되었던 것이 해군입니다. 포위된 적을 요리하는 것은 순전히 공격자의 선택에 달려 있지만 포위된 적이 해상으로 나갈 방법이 남아있다면 그것은 100퍼센트 완벽한 포위로 볼 수는 없습니다. 만일 오늘날 미국 같은 나라가 육지와 바다를 함께 봉쇄하였다면 이것은 완벽한 포위이며 포위된 적들은 더 이상 탈출구가 없음을 알고 조기에 항복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독일 해군에게는 이런 능력이 없었습니다.
[ 해상으로의 탈출로가 남아있었는데 독일은 바다를 막을 능력이 없었습니다 ]
됭케르크에서 독일 육군이 포위를 완성하였지만 바다는 세계 최강의 영국 해군이 장악한 앞마당이었습니다. 30여 만의 연합군이 탈출하는 동안 바다에서 독일 해군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사실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조그만 목선까지 탈출 작전에 동원하였다는 사실은 영국의 눈물겨운 분투를 알려주는 예이기도 하지만 이는 이런 선박조차 바다에서 요격하기 힘들었을 만큼 독일 해군의 상황이 열악하였다는 증거입니다.
[ 영국의 해군력은 대 탈주 성공의 밑거름이었습니다 ]
이처럼 독일군이 연일 맹공을 가하였음에도 연합군의 대부분이 안전하게 해협을 건너 영국으로 탈출할 수 있었던 일등공신이 바로 영국 해군의 활약 덕분이었습니다. 당대 최강이라는 독일 공군으로도 저지하기 힘들 만큼 바다 위의 영국 해군은 강력하였습니다. 만일 이러한 상황에서 독일 지상군이 무턱대고 됭케르크의 해안가로 계속 진격하다가는 영국 해군의 포격에 많은 피해를 입을 가능성도 농후하였습니다.
[ 1944년 연합군 해군의 포격으로 전멸당한 독일군 기갑부대 ]
1944년 노르망디 상륙 후 캉(Caen) 전투에서 독일군이 연합군 해군의 포격에 상당한 피해를 입었던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유추가 가능합니다. 한국전쟁 당시의 흥남철수도 강력한 미 해군이 탄막으로 중공군의 진격을 막은 후에 이룬 결과였는데 사실 됭케르크 철수도 이와 비슷한 측면이 있습니다. 이처럼 영국 해군의 엄청난 능력은 독일 육군의 진격을 망설이게 했을 가능성이 컸습니다. ( 계속 ) [ august 의 軍史世界 ]
됭케르크의 미스터리 [ 끝 ]
당연히 그도 승리를 원했다
비록 히틀러가 5월 24일부터 3일간의 진격을 멈춘 것에 대해 그동안 많은 이야기가 있어왔지만 사실 이에 대한 정답은 없습니다. 물론 이 3일간의 공백이 연합군의 철수에 많은 도움을 주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30만 명의 대병력이 거의 피해를 입지 않고 안전하게 철수할 수 있었던 결정적 사유 또한 아닙니다. 어쩌면 이 부분은 그 동안 인구에 회자되면서 과장되어 왔던 측면도 있습니다.
[ 3일간 이어졌던 히틀러의 공격 중지 명령이 대 탈주를 가능하게 한 결정적 사유는 아닙니다 ]
왜냐하면 됭케르크에서의 해상 철수 작전은 5월 26일 시작 되어 6월 5일 종료 되었는데, 히틀러의 명령으로 멈추었던 독일의 진격이 5월 27일 다시 시작되었으니 정작 연합군이 혜택을 보았던 시간은 단지 1일 뿐이었습니다. 물론 급박한 상황에서 1일도 엄청나게 소중한 시간이지만 30만 명의 대병력이 안전하게 탈출하기에 결코 충분하다고 볼 수 있는 시간은 아닙니다.
[ 연합군은 독일의 진격 중지도 모르고 오로지 바다를 향해 도망쳤습니다 ]
따라서 히틀러의 공격 중지 명령이 없었어도 많은 연합군이 탈출하였을 것이라는 추론이 충분히 가능합니다. 후일 처칠이 회고록에서 "5만 명 정도 구출해내면 다행"이라고 했을 만큼 절망적인 상황에서 영국원정군 23만 명, 프랑스군 8만 명 그리고 1만 점의 장비가 무사히 탈출하였기에 "이것은 기적이라고 밖에 말 할 수 없다"고 기술하였지만, 사실 자화자찬에 가깝습니다.
[ 처칠은 기적이라고 표현하였지만 영국은 이들을 탈출 시킬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
영국의 필사적인 활약은 독일의 진격을 충분히 상쇄 할 만큼 영웅적이었지만 사실 그런 능력은 충분히 있었습니다. 오히려 영국은 세계 최강의 해군을 보유하였고 프랑스는 육군 대국이어서 전쟁 개시 전 독일보다 우위에 있었습니다. 패배한 연합국은 독일군의 능력을 과대평가하였지만 반면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능력을 과소평가하여 이런 결과를 기적으로 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 설령 독일의 진격이 멈추지 않았어도 많은 병력이 탈출하였을 것이 분명합니다 ]
후일 30만의 대병력이 안전하게 철수한 결과에 대해 두고두고 통탄하는 목소리가 독일 측에서 나왔지만 설령 당시 진격이 멈추지 않았어도 지금까지 설명한 이유 때문에 독일은 고립된 연합군을 절대로 섬멸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이를 뒷받침 하는 결정적인 증거가 바로 다음에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열흘 후에 이와 맞먹는 거대한 해상 탈출 작전이 브로타뉴(Bretagne) 반도 끝에서는 다시 한 번 재현되었던 것입니다.
[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공격을 멈추고 대기 중인 독일군 기갑부대 ]
브로타뉴까지 밀려간 20여만의 연합군이 6월 14일 셀부르(Cherbourg)와 브레스트(Brest)를 통해 해상 철수를 시작하여 6월 25일까지 영국으로 안전하게 빠져나가는데 성공했습니다. 이른바 아리엘 작전(Operation Ariel)이었는데 이때는 프랑스가 항복하기 일보 직전이어서 됭케르크처럼 연합군의 반격을 고민하고 자시고 할 필요도 없던 시점이었습니다. 그런 압도적인 상황 임에도 독일군은 연합군의 탈출을 차단하지 못하였습니다.
[ 아리엘 작전 당시에 브로타뉴에서 안전하게 탈출하는 연합군 ]
결국 이것은 됭케르크의 철수당시에 미스터리하였던 히틀러의 공격 중지 명령이 결코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지 못하였다는 증거입니다. 그렇다보니 일부 자료에는 히틀러가 영국과의 전략적 동맹관계를 고려하여 일부러 진격을 멈춘 것은 아니냐는 분석을 내놓기도 합니다. 하지만 진격을 멈춘 직후 영국에 대해 정치적인 협상을 제안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또한 그다지 신빙성이 없습니다.
[ 본인이 해명한 내용이 없어 미스터리가 되었지만
그도 승리하기 위해 명령을 내린 것이 틀림없습니다 ]
결국 처음에 썼던 것처럼 히틀러가 자기 입으로 이야기 한 것이 없으므로 정답이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히틀러가 최후의 일격을 준비 중이던 자신의 군대에게 극적인 정지 명령을 내린 것은 결코 자비나 관용이 아니라 승리를 달성하기 위한 방편 중 하나였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전쟁을 시작하는데 히틀러만큼 적극적인 인물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 august 의 軍史世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