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실체·본질 봐야

폴 세잔: 본질을 추구한 긴 여정 / 사과

modest-i 2022. 11. 15. 10:00

[사과와 오렌지] 사과 때문에 세상이 뒤집혔다

폴 세잔, 사과와 오렌지, 1895~1900

사과는 무슨 빌어먹을 놈의 사과인지, 미칠 노릇이었다. 목이 또 저려온다. 손등은 또 간지럽다. 다리를 계속 꼬고 있자니 쥐가 난다. 움직이고 싶다. 목을 크게 한 번 돌리고, 손등을 시원하게 긁고, 다리를 쭉 펴고 싶다. 참을 수 없다.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몸을 돌리려던 그때… "어이, 숨도 크게 쉬지 말라니까? 자세가 또 흐트러졌잖소. 농담이 아니라, 정말 사과처럼 가만히 딱 있으란 말이오!" 아, 정말 울고 싶다.

누군가가 살면서 겪은 가장 큰 실수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이 순간을 말하겠다. 나보다 먼저 그의 모델로 서봤다는 한 말라깽이는 내게 아주 진한 블랙커피를 선물했다. "가기 전에 이거 꼭 마시고요. 그 사람 앞에서 절대로 졸지 마세요…." 얼빠진 자식의 얼빠진 소리인 줄 알았다. 아니었다. 모델로 선 첫날에 의도치 않게 살짝 졸았는데, 이 작자는 "나는 선생의 본질을 끄집어내려고 이렇게 애쓰는데, 선생은 어떻게 움직이고 잠까지 잘 수 있소!"라며 붓을 내던지고 뛰쳐나가려고 했다.

폴 세잔, 사과와 오렌지(일부), 1895~1900

그 까칠한 마네도 이 정도는 아니라는데, 때로는 모델이 떠들고 움직일 수 있게 일부러 풀어놓는다는데….

그런데 이 작자는 그런 게 없었다. 매번 "나는 화가, 당신은 사과. 움직이지 말 것. 오케이?"란 말만 하니 사과 노이로제에 걸릴 것 같았다. 나는 무려 115차례나 모델이 돼 줬다. 애초 그의 짜증을 몇 번 들은 후부터는 중도 포기를 선언하고 싶었다.

그 곰 같이 큰 덩치로 "그럼 내가 여태 그린 건? 내가 여태 짠 구상은! 응?"이라며 멱살을 휘감을 것 같아 그러지도 못했다.

언젠가 그가 불러 또 작업실로 덜덜 떨며 가던 중 길거리 과일 가판대에 쌓인 사과 더미를 봤다. 나는 그 녀석들을 끌어안고

"너희들은 그놈한테 걸리지 말아야 한다"며 펑펑 울었다. 누가 봤다면 틀림없이 나를 병원에 끌고 갔을 테다.

폴 세잔, 볼라르의 초상

"손이 약간 어색하지 않소?" 그 화가에게서 그림을 받아서 든 날, 이 말을 한 게 내가 행한 두 번째로 가장 큰 실수였다. "아니, 그림이 다 좋은데 말이오. 손만 좀 너무 각도를 달리해서 그린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그의 부릅뜬 눈을 본 나는 서둘러 뒷말을 덧붙였다.

그림은 굳이 따지자면 마음에 드는 편이었다. 분명 감각이 있었다. 그만의 야성이 뚜렷했다. 하지만, 세상에서 그림을 가장 잘 본다는 나마저도 고개를 갸웃하게 하는 면이 일부 있었다. 가령 초점과 형태가 어색하고, 내 눈동자는 없고, 내 자세도 이상하고, 색감도, 배경도, 붓 터치도…. 아, 일부가 아니군.

이 화가의 독특한 세계관은 분명 매력적이지만, 내 모습이 담긴 이 그림은 그간 없던 형식의 초상화였다. 다른 이가 봤다면 내게 분명 "멍텅구리 같으니! 사기를 맞았구먼"이라고 할 터였다. 이 생각을 하니 눈앞 화가의 명치를 힘껏 때리며 "내가 백 번이나 넘게 모델을 서 줬는데!"라고 외치고 싶어졌다. 다행히 내 두 배는 돼 보이는 큰 덩치가 다시 보였다. 그렇게 분노조절장애는 급속도로 치료됐다. 그래서 정말 마음에 안 드는 딱 한 지점, 가장 빨리 손 볼 수 있을 듯한 그 한 지점만 말한 것이다.

"손이 어색해. 손이 어색하다…. 그래, 좋소. 내일 또 이 시간에 나오시오. 내가 선생을 좋아해서 받아들이는 거요. 다른 이라면 어림없었소." 그래, 모델 한 번쯤은 더 서줄 수 있었다. "앞으로 또 백 번 정도 나오면 될 거요. 그림을 아예 새로 그려야 하니까."

뭐라고?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아니, 저 티끌만 한 곳만…." "볼라르 선생!" 그 화가가 소리쳤다.

"사과를 실컷 다 그려놓고 오렌지 꼭지를 덧발라놓으면 그게 사과요? 이 그림은 이제부터 약간만 달라져도 선생의 초상화가 아니게 되는 거요. 선생의 본질이 훼손되니까! 그러니 당연히 처음부터 그려야지. 알만한 양반이 말이야." 아, 또 그놈의 사과…. 정말 울고 싶다.

틈만 나면 사과 타령을 한 이 고집불통 화가의 이름은 폴 세잔입니다. 미술상 볼라르는 이런 세잔의 모델로 나섰다가 된통 당했습니다.

그는 1914년 일기장에 "세잔이 작업하는 것을 직접 못 본 사람은 그의 작업 진행이 얼마나 더디고 고통스러운지를 알지 못할 것이다"라며 분노로 펜을 꾹꾹 눌러 썼습니다. 하지만 볼라르의 인내는 훗날 가문의 영광으로 돌아옵니다. 미련하고 촌스러운 곰 같았던 이 화가가

'근대 회화의 선구자'로 세상을 바꿨으니까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정물화?

폴 세잔, 사과와 오렌지, 1895~1900

사과와 오렌지가 널브러져 있습니다.

흰 천과 접시, 화려한 술 단지, 알록달록한 식탁보가 함께 있습니다. 앞쪽 접시에 담긴 과일은 나름의 형태가 있지만, 뒤에 몰려있는 과일은 대충 색깔만 칠해놓은 듯합니다. 흰 천과 접시는 잘 보면 마냥 하얗다고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식탁보는 식탁에 딱 맞게 깔리지 않고 뭉쳐있습니다. 그림은 빼곡합니다. 숲과 바위로 빽빽이 채워진 풍경화처럼 느껴집니다. 그런데도 묘하게 안정감이 있습니다.

세잔의 그림 '사과와 오렌지'는 어렵습니다. 그간의 정물화와는 다르게 그려졌습니다. 언뜻 봐선 작품성을 느끼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이 그림이 서양 미술사의 기념비가 된 이유는요.

폴 세잔, 사과와 오렌지(일부), 1895~1900

영원할 것 같던 진리, 원근법을 대놓고 파괴했기 때문입니다. 세잔은 인간의 눈과 카메라 렌즈는 다르다는 점을 인정한 최초의 화가였습니다. 인간은 카메라처럼 하나의 소실점(消失點·평행한 두 선이 멀리 가서 만나는 점)을 갖고 사물을 '사진 찍듯' 하나의 상으로 볼 수 없다는 점을 받아들입니다. 이 말을 조금 더 풀어보겠습니다. 사진은 '찰칵'하는 순간 그 초점, 그 각도를 영원히 안고 갑니다. 하지만 인간의 눈은 한 사물을 다양한 형태로 바라봅니다. 눈앞에 사과가 있다고 상상해보면요. 이를 보는 두 눈동자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계속 움직입니다. 그럴 때마다 초점과 시야가 미세하게 바뀝니다. 눈을 조금만 크고 작게 떠도, 고개를 살짝만 까딱여도 변합니다. 아예 한쪽 눈을 번갈아 감은 채로 보면 놓인 위치까지 달라 보입니다. 오랜 기간 "그림이 사진 같다!"는 말은 칭찬으로 여겨졌습니다.

폴 세잔, 사과와 오렌지(일부), 1895~1900

그 시간대, 그곳에서 그 초점, 그 각도로 본 그대로를 그리는 것, 당시 그림의 원칙은 이러한 현실의 한 조각에 대한 '순간 포착'이었습니다. 이는 1401년생 르네상스 화가 마사초가 원근법을 건져 올린 후 근 450여년간 그 어떤 천재도, 반항아도 손대지 못한 성역이었지요. 세잔은 그런 점에서 혁명가였습니다. 과학사로 치면 누구도 생각 못한 공식 몇 개를 찾아낸 게 아니라(이 또한 대단한 일이지만), 아예 과학이라는 학문의 정의를 통째로 뒤흔든 겁니다.

폴 세잔, 사과와 오렌지(일부), 1895~1900

'사과와 오렌지'를 다시 볼까요.

그림 속 사과와 오렌지 등이 어지럽게 그려진 듯한 이유는 한 화폭에 여러 개의 시점이 담겨 있어서입니다. 왼편의 사과 접시는 위에서 본 시점으로 그렸습니다. 비스듬히 기울어진 오렌지가 담긴 접시, 술 단지는 옆에서 본 것처럼 묘사했습니다. 테이블 모양도 어색합니다. 식탁보 밑 왼쪽 테이블 면이 반대편의 오른쪽 테이블 면과 높이가 안 맞습니다. 마치 두 개의 테이블이 있는 듯합니다.

사과와 오렌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과일은 전혀 그럴 자리가 아닌데도 당장 굴러떨어질 듯 아슬아슬합니다. 몇몇 과일은 생뚱맞은 위치인데 안정적으로 잘 놓여 있습니다. 일부는 그리다 만 것 같고, 몇 개는 막 시들고 있는지 푸르스름합니다.

과일의 위, 아래, 왼쪽, 오른쪽, 더 나아가 어제, 오늘, 내일, 작년, 지금, 내년의 시점을 각각 그렸기 때문입니다.

색채는 해방됐다, 이제 ‘형태의 해방’이다! 세잔은 근대 회화의 길을 연 화가입니다. 미술사의 판을 바꿨습니다.

이 말은 후대 화가 중 세잔의 영향을 받지 않은 이가 없다는 뜻입니다.

모네, 인상 : 해돋이

한때 인상주의에 발을 담근 세잔은 곧 회의를 느낍니다. 인상주의는 빛을 끌어들여 그림에서 색채를 해방했습니다. 잘 익은 사과를 더는 빨간색으로 그리지 않아도 됐습니다. "빛이 더 들어오니 더 밝게 보였어. 그래서 주황색으로 칠했어"라는 말이 통하는 세상을 만든 겁니다.

하지만 세잔은 색채의 해방에서 만족하지 않습니다.

세잔이 볼 때 인상주의는 가야 할 길에서 중간에 멈춘 운동이었습니다. 세잔은 인상주의자들이 색채에 사로잡혀 사물의 형태를 소홀히 여긴다고 생각했습니다. 세잔이 볼 때는 사물의 형태도 색채만큼 변화무쌍했습니다. 빛이 사물의 색채를 바꿨다면 보는 방향과 각도는 사물의 형태를 바꿨습니다. 가령 사과라고 해서 무조건 동그랗게 보이는 게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사과는 넓적하게 보이기도 했고, 평평하게 보이기도 했습니다.

빛은 포개질수록 밝아집니다.

이에 따라 색채 해방의 종착지는 눈이 시리도록 밝은 흰색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형태 해방의 종착지는 무엇일까요. 세잔은 이 지점을 고민합니다. 세잔은 사물의 본질에 답이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세잔은 사과를 비롯해 셀 수 없이 다양한 사물을 셀 수 없이 다양한 위치에서 바라봅니다. 그렇게 본질을 탐구했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고정관념이 밀려오면 고개를 강하게 저었습니다. 가령 사과를 볼 때면 '씹으면 달콤한 즙이 나오는 빨간색의 동그란 열매'라는 인간 영역에서의 생각을 버리고, 그냥 사과 그 자체를 보려고 애썼습니다.

폴 세잔, 병과 사과 바구니가 있는 정물

세잔이 사과에 집착하게 된 이유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는데요.

그 시절, 세잔의 집요함을 견딜 수 있으면서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는 게 사과였습니다. 세잔의 끈질김은 모델을 도망가게 했습니다. 살구, 복숭아 같은 말랑한 과일을 세잔이 볼 때는 아주 빨리 썩는 과일이었습니다. 접시와 가구는 종류가 너무 많았습니다. 오래 관찰할 수 있고, 웬만한 곳에는 다 가져다 놓을 수 있고, 막 대해도 말 한마디 하지 않는 사과는 완벽한 사물이었던 겁니다.

세잔은 그림 '사과와 오렌지'에도 5년 이상 매달렸습니다.

얼마나 진득하게 쳐다봤는지 짐작할 수 있는 기간입니다. 때로는 붓을 내려놓고 온종일 사과만 쳐다봤습니다. 그 썩지 않는 사과가 시들고 썩을 때까지 응시했습니다. 사과 하나를 두는데도 여기가 아니면 안 되는 위치를 찾으려고 했습니다. 세잔의 이런 그윽한 눈빛으로 접시, 술 단지, 식탁보, 테이블의 본질도 찾으려고 애썼습니다.

폴 세잔, 과일 접시가 있는 정물

세잔은 끈질긴 연구 끝에 답을 내립니다.

1904년 세잔은 화가 에밀 베르나르에게 "나는 자연에서 구, 원뿔, 원기둥을 본다"는 내용이 담긴 편지를 씁니다. "모든 형태는 구, 원기둥, 원뿔로 재구성할 수 있다!"고 주장한 겁니다. 이 말을 조금 더 쉽게 풀어볼까요.

그가 여러 각도에서 본 다양한 사물의 모든 형상이 결국은 구, 원기둥, 원뿔의 형상으로 '수렴(收斂)'했다는 뜻입니다. 모든 사물에 대해 고정관념을 벗겨내고 본질만 남겨봅니다. 이를 가장 단순한 형태로 새롭게 구성하면 그게 예외 없이 구, 원기둥, 원뿔 중 하나였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세잔은 선과 색으로 대상을 모방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선과 색으로 대상에 '새로운 형태'를 부여하는 일도 미술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다는 점을 깨우친 겁니다. 이는 급진적 발상이었습니다.

인상주의도 이해받기 힘든 시절에 이런 생각을 이해할 사람은 없었습니다. 인제야 세잔의 이 말은 그림에서 형태를 해방한 선언문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山에 입이 있었다면…“그만 오라” 외칠 만큼

폴 세잔, 생 빅투아르 산

세잔이 말년에 그린 생 빅투아르 산입니다.

"이게 풍경화야?"라는 의문이 들 수 있겠습니다. 그림 자체가 범상치 않습니다. 산이 하나의 덩어리입니다. 하늘과 산이 모두 같은 범주의 파란색으로 칠해졌습니다. 산 아래 땅은 초록색과 금색의 조각들로 이뤄졌습니다. 집 몇 채와 나무 같은 걸 그린 듯하지만, 정확히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그렸는지는 짐작하기가 어렵습니다. 당연히 원근법도 없고, 명암법도 없습니다.

이 그림을 찬찬히 보면 원뿔과 원기둥 모양의 형상도 찾을 수 있습니다.

세잔은 사물의 외관 아닌 본질을 찾아 헤맸다고 했지요. 그런 그가 결국 "화가는 사물을 재현해야 한다"는 틀을 즈려밟고 "화가는 사물에 새로운 형태도 부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경지까지 올라선 겁니다. 즉 "네모로 보인다고 해 다 네모로 그릴 필요는 없다.

그건 겉모습일 뿐 본질이 아니니까"라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까지 왜곡된 풍경화는 세잔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폴 세잔, 생 빅투아르 산

폴 세잔, 1906년 9월 8일, 아들에게 쓴 편지

"같은 소재라도 다른 각도에서 보면 아주 강력하고 흥미진진한 대상이 돼. 그러니 앞으로 몇 달 간은 같은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관찰할 거야. 오른쪽으로 보면 전에 못 본 게 나와. 왼쪽으로 보면 또 전에 놓친 게 나오곤 해."

세잔은 이 그림을 어느 날 계시를 받고 휘리릭 그린 게 아니었습니다.

세잔은 젊을 때부터 집요하게 이 산을 올랐습니다. 근처 동네를 산책했습니다. 어떤 날은 전망대에 올라 눈이 빠질 듯 쳐다봤습니다. 샛길부터 특정 나무의 위치까지 줄줄 외울 경지에 올랐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세잔에 대해 대놓고 "산에 미쳐버렸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폴 세잔, 생 빅투아르 산

세잔은 1882년부터 생 빅투아르 산을 주제로 그림을 30점 넘게 그렸습니다.

그의 초기 작품은 비교적 평이합니다. 색도 다채롭고 나름대로 원근법도 있습니다. 이는 세잔의 말년작이 충동 같은 게 아닌 철저한 연습과 계산에 따라 그려졌다는 걸 증명합니다. "옛날 공식에 맞춰 그릴 수 있지만, 그러면 더는 발전은 없다"는 생각이었을 겁니다.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 그가 이렇게 될지

폴 세잔, 생 빅투아르 산

세잔은 어떻게 혁명가가 될 수 있었을까요.

'곰 손'에 둔재였던 그는 어쩌다 19세기 최고의 화가로 남게 된 걸까요. 이 질문의 답은 세잔이 품은 신과 같은 우직함자기 확신에 있습니다. 세잔은 1839년 프랑스 남쪽 끝 엑상프로방스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은행가였습니다. 그저 그런 은행가가 아니었습니다. 프랑스 곳곳에 지사를 둔 은행 설립자였습니다. 태어나보니 다이아몬드 수저였던 겁니다.

폴 세잔, 아버지의 초상

세잔은 어릴 적부터 법을 공부했습니다.

사업가인 아버지의 입장에선 믿을만한 법률인이 필요했던 겁니다. 세잔은 그런 아버지 속도 모르고 그림에 관심을 둡니다. 왜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당시 프랑스에서 돈 있는 집안 자제가 미술에 심취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22살, 법대까지 간 세잔이 자퇴하고 프랑스 파리로 간 건 친구 에밀 졸라 때문이었지요.

시인이자 소설가, 비평가로 활동하며 '목로주점', '나는 고발한다' 등을 남긴 그 졸라가 맞습니다. 세잔과 졸라는 동네 소꿉친구였습니다. 이탈리아 이민자 출신으로 가난하고 병약했던 졸라는 또래에게 맞고 다녔습니다. 이를 본 세잔이 냄비 뚜껑만 한 손바닥을 휘두르며 녀석들을 혼내줬습니다. 그때부터 두 사람은 영혼의 단짝이었습니다. 그런 에밀 졸라가 파리에서 두각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세잔은 여기에 자극을 받은 겁니다.

폴 세잔, Madame Cezanne in the Greenhouse

이때부터 세잔은 평생 견디는 삶을 삽니다.

스스로 그 길을 선택했습니다. 막상 파리에 와보니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 너무 많았습니다. 아버지가 지원 따위는 꿈도 꾸지 말라고 한 만큼, 팔자 좋게 연습에만 몰두할 수도 없었습니다. 세잔은 예민해집니다. 졸라는 자기가 사귄 친구들을 소개해줍니다. 하지만 그 특유의 큰 체구와 특이한 말투, 툴툴대는 성격과 거친 행동 탓(이쯤 세잔은 누군가가 우연히 자신의 팔이나 등을 건드리면 발끈하고 화를 냈음)에 파리지앵(Parisien)과 깊게 사귀지도 못했습니다.

폴 세잔, 목욕하는 사람

세잔은 파리에 있는 내내 지겹도록 기본기를 갈고 닦습니다.

타고난 곰 발이었던 탓도 있지만, 태생적으로 기교나 눈속임을 못 견디는 성격이었던 것 같습니다. 야망을 품고 파리에 온 세잔은 변방에 처박힌 채 성공을 향해 내달리는 친구의 모습만 봐야 했습니다. 세잔은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저주에 가까운 막말도 참아야 했습니다.

세잔은 1863년에는 낙선전(落選展), 1870년대에는 피사로 등과 함께 인상주의전에 참가합니다. 결과는 '폭망'이었습니다. 기성 화단의 핵심 표적 중 하나는 세잔이었습니다. 뚱한 이 남자가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림도 기괴했습니다. 다른 인상주의자들의 그림은 밝기라도 하는데, 세잔의 그림은 혼자 우울하고 어두웠습니다.

세잔은 인상주의에 대한 회의를 갖고 있었습니다.

이미 세잔은 색채 너머 형태의 표현 방식을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일단 이름을 알려야 하니 인상주의 전시에 나섰지만, 이들과 비슷한 그림은 도저히 그릴 수 없었던 겁니다. 하지만 세상은 세잔의 선구적인 시도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당연합니다. 인상주의를 놓고도 "뭣도 모르는 젊은 녀석들이 나댄다"고 손가락질한 시대였습니다.

폴 세잔, 빅토르 쇼케의 초상

폴 세잔의 '빅토르 쇼케의 초상'을 본 비평가의 감상평

"이상하게 생긴 머리 색깔은 임산부에게 충격을 줄 수 있고, 태아에게는 황열병을 옮길 것이다."

세잔은 본질을 탐구하는 자신의 방식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치매에 빠진 상태에서 그리는 백치"라는 말을 듣는 동안 그와 함께 비주류로 찍혔던 화가들은 하나둘 재평가를 받습니다. 다들 주류로 올라서 유명해집니다. 세잔은 그럼에도 세상과 타협하지 않습니다. 세잔의 동료들은 그런 그가 한심했습니다. 안타까웠습니다. 세잔만 늘 제자리였습니다. 세잔이 근 20년간 파리에 머물며 얻은 건 조롱 뿐이었습니다.

위대한 은둔, 전설의 시작

1886년, 세잔은 고향에 다시 둥지를 틉니다.

세잔은 한적한 곳에 틀어박혀 계속 그림을 그립니다. 파리에서 이룬 것 없이 돌아온 그는 편한 삶을 뒤로 하고 끝까지 붓을 쥡니다. 그 해 세잔은 졸라와의 우정도 끊습니다. 졸라가 세잔에게 새로 쓴 소설 '작품'을 보내줬는데요. 이 안에는 클로드라는 화가가 나옵니다. 화단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망상의 세계에 빠졌다가 끝내 극단적 선택을 하는 인물입니다. 세잔은 자신을 보고 클로드를 창조했을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30년의 우정은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세잔은 이후 평생 졸라를 만나지 않았습니다. 같은 해 세잔은 아버지도 잃었습니다.

폴 세잔,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

당시 세잔은 50대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세잔이 하는 건 붓질 밖에 없었습니다. 계속 사과를 그렸습니다. 지겹게 생 빅투아르 산을 그렸습니다. 형태의 해방, 사물의 본질…. 그는 이렇게 중얼거리며 초점과 각도, 거리를 바꾼 채 그리고 또 그렸습니다. 무능력한 아들, 희망 없는 친구, 조롱하는 화단, 남이 잘되는 걸 지켜만 봐야 하는 자신….

세잔은 낙오자였습니다.

이쯤 되면 "진짜 안 되는구나"라며 다른 일을 찾을 법합니다. 그런데도 그는 밀려오다 못해 만조가 된 고난을 품은 채 작품 활동을 했습니다. 그 고난에 빠져 죽지 않고 헤엄치는 것을 택했습니다.

폴 세잔, Château Noir

1895년, 견디는 삶을 살던 세잔은 드디어 빛을 봅니다.

그 시절 파리에선 미술상 중 프랑스계 미국인인 볼라르가 영향력을 키워가고 있었습니다. 볼라르는 우연히 "시골에 틀어박혀 이상한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호기심이 생긴 볼라르는 직접 세잔의 작업실을 찾았습니다. 볼라르는 남다른 안목의 소유자였습니다. "오히려 좋은데?"라고 생각합니다. 이후 볼라르는 자신의 갤러리에서 세잔의 생애 첫 개인전을 열었습니다.

"이런 괴물이 어디에 있었어? 도대체 뭘 어떻게 그리면 이런 작품이 나올 수 있는 거야?"

10여년 사이 시대는 또 바뀐 상태였습니다. 세잔은 그제야 명성을 얻었습니다. 젊은 화가들 틈에서 그의 이름이 퍼져나갑니다. 인상주의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이 화풍에 열광합니다. 후배들은 세잔의 그림에서 완전한 해방감을 느꼈습니다. 인상주의 이후 더 이상의 진보는 없을 것이라고 낙담했던 이들은 세잔의 그림에서 "아니다. 우리도 더 나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얻었습니다.

폴 세잔, 대수욕도

세잔은 이들의 교주가 됩니다.

혁명군의 총사령관이 됩니다. 차가웠던 평론가들은 세잔이야말로 가장 앞선 화가라고 띄웠습니다. 이렇게 뒤늦게 재산도, 명예도 얻은 세잔이었으나 그는 그 사이 득도한 양 명성을 만끽하지 않았습니다. 개인전이 성황리에 열릴 때도 세잔은 작업실에서 혼자 그림이나 그리고 있었습니다. 작품을 의뢰받을 때 말고는 거의 틀어박혀 있었습니다. 과거에는 실패자의 은둔이었습니다. 명성을 얻은 후부터는 이 또한 선구자의 신비주의로 포장됐습니다.

파블로 피카소, 아비뇽의 처녀들

피카소, 마티스, 칸딘스키…모두 ‘세잔 키즈’들

20세기에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한 화가 한 명을 꼽자면 단연 피카소입니다.

피카소도 자신의 위대함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피카소는 이 때문에 건방졌고, 남을 스스럼없이 비판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피카소가 고개를 숙인 단 한 명의 화가가 있었습니다. 세잔입니다. 피카소는 세잔을 놓고 "나의 유일한 스승인 세잔은 우리 모두에게 아버지와 같은 존재"라고 칭송했습니다. 20세기 이후 이름을 날린 화가 중 대부분은 '세잔 키즈'입니다.

세잔이 여러 방향에서 대상을 관찰하고 표현하던 버릇은 피카소가 이어받았습니다. 피카소는 여기서 더 나아가 대상을 조각조각 낸 뒤 캔버스 위에서 재창조했습니다. 입체파가 탄생한 겁니다.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은 세잔의 '대수욕도'를 본 뒤 그린 작품입니다. 피카소와 함께 입체파를 이끈 브라크 역시 "세잔의 작품을 보자 모든 게 뒤집혔다. 나는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야 했다"고 했지요.

앙리 마티스, 사과

세잔의 과감한 색채 선정에 영감을 받은 마티스는 아예 색채 그 자체를 주인공으로 두는 야수파를 창시했습니다. 마티스는 세잔을 '회화의 신 같은 존재'라고 칭했습니다. 세잔이 세상을 구, 원뿔, 원기둥으로 규정한 건 몬드리안칸딘스키의 추상회화에 영향을 줍니다. 추상화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는 데생과 색채의 분리를 시도한 화가도 세잔이 최초였습니다.

그 잘난 피카소가 세잔의 작품에 얼마나 푹 빠졌었는지 알려주는 일화가 있는데요.

어느 날은 피카소가 한 상인이 "이건 세잔의 그림이오"라며 비싼 값을 부르자 불같이 화를 냅니다. "내가 세잔을 모르는 줄 알아? 내가 그의 그림을 보기만 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야. 난 그것들을 연구하느라 몇 년의 세월을 보냈단 말이야!"라며 쫓아냅니다. 어떤 검증 도구도 없이 단번에 위작임을 알아차린 겁니다.

끝내 그림을 놓지 못한 채 죽었다

폴 세잔의 초상화

평생 버티는 삶을 살았다고 하지만, 그런 세잔의 마음속에서도 오랜 기간 받은 상처는 치유되지 않았나 봅니다.

원래도 사교성이 없던 세잔은 점점 더 사람들과 어울리는 일을 피했습니다. 성격은 더 예민해졌습니다. 찾아오는 이는 마다하지 않았지만, 혈기 왕성했던 어릴 적처럼 먼저 나서지는 않았습니다. 근 40년간 유채화 900여점, 수채화 400여점을 남겼습니다. 세잔은 그림을 실컷 다 그리고도 일순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잘라서 불태웠습니다. 세잔은 성공한 후에도 자신을 '실패한 화가', '예리하지 못한 눈을 가진 시골 화가'로 여겼습니다. 무능력 탓에 자신이 본 그대로를 화폭에 옮겨담을 수 없다고 개탄했습니다.

세잔은 1906년 10월 23일 눈을 감았습니다. 세잔은 죽기 일주일 전쯤 평소처럼 밖에서 그림을 그리다가 강한 비바람을 만났습니다.

세잔은 의식을 잃고 쓰러졌습니다. 기절한 채 몇 시간 동안 비를 맞았습니다. 세탁물 배달 마차에 실려 겨우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세잔은 바로 다음 날부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또 밖에서 그림을 그립니다. 건강은 더 악화합니다. 세잔은 마지막까지 붓을 든 채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인(死因)은 폐렴이었습니다. 세잔이 1903년 볼라르에게 수줍게 건넸다는 말은 괜히 코끝을 시리게 합니다.

누군가는 걸어야 한 그 길을 묵묵히 걸어온 그의 삶을 곱씹게 합니다.

사과 하나로 미술계를 뒤흔든 세잔

사과와 오렌지, 1899, 오르세미술관

“기분 나빠하진 말게. 자네는 우유부단하네. 그런 점 때문에 성공하지 못할 거야."

기분 나빠하지 말라고 하지만, 정말 기분 나쁜 얘기입니다. 심지어 이 말을 30년 단짝 친구에게 듣게 된다면 어떤 심정일까요.

화가 폴 세잔(1839~1906)은 소설가 에밀 졸라에게 이런 혹평을 들었습니다. 세잔과 졸라는 서로 힘들 때마다 의지했던 오랜 단짝이었습니다. 졸라의 얘기가 세잔을 채찍질하기 위한 취지였다고 좋게 해석하더라도, 너무 냉정한 평가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졸라는 1886년 소설 <작품>에 세잔을 닮은 한 인물을 넣었는데요. 능력은 있으나 끝내 인정받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화가 클로드라는 캐릭터죠.

세잔은 이를 졸라가 바라본 자신의 모습이라고 생각하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졸라와의 30년 우정에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폴 세잔의 자화상, 1875~1877, 노이어 피나코테크

졸라는 오랜 시간 세잔을 지켜봤던 만큼 나름 그를 잘 알았을 것 같은데요. 하지만 졸라의 예언은 보기 좋게 빗나갔습니다.

세잔은 '근대 회화의 아버지'로 미술사에 길이 남았습니다. 피카소도 "우리 모두의 아버지"라고 칭송했죠.

친구에게조차 비관적인 예언을 들었던 세잔은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을까요. 그의 이 한 마디면 모든 게 설명이 됩니다. "나는 사과 하나로 파리를 놀라게 할 것이다." 사과를 그리는 건 꽤 단순해 보입니다. 그것만으로 파리를 놀라게 하겠다니, 정말 가능한 일일까요. 놀랍게도 실제 세잔은 사과로 파리, 나아가 미술계 전체를 뒤흔들었습니다.

세잔은 프랑스 엑상프로방스에서 부유한 은행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부터 화가가 되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뜻에 따라 법대에 가야 했죠. 그러다 그는 아버지의 눈을 피해 무료로 강의를 해주는 시립 미술학교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이후엔 굳은 결심을 하고, 가족들에게 화가가 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아버지는 반대했지만 아들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습니다. 세잔은 미술을 배우기 위해 파리로 향했습니다. 중학교 때 친구가 된 졸라도 당시엔 그의 꿈을 응원했습니다.

졸라의 집, 1880, 글래스고 바렐 컬렉션

하지만 세잔은 5개월 만에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무료로 미술 수업을 들은 게 전부였던 그에게 파리에 모여든 천재 화가들의 벽은 너무 높았습니다. 민감하고 소심한 성격의 세잔은 자신에게 재능이 없다고 생각하고 크게 좌절했습니다. 그러나 가슴에 오랜 시간 품었던 꿈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법입니다. 그는 아버지의 은행에 들어가 일을 배우던 중 꿈을 포기할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세잔은 다시 파리로 향했습니다. 이번엔 홀로 미술관과 박물관 등을 돌아다니며 거장들의 작품을 모사하는 데 열중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부족했습니다. 그들을 어설프게 따라 하는 데 그쳤죠. 그러던 중 세잔은 훌륭한 스승을 만나게 됐습니다. 많은 화가들의 존경을 받던 인상주의 화가 카미유 피사로입니다. 피사로는 세잔의 시선이 자연으로 향하도록 안내했습니다. "자연을 성실하게 관찰하고 느낌을 그려라. 대담해지고 전체를 봐라." 세잔은 그와 함께 다니며 빛의 변화에 따라 자연을 화폭에 담는 법을 배우게 됐습니다.

세잔은 초상화를 그릴 때면 모델에게 150번 넘게 자세를 교정하도록 했을 정도로 까다로운 성격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피사로는 그런 세잔을 품고 다독였습니다. 피사로는 졸라와 다른 예언을 하기도 했습니다. "세잔은 항상 나의 기대를 뛰어넘는다. 훗날 위대한 예술가가 될 것이다." 원석을 알아본 스승의 가르침 덕분에 그는 화가의 길을 계속 걸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피사로의 예언이 실현되는 데는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56세에 이르러서야 첫 개인전을 열게 됐고 인정도 받았습니다.

이전까진 졸라의 말이 현실이 된 것처럼 온갖 조롱에 시달릴 뿐이었습니다. "데생도 제대로 못한다"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으며 그림을 사려는 사람도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아버지에게도 인정받지 못한 채 외면당했습니다.

생트 빅투아르 산, 1904, 필라델피아미술관

어려움을 겪던 세잔은 38세에 파리를 떠나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파리에서 벗어나면서 인상주의와도 멀어졌습니다.

그리고 고향에서 은둔 생활을 하며 온전히 자신만의 화풍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인상주의와는 다른 성향의 '후기 인상주의'의 길을 가게 된 것이죠. 인상주의는 순간을 포착합니다. 시시각각 변하는 빛에 따라 달라지는 찰나의 모습과 색을 빠르게 담아내는 것이죠.

세잔이 선택한 방법은 다릅니다. 인상주의처럼 매 순간 변화하는 사물을 바라보는 건 비슷합니다. 하지만 찰나의 순간이 아니라, 사물의 본질 자체를 담는 데 집중했습니다. 이를 위해 시간의 흐름과 시점의 변화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보이는 사물의 모습을 관찰하면서, 그 모습을 모두 한 화폭에 그렸습니다.

세잔의 대표작 '사과와 오렌지'는 무려 6년에 걸쳐 완성한 그림입니다. 이 기나긴 시간 동안 그는 시점, 각도를 달리해 사과와 오렌지를 관찰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과는 위에서, 어떤 사과는 아래에서 바라보며 그렸습니다. 좌우로도 방향을 달리해서 담았습니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사과의 색깔도 조금씩 다른 걸 알 수 있는데요. 맛있게 잘 익은 빨간 사과부터 어느 순간 푸석해진 사과, 오래 지나 썩기 시작한 사과까지 시간의 흐름에 따른 사과의 색 변화를 표현한 겁니다. '사과와 오렌지'란 하나의 작품에 사과의 모든 것, 이를 관통하는 본질을 담아냈다니 놀랍습니다.

생트 빅투아르 산, 1887~1890, 오르세미술관

세잔은 사과만이 아니라 고향의 아름다운 산에도 매료됐는데요. 그래서 80여 점에 달하는 '생트 빅투아르 산' 그림을 그렸습니다.

사과를 그린 것과 동일한 방식입니다. 시간과 빛의 변화에 따라 산의 색이 달리 보이는 것을 담아내는 것은 물론 다양한 색채로 원근감까지 살렸습니다.그렇게 세잔은 순간과 영원을 동시에 화폭에 담아냈습니다. "견고하고 영원한 인상주의를 만들고 싶다"라고 했던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알 것 같습니다.

세잔뿐 아니라 고흐, 고갱 등도 후기 인상주의에 속하는데요. 이들은 훗날 야수파, 입체파의 탄생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덕분에 세잔은 '근대 회화의 아버지'란 타이틀을 얻게 됐죠.은둔자이자 외골수 화가가 마침내 이뤄낸 승리. 세잔은 30년 절친으로부터도 혹평을 들었을 만큼 분명 더디고 느렸습니다. 그 고집이 스스로를 해치기도 했죠.그가 67세에 세상을 떠난 것도 그림을 그리다 일어난 일 때문이었습니다. 야외에서 작업을 하다 비바람을 맞고 폐렴에 걸린 겁니다.

하지만 이런 극한의 몰입이 있었기에,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높은 경지에 이르게 된 것이 아닐까요.

김희경 기자

당뇨병으로 고생한 ‘사과 화가’… 그린 만큼 먹었다면 건강했을까

폴 세잔의 ‘사과 바구니’

흔히 인류 역사를 바꾼 사과가 몇 개 있다고 말한다. 아담의 사과, 만유인력을 알려준 뉴턴의 사과, 그리고 스티브 잡스의 애플까지. 여기에 프랑스 화가 폴 세잔(1839~1906)이 그린 사과도 사과 역사 탁상에 올려도 될 듯하다.

세잔은 ‘사과 화가’로 불릴 정도로 사과를 40여 년 동안 줄곧 그렸다. 왜 사과에 천착했을까. 화가로서 사물에 대한 관찰력이 부족하다고

느낀 세잔은 사과를 오래 보며 그 변화를 그림에 담으려고 애썼다. 사과는 구하기 쉽고, 금방 썩지도 않기에 오랜 관찰 대상으로 좋았다.

그는 화실에 사과를 놓아두고 녹아서 문드러질 때까지 관찰하며 사과를 그렸다고 한다.

결국 세잔은 사과로 미술의 도시 파리를 정복했다. 그는 1893년 <사과 바구니>라는 작품을 통해 마치 여러 각도에서 사과를 바라보는 듯한 다관점 원근법(multiple perspectives)을 적용했는데, 이는 훗날 입체파, 야수파 미술 탄생에 기여했다.

세잔은 인생 후반 당뇨병으로 고생했다. 그는 해골과 썩은 사과를 나란히 배치해 그리곤 했는데, 당뇨병으로 신진대사가 나빠져 삶이 고단하고 죽음에 가까워진 자신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면역력이 떨어진 세잔은 폐렴이 악화돼 67세에 세상을 떠났다.

영양학자들은 사과가 당뇨병에 좋다고 말한다. 혈당 관리를 위해서는 먹었을 때 혈당이 천천히 올라가는 혈당지수(GI)가 낮은 음식을 먹는 게 좋은데, 사과는 혈당지수가 낮다. 비타민 C와 항산화제 성분도 풍부하다. 수분과 섬유질도 많아서 조기에 포만감을 유발, 다이어트에도 제격이다.

‘사과가 빨갛게 익으면 의사는 파랗게 질린다’는 서양 속담이 있다. 잘 익은 사과는 건강에 좋아, 의사가 할 일이 없어진다는 의미다.

설마 의사가 그렇게 되겠냐마는···. 어찌 됐든 당뇨병 화가 세잔이 자신이 그렸던 수많은 사과들을 다 먹었다면, 사과 그림을 더 오래 그렸지 않았을까 싶다. 세잔 사과의 아이러니다. --- 김철중 의학전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