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이 많은 아이들은 자기 만의 얘기를 만들어 낸다
수요일 아침 길을 가다가 어느 초등 부모가 아이에게 “ 훌륭한 사람이 되는 거야 알았지?” 하자 “엄마, 나중에 돈 많이 벌어서 엄마 많이 줄게” 하자 엄마는 방긋 웃으며 최상의 스킨 쉽을 하며 아이의 엉덩이를 토닥거리며 “그래, 우리 아들 역시 훌륭해 ” 합니다. 돌아서는 아이의 표정은 그다지 기쁘지 않습니다. 이러한 아이들은 자기얘기가 없으니 남의 이야기가 들어오지 않을 거고, 부모가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이 미숙하고 성급하여 아이는 늘 혼란을 겪게 되어 살아가면서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지나가는 초등의 여러 아이들에게 “훌륭한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 거니?” 묻자 “우리 엄마가 돈이 많이 벌려면 공부를 해야 된다고 해서요 공부 열심히 하는 거예요.” 아주 씩씩하게 말하는 아이도 있고 왜 자기가 하기 싫은 공부를 해야 되는지 모르는 아이도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엄마의 끊임없이 반복되어지는 잔소리는 너무 싫다고 했습니다.
아이들이 여러 명이 같이 가며 “야 너희 엄마도 잔소리 짱하지 우리 엄마는 공부도 하고 약속도 안 지키고 모르는 것도 많아. 그리고 더 죽여주는 것은 뭔지 알아 아빠하고 싸우는 날에는 나만 들들 볶는다니까 너 아 아빠처럼 되지 않으려면 공부 많이 해야 된대 죽이는 거 아냐 그럼 아빠하고 왜 결혼 했는지 몰라?”하자 “야 자식아 너 이제 알았어! 원래 엄마들은 그래 넌 눈치도 없냐 그럴 때는 눈치껏 해야지 하는 척하는 거야.” 하며 친구의 머리 뒤통수를 ‘딱’ 치며 학교를 향해 뛰어 갑니다. 이러한 현실이 아이들을 머리를 잘 쓰게 하는 것이 아니라 머리를 굴리면서 자라도록 합니다.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남들과의 비교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환경에 놓여져있습니다. 젊은 세대들은 도덕적, 윤리적이 들어 설수 없는 시대에서 살아 왔습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닌 시대적으로 반드시 거치는 시간대에 놓여있었습니다. 너희 불행이 나의 행복 이다.는 것은 결핍된 비교에서 오는 것입니다. 우린 자존심을 얻기 위해서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고, 당할 수밖에 없는 왜곡된 인간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의 얘기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자존심의 비교, 자존감의 비교가 아니라 행복의 비교가 되어야 한다는데에 안타까움을 뒤로하고 차가운 공기를 여러 차례 심호흡을 해야 했습니다.
사람은 누군가로부터 ‘당신 훌륭하십니다.“하면 왠지 움찔해집니다. 인간다운 삶이 되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입니다. 그 초등아이는 현재에 집중하기 보다는 미래의 성공에 대한 부담을 안고 살아가게 됩니다. 부모의 결핍을 채워주는 사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아이의 ‘때’에 맞는 시간에 충실하면 걱정을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지나침을 부추겨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린 미래에 대한 지나친 생각은 아이들이 자신의 결핍감만 보게 되어 있습니다. 현재가 행복해야 미래가 행복한 것입니다.
아이들은 자연에 나갈 때도 혼자 있거나 둘, 셋, 모여도 나뭇가지, 돌, 낙엽, 열매 등으로 서로 이야기 하며 작품을 만듭니다. 이러한 활동은 부담 높은 교사의 강조가 없기 때문에 아이들에게는 더 깊게 자연을 경험하게 됩니다. 수없이 만들고, 허물고 하는 놀이가 아이들의 일상의 살림 놀이가 바로 예술인 것 같습니다.
자기가 좋아서 하는 일은 수많은 환타지가 일어나며 다양한 언어들이 아이의 내적으로 분열되어지고, 아이들의 표정은 자연과 합일됩니다. 그냥 놔두면 긴 시간을 해도 지루하지 않아 합니다. 실컷 놀고 또 다른 이상함에 이끌려 나아갑니다. 이러한 활동들은 아이들 수준에 맞는 일상의 놀이입니다. 일상들은 지식의 전달로 흐르게 할 가능성이 높은 것입니다. 논리는 사실적 기초가 되며, 사실적 체험을 통해 형성됩니다
몇 년 전만 해도 미술 교육이 일상이 되었는데 지원 정책이 안 되는 부분으로 인해 예술 교육이 전면에 드러나지 않고, 가장 자리로 숨어버린 느낌이 듭니다. 이러한 시스템은 획일적 교육으로 흐를 가능성이 있습니다. 유아기 과정의 아이들에게는 균형이 깨지는 소리입니다. 저는 미술의 한 영역을 담당하는 사람으로서 이러한 부분들의 정책이 아쉽습니다. 유.초등 예술 교육이나 자연 교육은 감성과 이성의 조화이며, 감수성의 회복입니다. 손과 기능의 숙련보다는 불안한 현실 속에서 혹 비뚤어지고 움츠려들고 있는 아이들의 감성과 마음을 활짝 펴주고, 기쁨의 감정을 되찾아주는 인간성 회복인 것입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부모들은 이러한 부분들에 자성적인 검토를 해봐야 됩니다.
요즘 선생님들께서 ‘매년 갈수록 아이들이 몸치, 음치, 박치인 삼치를 다 갖고 있다’라고 말합니다. 매년 갈수록 그러한 아이들이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을 지식적인 접근으로 머리가 비대해지고 지나친 보호 아래 길러져 견디는 힘이 부족해진 것입니다. 아이들은 지식적으로 접근하기 보다는 자연의 원리와 조화를 감성적. 무의식적으로 경험하는 부분들이 일상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초등에 가서 논리적으로 주제에 맞고 주제에 벗어나지 않게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논리적으로 잘 전달하고 표현함으로써 논리적으로 잘 전달 할 수 있는 자신의 감정을 표현함으로써 아이는 노력하고자 하는 힘을 갖게 되어 스스로 만들어가며 변화되어지며 스스로 변혁하게 됩니다. 그리고 지각과 감각의 전체적인 영역은 서로 확실하게 구분되고, 마치 각각의 악기가 조화를 이루어 오케스트라의 심포니처럼 서로 조화성을 경험하면서 공부의 맛을 학교의 생활과, 친구의 생활 선생님과의 생활, 사회에 대한 긍정의 맛을 경험 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복잡한 감정을 잘 표현하는 능력은 없지만 환경적 교육으로 전달 가능한 형태로 표현을 위한 형식을 개발해줄 필요성이 있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뭔가를 관찰하거나 책을 보았을 때 ‘이미지’를 갖게 됩니다. 이러한 이미지를 건설적인 정신력을 개방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는 여러 형태로 생각을 표현하는 방법을 가르쳐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경험으로 내재하는 모순들을 조화시키는 것은 예술 교육입니다.
자연 교육은 아이의 잠재된 무한한 예술적 가능성의 ‘눈’을 띄워주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일상이 사실적 체험이여야 합니다. 경험할 기회를 갖지 못하는 아이는 주어진 형식과 내용과의 관계에서 야기되어지는 여러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혁신적인 변화에 접하지 못한다는 많은 통계들이 나와 있습니다. 이는 무감각함이며 좁은 세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는 자신이 갖고 있는 잠재력을 드러낼 수 가 없는 것입니다. 일상의 아이디어는 준비가 안 되었는데 ‘끙’ 한다고 해서 똥이 안 나오듯이 지난 역사가 없으면 현재의 아이디어도 미래의 아이디어도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역량이 부족하면 감정의 표현이 잘 되지 않으며 내부에 갈등이 수반되어져 소통이 어려워지고 많은 에너지 소모로 즐겁지가 않습니다. 사람들과의 관계성은 타당한 이유에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요구합니다.
체험 교육은 사물을 종합적으로 보고, 본질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출 수 있게 하고 창조적인 안목과 자세를 가다듬게 합니다. 자연과 현실 역사와 전통적 신뢰와 개인과의 조화를 만들어 냅니다.
생태체험은 모든 교과와의 통합으로 연계되어집니다. 코메니우스는 교육이 개개인의 삶에 있어 보편적, 기초적인 것이 되려면 여러 개 교과의 상호관련 속에서 누구에게나 부합되는 통합된 지식을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루소는 아동에게는 아동의 자연적 성장에 맞는 교육과정이 필요하며, 아동은 경험에 의해 사물에 대한 정확한 지식과 개념을 획득하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페스탈로찌는 학습준비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고,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형태와 내용의 과정을 통해 서로 연계성을 갖도록 하였다고 했습니다.
지금까지는 얼마나 많은 정보와 지식, 기술, 문화 등을 아이들 머리속에 간직하고 있는가가 중요하였지만 이제는 얼마나 가치 있고 우수한 지식과 정보, 문화를 창출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느냐가 중요하다면 이는 사실적 경험으로 얼마나 가슴으로 절절히 이해되어져 각각의 덩어리를 하나의 선으로 표현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자연만한 예술이 없다는 말처럼 자연도 과학이듯이 자연으로 접근한 사실적 경험은(경험과학) 모든 정보들을 교차적인 학습 방법으로 접근되어집니다. 일상 속에서 경험들을 자꾸 반추하면서 책을 보는 것은 창의욕 인 것입니다.현대는 뭔가가 부족해서 비교하는 것은 결핍을 강조하기에 자기의 얘기보다는 말이 복잡해지고 변명과 변명을 잘 만들어 내는 아이들이 많아져 안타깝습니다. 이는 자발이 아닌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왜 놀아" 하면 “그냥요 재미있으니까요?” 라는 말은 결핍도 변명도 놀이의 행위로 풀어내는 시간은 주체가 여러 개로 늘어나지 않습니다. 좋아서 하는 아이들은 부모의 결핍을 채워주는 아이가 아닌 '자기만의 얘기를 만들고 풀어내며' 즐겁게 살아갑니다.
/ 애벌레 맘김윤희 2013.11.28 / 양평 두물머리 생태학교 웹에서 펌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