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략

우리에게 주어진 진정한 과제는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

modest-i 2017. 2. 2. 21:57

인간은 실존적 동물이다.

스스로 생각하고 ‘왜?’라고 질문할 수 있다.


삶의 의미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느냐고 묻는 것은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과제에서 벗어난 질문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진정한 과제는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 아니라       삶의 의미를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실존적 존재인 우리 인간만이 풀 수 있는 문제이다

 

 

 

하늘을 향해 열린 창   블로그 에서 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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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현 행복대학교 대학원 지여과정 특강 제 34강

 

 

 

삶의 의미, 원래 있는 것일까? 내가 만드는 것일까?

 

 

 

송현(시인. 송현행복대학교 대표)

 

 

 

1.

많은 사람들이 이런 질문을 한다.

 

--인생에 아무 의미도 없는 것 같은데 왜 그런가요?

 

2.

나도 젊은 날에는 이런 질문을 자주 했다. 그리고 그무렵에는 인생에 무슨 대단한 의미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내가 젊은 날, 함 석헌 선생님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읽고나서 참으로 소중한 것을 알았다.

 

내 인생의 의미는 내가 만들어야 하는 것이란 사실을 알았다. 그때 나는 인생의 의미란 본래 있는 것이 아니란 것을 알았던 것이다. 알고보니 삶에는 본래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었다. 각자의 삶의 의미는 각자가 창조하는 것이다. 스스로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창조함으로써 동시에 그것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3.

그래서 삶의 의미란 자기가 만들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삶의 의미가 바위처럼 있는 것이 아니라 노래처럼 불러야 한다는 사실이다. 삶의 의미란 어떤 사물이 아니라 각자가 의식을 통해 만들어 내는 어떤 것이다. 그러니 그것을 무작정 기다리지 말라. 그것은 기다린다고 오는 그딴 것이 아니다.

 

삶의 의미를 창조하려면 그대는 하나의 실험실이야야 하고,하나의 자궁이어야 한단. 삶의 의미는 많은 실험을 통하여 새로운 의미를 잉태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삶에서 그대가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의 하나이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삶의 의미를 놓치고 말 것이다.

 

4.

많은 사람들은 한가지 잘못된 관념을 가지고 있다.  삶의 의미가 어디엔가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가 않다. 가령 붓다는 삶의 의미를 창조하고 그 다음에 그것을 밝히고 그 다음에 그런 삶을 산다. 그러므로 붓다가 창조한 삶의 의미가 결코 그대의 삶의 의미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삶의 의미는 언제나 개인적이다. 그래서 모든 붓다들은 각각 자신을 위해 자신만의 삶의 의미를 창조한다. 그들이 창조한 삶의 의미를 그대가 빌려 쓸 수가 없다.

 

5.

과학적 진리와 종교적 진리는 전혀 다르다. 과학적 진리는 사실 죽은 것이다. 과학적 진리는 일단 누군가가 발견하기만 하면 뉴우튼이 일단 중력의 법칙을 발견했으면 다른 사람이 다시 그것을 발견할 필요가 없다. 일단 발견된 무엇은 공동의 재산이 된다. 물론 뉴우튼은 그 법칙을 발견하기까지 오랫동안 노력했을 것이고, 어쩌면 자신의 전 생애를 바쳤을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의 어린 학생들도 그것을 몇분만에 배울 수 있다.이처럼 과학적 진리는 죽은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사물이나 같다. 한 사람이 발견하기만 하면 그것은 곧 모두의 재산이 된다.

 

6.

그러나 종교적 진리는 과학적 진리와 전혀 다르다. 종교적 진리는 여럿이 공유하는 사물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뜻이며 의미이다. 각자가 탐구하고 각자가 발견해야 한다. 그래서 붓다의 진리는 붓다와 함께 사라진다. 모하메드의 진리는 모하메드와 함께 사라진다. 그것은 모하메드의 가슴에서 핀 한송이 꽂 향기였다. 꽃이 이미 졌는데 어떻게 향기가 날을 수 있겠는가? 이제 모든 경전들이 죽었다. 하나의 경전은 꽂이 거기 있을 때만이 살아 있다. 꽃과 함께 샹기는 살아 있다가 꽃과 함께 가버린다.

 

과학적 진리는 배울 수 없다. 그대는 학교 선생님에게 가서 그것을 배울 수 있다. 종교적 진리는 배울 수 없다. 그것은 배우는 게 아니라 창조되는 것이다. 그대는 학교 설생님에게 그것을 배울 수 없다. 그것을 가르칠 길이 없다. 그대는 학교 선생님이 아니라 스승에게 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곧 학교 선생님과 스승과의 차이다. 학교 선생님은 죽은 것을 다루지만 스승은 자신의 진리를 산다.

 

7.

그래서 그대가 스승 앞에 서면 그대의 온몸은 떨리고 흔를릴 것이다. 진리가 그대에게 주어질 수는 없지만 그대가 그 향기를 음미할 수는 있다. 그러면 그대의 가장 내밀한 속에서 그대의 존재 속에서 그것을 찾기 시작할 수 있다. 거기서 부터 그대의 탐구는 전개되고 성장해야 한다. 이런 면에서 보면 의미란 곧 성장이다..그대는 의미를 찾아서 그대 성장을 위해서 전생애를 바쳐야 할 것이다. 그러니 그대여 연생에 왜 아무 의미가 없느냐고 어리석은 질문을 하지 마라. 그것은 그대가 아직 자기 삶의 의미를 창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8.

그대가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창조하기 전에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앎과 지식이다. 앎은 가능성이 있지만 지식은 가능성이 없다. 지식은 하나의 이론이며 앎은 하나의 체험이다. 앎이란 그대가 눈을 떠서 본다는 것을 뜻한다. 지식이란 누군가가 그대의 눈꺼풀을 열어주고 보여주고 그것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면 그대는 단순히 정보를 수집하는 것을 뜻한다.

 

9.

지식은 설혹 그대가 장님이라할지라도 얻을 수 있다. 눈이 없어도 빛에 대해 많은 지식을 모을 수 있다. 그러나 그대가 장님이라면 빛에 대한 앎은 불가능하다. 빛에 대한 앎은 그대의 눈이 온전해야 가능하다.그대가 온전히 볼 수 있어야 앎은 가능하다.

 

10.

그래서 앎은 그대의 진짜 체험이며 지식은 가짜이다. 그러니 살아가면서 지식에 의존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정작 중요한 의미를 다 놓칠 것이다. 그래서 그대는 지금 당장 모든 지식을 다 버려야 한다. 이것이 그대가 넘어야 할 최초의 관문이다. (2014. 3.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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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제)

 

1)그대기 평소에 말을 할 때, 지식을 말하는 경우와 체험을 말하는 경우의 비중은 얼마나 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