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음의 향기, 비움

자신의 신발을 머리에 얹고는 스승의 방을 나가버린다 / 조주(趙州), 남천(南泉)

modest-i 2016. 11. 21. 07:28

스승인 남천사이에 있었던 남천참묘(南泉斬猫)의 일은 선가의 가장 유명한 공안의 하나다. 그 내용은 이러하다. 울력을 하던 스님들이 고양이 한 마리를 발견하고는 서로 차지하려다툰다. 이에 남천은 적절한 해결책을 찾지 못하면 고양이를 죽여버리겠다고 했지만 어느 누구도 해법을 제시하지 못하자 칼로 고양이의 목을 베어버린다. 저녁이 되어 출타했던 조주가 돌아왔고, 남천은 낮에 있었던 소동을 들려주자 조주는 자신의 신발을 머리에 얹고는 스승의 방을 나가버린다. 이에 남천은 ‘네가 있었더라면 고양이를 살릴 수 있었을 텐데’라며 탄식한다.





조주(趙州), 남천(南泉)을 찾아 길을 나서다

 

 

 




 

어느 봄날, 조주는 스승인 남천을 찾아 길을 나섰다. 문둥병 시인 한하운(韓河雲)이 걸었음직한 황톳길 산길을 오르는데 샛노란 야생화가 눈에 띄었다.

“너 이름이 뭐니?”

“우리끼린 그냥 ‘노랭이’라고 불러요. 하지만 인간들은 우릴 ‘애기똥풀’이라고 부르는데 영 마땅치가 않아요.”

“왜?”

“왜라니요? 이름에 쌍스러운 똥자가 들어가면 누군들 좋겠어요?”

“그렇기도 하군. 왜 굳이 그런 이름을 붙였을까?”

“줄기에서 노란 유액이 나온다고 해서 그런 이름을 붙인 모양인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우리의 피가 노랗거든요. 인간들은 그런 사실을 확인하려고도 하지 않고 자기들 맘대로 괴상망측한 이름을 붙이는데 저희들로선 불편하죠.”

“그래도 자신만의 이름을 가졌다는 게 좋지 않니? 이름 없는 들꽃들도 많은데.”

피는 의당 붉어야한다는 선입관만으로 적당히 붙인 이름도 내키지가 않고, 진정성이 없는 과잉친절도 싫어요. 이름이 없다고 한들 무슨 문제가 있겠어요? 우린 그냥 ‘노랭이’만으로도 충분한 걸요.”

“그래. 네 말이 옳아. ‘노랭이’란 이름이 더 어울려. 정겹기도 하고. 정말이지 내가 생각해도 인간은 참 묘한 존재야.

많이 알고 있는 듯 하지만 실은 아집에 둘러싸인 호두열매나 다름없어.

붉은 피 뿐만 아니라 노란 피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여간해서는 인정하려들지 않을 거야.”

“오만해서 그래요. 배려심도 부족하고.”

“미안하다. 노랭아.”

 

 




다시 길을 걷다 너른 땅을 뒤덮고 있는 야생화군락을 발견했다.

너희들은 왜 그리 키가 작니?”

“그런가요?”

“그렇지 않고. 주위를 둘러보렴. 너희들의 키가 얼마나 작은지.”

“왜 그런 쓸데없는 일에 신경을 써야하죠? 그리고 키가 큰들 무슨 도움이 되죠? 거친 바람만 더 맞을 뿐인데.”

“그렇지만은 않단다. 더 많은 햇볕을 받는 것은 물론 더 너른 세상을 볼 수가 있잖니?”

“그렇기는 하겠죠. 하지만 우린 지금 받는 햇볕만으로도 충분하고, 더 너른 세상을 본들 지금 누리는 행복에 대한 회의감만 생길 뿐이고, 키가 더 커지기 위해 쓸데없는 경쟁만 할 텐데요.”

“적당한 경쟁심은 필요하지 않을까? 진보의 원천일 수도 있는데.”

“그건 인간들의 세계에서나 통용되는 가치지 우린 아니에요. 우리 모두는 크지 않은 키를 가졌기에 남의 햇볕을 탐하지 않고 고루 나누어 가지며, 같은 키를 가졌기에 시기하지 않는걸요. 그러지 않았더라면 이처럼 너른 땅을 차지할 수 있었을까요?”

“인간은 왜 너희들처럼 살지 못하고 서로 잘났다고 다툴까?”

“이유는 간단해요. 잘 못 교육받고, 잘 못 길들여진 거죠

 

 

다시 길을 가는데 지렁이 한 마리가 풀섶에서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넌 왜 그리 못났고 느리니?”

“무슨 말씀을 그리 하세요? 제가 못나고 느리다니. 전 한시도 그리 생각해본 적이 없는 걸요.”

“착각이 아닐까?”

“우린 있는 그대로를 보고 느낄 뿐 착각 같은 건 하지 않아요. 그래야 할 이유가 없는걸요. 착각 같은 건 불안정하고 자기 확신이 부족한 인간세계에서나 있는 일인걸요.”

“그럼 네가 잘생기고 빠르다고 생각하니?”

“굳이 말씀드리자면 그렇죠. 제 입으로 말하기는 쑥스럽지만 제 부모님은 물론 주변에서도 제 모습이 멋지고 당당하다며 칭송이 자자한걸요. 뿐만 아니라 민첩함에 있어서는 제 또래 어느 누구도 저를 당해내지 못할 걸요.”

“그게 사실이라면 내가 여간 실례를 저지르지 않은 게로구나.”

“인간은 많은 것을 터득하고 안다고 거들먹대지만 우리 눈에는 별로예요.

알고 있는 대부분도 편견이나 선입관에 불과한 걸요.

그러면서도 자신의 판단만이 옳다고 생각하죠.”

“부분적으로는 인정하마. 조금 전, 자신이 민첩하다고 자랑했는데 그런 사실이 부담스럽진 않니?”

자랑스럽기는 하지만 전 그딴 걸 가지고 뽐내지는 않아요. 빨리 움직일 수도 있지만 다른 동료와 함께라면 전 절대로 앞서 나가지 않아요.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나보다 느리다는 사실조차 모르죠.

그게 우리 모두가 정상으로 살아가는 방법인걸요.”

“현명하군.”

“현명하기보다는 지혜로운 편에 가깝겠죠.”

“이 산에는 너의 목숨을 노리는 천적이 많은 듯 한데 위험하지 않니?”

“당연히 위험하죠.”

“그런데도 이렇게 한가롭게 돌아다니다니?”

“상관없어요. 삶과 죽음은 자연스런 순환에 불과한 걸요. 우린 인간처럼 삶에 집착하진 않아요.

그리고 살려고만 한다면야 땅속 깊숙이 들어가면 되겠지만 이 봄을 그렇게 보낼 수는 없잖아요.

저에게는 목숨보다도 이렇게 누리는 자유와 행복이 더 소중한걸요.

그리고 전 알아요. 적들은 필요한 양만큼만 먹이를 구하지 배를 불리지 않는다는 걸. 제가 그들의 먹이가 된들 할 수없는 일이죠. 대신 누군가가 제 대신 이 봄의 행복을 누리겠죠. 그러면 된 거 아닌가요?”

“네 마음이 가상하구나.”

“우린 모두가 그런 자세로 살아요. 인간은 그렇지 않나요?”

“…”

 

 





길은 솔숲으로 이어졌다. 이름 모를 산새 한 마리가 가까이 날아와 신경질적으로 울어댄다.

“새야, 난 너희들을 해칠 생각이 없으니 울음을 그치렴.”

전 무서워서 우는 것이 아니라 동료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경계의 신호를 보내는 거예요.”

“내가 두렵니?”

“아니에요. 인간은 정당한 방법으로는 우릴 해치지 못해요.

우린 충분히 빠르니까요. 하지만 경계를 늦추지 않을 뿐이죠. 그게 우리가 터득하고 살아가는 방법인 걸요.”

“인간은 자신의 힘만으로, 그리고 정당한 방법만으로 살아가진 않아. 많은 기술과 반칙을 활용하지.”

“그러겠죠.”

“만약 내가 모르는 수단과 방법을 동원한다면?”

“저의 날개를 믿을 수밖에요.”

“난 너보다 더 빨리 날 수도 있어. 이미 인간은 바람보다도, 소리보다도 월등히 빨리 움직일 수 있거든.”

“꼭 그래야할 합당한 이유가 있다면 그러시겠죠.

하지만 전 인간의 탁월한 능력뿐만 아니라 선악을 구별할 줄 아는 이성과 지혜를 믿죠.”

“불행하게도 인간은 그 이지력의 상당부분을 잃어버리고 말았어.”

“왜 그랬을까요?”

“글쎄다. 아마도 욕심 때문이겠지.”

“과하지만 않다면 욕심이 꼭 나쁜 건 아니에요. 그것을 필요 없이 부추기거나 용납하는 사회가 나쁘지. 우리라고 욕심이 없는 건 아녀요. 신선한 먹이를 찾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부단히 움직이니까요.

하지만 남의 먹이를 탐내지도 않고, 탐욕을 위해 남을 해치지도 않아요.

도리어 서로를 보호하며 공생의 길을 찾죠.

그리고 인간처럼 바람보다도 더 빨리 날기 위해,

                              구름보다도 더 높이 날기 위해

                                                                    자신을 혹사하지도,

                                                                    경쟁하지도 않아요.

저 자신이 거둔 적은 먹이에도 만족하며 기쁨의 노래를 부르죠.”

“어떻게 그런 지혜를 터득했지?”

쓸데없는 목표를 정하지 않았기에, 조그만 것에도 만족할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겠죠.”

“인간도 그렇게 겸손해질 수 있을까?”

“쉽진 않을 거예요. 이미 굳을 대로 굳어진 가치체계를 바꾼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요?

하지만 문명화의 속도를 늦추고, 자신은 물론 주변에 대해서도 관대해질 수 있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죠. 혼자만 잘났다고 앞서나간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그저 외로워질 뿐인데. 우린 많은 시간을 허비한 끝에야 그 사실을 깨달았어요. 무엇과도 바꿀 수없는 값진 가치죠.”

“인간이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긴 시간이 필요할 테고, 그 과정에서 지금까지보다도 더 큰 대가를 치러야할지도 몰라.”

“그렇지 않아요.

단 한 명이라도 정신이 깨어있다면 인간은 참된 길을 찾아내고야 말거예요. 그게 인간의 위대함이죠.


더더구나 인간은 스스로 성찰할 수 있고,

                      어느 종도 가지지 못한 사랑에 대한 탁월한 감정과 표현능력을 가졌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너희들처럼 모두가 행복해지기란 쉽지 않을 거야.”

남보다 앞서 나가려하고,

 필요한 것 이상을 가지려하니까 그렇죠.

자신을 내려놓아 보세요. 나보다 못나고 가난한 자를 생각하면 행복해지지 않을 수가 없죠.”

“너희들은 진정 행복하다고 느껴?”

“잘 모르겠어요. 인간들이 생각하는 행복의 기준을.

 하지만 살아있는 게 곧 행복이 아닌가요?

 우린 행복을 잊고 살아요. 그래서 행복하죠.”

“그런 삶이 부럽군.”

“비록 많은 인간이 행복에 이르는 길을 잃어버렸다고는 하지만 누군가가 그 길로 인도해줄 거여요. 어떤 분께서.”

“아!”

갑자기 머리가 맑아졌다.

 

 

긴 산길이 끝나는 지점에 남천이 기거하는 오두막이 쓰러질 듯 서 있었다.

“누가 왔는가?”

스님의 목소리는 여전히 칼칼타.

 

 

 

난 종교인이 아니지만 한 선각자의 위대한 깨달음의 혜택을 삶의 곳곳에서 누리기에 항시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놓지 않고 있다. 석가모니의 위대함은 누구나 깨달음을 통해 높은 마음의 경지에 다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실천을 통해 보여준 점이다.

하지만 끊임없이 불사나 해대고, 세력화의 길로 나아가는 오늘날의 한국불교를 바라보는 심정은 찹찹하기만 하다.

그러다보니 일찍이 불교도가 되기를 포기하였으며, 자주 사찰을 찾기는 하되 예를 올리지도 않는다.

 대신 선각자의 위대한 정신을 기리는 나름의 방법을 찾고 있다. 이 글 또한 그런 차원에서 썼다.






조주는 내가 지극히 존경하는 선사의 한 분이다. 중국 선종의 법통은 6조 혜능(慧能)에서 끝나지만 당나라말기까지 위대한 선사들에 의해 융성하다가 조주 이후 세락의 길을 걷는다. 살아서 고불(古佛)로 불리기도 했던 조주는 많은 일화를 남겼으며, 스승인 남천사이에 있었던 남천참묘(南泉斬猫)의 일은 선가의 가장 유명한 공안의 하나다. 그 내용은 이러하다.


울력을 하던 스님들이 고양이 한 마리를 발견하고는 서로 차지하려다툰다. 이에 남천은 적절한 해결책을 찾지 못하면 고양이를 죽여버리겠다고 했지만 어느 누구도 해법을 제시하지 못하자 칼로 고양이의 목을 베어버린다. 저녁이 되어 출타했던 조주가 돌아왔고, 남천은 낮에 있었던 소동을 들려주자 조주는 자신의 신발을 머리에 얹고는 스승의 방을 나가버린다. 이에 남천은 ‘네가 있었더라면 고양이를 살릴 수 있었을 텐데’라며 탄식한다.


이 공안이 왜 그렇게 유명한지 굳이 설명하지는 않겠다. 석가탄신일에 즈음해 소원을 기원하는 등을 달고, 정체불명의 불상을 막연히 경배를 하기보다는 이런 공안 하나쯤을 붙잡고 마음을 갈아보기를 바라서다.




이 글은 어른을 위한 동화형식으로 구상하였고,

화자로 조주를 택한 것은 미물인 개에게도 불성이 있다고 한 그였기에 더 미물에 속하는 타 종과의 대화도 가능하겠다는 판단에서다.

그리고 글을 쓴 동기를 굳이 찾자면 야생화 한 포기로부터도 심오한 깨달음을 얻고, 아무리 삶이 팍팍하다고는 하지만 자신의 허물을 나무라고, 타인의 아픔을 보듬으며, 진리와 정의라는 숭고한 가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이 세상의 유일한 존재가 인간이기에 그 인간의 위대함을 다시금 일깨워주고 싶었다. 열반하신 성철스님은 우리가 깨달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파했다. 석가탄신일을 맞아 주위에서 조그만 깨달음이라도 얻는다면 큰 보람이리라.

 



느티나무 그늘 블로그에서 펌함